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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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48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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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알라딘 동지들의 놀이터인 북플이 최고다. 다른 분들처럼 나도 북플에 올라오는 책들을 그리고 다른 채널로는 인스타를 참고한다. 올라오는 피드에 자극을 받아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한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말년에 잘 나가기 시작한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집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를 읽었다. 아마 중고 서점에 있었다면 사서 읽었을 텐데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시집인가 아니면 노땅 백인 아자씨의 넋두리인가. 그리고 보니 소설가로 만난 부카우스키가 출발은 시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별의별 일을 다 한 부카우스키는 끝내 버텨서 꽤 나이가 들어서 작가로 성공했다고 한다.

 

말년에 발표한 작품이라 그런지 몰라도, 자신이 늘 속여 넘기는데 성공한 죽음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보인다고나 할까.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숙명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더 두려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나이 든 이는 오랜 경험 덕분인지 담담하게 받아 들이기는 개뿔! 그럴 리가 있나 그래. 여전히 시간과 죽음을 속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부카우스키 아저씨는 그럴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고, 경마장을 찾아 돈을 날리고 또 술집에서 드잡이질을 마다하지 않는 부카우스키의 뻔뻔함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작가로서의 찰스 부카우스키의 정체성을 만든 요소는 무엇일까? 가학적인 아버지 헨리의 폭력이었을까? 아니면 어려서부터 반강제로 독립해서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체험하게 된 세상과 경험이 훗날 그가 글을 쓰는 데 소재가 된 게 아닐까. 확실히 곧고 바르게 자란 문창과 엘리트 계급 출신의 작가들과는 변별력을 가지는 날것 그대로의 펄떡거림을 느낄 수가 있다.

 

부카우스키는 참 특이한 캐릭터인 게 예술, 특히 문학을 어떨 때는 개똥 같이 여기다가도 또 작가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타자기 앞에서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는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그에게 배울 만한 점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창작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다며 불평 따위는 하지 말란다. 어쩌면 종이 한 장과 볼펜 한 자루만 있더라도 무언가를 쓰고 싶어서 환장하는 게 작가라는 존재여야 한다는 말을 고상한 방식 대신 거친 방식으로 내질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박중독자 대선배 도끼 선생의 후배답게 부카우스키도 경마라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경마장에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사귀는 여자(?)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여자와 있지 않았냐고 따진다. 성난 그녀에게 부카우스키가 진실을 이야기해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 물론 상대방이 그런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숱하게 해온 전과 때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시인이자 작가로 성공한 다음에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여자들을 꾀기도 한다. 부카우스키는 그런 데 대해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오랜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젊은이와 고속도로에서 얼토당토않은 레이싱을 하다가 자신이 목표한 지점보다 30km를 더 나가는 치기를 보여 주기도 한다. 아무리 자신이 유명하다고 하더라도, 불멸의 걸작을 남긴 세르반테스보다는 하수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던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제 부카우스키의 이 시집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옆지기가 보더니, 감수성이 많다며 왜 생전 안 보는 시집을 다 보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늙다리 영감탱이가 쓴 시집의 레알 콘텐츠를 봤다면 아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어쨌든 나는 부카우스키의 지독한 뻔뻔함이 마음에 든다. 쟁여둔 부카우스키의 다른 책들도 읽어야지.

 

[뱀다리] 하도 이 작자가 궁금해서 너튜브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리딩이라는 타이틀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 오디언스 앞에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담배도 꼬나물고 뭐라고 하는 오디언스에게 쌍욕을 박는 장면에서는 정말. 또 다른 시퀀스에서는 리쿼 스토어에서 6병들이 맥주를 사면서 어느 손님에게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카우스키라고 발음하는 것도 들었다. 우리 미국인 친구 브랜던이 알려준 발음이 맞다는 걸 오늘에서야 내 귀로 확인하게 됐다. 어느 시 낭독의 밤(1972)에 등장할 땐, 거의 록스타 수준의 환호를 받기도 하더라. 부카우스키는 진짜 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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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2-07-25 16: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덕분에 찰스 부카우스키를 알게 되어 기뻐요.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2-07-25 17:18   좋아요 3 | URL
지금 다시 찾아 보니 예전에
열책에서 나온 책들은 모두
절판이 되었네요. 아쉬워라.

아주 재밌는 작가로 기억합니다.
단, 꼰대라는 점도...

얄라알라 2022-07-25 16: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소개하신 몇 일화만 봐도, 양면성이 튀는 독특한 작가일 것 같습니다! 30km를 더 나갔다는 건 차로 갔다는 말씀이시죠? 달리기가 아니라?^^

레삭매냐 2022-07-25 17:19   좋아요 4 | URL
네이 그러합니다 -
부카우스키 씨가 청년하고
붙었던 경험이라고 하네요.

미미 2022-07-25 17: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를 읽어봤는데 개성이 돋보이는 작가라고 생각했어요.
부카우스키의 시집을 읽어봐야겠네요! ^^*

레삭매냐 2022-07-25 19:32   좋아요 3 | URL
넵, 저도 그 책 7년 전에
읽었답니다. 이래서 기록이
필요한가 봅니다 :>

재밌고 기묘한 개성이 넘치
니는 작가지요, 부카우스키.

얄븐독자 2022-07-25 1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절판된 책 잘 간직하고 있어야겠네요 ㅋ 어쩌면 판권을 다른곳에서 가져갔으려나

레삭매냐 2022-07-25 19:34   좋아요 2 | URL
제가 이래서 책을 못 정리하는
거라고 나름 위로해 봅니다 :>

<우체국>이랑 <여자들>은 다시
읽어 보고 싶네요. 처음에 읽을
적에 뭐 이런 작가가 다 있나 싶
었는데 말이죠.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도 다
절판이 되었더라구요.

mini74 2022-07-26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핏 보이는 싯구로는 감수성과 거리가 먼 듯 합니다 ㅎㅎ뻔뻔한데 솔직해서 매력적인 작가같습니다. 저도 궁금해지네요 이 작가님..ㅎㅎ

레삭매냐 2022-07-26 17:5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감수성과는 1도 관련
이 없는 양반이랍니다. 너무 레알
해서 당황스럽게 만드시는 탁월
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죠.

재밌는 작가이니 한 번 읽어보시
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200759. 아무 준비 없이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향했다. 일찍이 유홍준 선생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렇게 목놓아 외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빈을 찾았다.

 

그리고 15년이 지나, 유시민 작가의 책을 읽으며 후회를 한다.

왜 내가 거기에 가보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마리아 슈트라스가세? 너무 오래 전이라 거리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은 마셨어야 했는데 말이지.

 

여하튼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라도, 유시민 작가 덕분에 빈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련다.

 

지난주에 최경영 아자씨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유시민 작가가 출연하셔서 신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바로 보헤미아의 얀 후스였다. 한 며칠 푸욱 쉬면서 책이나 실컷 읽었으면 좋겠다. 뭐 그렇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반동(反動)의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좌절감이 옅어지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대중의 이성이 눈 뜨고,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가 번지면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물결이 밀려와 진보의 모든 배를 한꺼번에 띄워 올린다. 그런 때가 오기까지 작고 확실한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비더마이어 시대 전시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퇴행과 압제의 어둠 속에도 빛이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다. 그렇게 믿으며 삶을 이어가면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다. 내가 거기서 본 것은 좌절과 도피가 아니었다. 질긴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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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7-19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죠. 저도 10년도 훌쩍 전 독일에 갔었는데 공부한다고 하고 갔지만 놓친 것이 참 많더군요ㅠㅠ 지금은 그렇게 길게 여행가기도 어려운데 말입니다ㅋㅋㅋ 빈은 못가봤는데 간다면 가기 전 도움받고 가야겠군요.
이번 여름 휴가 때는 정말 책에 푹 묻혀서 살까 합니다^^*

레삭매냐 2022-07-19 17:53   좋아요 0 | URL
한 곳에서 오래 지내는 이들보다
어쩌면 단기 여행자들이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지 않나 싶더라구요.

일상이 되면 단기 여행자들에게는
낯선 풍경들도 그냥 시큰둥해지지
않나 뭐 그렇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빈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 보게 되네요.

무더운 여름에는 책이 쵝오지요.

바람돌이 2022-07-19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직전에 다음 여행은 동유럽이다 하면서 준비 시작하다가 좌절! 지금은 또 언제갈지 아직도 기약이 없는 곳이라 지금 이 책 읽으려고 줄세워놨어요. 유시민 작가의 유럽도시기행 1권은 사실 저는 좀 감흥이 없었던.... 제가 최근에 갔다온곳이라 그런지 특별한 임팩트를 잘 못느끼겠더라고요. 이번 책은 못가본 곳이니까 뭔가 좀 더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

레삭매냐 2022-07-19 17:58   좋아요 1 | URL
전 1권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1권도 호기심이 생기네요 ^^

어려서는 하나라도 더 보자라는 무모
한 발상으로 정말 발바닥에 땀이 나
게 뛰다니시피 다녔었는데 지금은 그
저 휴양을 하고 싶습니다.

지도를 보니 드레스덴하고 프라하가
정말 가깝더라구요. 베를린 올라가는
길에 드레스덴에 ICE가 잠시 섰었는데
그 때 무작정 기차에서 뛰어 내렸어야
했나 봅니다 :>

단발머리 2022-07-19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방송 봤는데 그래서 얼른 읽어보고 싶고요.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는 날이 오겠나, 싶었는데 오긴 오네요.
근데 저는 못 가는 ㅋㅋㅋㅋㅋㅋ 일단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7-19 20:06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못 갔었구요... 지금은 시간과
돈 둘 다 없어서 못간다는 -

책은 재미집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럽여행 가고 싶어요.
피렌체, 베네치아, 바르셀로나, 북유럽....!

레삭매냐 2022-07-19 20:08   좋아요 2 | URL
악! 로마에서 표만 사놓고 결국
가지 못한 피렌체 생각이 납니다 !

부끄유럽과 바르셀로나에도 가보
고 싶구요.

가지 못하니 더 애절하네요.

젤소민아 2022-07-2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스페인을 다녀왔는데 같은 곳을 가도 생각의 끈이 짧으니 ‘보기‘가 달라지네요. ‘보기‘가 다르니 ‘사유‘도 다르고요. 저는 그만, 짧기만 합니다 그려 ㅎㅎ

레삭매냐 2022-07-21 09:37   좋아요 0 | URL
우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스페인!
마냥 부럽습니다.

저도 수년 전에 스페인 가보려다가
비행기값이 너무 비싸서 패스했던
기억이 - 아마 그 때 무리를 해서라
도 갔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럽도시기행 빈 편을 보면서 난
도대체 빈에 가서 뭘 했지 싶더라구요.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울 전기 -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미즈키 시게루의 귀중한 라바울 전투 체험담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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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 씨가 쓴 <태평양전쟁>이라는 그야말로 희한한 책을(그것도 5권이나!)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저자는 종군기자였던 것 같은데, 남양군도에 전개해서 미군과 싸우다가 개죽음을 당한 일본군을 황군이라 부르며 그야말로 찬양으로 가득한 그런 내용이었다. 야마오카 씨는 그가 그토록 찬양하던 황군이 남양군도의 각처에서 저지른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 시간이 흐른 뒤, 몇 년 전에 그가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으면서도 그런 이유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극우작가 야마오카 씨가 맨 오른쪽에 가 있다면, 진짜 전장에서 자신의 한쪽팔을 잃고서도 저명한 만화가로 활약한 미즈키 시게루는 자신이 직접 전장에서 체험한 사건들을 일체의 미화 없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돗토리 부대의 일원으로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일본군의 거대 기지가 있었던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에 미즈키 씨는 파병됐다. 구타가 일상화되었던 구식 일본 군대에서 몽상가로 보이는 미즈키 씨는 그야말로 구타의 아주 적절한 타겟이 아니었을까. 농땡이를 피운다운 이유로 게다짝을 맞질 않나, 20-30분의 연속 따귀 세례는 아예 기본이었다. 오죽 했으면 스스로를 따귀의 왕자라고 했을까. 더 웃기는 건 그렇게 자신을 두들겨 팬 선임병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했다고 한다. 이런 똥군기와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건 비단 구식 일본군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 것이다.

 

그들이 상대하는 미군들은 잘 보급된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최신 무기와 무진장한 탄약으로 무장했기에 일본군들이 비아냥거리던 개판 같은 군기에도 자신들을 압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미즈키 씨는 그야말로 뱃속에 거지가 들어 앉았는지 오로지 라바울 현지에서 먹거리에만 관심을 가졌다.

 

솔저 보이(토인)들과 안면을 트고 마을을 다니면서 자신이 가진 담배와 현지의 싱싱한 과일과 야채들을 원없이 먹었다고 했던가. 그에 비하면 정규 일본군이 보급하는 부식과 먹을 것들은 너무나 부실했다. 심지어 그가 우연히 만난 해군들의 보급 상태는 육군의 그것에 비해 월등했다. 하긴 일본 육군과 해군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조슈파와 사쓰마파로 나뉘어진 구 일본 군대 내의 첨예한 다툼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왔다. 아울러 군대 전체의 기율에 반하는 하극상도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미즈키 씨가 전하는 라바울의 실상 가운데 충격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현지에서 보급투쟁에 나섰다가 밀림에 사는 악어밥이 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악어는 일단 먹이를 잡아 부패시킨 뒤 먹는 습성이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악어에게 반쯤 뜯어 먹힌 시신이 떠내려 오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이 남양군도에 수행한 전쟁 자체가 넌센스였지만, 현지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는 사실이 참 그랬다.

 

일본군의 상식에 반하는 작전은 적전 상륙이라는 이름 아래, 치러지기도 했다. 사실 라바울에 주둔한 10만에 가까운 일본군을 소탕하는 문제는 당신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미국과 호주에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고립된 라바울이 전략적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연합군 전쟁 지휘부에서는 라바울을 건너뛰고, 다른 지역을 공략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아마 그래서 과달카날이나 팔라우 혹은 필리핀 전역에 비해 라바울에서 생환한 병사들이 많았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의 미즈키 씨는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 왼쪽 팔을 잃게 되었다. 상이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구타나 노역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전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구사일생으로 어느 순간 적으로 돌변한 솔저 보이들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난 미즈키 씨는 라바울에서 종전을 맞이하고, 토마로 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본국으로 귀환했다.

 

토마에서 포로 생활 시절, 미즈키 씨는 현지 제대할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는 확실히 현지인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다른 일본군과는 다른 성향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자신을 돌보아 준 군의관의 설득으로 귀환선에 올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토마에서 어렵게 구한 종이와 연필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그림들을 그렸다. 그리고 나중에 일본에 돌아와서도 당장 먹고 살기에도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라바울 시절을 회상하며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들이 모여서 <라바울 전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미즈키 씨는 태생적으로 특유의 낙천가였는지 <라바울 전기>를 통해서는 비관적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림 그리는 만화가로 한쪽 팔이 없다는 건 작화에 치명적인 결함일 텐데, 후회나 통한 같은 부분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긴 만성적 말라리아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양군도에서 생환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 않았을까.

 

미즈키 시게루 씨가 <라바울 전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도 모른 채, 타지에서 어이 없이 죽어간 그리고 학대 받은 병사들에 위해서라도 전쟁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지금도 지구촌의 어딘가에서 대화나 타협 대신 폭력적 방식에 호소하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부디 무의미한 갈등이 종식되고, 평화의 시간들이 도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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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19 1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군대문화도 일제시대때 굳어진거라 읽었어요. 군장교들도 대부분이 일본군대에서 교육받은 자들에 ㅠㅠ전원 옥쇄하라 예전 해적판으로 봤어요. 책소개 너무 좋네요 *^^*

레삭매냐 2022-07-19 14:59   좋아요 2 | URL
구 일본 군대가 프로이센 군제를
받아 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서양의 합리적 방식들은 거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대로, 해방 이후 군
지휘관들의 대부분이 구 일본군
출신이다 보니 구태와 악습의 고
리를 끊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못된 하극상만 배워서
결국 군사 쿠데타라는 최악의 결
과가 도출되었지요.

<전원 옥쇄하라>와 이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더 이해가 쉬
었습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7:52   좋아요 3 | URL
공립학교도 프로이센에서 받아들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군인을 만들기위한 교육, 황국신민교육이죠.
당시 교복도 군복에서 온 디자인이라고 알고 있어요.

바람돌이 2022-07-19 18: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주 4.3에 대한 가혹한 진압을 주도한 것도 모두 일본 관동군 출신 장교들이 중심이었지요. 일본 군대에서 배운 것들을 그대로 적용한 놈들이 해방 후 한국 군대를 주도했다는게 우리의 비극이기도 하구요. 이 책도 봐야겟네요. 레삭매냐님 덕분에 놓칠뻔한 책을 챙기게 되는 일이 많네요. 늘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2-07-19 20:15   좋아요 2 | URL
제가 남태평양 전역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라바울 전선에서 실
제 참전했던 미즈키 씨의 기록이 더
와 닿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적해 주신 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후과가 참 아쉬울 따름입니다.

coolcat329 2022-07-19 1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
저 이 책 살까말까 고민했거든요.
꼭 읽어야겠습니다.
사실 책 표지랑 제목이 좀 구려서 ㅎㅎ

레삭매냐 2022-07-19 20:16   좋아요 2 | URL
라바울의 일본어 표기가
라바우루더라구요.

그냥 제목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저도 이 책은 사지 않고 도서
관 희망도서로 땡겨서 읽었답
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9 2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야마오카 소하치는 2차 대전 당시 종군기자로 참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 미즈키 시게루는 직접 총을 들고 적과 싸워야 했던 입장 차이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자가 들고 있는 사진기와 총 모두 ‘shoot‘을 하지만, 동일한 언어가 담지 못한 서로 다른 이들의 처지가 관점과 작품의 차이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레삭매냐 2022-07-20 09:56   좋아요 2 | URL
겨호님의 말씀이 정확하십니다.
문인과 전투병의 시선을 다를 수 밖
에 없을 것 같습니다.

둘 다 ‘shoot‘을 해야 하는 동병상련
의 처지였네요.

숲노래 2022-09-06 0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만화왕국이 되도록 밑바탕을 다진
테즈카 오사무, 미즈키 시게루, 후지코 후지오
이 세 사람이 걸어온 길과
만화로 담은 삶을 보면
그분들이 태어난 일본이란 나라가 저지른
바보스럽지만 무시무시한 전쟁범죄를 온몸으로 겪고 나서
이를 그 나라(일본) 어린이한테
제대로 보여주되, 만화답게 새로 풀어내어 보여주어야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게게게의 기타로>를 보면 슬쩍슬쩍
일본정부와 일본정치를 엄청나게 꾸짖는 대목을
일부러 집어넣기도 합니다.

미즈키 시게루 님은 일본 요괴 이야기를 그리면서
이웃나라(한국) 요괴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웃나라로 찾아와서 한국 요괴 이야기를 듣고서
이를 <게게게의 기타로>에 담기도 했습니다
 

슈테판 광장은 원래 놀이터였다. 중세에는 거기서 부활절 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축제를 열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우리는 놀이를 즐기는 종이다. 뭘 가지고 어떻게 노는지만 달라질 뿐,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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