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곳에서
제임스 설터 지음, 이용재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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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어젯밤>을 만난 이래, 설터 작가의 팬이다. 그런데 여전히 시대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마초 작가라고 볼 수도 있는 설터와 필립 로스, 모두 글쟁이로서는 최고지만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번에 읽은 설터의 9번째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콜로라도와 일본 그리고 영국까지 섭렵하는 여행 에세이 <그때 그곳에서>를 읽다 보니 백인 특유의 거만함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프랑스에 가서도 굳이 영자 신문을 구하는 패기도 그렇고, 아무리 전중에 전투기 조종사였다고 하지만 일본 사람을 왜놈이라고 굳이 표현하는 걸 보면 좀 그랬다. 작가처럼 저명한 인사가 아니었다면, 오스트리아 알프스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스키 강습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나같은 보통의 소시민에게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한 달씩 사는 건 특권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사실 스키 이야기는 내가 스키를 전혀 타지 못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사실 관심도 없는 분야고. 그래도 스키를 배우다가 팔 다리 부러지지 않은 곳이 없다는 서술에서부터 아마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나 싶다. 한참 자랑질들을 해대다가 굳어 버린 독자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노하우를 아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에세이집의 전반을 장식하는 프랑스에서는 먹슐랭이 추천하는 많은 맛집 가운데 특히 별 하나 받은 집을 찾으라고 했던가. 나처럼 꼴랑 프랑스를 두 번 찾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미션이 아닐 수 없다. 짧은 시간에 그나마 하나라도 더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던 날림 여행자에게 그런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그 시절에 먹슐랭 집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고 고백한다. 우리나라에도 먹슐랭 맛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 보긴 했는데, 지금은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도 금전적 여유도 없어서 그냥 인터넷으로 한 번 검색해 보고 말았다.

 

아들래미와 같이 전후 일본의 규슈를 찾아 자전거 여행을 한 장면은 또 어떤가. 전후에 일본을 점령했던 미군 가운데 하나였던 저자는 담배 한 갑이면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었던 호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전거 여행 중에 방문한 료칸이나 민슈쿠의 공용 욕탕에서 적당하게 몸이 삶아지던 순간에 대한 경험도 흥미로웠다. 곡식이나 쌀겨로 만든 베개를 사고 싶다는 말을 지인에게 했다가, 그런 건 파는 게 아니라 어머니들이 만들어 주는 거라는 말에서도 확실히 동서양 간에 뛰어 넘을 수 없는 삶의 관습과 체험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차이들을 경험해 보기 위해 우리가 여행길에 나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하나 규슈 자전거 여행기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점은 설터 작가는 역시나 군 출신답게, 자전거 부대의 모습이 1942년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 반도를 공략했던 일본군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고 쓰고 있다. 태평양전쟁 초기, 말레이 반도 공략을 맡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제25군은 정글로 뒤덮인 말레이 반도에 상륙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자전거를 징발한 부대 편성으로 영국군과 싸우고 결국 영국의 아시아 핵심거점이었던 싱가폴까지 함락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에 건너가서는 장비들을 챙겨서 남부의 여러 곳을 직접 행군(?)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그는 글을 쓰기 위해 걷기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타인과 변별력을 갖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너튜브 크레에이터들의 선각자가 우리 설터 형님이 아니었을까? 그는 반세기 전에 남들이 하지 않는 이런 일들을 선행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 것이다. 수시로 비가 내리는 영국의 날씨를 고려해서 이탈리아에서 만든 방수 장화를 길들이고, 여정에 나선다. 그리고 걷기에 있어 불필요한 것들은 단 10그램이라도 몸에 지니지 말라는 교훈을 잊지 않는다. 되돌아보면, 군대에서 행군할 때 앞을 보고 걷는 게 아니라 앞사람의 발꿈치만을 보고 걸었었다. 동이 터오던 새벽녘에 무거운 군장에 총까지 메고, 마지막 코스인 북한산에 오를 적에는 정말 도무지 말을 듣지 않던 발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싶었더랬지. 덕분에 지금도 산에 오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 이 정도라면 그냥 그런 여행에세이려니 싶었겠지만 우리의 설터 작가는 자신의 등반기에서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최근에 읽은 <고독한 얼굴>아 아니었다면 이만큼 절실하게 와 닿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어제 아침 출근길에 버스에서 읽었는데, 산에 오른다는 건 극단적으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장면에서 정말 울컥했다.

 

그래서 결국 너튜브로 험준한 등반에 나서는 이들의 콘텐츠를 두어 개 감상했다. 화면에는 아주 미세한 바위틈을 찾아 헤매는 등반가의 거친 손이 보였고 오디오는 그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다. 쫄보인 나로서는 도저히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암벽 등반에 나서는 이들의 심리 상태는 도대체 어떤 걸까? 아마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순간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까? 그런데 설터 작가는 예상 외로 땅에 있을 때 더 불안하다고 말한다. 땅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앞으로 전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자신의 체력이상의 괴력을 발휘해서 틈새에 팩을 박고 카라비너와 로프를 이용해서 중력에 거스르는 모험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과 사투를 벌인 끝에 정상에 오른 뒤에는 영속되지 않을 성취감을 느낀다. 그 장면에 대한 묘사에서는 정말 눈물이 다 날 정도였다. 대자연에 맞서는 미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무모한 도전의 정수에 감정이 반응한 탓일까.

 

이미 설터 작가는 오래 전에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는데, 새로운 천년에는 더 많은 것들이 소멸해 버렸고, 현재 진행 중이다. 설터는 이렇게 사라지는 최후의 아름다움을 잡아내는 사냥꾼이 아니었을까. 그가 아니었다면 프랑스의 시골 마을 레크투르나 오스트리아 키츠뷔엘의 하넨캄에 대해 평생 알 방법이 없었겠지.

 

몇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구석들이 있지만, 여전히 설터 작가의 작품이 지닌 아우라는 대단했다. 아마 내가 이 맛에 계속해서 설터 작가의 책들을 읽는 거겠지. 이제 딱 한 권이 남았다. 해를 넘기지 말고, 마지막 책을 읽고 싶다. 그런데 그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우선 책부터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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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9-01 11: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 권 남은 마지막 셜터 책도 궁금하네요
뭘까요 ^^

레삭매냐 2022-09-01 11:11   좋아요 3 | URL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이네요.

지인에게 선물도 했는데 정작 저는
읽지 못했더라는. 그랬다고 합니다.

미미 2022-09-01 1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혹시 안읽어보셨다면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속>으로 추천드려요.
이 글을 읽어보니 좋아하실듯하여^^
아앗... 혹시나 검색해보니 읽어보셨군요!!ㅋㅋㅋㅋㅋ

엄마가 한때 암벽등반 즐겨하셨어요. 겁도없이 한 번 따라 갔다가 북한산에서 발이 미끄러져 죽을뻔한 뒤로 다시는 안했는데 그래서 싫어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책들 읽으면서 그런 삶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건 역시 특별하죠.
<고독한 얼굴> 사두었는데 조만간 저도 읽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9-01 13:25   좋아요 2 | URL
아닛 소인의 독서력까정!
감사합니다.

오래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
에서 사다가 읽은 것으로 기
억합니다.

어억! 대단하십니다. 전 겁쟁
이라, 엄무도 내보지 못할 등
반을!!! 존경합니다.

<고독한 얼굴> 넘 좋았습니다.
응원하는 바입니다.

Falstaff 2022-09-01 1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이게 좋다 이 말씀이지요. 기약하겠습니다. ^^;;

레삭매냐 2022-09-02 19:30   좋아요 1 | URL
어쩌면 취향에 따라서는 -
골드문트님도 좋아하실런지
궁금합니다.

mini74 2022-09-02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세이집도 있군요. 일본에서의 자전거 여행 특이하면서 묘하네요. 매냐님 글 읽으면 설터 책 읽고싶어집니다. *^^*

레삭매냐 2022-09-02 19:32   좋아요 1 | URL
룰루랄라~

전 이제 한 권만 더 읽으면
설터 쌤 완독이랍니다. 자랑 자랑 ~

coolcat329 2022-09-06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제임스 설터 유혹에 넘어가려고 합니다. ㅎㅎ 완독까지 한 권 남았다니 부럽습니다.

레삭매냐 2022-09-06 09:55   좋아요 1 | URL
대환영하는 바입니다 -

드디어 설터 샘의 팬이 한 분
더 생기게 되는 건가요 ㅋㅋㅋ

the temptation completed.

coolcat329 2022-09-06 09:58   좋아요 2 | URL
넹~ㅋㅋ 설터의 책 한 권 추천 부탁드립니다.

레삭매냐 2022-09-06 10:01   좋아요 2 | URL
소설로는 이번에 새로 나온
<고독한 얼굴>

그리고 소설집으로는 <어젯밤>
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coolcat329 2022-09-06 10:04   좋아요 2 | URL
네~<고독한 얼굴>꼭 읽어보겠습니다. <어젯밤>은 다시 읽어보고 싶었는데 추천하시니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장 훌륭한 순간에 등반은 시련이고, 대부분의 시련이 그렇듯 사람을 거기에 바싹 결속시키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끝난 뒤의 승리를 기억하지만 그건 행복처럼 막연한 것이다. 절망의 순간이 훨씬 더 생생하고 잊히지 않는다. - P186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멍청하고 마초에 이기적일 수있는 등반가들도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는데, 자신의 영혼, 말하자면 자신의 품성에 관해서 알게 된다는 것. 물론 대가를치러야 얻을 수 있으니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한다. 가장 즐거운 경우라도 등반은 도전이다. 도전이 없다면 의미도 없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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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이른 여름이라도 그 섬은 분명 휴가온 사람들로 가득할 테고, 가기도 힘들어. 친구가 말했다. 게다가 내 마지막 여생을 공화당 주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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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그곳은 안락했지만 쇠락한, 한때 아름다웠던 마을이다. 겨울은 길고 눈부셨으며, 아무도 문을 잠그지 않았고, 우리는 시골 사람이었다. 천천히 바뀌었다. 사람들이 도시와 그에 맞는 스타일을 가져왔다. 메타 버든은 떠났다. 랠프 잭슨도, 프레드 이젤린도, 벅시도. 모두가 죽은 건 아니지만 사라지고 가버린 것 같다. 때로 낡은 마을이 다시 나타난다. 절반쯤 희미해졌지만 황홀한 채로 잠시 발치에 펼쳐진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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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독점자본주의 단계라고 정의되지.
독점자본과 금융자본이 지배하여자본을 수출하고,
가장 힘 있는자본주의 국가들끼리세계를 나누어 갖지.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최고 단계라고 볼 수 있어.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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