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후안 호세 사에르 지음, 유지선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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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신대륙이 발견되었던 16세기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그리고 미지의 대륙이 가져다 줄 물질적 축복에 대해 모두가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호세 사에르 작가의 책 <목격자>에서도 그런 시선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사에르 작가는 주인공 소년에게 익명을 부여했다. 하지만 동방의 이 엉뚱한 독자는 마음대로 그를 아노니마토(무명씨)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목격자>가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독서는 내 마음대로니 말이다. 이름이 있다면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게 안되겠지만, 주인공 소년은 이름이 없었으니까.

 

13세 고아 소년 아노니마토는 브라질 내륙으로 탐험에 나선 배의 사환으로 취업해서 대양에 나선다. 그리고 배 위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없었던 소년은 양성적 인간 취급을 당한다. 당시에는 그런 게 일상이었는지 좀 의심스럽다. 그의 여정은 내륙에 상륙한 뒤, 현지 인디언들을 만나면서 180도로 바뀌게 된다. 선장을 필두로 한 다른 동료들이 모두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아노니마토 홀로 구사일생으로 생존하는데 성공했지만, 끔찍한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데프-라 부르는 인디언들이 살해당한 아노니마토의 동료들을 잡아먹은 것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그래. 그리고 왜 그들은 또 디에고는 살려 두었단 말인가. 아노니마토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석쇠를 준비해서 거대한 말 그대로 카니발을 벌였다. 그리고 술도 마시고 교접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인디언들과 그렇게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난 뒤, 인디언들은 아노니마토를 해치지 않고 카누에 태워 자신이 있던 사회로 보내졌다. 아노니마토는 스페인에 돌아가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정부 관리와 사제들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케사다 신부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목격자>를 읽으면서 아노니마토가 스페인으로 복귀하면서부터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에서 아노니마토는 7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아버지 같은 케사다 신부에게 글쓰기와 읽기 라틴어 히브리어 같은 전문적인 영역의 학업적 성취를 이룰 수가 있었다. 이런 배움이 훗날 아노니마토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상당히 전문적 관점에서 기록으로 남기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아노니마토는 유랑극단을 만나 희곡배우이자 전속배우로 변신을 거듭한다. 브라질에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꾼이자 배우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들을 아노니마토보다 더 잘하고 연기할 수 있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어느 순간, 아노니마토는 그 일을 그만둘 결심을 하게 된다. 동료 배우들의 아이들을 거둬 유사가정을 이루게 되는 아노니마토.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에서 희망도서로 처음에 빌려서 읽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반납하러 가서 연장한 다음,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다 읽을 수가 있었다. 16세기 초,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사에르 작가는 기억과 구전에 기반한 신화 같은 이야기들을 재창조해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경험들을 했던 아노니마토는 반세기 전의 사건들을 기억의 저장소에서 소환하고 분석한다. 뛰어난 지식인들에 버금가는 해석과 상상력 넘치는 주인공의 서사 전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미지의 신세계와 조우했던 소년의 기억들은 그렇게 새로운 세기에 재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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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손정숙 옮김 / 지식의풍경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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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년 전에 산 책을 이제야 읽는다. 산 책은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읽는다라는 모토를 가지고 책을 읽는다. 금방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하긴 내가 책 한 권에만 목숨 걸고 읽는 게 아니니. 다 읽고 나니 속이 시원한 걸 그래.

 

1차 세계대전 후, 정치적 혼란과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던 독일 민족에게 오스트리아 상병 출신 베테랑 아돌프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의 출현은 구세주처럼 받아 들여졌다. 전투가 아닌 전쟁에 진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야기된 엄청난 금액의 전쟁배상금과 영토 할양 등의 굴욕적 조건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등장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나치)당의 히틀러는 독일 사람들에게 장밋빛 희망을 약속하기 시작했다.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일자리를, 배가 고픈 이들에게는 빵을 주겠다는 간단한 슬로건보다 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호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는 더더욱.

 

책에서는 히틀러청소년단이라고 하지만, 원어는 히틀러유겐트였다. 책을 펼치면서 가장 뒤에 등장하는 제12SS 무장친위대 히틀러유겐트 사단에 대한 부분부터 읽었다. 청소년기를 히틀러 통치 아래서 보낸 독일의 청년들은 그 누구보다 맹렬하게 조국을 위해 연합군과 대항해서 싸웠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전투력은 상대였던 연합군 병사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래, 압도적 공군력과 병력으로 독일 수비대를 몰아붙이던 연합군을 상대로 캉에 투입한 히틀러유겐트 사단은 그야말로 총탄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할 때까지, 아니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웠다. 이 지점에서 히틀러의 가스라이팅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책의 초반으로 돌아가 히틀러가 1933130일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되면서 전제주의 국가가 되는 모습부터 살펴보자. 히틀러를 필두로 한 나치 일당은 집권하자마자 독일 청소년들을 개조할 필요를 느끼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가스라이팅 작업에 착수한다. 집권 후, 라인란트 진주와 재무장 그리고 베르사유 협약에서 탈퇴하면서 전 국민적 지지를 얻기 시작한 총통에게 대부분의 독일 청소년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조국 건설이라는 대업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희대의 독재자이자 사기꾼이라는 속성을 파악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총통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면 아이들은 지체 없이 당국이나 악명 높은 게슈타포에게 부모를 신고했다. 이런 방식과 과정을 거쳐 자유가 흘러넘치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찰국가 제3제국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의무적으로 히틀러유겐트 소속으로 편입되어, 어려서부터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고속도로 건설 작업에도 투입되어, 그야말로 손에 피가 흐를 때까지 곡괭이질과 삽질을 해야했지만 이미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홀린 청소년들은 독일 시민으로서 당연히 감수해내야할 그런 임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소년들은 소녀들대로 조직되어 시골 마을에 내려가 육아와 요리 그리고 훗날 청년들이 전쟁터에 징집되어 갔을 때, 생산대 역할을 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과정을 경험하게 됐다. 이 모든 상황들이 나치가 미래에 대비한 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역시 빠질 수가 없는 아이템이다.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강제수용소와 대규머 가스 처형실 이전에, 히틀러 일당들은 독일 제국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진짜 독일 시민들을 비밀리에 대규모로 처형하는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었다. 정신질환자나 장애인 그리고 동성애자들을 강제수용소나 비밀병원으로 보내 제거했다. 이런 방식을 익힌 나치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서, 아인자츠그루펜으로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처형할 수 없게 되자 가스처형실이라는 극악무도한 방식을 도입해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원들을 학살했다.

 

독일의 모든 청소년들이 그렇게 무력하게 히틀러에게 맹종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백장미단으로 알려지게 되는 한스, 소피 숄 남매와 더불어 카를 슈니베 같은 청년들은 히틀러유겐트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히틀러가 숨겨온 진실을 알게 되면서 사실을 알리는 전단지 살포 같은 저항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시도는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적어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아무런 저항활동도 없었다는 오명만은 면하게 해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히틀러가 벌인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이른바 히틀러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희대의 악당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니 한스나 소피 숄 그리고 카를 슈니베 같은 청년들이 그들보다 먼저 진실을 깨닫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나오지만, 유대인 학살에 대한 전모를 모르고 있던 평범한 독일 시민들은 미군이 촬영한 홀로코스트 영상을 보면서도, 프로파간다라며 믿지 않았다. 히틀러 정권이 선전해온 가짜 뉴스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작가는 생존한 히틀러의 아이들과 직접 만나거나 이메일 혹은 전화 같은 방식으로 인터뷰를 통해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홀렸던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한 세기만에 다시 전세계적으로 극우 정치들이 득세하고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되풀이돼서는 안 될 비극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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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틀러유겐트는 중국에서는 홍위병으로 부활했죠. 맹목적인 저돌성이 독재자의 가스라이팅에 철저하게 이용된 사례들은 일면 끔찍하고 일면 안타깝고 그리고 무서워요.

레삭매냐 2025-07-28 18:26   좋아요 1 | URL
전체주의 국가에서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난 청소년들의 모습이
말씀해 주신 대로, 상당히 유사해
보이네요.
그리고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요.

카스피 2025-07-28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히틀러 유게트를 보니 중국의 소분홍이 생각나더군요.현재 소분홍들은 중국의 정치 지도부가 너무 착해서 중국이 대국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더군요.

레삭매냐 2025-07-29 08:22   좋아요 0 | URL
저는 카스피님 덕분에 ‘소분홍‘
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네요.

과연 소분홍들 다운 발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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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민 말루프의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드디어 출간됐다. 세상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리고 바로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다 읽는 데는 두달여가 걸렸다. 사실 집중해서 읽는다면 많이 걸려도 일주일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상관없다. 드디어 다 읽었고, 독서는 역시나 대만족스러웠다.

15세기 말, 서방에는 그라나다로 알려진 알 안달루스의 가르나타 출신의 알 하산 무함마드 알와잔이 바로 이 책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주인공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하산은 카스티야 왕국의 레콩키스타로 나스르 왕조가 가르나타를 잃은 뒤, 마그레브의 페스로 이주했다. 이 부분은 왠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타리크 알리의 <석류 나무 그늘 아래>의 후속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그라나다 시절을 뒤로 하고, 실향민이 된 하산 가족은 전혀 새로운 환경의 페스에서 적응해야 했다. 그라나다에서 검량관으로 활동하던 하산의 아버지는 페스에서 애증의 관계를 엮어간다. 어려서부터 책과 학문을 사랑한 주인공 하산(미래의 조반니 레오)은 페스에서 착실하게 학업을 쌓아 가면서 미래의 자산을 쌓아간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외숙부와 함께 말리 왕국의 팀북투로 외교 사절로 출동하기도 한다. 사막을 가로 지르는 카라반의 일원으로 하산을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될 하룬과의 관계도 페스에서 시작된다. 하룬은 하산의 누이 마리암과 사랑에 빠지지만, 타향에서의 삶은 하산 가족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산에게도 대운이 터서 재물을 쌓아 상인으로 성공하는 입지전적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인 복도 많아서 가는 곳마다 애인들이 끊이지 않는다. 외숙부가 죽고 난 뒤, 그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해서 딸 사르와트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누이 마리암을 괴롭히던 자르왈리를 하룬이 암살하면서, 페스에서 하산은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까지가 역사 소설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가르나타와 페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다음 하산의 무대는 맘무르 왕조의 술탄 칸수가 지배하는 카이로다. 당시 하산 같이 가르나타에서 쫓겨난 무슬림들은 동방에서 한창 부상 중이던 오스만 제국이 가르나타를 다시 카스티야 왕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은 포르투갈 세력과 카스티야 왕국의 도전으로 마그레브 상당 부분이 기독교도 진영에 떨어졌지만,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힘을 합쳐 서진을 개시한다면 무슬림 제국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카이로에서도 하산은 누르라는 오스만 제국 술탄 조카 미망인 누르와 만나 로맨스를 꽃피운다. 하산이야말로 16세기판 '펠릭스'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오랜 친구 하룬에게 발탁되어 하산은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된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제국을 오가면서, 16세기에 이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인사가 얼마나 되었을까 과연 의문이 든다.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하산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외교 사절로 유감 없는 활약을 펼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오스만 제국이 사실은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 아니라, 맘루크가 다스리는 이집트를 복속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하산은 이집트 공략에 나선 오스만 제국과의 치열한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술탄 칸수에 이어 맘루크 왕조의 마지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투만베이는 월등한 군세를 자랑하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지만, 결국 게릴라전 끝에 배신당하고 포로가 되어 처형당한다. 한 명의 문제적 인간이 이 모든 아수라장 속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삶을 영위해갈 수 있다는 상황이 너무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것만으로도 하산의 파란만장한 삶은 충분히 후대에 기억할 만한 그런 서사였다. 하지만 주인공의 간난신고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인 로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지 메카 순례를 마치고 어머니와 가족이 기다리는 튀니스로 가던 제르바에서 하산은 기독교 해적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그렇게 기독교 노예 신세로 전락한 무슬림 지식인 하산은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다스리는 로마의 산탄젤로성으로 끌려간다.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이었던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에게 가르나타-아프리카 출신 지식인이자 외교관이었던 하산은 소중한 존재였다. 동방의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대제가 지휘하는 정복 사업으로 로도스를 함락시키고, 서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와 빈이 다음 목표였다. 서방에서는 카스티야와 신성로마제국을 아우른 칼 5세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면서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레오 10세 그리고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훗날 클레멘스 7세)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령 확대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목표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하산은 그야말로 신이 보내준 사자가 아니었을까. 이에 레오 10세는 하산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조반니 레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을 정도의 절대적 신임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레오 10세는 줄리오 추기경의 유대계 정부 마달레나를 이제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된 하산의 부인으로 삼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마달레나는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그가 바라던 아들 주세페를 안겨 준다.

로마에서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기념비적인 저술 <아프리카 지리지>을 쓸 준비하는 동시에, 로마 지식인들에게 아랍어를 가르키는 교사의 역할도 맡게 된다. 물론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라틴어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복음서를 배우는 학생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 작센 출신으로 한스라는 이름의 사제가 있었는데 훗날 한스 사제가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로마에서 계속해서 꽃길을 걸을 것만 같았던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레오 10세가 선종하고, 하드리아노 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이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 산탈젤로성의 죄수 같은 신세로 유폐되어 있던 그는 개혁적 성향의 하드리아노 6세가 선종하고 줄리오 추기경이 클레멘스 7세가 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고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 대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자신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았고,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코냑 동맹군이 칼 5세의 제국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교황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527년 5월 6일 란츠크네이트 용병대가 주축이 된 제국군이 로마에 진입하면서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이 사건은 훗날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우리의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대살륙전 속에서도 신의 가호와 옛 제자 한스 사제의 도움으로 살아남는 무쌍의 정수를 보여준다.

우선 격변의 16세기를 살아낸 문제적 실존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가르나타 함락에서부터 시작해서, 페스로의 강제 이주, 마그레브 일대를 주유하고 맘루크 제국의 멸망을 지근거리에서 직접 목격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로마 약탈은 레오 아프리카누스 일생에 방점을 찍는 대사건이었다. 그는 정말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체험한 몇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아민 말루프는 이 방대한 대서사시의 신화적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역사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현대에 소환하는데 성공했다. 영국 BBC에서는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한다. 무슬림과 기독교 세계를 경험하고, 명멸하는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직접 목격한 매력적인 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를 기대해 본다면 너무 과도한 기대일까. 대가의 작품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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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5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읽고싶어지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레삭매냐 2025-07-25 20:56   좋아요 0 | URL
리뷰어에게 최고의 상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제철은 지금
섬멍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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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토 파실린나의 절판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 앉은 자리에서 읽은 책이다. 모두 8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웹툰이다. 우리네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단 말이지.

 

어라, 맨 처음 이야기가 뭐였더라. 무당산에서 장삼봉 태사부에게 태극권을 연마하던 장무기처럼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도루묵이다. 임금님이 피란 시절에 하도 맛나게 자셔서 은어라고 하다가, 나중에 먹어 보니 별 맛이 없어 도루 묵이라고 부르라고 했던가.

 

벼는 보통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이 녀석 도루묵은 익을수록 고개를 빳빳이 쳐든다고. 그 이유는 알배기가 한 녀석들이 익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톡톡 터지는 알맛에 도루묵을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네 먹거리에는 그런 재미도 있어야 또 맛도 배가가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비린내 나는 녀석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리.

 

마라샹궈에서 발전한 게 마라탕이라고 했던가. 고수도 그렇지만, 향신료 특유의 향과 맛 때문에 잘 찾지 않는 음식이지 싶다. 그 이야기에 같은 동네에 사시면서 호구조사하시는 아저씨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던가. 너무 금방 후루룩 읽다 보니 이야기들이 뒤죽박죽된 그런 느낌이랄까. 그냥 스몰톡 정도로 하고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어디 가시나라고 묻는다면 네 어디가요라고... 대답하면 너무 버릇 없어 보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답답형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진다면 그 또한 낭패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경 하루에 1미터씩 자랄 수도 있다는 죽순, 죽피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에 들른 쭈꾸미 전문점에서 대나무를 왕창 베어 버렸는데 그 뒤에 얼마 안 있다가 방문해 보니 훤하던 대밭에 대나무들이 그새 자라 있더라. 그 정도란 말이지. 문득 그 때 자른 대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좀 궁금해졌다.

 

음식을 해서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식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도 재밌단 말이지. 물론 음식 만들기라는 노동에 들어가는 수고를 빼놓고 또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남이 해주는 건, 라면도 맛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주인공과 함께 사는 망토가 장을 보러 갔다가 체크카드에 잔액이 없어서 낭패를 당한 이야기도 재밌었다. 가끔 그렇게 체크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무언가 사러 갔다가 펑크가 나면 참 난감할 것 같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항상 마트에서 준비된 자세로 계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사람으로서 또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보통 집에서 음식 준비보다는 뒤처리를 담당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우리 동생은 설거지가 그렇게 하기 싫다고 하는데, 예전에 룸메이트랑 같이 살던 시절부터 설거지를 해와서 그런지 나는 설거지에 대한 그런 거부감은 1도 없다. 밥 먹는 대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 작전에 투입하는 편이다. 그리고 개수대에 설거지가 쌓여 있는 꼴도 보지 못한다. 누가 먹었던 간에 바로 설거지부터 한다. 밥을 먹었으니 그 다음에 내 차례가 아닌가. 망토가 초반에 상을 펴라고 했더니만 정말 상만 펴는 장면을 보고는... 그게 상차림 끝은 아니지 않은가. 이 양반 너무 센스가 없으신 건 아니고. 하긴 그런 이야기가 먹거리 차림새에 들어가야 또 이야기가 다채로워질테니까.

 

참 그리고 보니 원제가 제철음식에 관한 것이었지. 누가 모르는가. 다들 제철에 나는 식재료를 이용해서 무언가 한 끼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걸. 아 그리고 보니 마지막 에피소드가 냉면에 대한 이야기 아니었나. 사실 냉면이 무슨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고. 순전히 여름에 시원하게 즐기는 맛으로 먹는 게 아닌가. 요즘에는 냉면값도 하도 올라서 선뜻 먹게 되질 않는다. 만화에서는 다시다를 이용한 육수내기 기법을 보여주는 것 같던데 말이지. 마트에 들렀다가 다시마를 보고는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요즘에는 밀키트 냉면으로도 괜찮은 녀석들이 많아서 간단하게 먹기 부담이 없지 싶다.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은 냉면 12,000원은 솔직히 너무 비싼 거 아니구.

 

닐이 너무 덥다 보니, 한 끼 챙기기가 쉽지 않다. 더위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부디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이 더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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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 대항해 시대와 우연의 역사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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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로운 타이밍에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책이 출간됐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아메리고>가 하나는 이화북스에서, 또 다른 하나는 이글루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나의 픽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꾸준하게 내고 있는 이화북스였다. 문득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작권이 소멸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0쪽 남짓한 <아메리고>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 아니 인식자로 알려진 피렌체 출신의 항해사이자 지리학자, 사실은 상인이었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대한 이야기다. 궁금하지 않은가? 모두가 인류의 네 번째 대륙으로 알려진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메리카 대륙이 콜럼비아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투피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란 말인가.

 

역시 서양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연원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사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항해 시대, 콜럼버스가 이끈 선단의 최종 목표는 아시아로 가는 최단 거리의 항로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아시아라고 죽는 날까지 믿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 대항해 시대 모든 탐험가들의 목표는 항료가 넘쳐나는 말루쿠 제도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달랐다. 콜럼버스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베스푸치는 15세기 말 경, 아메리카 대륙의 남반부인 브라질에 상륙하면서 그곳이 아시아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파악했다. 바로 이런 명징한 인식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베스푸치는 계속되는 오해와 우연의 작동으로 문두스 노부스(Mundus Novus, 신세계)를 발견한 레전드가 되었다.

 

츠바이크는 베스푸치가 그럴만한 업적을 이룬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논증한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법이라고 전설적 전기작가는 말한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룬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무명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가 하면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경우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조건과 상황들 덕분에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참 다이내믹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공평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전설로 만든 일련의 저작들이 당시 인쇄업자들의 농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츠바이크는 지적한다. 1497년의 항해는 1499년의 실제 항해기록에서 파생된 왜곡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그런 모순들 때문에 베스푸치는 당대 저명한 라스 카사스 사제 같은 이들에게 신랄한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베스푸치가 직접 나서서 콜럼버스의 성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깎아 내렸던가?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였다는 점이 서간을 통해 밝혀졌다.

 

신대륙 발견 이래, 콜럼버스를 필두로 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현지에서 저지른 악행들과 수탈의 역사들이 용서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강탈(?)된 대륙 이름의 어쩌면 원주인일 수도 있는 콜럼버스에 대한 재평가의 과정을 거치고, 이번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역습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속도감 있게 다루어진다.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리에 오해와 우연 그리고 타의에 의해 올라간 대표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룬 업적에 비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대륙에 이름을 붙일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물론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콜럼버스가 하지 못한, 새로운 대륙에 대한 인식은 탁월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모든 것을 고치겠다고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비아라고 부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을까. 잘못된 것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광기와의 우연의 역사> 시리즈에서 츠바이크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놀라운 관찰력과 분석력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아메리고>에서도 오해와 우연이 빚어내는 놀라운 역사의 드라마에 대한 자신의 접근 방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이래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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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2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와 우연의 역사와는 다른 책이네요?!
같은 책인가 했어요

레삭매냐 2025-07-22 21:57   좋아요 1 | URL
비스무레하지만 아주 다른
책이랍니다.

정말 오래 전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읽
은 생각이 나네요.
다시 한 번 읽어봐야지 싶
습니다.

카스피 2025-07-23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읽은 기억이 나네요^^

레삭매냐 2025-07-23 11:08   좋아요 0 | URL
츠바이크 선생의 저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