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살인자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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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헨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 말이다. 일단 집에 소장각이었던 시리즈 3탄인 <하얀 암사자>를 구입한 지 8년만에 읽었다. 그리고 나서는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시리즈 시초격인 <얼굴 없는 살인자>를 대출해서 읽기 시작했다. 3일만에 다 읽었고, 오늘 오후에 2<리가의 개들>이 도착할 예정이다. 평소에 다른 일에는 게으름으로 충만한 내가 한 번 이렇게 책읽기에 빠지면 촥촥 이어지는 다음번 읽기 프로젝트에는 이런 열정을 보이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9017일이다.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주 룬나르프라는 작은 마을 농장에 사는 뢰브그렌 부부 가운데 한 명은 참혹하게 살해를 당하고, 다른 한 명은 올가미가 목에 걸린 채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의 해결에 투입된 경찰이 바로 우리의 빛나는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 경위가 되시겠다.

 

올해 42세의 베테랑 형사 발란데르 아저씨는 위기의 중년이다. 일단 아내 모나와 이혼했고, 딸 린다는 아버지와 말도 섞지 않으려고 한다. 화가인 아버지는 치매기에 시달리는 중이며, 자신의 뜻과 거슬러 경찰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발란데르는 전형적인 꼰대 형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런 개인적 위기 가운데, 자신과 경찰이라는 조직이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시점에서 발란데르가 사는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해 궁금해졌다. 우리는 보통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천국이라고 알고 있다. 물론 굉장히 피상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 나라들에 가본 적도 없고, 그 나라가 빌드업한 사회복지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언론을 통해 얻은 파편적 지식이 전부다. 우리나라도 심각한 인구위기 문제를 겪고 있지만, 인구 천만의 나라 스웨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1930년대 뮈르달 보고서를 통해 인구 위기에 대한 경고등이 켜졌다. 그리고 스웨덴 국가의 소멸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구사해서, 현재는 EU 국가 중에서 인구증가율 3위라고 했던가.

 

그중에서는 오랫동안 지속해온 이민 정책도 한몫했다. 현재 스웨덴 인구의 1/10이 타국적자라는 기사를 읽었다. 왜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느냐고? 쿠르트 발란데르 형사가 추적하는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 1990년대 이미 스웨덴은 세계 각국의 난민들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고, 책을 읽으면서 이에 대한 문제점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헨닝 만켈 작가는 단순하게 살인사건 추리물을 다루는 그런 평범한 작가가 아닌 사회파 작가로 분류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경찰 회의 내부에서 병원에서 결국 작고한 피해자 마리아 뢰브그렌이 남긴 외국인이라는 말이 내부 누설자를 통해 언론에 누출되면서 그야말로 지역 사회에서 제노포비아가 폭발해 버린다. 심지어 극단적 인종 혐오 범죄로까지 분출되면서 하게홀름의 소말리아 난민이 살해되기도 한다.

 

평범한 농장주로 보였던 요하네스 뢰브그렌이 알고 보니, 전쟁 중에 부당한 방식으로 막대한 자금을 축적하고 아내와 두 딸들 그리고 이웃 몰래 정부와 아들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이지? 헨닝 만켈 작가는 능구렁이답게 약점투성이 형사 발란데르를 통해 독자들을 호도하기도 하고, 엉뚱한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렇지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끝내면 안되지. 비틀기야말로 추리물의 기본 중이 기본이 아닌가. 너무 쉬우면 독자들이 흥미를 금방 잃어버릴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어려워도 독자는 버거워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헨닝 만켈은 때로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동료 경찰들에게 걸리기도 하고, 매력적인 검사 아네테 브롤린에게 집적거리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는 인간쿠르트 발란데르를 창조해냈다. 심지어 그는 십대 시절,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친구 스텐 비덴의 매니저가 되길 꿈꾸었다지 않던가. 그런 그가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를 즐겨 듣고, 신상 스테레오에 관심을 갖는 건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다. 1편에서 주인공을 조력하던 동료 형사 뤼드베리가 전립선암으로 고생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3편에서 이미 죽은 뤼드베리의 부재를 그렇게 아쉬워하던 이유를 1편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쿠르트 발란데르를 통해, 올드 스쿨 스타일의 범죄 해결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마약과 총기로 무장한 흉악 범죄라는 폭력의 올가미 앞에 주인공을 죽을 위기를 몇 번인 넘기기도 한다. 하긴 이런 액션 정도는 추리물에서 기본이 아닐까 싶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스웨덴 국가가 추구해온 관용적인 이민 정책이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한 발란데르의 작은 목소리도 경청할 만했다.

 

<얼굴 없는 살인자>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이민 정책은 또 어떤지 생각해 보게 됐다. 인구 절벽은 미래의 일이 아닌 당장 우리에게 도달한 미래가 되었다. 지난 십여 년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은 정부 주도의 출산장려정책은 실패라는 게 작금의 출산율로 증명이 되었다. 보육과 육아, 주택문제, 양성평등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 등등 관련된 문제들을 턴키로 해결할 수 없다면, 대안으로 이민자 수용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와 다른 문화와 관습을 지닌 이들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또 다른 문제의 근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자.

 

간만에 즐길 만한 형사추리물을 만나 기뻤다. 오늘 오후에 도착할 <리가의 개들>을 고대해 본다. 범죄자들을 쫓는데서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발란데르 경위처럼 어쩌면 나도 다른 발란데르시리즈 사냥에 나설 지도 모르겠다.




[뱀다리] <리가의 개들> 도착, 바로 읽기에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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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21 16: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만켈의 3대 작품(유럽 최고 히트 기록! 영상으로도 제작)

방화벽-얼굴 없는 살인자-피라미드
입니다

웃는 남자-다섯 번째 여자-사이드 트랙- 문제적 인간
도 재밌습니다

한 십여년 전 전 유럽 서점마다 만켈의 책으로 뒤덮였고

영쿡 국민(독서인들만) 조사에서
가장 선호하는 외국인 작가 로 일등!^^


레삭매냐 2022-09-21 17:20   좋아요 3 | URL
제가 추리물은 잘 안 읽는데
만켈의 책들은 아주 따봉~이네요.

인기만점이었나 보네요.

여러 출판사에서 중구난방식으로
출간했다는 피니스아프리카에
싸장님? 편집자님의 썰이 흥미로
웠습니다.

드라마도 구해서 봐야 하나 어쩌
나 고민 중입니다.

햇살과함께 2022-09-21 21:37   좋아요 4 | URL
저도 마르틴 베크 시리즈 끝나면 만켈로 넘어가야겠네요. 스웨덴에 엄청 친근해지고 있습니다!

scott 2022-09-21 22:03   좋아요 4 | URL
이 책 출간 되기 시작 한게 첫번째 번역가가 독일 유학 중에 용돈 벌이로 (독일에서 만켈 인기가 엄청 났었음) 번역을 했다가
한국 독자들에게 별 반응이 없었는데

이렇게 수년 만에 다시 제대로 번역 되어서 다행입니다

만켈은 추리 서스펜스 미스테리 픽션, 에세이 논픽션 등 광범위한 작품을 쏟아낸 대 작가!
매냐님 야금 야금 책 탑 쌓으실지 몰라여 !ㅎㅎㅎ

안탑깝게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 셨는데
사망 직전 까지 난민들을 위해 살다 가쉼

애플 티비에서 볼 수 있는 발란데르 시리즈 추천 합니다(캐너스 브랜던 감독제작 출연)

영국에서는 셜록급 인기였고
의외로 영국인들은 만켈의 The Troubled Man을 좋아합니다 ^ㅎ^

미미 2022-09-21 17: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을 예정이므로 앞쪽 리뷰는 실눈뜨고 봤습니다.
뒷부분 읽어보니 역시 제취향일것 같아요.
레삭매냐님 마르틴 베크 시리즈도 혹시 읽으셨나요?
그 시리즈의 작가들도 사회파거든요.
헨닝 망켈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좋아하실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09-21 17:45   좋아요 3 | URL
아무래도 추리물이다 보니 가능
하면 스포를 안하려고 노력하
였으나...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헨닝 만켈 아자
씨를 파다 보니, 결국 마르틴
베크까지 도달하더군요.

일단 발란데르 파고 난 뒤에
생각해 볼라구요 :>
감사합니다, 미미님!!!

coolcat329 2022-09-22 0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전까지 보뱅에 빠져계셨다가 갑자기 헤닝 만켈과 바람을 피우시니 ㅋㅋ 아 아침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레삭매냐님!

레삭매냐 2022-09-22 11:05   좋아요 1 | URL
아웅 우리 예리하신 쿨캇트님 같으니라굽쇼.

그렇지 않아도 지난 연휴 동안, 보뱅을 읽겠
다고 빌리고 사고 잔뜩 쟁여 두고 미처 한
권을 못 읽었네요.

그래도 일단 오늘 <환희의 인간> 마무리
지을 생각이랍니다.

그런 다음에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읽을라고 가방에 고이 모셔 두었답니다 ^^

나는야, 책 바람둥이~~~

근데 헨닝 만켈의 책들 너무 재미져요.
오늘은 1991년 1월 리가의 <바리케이드 사
건> 공부를 했답니다. 책 읽는 게 쉽지 않네
요.

mini74 2022-09-22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리가의 개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어요. 과연 받아들여줄것인가 ㅎㅎㅎ 받아주겠죠. 만켈의 책들이 따봉이라 하시니 얼릉 읽고싶어집니다 *^^*

레삭매냐 2022-09-22 13:07   좋아요 1 | URL
저희는 만화(그래픽 노블)만 아니면
다 희망도서로 받아 주는 분위기랍
니다.

저도 희망도서로 신청할라구 그랬는
데 이미 누가 신청을 해서, 못 참고
주문장을 날렸지요.

쿠르트 발란데르 형사님, 너무 재밌어요.

바람돌이 2022-09-22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저도 취향저격인데요.
절판된 발란데르 시리즈 우리 동네 도서관 검색해보니 다 있어요. 아 진짜 우리 동네 도서관은 너무 좋아요. ㅎㅎ 새책도 벌써 다 있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2-09-22 16:25   좋아요 2 | URL
우와 부럽삽니다 :>

한 번 보시기 시작하시면
단박에 빠지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넘나 재밌는 것이지요. 고고씽~

Forgettable. 2022-09-25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가의 개들 대기중이에요. BBC 시리즈를 진짜 재밌게 봤는데 월랜더라고 해서 책 읽으면서 아 발.. Wal!!! 했던 기억이 ㅋㅋ 마르틴베크도 즐겁게 읽으실 듯 합니다.

레삭매냐 2022-09-27 10:10   좋아요 2 | URL
아 BBC 드라마 저도 보고 싶네요.

<리가의 개들>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영국 스타일로 개작된
거라 아마 주인공 이름도 월랜더
로 바뀌지 않았나 싶습니다 :>

scott 2022-10-07 14: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이달상 추카!

만켈옹 다음 작품들

완독을 향해 ~@@@

새파랑 2022-10-07 16: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주말에는 맛집으로~!!!

mini74 2022-10-07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축하드려요 ~~~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서니데이 2022-10-07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강나루 2022-10-1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된 것 축하새요^^
 
하얀 암사자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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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쿠르트 발란데르 경위. 그는 1948년에 태어난 스웨덴 남부 스코네 지역 이스타드(위스타드?) 경찰서 소속 경찰이다. 발란데르는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작가 헨닝 만켈(2015년 작고)가 창조해낸 캐릭터다. 저자는 스톡홀름 출신이라고 하던데, 발란데르는 어디 출신이었더라. 말뫼였던가. 이번에 피니스아프리카에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 전에 사둔(무려 8년 전에!!!) 발란데르 시리즈 3<하얀 암사자>를 책장 구석탱이에서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책무덤에 갇혀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나 할까.

 

제법 두툼한 녀석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주말끼고 단박에 읽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다 읽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구나. 돈주고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라는 독서의 모토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시작은 남아프리카 형제단 소속 세 명의 보어인들의 비밀결사로 시작되었던가.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젖어 사는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가 근 수세기 동안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 무대는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역으로 이동한다. 어느 날 부동산업자 루이제 아줌마가 실종되고, 우리의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가 투입된다. 투입되는 순간부터 경찰의 직감으로 발란데르는 그녀가 살아 있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다만 유족들을 위해 자신의 직감을 외부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는 동네 주택에서 폭발사고가 나서 집이 전소하고, 그 부근에서 흑인의 손가락 하나가 발견된다. 아니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렇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사가 전개되는 걸까. 한 마디로 소설 <하얀 암사자>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남아프리카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던 1992년의 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계 역사에 문외한이다 보니 영국의 식민지로 알고 있던 남아프리카에서 극단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주도한 게 영국계 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들보다 앞서 남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린 보어인, 아프리칸스들이야말로 평화롭게 살던 다수 남아프리카 흑인들을 굴종과 치욕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일 지도 모르겠다. 역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자신들의 흑인들에 대한 지배를 영속시키기 위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 대표로 얀 클라인과 프란츠라는 인물을 헨닝 만켈은 배치한다. 그들은 대통령 프레데리크 빌럼 더 클레르크의 영도 아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남아프리카(소설에서 암사자는 남아프리카를 상징한다고 밝힌다)의 미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그들의 망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고 유혈을 통한 내전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암살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정보부 출신의 빌런 얀 클라인은 암살 대상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남아프리카 최고의 킬러 빅토르 마바사를 고용한다.

 

그리고 그를 멀리 스웨덴의 오지에 보내 전직 KGB 장교 아나톨리에게 장거리에서 타겟을 처리하는 암살교육을 맡긴다. 그 와중에 그들이 지내던 외딴 집을 찾아온 루이제 아줌마를 냉혹한 빌런 아나톨리가 살해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 만켈이 인종차별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장소, 스웨덴과 남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그것이 마치 하나의 나비효과처럼,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아프리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하나의 권력투쟁 혹은 반동에 대한 역작용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만켈의 치밀한 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0년 전, 세계화 초기 시절에 새로운 사고가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바꾸게 강요할 거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발란데르 경위의 경우에는 스웨덴 경찰 세계에 국한되어 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난민들이 지속적으로 그네들의 사회 속에 유입되면서 발생될 미증유의 사태에 대한 저자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러한 갈등들이 소설 속에서 발란데르와 아나톨리가 격렬하게 투쟁하는 장면처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구소련제국 출신 KGB 아나톨리가 피지컬 영역을 맡았다면, 두뇌 플레이를 맡은 배후의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던 얀 클라인이 지닌 치명적 약점의 의도적 배치는 탁월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일까. 얀의 미란다에 대한 일방적 사랑이 궁극적 파멸의 원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 조금 평면적이지 않나 싶다.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 줄루족 전사 빅토르의 퇴장도 아쉬웠다.

 

전작들과 다른 스케일의 서사를 구사한다고 하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얼굴 없는 살인자><리가의 개들>을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사러 가야 하나.



[뱀다리] <하얀 암사자>를 다 읽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영국 BBC에서 2008년부터 계속해서 헨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게 아닌가. 한 시리즈 당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란데르 소설을 극화한 모양이다.


어제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헨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를 검색해 보았는데 <사이드트랙>, <리가의 개들> 등등이 모두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 같다. 아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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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19 1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전 판형 번역자가 독일 유학중에 번역해서(만켈 작품 독일 최고베스트셀러기록)
새번역본 추천합니다 ☺

레삭매냐 2022-09-19 18:42   좋아요 3 | URL
오오 그랬군요 :>

역시 스케일이 커서 그런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마 <리가의 개들> 후속편
으로 나오나 보네요 :>
기대해 보겠습니다.

mini74 2022-09-19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 읽는데 8년. ㅎㅎ제게도 해넘긴 묵은지 같은 녀석들도 수두룩합니다. 이럴거면 책들을 항아리에 담아둘걸 그랬어요. 발효라도 잘 되라고 ㅎㅎㅎ 하얀 암사자 기억하겠습니다 *^^*

레삭매냐 2022-09-19 18:54   좋아요 2 | URL
그나마 산 걸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

묵은지 항아리를 저도 한 댓개
준비해야지 싶습니다.
일케라도 읽는 맛에 일단 질러!
를 외쳐 봅니다.

누군가 그랬다매요, 책을 사서
닐는 게 아니라 집에 쟁여둔
책을 닐는거다라고요 ㅋㅋㅋ

독서괭 2022-09-19 19: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은 사두면 언젠가 읽게 된다 ㅎㅎ 묵은지 항아리! ㅋㅋㅋ 저도 묵은지 꽤나 있는데 언젠가 읽으리라 믿어봅니다^^;
매냐님이 너무 재밌었다 하시니 기억해두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9-19 19:54   좋아요 2 | URL
절판된 책인데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아서 걱정
했는데 제 책더미에 떠억하
니 버티고 있을 줄이야 :>

피니스아프리카에 버전 기
대해 봅니다.

책은 묵은지 항아리다라는
타이틀로 뻬빠 하나 써봐
야겠습니다.

coolcat329 2022-09-19 19: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저 이 책으로 발란데르 시리즈 입문했습니다. 발란데르 말뫼 출신 맞습니다. 일하는 경찰서는 스코네 지역 Ystad 인데 발음이 제 귀엔 이스타드에 더 가깝게 들립니다.
피니스아프리카에에서 또 나온다면 이번에 하얀 암사자 차례인데 나오면 꼭 다시 읽어보려구요.

레삭매냐 2022-09-19 20:02   좋아요 3 | URL
오호 저도 그럼 쿨캇트
선밴님의 길을 따르는 거임?
ㅋㅋㅋ

피니스아프리카에 버전에서
는 지도에 위스타드로 표기
되어 있더라구요. 오늘부터
1권 읽기 바로 돌입합니다.

하얀 암사자, BBC에서 케네스
브래너 기용해서 맹근 도라마
시리즈가 있네요. <리가의 개들>
도 시리즈에 들어가 있네요...
아 급 보고 싶어졌습니다.

coolcat329 2022-09-19 20:06   좋아요 3 | URL
아마도 레삭매냐님이 저보다 앞서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거든요ㅠㅠ

네~드라마 있습니다. 케네스 브래너 주연인데 거기는 배경이 영국이라 이름도 커트 월랜드입니다. 스웨덴 분위기가 아니라 저는 안봤습니다.

리가의 개들 도서관 신청도서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기대됩니다!

바람돌이 2022-09-19 2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추리소설 시리즈들은 왜 이렇게 많은걸까요? 다 보고싶어요. ^^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굽쇼. 집에 있는 책들을 보면서 음 용기를 내봅니다. ^^

레삭매냐 2022-09-20 09:59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아마 매력적인 캐릭
이라 작가들이 최대한 뽑아 먹으
려... 그랬다고 합니다.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도 자그
마치 14권이나 되는 것 같더라
구요. 스핀오프도 있는 것 같고 -

산 책 다 읽는다에는 다소 뻥이
섞여 있지 않나 ㅋㅋ
여튼 읽고자 노력 중입니다.

라로 2022-09-21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발렌데르 시리즈 남편이랑 다 봤지요!!
넘 재밌었어요!!!

레삭매냐 2022-09-21 14:07   좋아요 1 | URL
저도 찾긴 했는데 돈 주고
사서 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
중이랍니다.

어떤 분들은 스웨덴 이야기
인데 영국에서 맹근 거라고
패스했더라는 야그가... 아
넘나 강렬한 유혹입니다.
 
센고쿠 시대 무장의 명암 -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신과 음모
혼고 가즈토 지음, 이민연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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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일본 센고쿠-모모야마 시대 마니아가 아닌가라는 착각에 빠져 본다. 어쨌든 해당 분야의 책들이 나온다면 읽을 의양이 차고 넘친다. 이번에 혼고 가즈토의 <센고쿠 시대 무장의 명암>이라는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냉큼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무려 주중에 가서 빌려다 모두 읽었다. 감상에 앞서 다수의 오탈자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일본어/한자어 이름의 혼란스러운 병기가 너무 신경이 쓰였다. 꼭 출판사에 출간 전, 세밀한 감수를 부탁하고 싶다. 이건 좀 너무 하지 않나.

 

타이틀은 비록 <센고쿠 시대>라고 했지만, 군웅할거의 시대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두고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 즈음한 이야기다. 이 전투를 효시로 에도 막부가 시작되었으니 굳이 분류하자면 센고쿠 시대의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긴 하다. 역시 역사 해석의 차이니까.

 

도요토미 사후 전권을 장악하고 무소불유의 권력을 행사하던 미카와의 너구리 혹은 악질 아저씨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경을 거부한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시다 이쓰나리가 거병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막이 오르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원래 서군으로 참전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문치파의 영수 미쓰나리를 배신하면서 세키가하라 전역은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이르는 과정들은 이미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읽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다만 여전히 이름이 낯선 숱한 무장들의 이름과 관계도 그리고 옛 지명들이 귀에 들어와 박히지는 않는다. 하긴 뭐 내가 전문 역사가도 아니고, 어떤 부분들은 대충 넘어가도 되겠지 싶다.

 

혼고 가즈토에 따르면 일본 천하쟁패의 결정적 순간이었던 세키가하라 전투는 치밀하게 의도된 전투가 아닌 우연히 이루어진 그런 전투라는 게 분석이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들어 보면, 우선 도쿠가와 정예군을 이끌던 후계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주력부대가 사나다 마사유키에 막혀 가장 중요한 전역인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서군에서도 최강 부대라고 할 수 있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부대가 작은 성에 막혀 본진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전이 이루어졌다. 문치파 미쓰나리와 달리 숱한 전장을 실제 경험한 미카와의 너구리 영감은 주력부대 없이 서군을 이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전투를 개시했다. 그리고 그의 도박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역시 전장에서의 승리를 빠른 판단과 신속한 실행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이 만약에 서군에게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도쿠가와 주력군이 후방에서 온전하게 전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에도 250만석을 바탕으로 천하쟁패에 재도전할 수 있다는 속셈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맨 끝에 배치된 도리 모토타다의 후시미성 분전에 대한 막부의 보상도 대단하지 싶었다. 두 번이나 가계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지만, 어린 시절 마쓰다이라 다케치요가 이마가와-오다 가의 인질로 잡혀 있을 때부터 시종한 친구이자 오랜 전우를 서군의 거병이 명확해 보이는 상황에서 총알받이로 남겨 두고 가는 미카와 너구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싶다. 후다이 가신단인 도리 가문과 달리 도자마 가신으로 합류한 이이 나오마사가 전장에서 공을 다툰 상황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너구리 영감은 오랜 가신단에 대해 논공행상이 무척이나 짰던 모양이다. 그런데 도자마 다이묘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후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즈카타케 칠본창의 일원이나 히데요시 가문의 오랜 가신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를 사위로 삼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기요마사(우리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그 가등청정이 맞다)의 석고를 두 배로 튀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실질적인 이유보다는 이것 봐라, 내가 히데요시의 가신도 이렇게 등용하고 후하게 보답하지 않는가라는 점을 천하에 널리 선전하고 싶은 속셈이 배후에 숨이 있지 않나. 미카와 너구리 영감은 뛰어난 정치가답게 무엇 하나 순수하게 하는 게 없었다. 모든 게 치밀한 정치적 노림수였다고나 할까.

 

저자는 질 걸 뻔히 알면서도 동군 대신 서군에 가담한 오타니 요시쓰구나 우에스기 가문의 참모 나오에 가네츠구를 높이 평가하지 않나 싶다. 승자보다 패자에 대한 연민과 로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초한쟁패에서도 한고조 유방에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면서도 결국 패배하고 허무하게 죽은 초패왕 항우를 사모하는 팬들이 지난 2천년 동안 생기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흥미롭게 느낌 점 중의 하나는 미카와의 너구리 영감이 천하통일을 꿈꾸었다면, 다른 센고쿠의 무장들은 여전히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를 꿈꾸었다는 점이다. 전자는 염리예토, 흔구정토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이제 더 이상의 전란 대신 평화를 갈구한다는 정치적 구호를 전면에 내세웠다. 물론 도쿠가와 집안이 대대로 해먹는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하지만 사나다 가문이나 시마즈 혹은 구로다 조스이 같은 센고쿠 시대의 전통적 사고에 젖은 무장들은 예전의 입장을 고수했다. 무장들에게 평화는

 

그 결과 우에스기 가게카츠는 세키가하라에서 동군과 서군이 맞붙었을 때, 전력을 다해서 도쿠가와의 후방을 치지 않고 전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들이 진정으로 군웅할거의 시대를 원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유력 다이묘들은 서군이나 동군의 일방적 승리 대신 적당한 균형을 유도해야 했다. 한신에게 천하삼분계를 고언한 괴철 같은 인물이 우에스기 가문에는 없었던 걸까. 그리고 간신히미카와 너구리 영감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던 히데요시의 전우이자 충직한 가신이었던 가가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좀 더 살아 남았다면, 세키가하라의 향방은 또 다르게 전개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일되지 않은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 대한 한자/일본어 병기 문제는 심각하다. 나는 우시 히데요시라고 해서, 히데요시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았는데 하시바의 한자 표기였다. 아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우시라고 통일하던지 또 어디서는 하시바로 등장한다. 보다 정확한 감수가 많이 아쉬웠다. 좋은 콘텐츠인데 이런 이유로 책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전승, 민담 등 지금으로부터 무려 422년 전에 벌어진 일대 사건에 대한 고찰은 여전히 흥미로웠다. 명확한 기록의 부재는 그 여백을 채우기 위해, 오히려 독자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던가. 저자의 말대로 진실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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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17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구리 ㅎㅎㅎ 매냐님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도 이 시대 좋아해요. 어릴적 아부지가 대망이며 이런 쪽 소설 좋아하셔서 이런저런 이야기 해주셔서인지 ㅎㅎㅎ 근데 얘네들 이름 너무 헷갈려요 성도 자주 바뀌고 ㅠㅠ 하시바가 한자로 우시군요. 매냐님 👍

레삭매냐 2022-09-17 22:12   좋아요 1 | URL
20년 전, 타루미의 어느 숙소
에서 일본 교수님과 어줍잖게
보신전쟁과 세이난전쟁에 대
해 이야기하던 생각이 나네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하더라
도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로
출발해서 모토노부, 모토야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까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죠.

그쪽 역사에 문외한이다 보니
너무 헷갈리더라구요.


얄라알라 2022-09-17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항아리면....그래도 많이 이름 들어본 출판사인데 한자/일본어 병기 그렇게 심한가요?^^;; 근데 그만큼 레삭매냐님께서 박학하시고 애정 많으셔서 보이실터이고, 저같은 독자는 모르고 읽을 것 같아요. 엣이야기는 항상 강렬해요. 불과 1,2세대 이전분들 이야기도 재밌는데 400여년 전 일이면 몇세대일까...

레삭매냐 2022-09-17 22:13   좋아요 2 | URL
박식은 아니고 무식으로 ^^
슬쩍 평을 보니 저보다 고수
분들이 너무 평이하다는 평
을 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출판사에서 너무 감수나 교
정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금방 휘리릭 읽고 내일 반납
하는 것으로 :>

coolcat329 2022-09-17 15: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이름 읽다가 자꾸 막혀서 내용 연결이 힘드네요.😟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싸우고 엎치락뒤치락 했으니 오죽 사람이 많았을까 싶어요.
저도 좋아하는 시대 있어서 공부하고 싶어집니다. ㅋㅋ

레삭매냐 2022-09-17 22:15   좋아요 2 | URL
관계도를 그리려면 아마 하루
종일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계속해서 작중에 등장하
는 인물들의 이름을 찾았답니
다.

일본에서는 센고쿠 시대와 막말
격변의 시기가 문학이나 드라마
로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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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수년간 나의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마침내 읽었다. 결국 언제고 읽을 책은 읽게 된다. , 그전에 이미 영화화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봤다. 확실히 영화로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밀도와 깊이는 원작의 아우라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우리는 눈으로 모든 정보를 뇌에 전달하고, 뇌에 내린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데 만약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백색 질병이 퍼진 사회의 몰락을 그린다.

 

보통 사람들은 정상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상에 아무런 불편이 없이 생활한다. 하지만 당장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암흑이 내리고 답답해서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도시에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 질병이 속수무책으로 퍼지면서 공포가,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야말로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첫 번째 환자를 필두로 해서 정부는 초기 발병환자들을 격리 수용에 나선다. 낡은 정신병원에 그들을 가두어 버렸다.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캐릭터를 하나 배치한다. 안과 의사의 아내가 요주의 인물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다. 백색 질병의 원인을 알 수가 없듯이, 유일하게 그녀가 눈이 멀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격리 수용된 병동은 조금씩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당장의 먹을 것이 없어 그들은 굶주리게 된다. 그들은 포위하고 있는 군인들은 그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지만 그들 역시 곧 눈이 머는 건 시간문제였다. 눈이 먼 사람들은 격리된 공간에서 생존하기 위해 조직과 협력이 필요하지만, 그 대신 다른 선택을 하면서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대신 짐승이 되는 길을 택한다. 소설의 엔딩을 장식하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안과 의사의 아내는 인도주의 정신으로 최대한 타자를 도우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사회적 노력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말을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도대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먹을 것에 대한 집착과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때문에 발생한 악취와 비위생적 상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들이, 비상상황에서는 얼마나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는지 작가는 절절하게 표현한다.

 

그나마 격리된 수용소에 사람들이 적었을 적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눈이 멀고 총까지 지닌 악질 깡패들이 등장하면서 수용소는 지옥으로 한걸음씩 다가선다. 자신도 눈이 멀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군인들은 선을 넘어서려는 재소자들에게 총격을 가한다. 자신들이 무력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빚어낸 우발적 사고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군인들이 지급하는 식량을 독점한 좌병동의 깡패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중품과 돈을 식대로 요구하고, 다음에는 더한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한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기에 대항할 수도 없었던 다른 병동의 사람들은 무력하게 좌병동 깡패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에 사람들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얼마나 인간이 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던 의사의 아내는 가위를 들고, 깡패들을 응징하러 나선다. 그리고 곧 전쟁이 벌어지고 깡패들이 바리케이드처럼 설치한 매트리스에 용감한 한 여성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서 전체 건물에 불이 붙어 버렸다.

 

불에 타죽지 않기 위해 군인들이 총격을 할 지도 모른 상태에서 탈출을 감행하지만, 군인들 역시 모두 눈이 멀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실명만큼 재소자들의 자유 역시 그렇게 찾아왔다. 다음 단계는 의사의 아내를 필두로 해서 생존과 자구에 나서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 버린 도시 역시 생존에 적합하지 않았다.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과 전기가 공급이 되지 않는 소비처인 도시에서 먹을 게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슈퍼마켓은 이미 약탈된 지 오래다. 거리에는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고 야생화된 고양이와 개들이 그곳을 누비고 있다.

 

그리고 안과 의사의 집에 안식처를 마련한 7명의 일행들에게 결국 광명의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눈이 멀어버린 도시에서 철저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아포칼립스적인 서사를 이어간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름이라는 개인의 고유성마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는 설정이었을까. 그런 익명성 뒤에는 위선과 허위가 비집고 들어선다. 공교롭게도 우병동 1호실에는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부터 시작해서 안과 의사와 접촉한 이들이 모이게 된다. 검은색 안경을 쓴 여자는 자신의 정체가 들어날 위기에 처하자 슬그머니 검은색 안경을 벗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자신을 보호하고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동이었을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타인을 위한 이타주의가 구원의 길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다가, 또 반대편에서는 약한 사람들이 죽든 말든 자기들의 욕망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극한의 이기주의가 발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익명성은 최악의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잘 아는 이들에게 그런 악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으리라. 나와 나의 동지들이 아닌 철저하게 타자화된 이들을 착취하는 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라는 변명으로 자신의 양심을 가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영화에서 아주 잘 묘사되었는데, 텅 비어 버린 도시에서 안과 의사의 아내가 먹을 것을 구하다가 잠시 안식을 위해 들른 성당에서 성상들이 모두 눈을 가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시퀀스는 과연 압권이었다. 신마저 보는 것을 거부했다는 표현일까. 과연 다시 볼 수 있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마저 사라졌다는 걸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장치는 아니었을까. 공존이 아닌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로 뒤뜰의 토끼와 닭을 잡아먹으며 생존하는데 성공했던 어느 노파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의사의 아내는 좌절한다.

 

모든 희망과 구원에 대한 기대를 접으려던 그 순간에 사람들은 시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이던가.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후속작으로 <눈뜬 자들의 도시>가 있는 모양이다.

 

가볍게 시작했으나 종말 서사가 인도하는 어둠은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금방 읽은 걸 보면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말이겠지. 역자는 주로 영문학을 번역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버전은 영어판의 번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주제 사라마구 작가 특유의 문장 끊지 않고 쓰기와 사뭇 다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아마 영어판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건조한 스타일의 번역이 아포칼립스적인 분위기가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아니 보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비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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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13 12: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앗 표지가 바뀌었네요 하고 봤더니 특별판이네요. 전 이 책 아주 예전 추석에 큰아주버님이 기차 타고 오면서 다 읽었다고 남편에게 넘겨서 ~ 무섭고 잔인하고 질서라는게 얼마나 손쉽게 무너지는지 허망했던 기억도 납니다. 저도 영화도 좋았어요 *^^*

레삭매냐 2022-09-13 13:33   좋아요 3 | URL
표지 갈이하고 단가가 거의
두 배가 되었답니다...

인간의 본성을 극단까지 밀어
붙이는 작가의 근성에 그만
질려 버릴 정도였습니다.

질서의 허망함이랄까요...

페크pek0501 2022-09-13 13: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기념 에디션이군요.
어느 팟케스트에서 이 작품을 읽어 줘서 들었어요. 그래서 내용을 알죠.
갑자기 눈이 멀게 되는 장면부터 참신하면서 충격적이라고 느꼈어요.

레삭매냐 2022-09-13 13:35   좋아요 4 | URL
사실 전 구판으로 읽었답니다.
너무 오래 전에 쟁여둔 책이라 -

명절에 집에 갔다가 집어서 읽
기 시작했는데 손에서 뗄 수가
없더라구요.

아이디어 하나는 기발했습니다.

미미 2022-09-13 14: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팟케스트에서 초반 스토리를 듣고 읽기가 두려웠어요. 영화도 그랬지만 모두가 눈이 안보인다는 설정이 그 어떤 설정보다 공포라고 생각했거든요. 의사의 아내는 비참한 상황의 유일한 목격자군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다‘는
말이 날카롭게 느껴집니다.
저도 결국은 읽게될 책인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09-13 15:15   좋아요 3 | URL
보이지 않는 백색의 공포 -

우리 인간이 지닌 오감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비주얼이 아
닌가 싶습니다. 그런 시각이
사라진다면... 상상하고 싶지
도 않네요.

시간이 많이 흘러도 언젠가
는 꼭 읽게 되시리라고 믿슙
니다.

바람돌이 2022-09-13 15: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을 때 충격이 잊히지 않아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밑바닥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파고든다는 느낌이었던것 같습니다. 이후로 이 작가의 팬이 되었는데 이후 읽은 책들 중 이 책을 능가하는 책이 없었다는 슬픔이.... ^^

레삭매냐 2022-09-13 17:45   좋아요 2 | URL
전 13년 전에 <수도원의 비망록>
과 <죽음의 중지> 읽고 나서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바람돌이님처럼 아마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네요.

Falstaff 2022-09-13 16: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 책, 이거 정말... 좀.... 아니, 과하게 적나라하지 않았나요?
어후, 전 이 작품 써 놓고 리스본 아파트 꼭대기에서 낄낄대면서 군중들을 내려다볼 사라마구가 연상되어 소름이 다 끼치던 것을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2-09-13 17:53   좋아요 3 | URL
너무 적나라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리더군요.

세상의 그 누구도 눈먼 자들
의 도시에 가져다 놓으면 그들
처럼 되어 버리지 않을까 싶습
니다.

역시 작가가 고수가 아니었을
까요.

coolcat329 2022-09-14 07: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가끔 운전하다 눈 부시면 이 소설 생각납니다. 눈이 머는 상상하곤 해요.

레삭매냐 2022-09-14 11:45   좋아요 3 | URL
운전하다 눈이 멀게 된다면 정말 -

어떻게 보면 아포칼립스라기 보다
호러에 가까운 소설이 아닌가 싶기
도 하더라구요.

젤소민아 2022-09-14 1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도 영화도 제목이나 발상 등 많은 오마쥬를 낳은 걸작이죠~~저도 다시 읽고프네요~~서브텍스트의 압권이랄까요~~

레삭매냐 2022-09-14 13:34   좋아요 1 | URL
오오 이미 읽으셨군요 ^^

전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내용을 모두 알고 봐도 넘
재밌더라구요. 역시 콘텐츠
의 힘인가 봅니다.

서니데이 2022-09-14 18: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00쇄 기념 에디션도 나온지 몇 년 되었네요.
이 책 영화로도 나오고 많이 소개되긴 했는데, 그래도 100쇄면 읽은 분이 많겠어요.
레삭매냐님, 연휴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09-15 08:56   좋아요 2 | URL
우와 100쇄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해냄은 이 책으로 노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연휴가 어떻게 갔는지 모
르게 그렇게 지나가 버렸
네요, 감사합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제임스 레스턴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산 책은 언젠가는 반드시 읽는다. 6년 전에 중고서점에서 산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을 다 읽었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지난 천년 동안 하도 울궈 먹어서 더 이상 나올 이야기가 더 있을까 싶지만, 천년이라는 시간의 더께가 이제는 온전한 역사라기보다 이야기 혹은 전설의 영역으로 넘어간 서사가 되어 후대의 크레에이터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고 있지 않나 싶다. 거기에 해석이라는 영역까지 더해지면서 오히려 풍부한 이야기로 변신 중이다.

 

무슬림 세계에서 지난 천년 최고의 영웅으로 알려진 살라흐 앗 딘이 1차 십자군원정으로 세워진 라틴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서방 기독교 세계는 그야말로 일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구세주가 나고 자란 성도가 또다시 이교도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사실 첫 번째 십자권원정에서 이슬람 세계가 서방의 오합지졸 십자군 기사들에게 패배한 것은 시리아와 이집트로 나뉘어 서방의 침략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흐 앗 딘은 에데사를 수복하면서 성지탈환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장기의 아들 누레딘 밑에서 봉신으로 있다가 숙부 시르쿠와 함게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장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결국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살라흐 앗 딘은 종주국이라고 볼 수 있는 시리아마저 집어 삼키면서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살라흐 앗 딘의 깃발 아래 이루어진 무슬림 대통합이야말로 무슬슬림의 3대 성도이자 예언자 무함마드가 밤의 신기한 여행으로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알 쿠드스(예루살렘) 탈환작전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이에 반해 라틴 제국의 사분오열은 한 세기 전, 무슬림 세계가 외부 침략에 직면했던 예의 상황과 유사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지도자였던 뤼지냥의 기는 형편 없는 군주였다. 티레에 근거한 몬페라토의 콘래드는 성지 수호라는 대의보다 자신의 사익 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라틴 제국에서 나고 자란 프랑크족의 후예들은 동방의 문물에 익숙해진 나머지 당시 최강의 전투단으로 알려진 서방 기사단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알 쿠드스 탈환을 앞두고 지하드를 선포한 살라흐 앗 딘이 휘하에는 마그레브 제국에서부터 쿠르드족, 이집트, 다마스커스, 바그다드에 이르는 거의 모든 무슬림 세계의 전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18774일 하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무슬림 전사들이 기독교 전사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알 쿠드스의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무슬림 군대가 알 쿠드스에 입성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잘 다루고 있으니 참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관대한 군주 살라흐 앗 딘은 한 세기 전, 기독교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와는 달리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1099년에는 프랑크족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사는 거의 모든 이슬람 사람들과 유대인을 비롯한 이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해서 그들의 피가 전사들의 무릎은 물론이고 마구까지 차올랐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살라흐 앗 딘의 위대한 명성은 알쿠드스 탈환보다 상대방에 대한 관대한 처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제임스 레스턴 저자는 이 과정에서 살라흐 앗 딘이 치명적인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의 티레를 정복하지 않고 놔둔 것과 기 드 뤼지냥을 석방시킨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서방에서 세 번째로 조직된 3차 십자군원정 당시 살라흐 앗 딘이 고전하게 된다.

 

무슬림의 영웅 살라흐 앗 딘이 있다면 서방에서는 사자심왕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의 군주 리처드 1세가 있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세 번째 아들이었던 리처드는 어려서부터 서방 최강 전사의 기질을 검증받았다.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플래태저넷 왕조의 헨리 2세의 적자였지만, 지방 귀족들의 계속되는 견제와 부왕의 동생 존 백작에 대한 편애로 왕위 계승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모국 잉글랜드보다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영지였던 아키텐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사자심왕은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최강전사의 명성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그의 생애와 당시 프랑스와의 관계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넘어 가기로 하자.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쳐 부왕이 죽은 뒤,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리처드는 동방에서 날아온 성도 함락이라는 비보를 듣고 바로 십자군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전략가답게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게 기사와 병사 뿐 아니라 병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리처드는 자국에서 살라딘세라는 걸 만들어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증세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정책이 아니었던가. 잉글랜드와 아키텐, 노르망디 그리고 푸아투의 백성들이 아우성칠 만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군단을 편성해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와 함께 리처드는 동방원정을 개시했다. 저자는 리처드와 필리프가 과거의 연인이자 전우 그리고 경쟁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첫 번째 관계가 진짜 맞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시칠리아와 키프러스를 거쳐 후방을 든든하게 한 뒤, 티레에 상륙한 리처드는 첫 전투인 아크레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서방 최강전사이 등장이라는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붉은수염(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는 10만 대군을 동원해서 67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성도 탈환을 목표로 육로로 시리아 경계까지 진출했다. 서방의 이런 무시무시한 두 전사 집단을 상대해야 했던 살라흐 앗 딘에게 프리드리히가 살레프 강가에서 심장마비 혹은 익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공할 전력을 자랑하던 독일 기사단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기사단이 리처드의 부대와 합류해서 살라흐 앗 딘을 상대했다면, 중근동의 역사는 또 다시 바뀌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리처드를 상대하던 살라흐 앗 딘에게 항상 행운이 따른 것도 아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간의 전쟁은 무슬림 진영에게도 극심한 피로를 제공했다. 아무리 신을 위한 전쟁이라고 포장을 해도, 현생에서의 괴로움은 우리 인간에게 문제가 아니었던가. 사자심왕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공포감, 전장에서의 배고픔과 추위, 악천후와 무더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전사는 아무도 없었다. 무서운 기세로 무슬림 군대를 상대하는 사자심왕의 공격으로 살라흐 앗 딘은 아르수프와 야파에서 연전연패를 당했다.

 

하틴 전투 이래 서방 침략자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무슬림 군대의 기세가 꺾이자, 살라흐 앗 딘 아래 단결해 있던 아미르들 역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라틴제국의 오합지졸과 달리 잘 훈련되고 조직된 서방 기사단 그리고 최고의 전사 리처드의 용병술 앞에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수비대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대규모 결전으로는 도저히 리처드를 상대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기존의 게릴라 전술과 초토화 전술로 자신들과 달리 병력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십자군부대에 대한 소모전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남부의 중요한 거점 항구도시였던 아스칼론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연결하고 예루살렘을 요격할 수 있는 전략요충지였다. 이 요충지가 리처드의 손에 넘어 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거라고 판단한 살라흐 앗 딘을 아스칼론을 파괴해 버렸다. 그렇게 성도 예루살렘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도달한 리처드는 왠지 모를 이유로 공성전에 나서지 않고 철수해 버렸다. 살라흐 앗 딘은 최악의 경우 알쿠드스 함락을 예상하고, 심지어 주력부대를 후퇴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리처드가 예루살렘 공성에 나섰다고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계속해서 비판받는 이유가 되었다.

 

이것이 3차 십자군원정이 실패한 결정적 장면이었다. 살라흐 앗 딘은 다시 한 번 무슬림 세계를 서방의 침략자로부터 구원하는데 성공했고, 지중해 연안의 몇몇 도시들을 수복하는데 그친 리처드는 초라하게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귀국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교황이 중재한 신의 휴전은 리처드에 대한 개인적 복수를 꿈꾸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공허한 말잔치였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이 결국 그를 납치해서 뒤른슈타인 성에 감금하고,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넘겼다.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가 귀국한 다음 해에 사망했고, 리처드는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고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하긴 했비만 몸값으로 국가 재정을 드러낼 정도의 금전적 보상을 치러야했다. 귀국해서도 계속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을 제압하러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애송이가 쏜 재수 없는 화살을 팔에 맞아 죽고 말았다. 저자는 개미에게 당한 사자의 최후로 묘사했다.

 

12세기 대표적 신의 전사들이었던 살라흐 앗 딘과 리처드 모두 자신들이 믿는 신의 장기말이 아니었나 싶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성도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친 한 종교를 믿는 집단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치욕의 상징이었다. 두 진영의 대표적인 전사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예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후방에서 고생한 민중들에 대한 고생은 상대적으로 가리워진 느낌이다. 전투 장비는 물론이고, 말먹이와 군수물자를 준비하는데 들어간 막대한 비용과 노동력은 누가 제공했을까? 계속해서 매몰되어 가는 전쟁비용을 치르기 위해 서방과 동방의 민중들로부터 세금을 쥐어 짜내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접한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같은 일신교라고 생각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견해 차이가 너무 달랐다는 점이다. 알라 신을 유일신으로 믿는 이슬람교에서는 삼위일체의 기독교를 다신교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알쿠드스에서의 승리를 다신교 이교도에 대한 유일신을 믿는 자신들의 승리로 간주했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가장 기본적인 교리 해석의 차이로부터 어쩌면 해결될 수 없는 갈등의 원천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 십자군 서사는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그리고 또 몰랐던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곁들여지니 더 다채로울 수밖에. 새로운 천년에도 계속해서 이어질 십자군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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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7 11: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 ㅎㅎ 제가 산 책들이 저를 막 째려봐요. ㅎㅎ
술탄 살라딘 소설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때 역사서도 읽자 해놓고 잊어버렸네요. 이 책도 관심도서 찜해갑니다. ^^

레삭매냐 2022-09-07 13:48   좋아요 3 | URL
타리크 알리의 살라흐 앗 딘에
대한 소설은 가히 최고였습니다.

왜 그의 이슬람 5부작이 더 나오
지 않는지 아쉬울 따름입니다.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라는
선언보다 읽으려고 노력한다
라고 바꾸어야 하나 싶습니다
ㅋㅋㅋ

mini74 2022-09-07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겠어요. 저도 십자군 이야기 좋아합니다. 넘 잔인해서 좀 그렇지만 ㅠㅠ

레삭매냐 2022-09-07 15:51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재밌긴 한데 무시무시
하더라구요.

특히 리처드 일당이 아크레 공방전
에서 저지른 악행은 정말...

자목련 2022-09-07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산책은 자꾸만 잠을 잔다. 산책은 잠들다 중고로 팔린다. 훗날 그 책을 또 산다. ㅠ.ㅠ
역사를 다룬 책(소설 포함)은 어려운 독자에게 이런 리뷰는 놀랍고 대단합니다.

레삭매냐 2022-09-07 16:27   좋아요 0 | URL
자수하자면 잠자는 산책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뭘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고
또 사들이기도 하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