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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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여름에 읽은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다시 읽는다. 이유는? 새로 개정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모클 60번으로 나왔었다. 이제는 사라진 모클에 대한 추억이라고나 할까. 다시 읽어도 대단한 소설이라는 생각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파키스탄 동부의 대도시 라호르다. 아나르칼리 거리에서 수상해 보이는 미국인을 만난 화자 찬게즈는 거침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풀어 놓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 중의 하나는 미국 일류대 프린스턴 출신의 찬게즈는 진짜 미국인보다 더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이다. 청자 미국인과의 대화는 그래서 아무런 소통의 문제가 없다.

 

미국 뉴저지의 명문대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졸업한 찬게즈의 미래는 그야말로 하이웨이처럼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명문대 졸업장은 뉴욕의 감정회사 언더우드샘슨에 취업하는데 있어 하나의 보증서처럼 작동한다. 미국의 직장은 일을 배우기 위한 곳이 아닌,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 역군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본토 사람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회사에서 뽑는 6명 가운데 찬게즈는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면접에서 전무이사 짐이 낸 모의 문제를 현란한 기술로 풀어낸 찬게즈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졸업장은 찬게즈가 미국 사회의 편입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었다. 소설의 다른 한 축에서는 여자 친구인지 그냥 친구인지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에리카의 존재가 있다. 찬게즈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다른 세계에 사는 에리카와 그리스 산토리니 여행 중에 만나, 그는 사랑의 감정을 키워 나간다. 문제는 에리카는 죽은 남자 친구 크리스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 사람이라면 몰라도 죽은 사람과 경쟁할 수 있을까?

 

에리카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담은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탈출을 도모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계속해서 접근하는 찬게즈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밀어냈다가 당겼다가를 반복한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밀당의 표본이 아니던가. 정말 자신과 미래를 설계할 수 없을 것 같다면 그냥 찬게즈를 밀어내면 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자신의 본질을 결코 이방인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본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에리카가 경험하는 정신적 위기는 찬게즈와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라호르의 찬게즈와 모종의 임무를 띠고 그곳을 찾은 미국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언더우드샘슨에서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인정받은 찬게즈는 직장에서 그야말로 승승장구한다.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달성하기 위해 냉정한 재정 모델을 개발하라는 회사 전무이사의 짐의 오더는 명징하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레코드 회사를 감정하고, 뉴저지의 케이블 서비스 회사에서도 잇달아 성과를 내는데 성공하는 찬게즈. 그의 삶에 균열은 2001911일 월드트레이드 센터 공격으로 시작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세력에게 본토 공격을 당한 미국인들의 노이로제는 극에 달했다. 뉴욕의 잘나가는 비즈니스맨 찬게즈는 마닐라에서 귀국하던 중, 공항에서 거의 발가벗긴 채로 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겼는다. 아 그전에 WTC가 공격받는 장면을 보고 일종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던가. 거대한 미국이 외부의 공격을 받고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상징성에 모신 하미드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찬게즈가 현재 살고 있는 최첨단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하기 이전부터 자신의 고향 라호르에서는 문명이 꽃을 피웠었는데, 형세가 역전되어 라호르는 그저그런 제3세계 국가의 이름 모를 도시가 되었고, 뉴욕은 이른바 밀레니엄 캐피탈로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되찾아야겠다는 심정의 발로로 WTC 공격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찬게즈의 숱한 노력에도 에리카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결국 에리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어쩌면 에리카와의 만남 그리고 이후의 관계 발전은 찬게즈가 미국에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지도 모르겠다. 20019월에서 12월로 이어지는 시간은 이십대 초반의 청년 찬게즈에게 그야말로 위기였다. 설상가상으로 20011213일 벌어진 인도 의사당 공격 테러 사건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왜 내가 처음에 이 책을 읽을 적에는 이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에리카의 실종과 언더우드샘슨에서의 마지막 미션이었던 칠레 발파라이소 일정을 마지막으로 찬게즈는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가족들이 고향에서 어쩌면 전쟁에 휘말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미국에 남는다는 건 찬게즈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겼던 찬게즈는 발파라이소 출판사 감정 와중에 만난 후안 바우티스타로부터 오스만 제국 시절 용병이었던 예니체리에 대해 듣게 된다. 그전의 리뷰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인용해서 리뷰를 쓰지 않았나 싶다. 결국 찬게즈 역시 서방 세계에 고용한 예니체리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쓸모가 있을 적에는 무척 유용하게 쓰이다가 결국에 가서는 용도 폐기되는.

 

9-11 사건이 일년 정도 지난 시점의 라호르에서 대학 강사로 변신한 찬게즈의 현재 모습이 소개된다. 그 사이에 찬게즈는 서방 세계의 총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변신한 모양이다. 라호르는 무슬림 세계에서 서방의 모로코에 대척점에 놓인 동방의 거점 도시라고 했던가. 물론 동방에도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인도네시아 같은 무슬림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정통적인 의미에서 무슬림국가의 중요한 도시들 중에서는 라호르가 가장 동쪽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서구식 교육과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유능한 무슬림 청년이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겪으면서 반서방 지식인으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모신 하미드는 유감 없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무리 서구식 물질주의가 영혼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했던 청년 찬게즈가 결국 실패하게 된, 더 이상의 모욕과 수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 정도에서 그치게 된 것을 안도해야 할까.

 

무려 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사반세기 전에 시작된 미국 패권주의의 균열이 가속화되어 가는 시점에 적절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시스템에 적응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방인의 삶을 통해, 날이 갈수록 맹위를 떨치는 미국 우선주의로 동맹국들의 이탈을 막을 수가 없게 된 2025년을 겨냥한 모신 하미드의 예언이 아닌가 싶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영화는 보지 못했다. 문득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나방 연기>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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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와 광기
야콥 하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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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 도서관에서 연락이 왔다. 희망도서가 도착했으니 빌려 가서 읽으라고. 그래서 도서관에 가는 김에 그전에 빌렸다가 미처 읽지 못한 자우메 카브레의 소설집도 반납했다. 그렇게 빌린 책이 야콥 하인이라는 독일 출신 소아정신과 의사 작가의 <소시지와 광기>. 내가 또 어려서부터 소시지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광기는 글쎄.

 

소설의 출발은 채식주의자로 강제로 변신해야 했던 내추럴 본 육식주의자 주인공 남자의 진술, 아니 고기사랑에 대한 간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누구에게? 바로 형사에게. 그리고 살짝 유혈극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았나. 그러니까, 그전에 무슨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데 소설이 집중할 거라는 말이겠지.

 

주인공에게 고기를 도락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바람과 달리 무섭게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우선 수십년 동안, 자리를 지켜왔던 정육점이 문을 닫았고 마트 내 정육코너도 축소되고 청소년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살육되어 전시된 고기가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말이지. 아하, 드디어 단서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사방에서 육식 중단에 대한 압박이 들어온다. 아내는 물론이고, 특히 직장에서 크리스마스 회식(?) 때 거위다리 요리를 주문했다가 베지들이 득실거리는 직장 동료들에게 한껏 갈굼을 당한다. 결국 그는 채식주의자가 되기 전, 마지막 만찬이라는 말로 위기를 넘는데 성공한다. , 이제부터 본격적인 주인공의 고난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육식에 대한 금단, 아니 금육현상은 심각했다.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고기에 대한 타는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게 되었다. 누군가 먹다가 땅에 떨어진 소시지 덩어리는 그에게 축복처럼 다가왔다. 누군가 봐도 상관없고, 그저 그 싱그러운 고기 냄새가 풀풀 나는 소시지 한토막이라면 그야말로 자신의 영혼도 기꺼이 팔 지경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육식의 중단으로 건강까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일단 치아 두 개가 날아가 버렸고, 이런저런 건강 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니 이게 이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단 말인가? 그럼 나도(물론 육식을 끊을 생각은 안하지만) 육식을 안하면... 아마 안될 것 같다. 주인공은 급기야 블랙아웃으로 해리성 둔주 진단까지 받지 않았나.

 

바로 이 지점에서 야콥 하인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정신과의사의 소견과 또 작가로서의 소양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주인공은 채식주의자 블로거인 톰 두부의 조력을 구한다. 극단적인 채식으로 심지어 똥까지 제대로 누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주인공에게 전문가 톰 두부는 채식주의자라면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며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돌파구로 글을 써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니까 육식의 즐거움을 글쓰기로 한 번 치환해 보라는 거지.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아내와 결별하고 또 일자리마저 잃은 주인공은 리비도의 상실로 해괴한 짓거리를 하다가 성기가 훼손되어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된다. 이거 너무 극단적인 게 아닌가. 그런데 말이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 지점까지 너무 재밌어서 끊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쾌속으로 읽어 버렸다. 게다가 분량도 적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이제 앞으로 세 꼭지가 남았다.

 

서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야콥 하인 작가는 금육현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위해 톰 두부 진영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이른바 이름부터 정체성이 확실한 '미트 프렌즈'의 육사맛내기69 베르트를 등장시킨다. 둘의 만남의 장소부터가 과거 육식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맥도널드다. 육수맛내기 선수는 세상에 만연한 채식 만능주의가 풀을 뜯어 먹는 악당들이 만들어낸 교활한 음모론이라는 주장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채식주의야말로 동물 사랑과 환경친화적인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식의 상투적 선전에 속지 말라고, 베르트는 주인공을 강력하게 설득한다. 그리고 정신 차리라고 작은 육수 한 컵을 내주는 호의도 잊지 않는다. 극단적인 비건만큼이나 베르트의 주장도 궤변에 가깝다. 동물들이 육식주의자들을 위해 존재한다느니, 두부산업이나 비타민 제조업체의 블러핑이라는 등. 베르트의 이런 시도들은 한 때, 채식주의에 경도되어 혼란스러워진 삶에 빠진 주인공의 마음에 강한 파문을 일으킨다. 어때 점점 흥미진진해지지 않는가.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주인공이 하던 고민의 시간을 길지 않았다. 냉큼 마트 정육코너로 달려가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하나 사가지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고기를 영접하기에 앞서 집안 청소를 하고 육신을 정화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주물 프라이팬을 꺼내 스테이크를 요리하기 시작한다. 마치 새로 사귄 연인과 연애를 시작하듯 그런 정겹고 사랑스러운 풍경들이 지나쳐 간다. 그리고 라스 기름으로 지진 스테이크 그리고 접시에 묻은 기름까지 싹싹 핥아 먹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뿐, 곧바로 채식으로 다져진 몸에 각성이 찾아왔다. 그동안 혹독한 금육생활로 육신이 고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인공은 그래서 바로 베르트에게 항의했다. 베르트는 그래서 자신이 육수를 먼저 권하지 않았냐고 따진다. 맥도널드에서 그가 작은 컵의 육수를 권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렇지, 주인공의 초라한 육신은 아직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친절한 베르트는 내장이 든 큰 봉지를 들고 나타나서, 주인공의 육신이 고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치게 도와준다. 참 친절하시기도 하여라.

 

결국 채식을 포기한 주인공은 좌절과 거세의 공포에서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육식파로 개종한 주인공은 베지스텐들을 원수처럼 여기면서 베르트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개종자들을 찾아 나선다. 처음에는 세 명으로 출발했지만, 순식간에 12명의 초식파들을 육식파로 돌려세우는 혁혁한 무공을 세우기도 한다. 야콥 하인 작가의 엔딩에 배치한 반전은 역시나 대단했다.

 

처음 만나는 독일 작가 야콥 하인의 소설 <소시지와 광기>는 육식을 끊고 비건으로 변신한 주인공이 보여주는 광기에 대한 서사다. 그동안 공장식으로 생산된 가공육들의 폐해에 대해 익히 들어온지라, 주인공의 채식 멘토 톰 두부의 주장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았다. 소설적 재미를 위해 채식과 육식 양극단을 오가며 영혼이 탈탈 털리던 주인공의 분노에 왠지 탑승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소아정신과 의사인 작가는 적절하게 균형 잡힌 시선 대신, 양극단에서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분열과 증오의 대결이 불러올 비극에 대한 경고로 소설을 마무리짓는다.

 

야콥 하인은 주인공에게 한스나 빌헬름 같은 이름 대신 철저한 익명성을 부여한다. 이런 주인공의 익명성은 채식과 육식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랄까. 조화나 균형 대신 극단주의에 치우치게 되면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는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콥 하인의 <소시지와 광기>는 짧지만 정말 강렬한 작품이었다. 물론 재미도 있었고.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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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5-30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엄청 흥미롭습니다.
레삭매냐님께서 드물게 5별 주신 것 같아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25-05-30 18:12   좋아요 1 | URL
그냥 제가 너무 재밌게 읽은
소설이라, 별을 후하게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근래 그런 소설이 드물어서요.

카스피 2025-05-30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를 보니 내용이 참 강렬한 것 같습니다.
동양의 경우 종교적 신념으로 채식을 하는 분들이 많은 편이지만 그런분들이 아니어도 워낙 채식의 비중이 높다보니 굳이 일부러 육식을 안하고 채식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닥 맣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 육식 위주의 식단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일부 극단주의적 채식주의자들은 스스로 육식을 완전 금하고 채식만 하면서 타인에게도 이를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극단주의적 채식주의자는 채식만 하다 죽는 경우도 있고 아주 어린 자식에게 채식만 주다 사망케해서 살인죄로 징역형을 사는 경우도 있고 타인의 식당에서 육식반대 데모를 하는 경우도 있지요.인간은 잡식성 동물이기에 채식만 섭취하다가는 몸의 밸런스가 깨진다고 하는데 너무 과한것은 오히려 못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음식은 골고루 적당하게 섭취해야 될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5-05-30 18:14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런 취지에서 작가도 밸런스
있는 섭생을 하라는 집필 의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비건도 그렇다고 육식파도 누가
옳다고 말하기가 그런 상황과
만나게 되거든요.

짧지만 강렬한 작품이었답니다.
 
성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8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진준 옮김 / 민음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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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지난 달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로 첫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보니 오래 전에 <소리와 분노>도 읽어 보겠다고 기세 좋게 사서 읽어 보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를 만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매달 한 권 씩 그렇게 포크너의 책들을 읽는 중이다.

 

1931년에 발표된 <성역>은 두 명의 중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때는 이른바 금주법 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포크너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부(Deep South)의 여러 도시들인 제퍼슨, 잭슨 그리고 멤피스 등이 차례로 나온다. 소설의 중심에 서 있는 첫 번째 캐릭터는 18세의 미시시피 출신 여대생인 템플 드레이크다. 아버지는 판사로, 엘리트 계층을 대변한다고나 할까. 가우언 스티븐스와의 두 번째 데이트에 나섰다가 큰 봉변을 당하면서 삶이 꼬이기 시작한다.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로 중요한 캐릭터로는 사십대 남성 호러스 벤보다. 그의 직업은 변호사로,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별종 같은 양심가라고나 할까. 사실 윌리엄 포크너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비선형적인 구성으로 좀 헷갈리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 호러스나 템플 같이 중요한 인물들 그리고 소설에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쉽지 않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포크너의 소설이 매력적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금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긴 하지만, 또 어떤 나같은 독자들은 자력갱생의 심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이처럼 조건이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템플에 대한 폭행이나 토미나 레드를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살해한 빌런 포파이의 행위들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보이지는 않는다. 포크너가 준비한 단서들을 바탕으로 해서 독자는 도대체 소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상상해야 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 이런 게 바로 포크너의 스타일이란 말이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걸. 모든 작가의 개성적 스타일에는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내가 보기에 포파이 만큼이나 나쁜 악당은 가우언 스티븐스란 녀석이 아닐까. 자동차 사고로 밀주업자들의 소굴에 드레이크 양과 함께 흘러 들어갔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그곳을 탈출하지 않았던가. 템플에게 지옥 같은 경험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가우언이었다. 그리고 호러스의 과부 여동생과 썸을 타기도 하지 않았던가.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남부에서 불우한 이웃을 진심으로 자신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나르시사 사르토리스 같은 인물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밀주업자 리 구드윈이 토미의 살해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고, 오갈데 없는 그의 동거녀 루비 라마와 아이를 절대 자신의 집에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시대고모라는 미스 제니도 마찬가지였다. 포크너는 나르시사와 미스 제니라는 위선적 인물들을 소설에 캐스팅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남부 사람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포크너의 <성역>은 다양한 소설적 특징들을 안고 있다. 어쩔 때는 드레이크 양에게 도매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하는 탐정소설 같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범죄소설 같기도 하고 막판에 가서는 법정드라마로 귀결이 된다. 그래도 역시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템플 드레이크가 자리잡고 있다. 템플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리 구드윈의 억울한 누명을 밝혀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러스 벤보의 모든 노력을 위증으로 무력화시킨다. 템플은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걸까?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포파이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남부의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 호러스 벤보는 돈이 없다는 루비 라마의 말을 듣고, 리 구드윈의 무료 변호를 맡는다. 돈도 되지 않는 형사 재판에 누가 호러스처럼 나설까 싶다. 직업이나 과거의 행적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자신의 여동생 나르시사와 달리 호러스는 리 구드윈의 무죄를 확신하고 법정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뢰인을 변호한다. 아무리 빌런들이 들끓는 곳이라지만, 호러스 같은 의인도 존재한다는 말을 포크너는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대단히 폭력적이고 잔혹한 강력 사건 사고들이 잇달아 발생하는데, 포크너는 마치 영화 <킹스맨>의 대살륙전에서처럼(영화에서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음악을 도입해서 폭력적인 시퀀스를 경감했다) 생략의 내러티브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상상력과 모종의 텐션을 극대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소설 <성역>의 하일라이트는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투옥된 리 구드윈을 진범으로 간주한 대중들이 가솔린을 이용해서 화형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법보다 사적인 복수가 우선하는 남부에서는 법정에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누가 과연 진짜 범인인가 그리고 사실 유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 보복이라는 미명 아래, 정의구현에 나선 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문명국가란 말인가?

 

그리고 보니 포크너는 남부에서 정말 민감한 문제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적어도 <성역>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그가 좀 더 한발 나가서 리 구드윈을 흑인 가해자로 설정했다면, 화형 엔딩은 또 다른 야만적인 방식으로 확대되지 않았을까. 유대인 출신 변호사에 대한 언급해서는 만연한 반유대주의의 단편을 볼 수도 있었다.

 

좀 진부하기는 하지만,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결국 포파이는 다른 죄목으로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워낙에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지른 빌런의 최후는 극적인 텐션 폭발로 이어지지 않고,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서술된다. 어쩌면 포파이는 자신의 그런 마지막을 예견이라도 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템플과 아버지 드레이크 판사는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삶을 이어가는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제임스 조이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는 <성역>에서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채용했다. 포크너가 창조한 캐릭터에 온전하게 몰입을 하지 못한 탓인지, 주인공들의 의식이 흘러가는 지점과 그들의 속마음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최근 읽고 있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작가는 아마 명징하게 어떤 뜻을 가지고 그런 주인공들의 의식의 흐름을 기술했겠지만, 모든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확실하게 알아내는 게 가능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너튜버들의 리뷰를 참조해 보니, 남부 특유의 슬랭이나 사투리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번역서로는 아무래도 그런 지점까지 도달할 수가 없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역>을 원서로 읽을 자신은 없고 말이지. 그동안 마냥 어렵다고 생각하고 아예 책장을 펴볼 생각도 못한 포크너의 책들을 잇달아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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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5-26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이 셋이군요~ 저 읽어보려고 일단 책상앞에는 놔뒀는데 포크너는 왠지 시작하기 부담스러워서 ㅋ <소리와 분노>도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몇번 더 읽으니까 완전 좋더라구요. 포크너는 읽었다는데 의의가 있는거 같습니다 ㅋ

레삭매냐 2025-05-27 08:19   좋아요 1 | URL
여전히 저에게 포크너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

어제부터 <소리와 분노>를 읽기
시작했는데, 읽기 전에 너튜브에
서 어느 대학 교수님의 강의를 좀
듣고 시작했습니다.

미쿡 남부 스타일의 매운맛이라
고나 할까요.

젤소민아 2025-05-28 0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포크너 너무 어려워요~~성장소설은 어지간하면 어렵지 않는데 포크너는 성장소설도 어렵게 쓰심 <곰> ㅎㅎ 아직도 아득~~. 다시 읽어야 할 듯요. <성역>은 또 얼마나 어려울지요. <소리와 분노>라...흐흐흐

레삭매냐 2025-05-28 07:09   좋아요 0 | URL
포크너,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사 읽기 시작했답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읽고 있지요.

어젠 도서관에 가서 일단 <곰>
을 빌려 오긴 했는데...

<소리와 분노> 읽기 전에
너튜브에서 어느 교수님의 강의
도 초큼 듣고 시작했습니다.
도움이 되더라구요.
 
카차토를 쫓아서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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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5년 만에 팀 오브라이언의 <카차토를 쫓아서>를 다 읽었다. 사실 5년 전에 읽기 시작하면서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러다가 흥미를 잃고 책을 놓아 버린 모양이다. 나흘 전에 다시 집어서 읽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줄라이, 줄라이>를 완독한 기세로 금방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5년 전에 읽다만 기억의 힘이라고나 할까.

 

소설 <카차토를 쫓아서>1968년 베트남전에 파병된 미군 중에 탈영해서 파리로 가겠다고 나선 카차토를 추격하는 일군의 무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베트남에서 파리까지 자그마치 8,600마일 KM로 환산하면 13,840KM라고 한다. 아무리 상상이라고 하지만, 가는 동안에 마주하게 될 무수한 국경들은 어쩌구. 아마 그래서 5년 전에 읽다가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하고 그만두지 않았을까.

 

카차토는 어쨌든 전장에서 이탈했고, 아메리칼 사단(23사단) 198여단 소속 7명의 분대원들이 카차토 추격에 나섰다. 동시에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미네소타 출신의 폴 벌린 상병(아마 작가의 문학적 페르소나가 아닐까 싶다)의 관측소 경계임무 그리고 레이크 컨트리 전투의 낯선 이야기들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면서 소설이 전개된다.

 

파리로 도망 중인 카차토는 친절하게도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추격자들이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거의 그를 잡을 뻔하기도 하지만, 항상 카차토는 그들을 앞서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카차토가 겁쟁이나 버프처럼 전투 중에 심장마비로 죽을 법한 배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긴 그럴 배짱이 없다면 파리로 가겠다며 나서지도 않았겠지만.

 

첫 관문인 베트남과 라오스 국경에서 기관총수 해럴드 머피는 추격 대열에서 이탈한다. 그 다음에는 머피를 대신해서 베트남 피난민 사르낀 아웅 완이 분대에 합류한다. 정글을 헤매던 그들은 베트콩 땅굴에 떨어져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 다음에 그들이 지상에 나왔을 적에는 버마 만달레이였던가. 지독한 전쟁의 서사를 다루다가 갑자기 판타지로 변하기도 하는 서사의 맥락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하긴 전쟁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사실 소설의 판타지적인 요소들을 서로 보완하거나 벌충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국의 멀쩡한 청년들이 베트남 땅굴에 숨은 베트콩들을 색출하겠다고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되는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분대원들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깐깐한 시드니 마틴 중위보다 '늙은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코슨 중위를 더 선호한다. 설사에 시달리면서 제대로 된 지휘보다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추격자 집단에 든든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관측소 근무를 하면서, 빨리 제대할 날만을 꼽는 폴 벌린 상병의 모습에서는 징집된 병사들의 애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가고 싶어서 가는 군대가 아닌, 어쩔 수 없이 끌려간 병사들의 마음은 동서양을 떠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시계를 보면 시간이 더 가지 않는다며, 아예 시계도 차지 않고 야간 근무에 나섰던가. 중간 근무보다는 초번이나 말번 근무가 차라리 낫다는 이야기도 왜 이리 공감이 가던지.

 

그나마 만달레이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치타공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야말로 판타지 세계로 돌입한다. 아니 소총과 세열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여권도 없이 인도의 수도 델리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누비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하긴 베트남과 라오스의 정글을 누빌 적에도 아니 보급품도 없이 계속해서 행군하는 장면이 이해가 되지 않긴 했었지. 그리고 카차토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사방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그런 기행을 보여준다.

 

폴 벌린의 전우들이 잇달아 쓰러지는 레이크 컨트리 전투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왜 싸우는지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이기기 위해" 싸운다는 벌린의 진급 심사를 맡은 장교들의 대화가 계속 귀에 맴도는 느낌이다. 오랜 외세의 개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나선 이들과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른 채 전장에 나선 이들의 전투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는 이미 시작 전부터 정해진 게 아닐까.

 

델리에서 출발해서 기차를 타고 아프가니스탄의 페샤와르와 카불을 거쳐 이란의 테헤란에 도착한 벌린들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샤의 비밀경찰 사바크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매질과 폭력을 경험한 일행은 카차토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테헤란 시내를 질주하는 스릴 넘치는 도주에 나선다. 이런 장면들은 정말 영화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어떤지.

 

그 다음에는 터키의 앙카라와 이즈미르를 거쳐 마침내 카차토 추적대는 유럽 대륙에 발을 딛는다. 자그레브와 독일 그리고 룩셈부르크를 거쳐 대망의 파리에 도착하는 폴 벌린과 일행들, 그들은 과연 꿈의 도시 파리에서 카차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할 것인가.

 

어마어마한 여정 끝에(19693월 말) 파리에 도착한 이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서로에 대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혐오와 분노로 총질을 해대는 베트남과 파리의 평화로움은 너무나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사르낀 아웅 완은 그나마 대화가 통하던 폴 벌린과 파리에 정착할 것을 꿈꾸지만, 팀의 실질적 리더인 오스카 존슨은 원래 목표였던 카차토 추적의 의지를 단념하지 않는다. 무장한 벌린들이 카차토가 은신해 있는 곳으로 출동해서 한바탕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팀 오브라이언 작가가 직접 베트남의 전쟁터에서 경험한 것을 문학적 작품으로 풀어낸 전쟁의 서사는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바로 옆에서 웃고 떠들고 고락을 같이 하던 전우들이 어디서 날아온 지도 모른 그런 총탄에 즉사해 버린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더라도, 그들은 그 순간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

 

처음에 읽을 적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설정 때문인지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싶었는데, 다시 읽다 보니 그런 부분들도 무난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도대체 어떻게 끝을 맺으려고 하는지 궁금해져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읽었다. 파리라는 이상향을 향해 달려가는 탈영병 카차토를 추격하는 보병 분대의 모험담, 레이크 컨트리라는 치열한 전장에 대한 르포르타주 그리고 관측소에서 시간을 죽이는 폴 벌린의 심리 상태라는 삼각축으로 구성된 팀 오브라이언 작가의 <카차토를 쫓아서>는 확실히 평화를 노래하는 멋진 전쟁소설이었다. 5년이 지나도 결국에는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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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5-20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팀 오브라이언 작가가 1946년생이고,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전했다고 소개되어 있네요. 직접 경험한 것이 소설적 소재가 되니 내용이 더 실감날 것 같아요.

5년만에 완독하셨다니 레삭매냐님은 끝내 읽고야 마는 독서인이시군요^^

레삭매냐 2025-05-20 20:18   좋아요 1 | URL
고저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
주의로 살아간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도 읽기 시작
했습니다.

자목련 2025-05-21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책은 언제고 읽는다.
아, 저는 산책도 읽지 않으면 정리한다로 ㅎㅎ

레삭매냐 2025-05-22 13:03   좋아요 0 | URL
아아~ 저는 그러지 못하여서
책이 날로 쌓여 가고 있답니다.

지금도 5년 전에 사서 읽지 못
한 클라리시 리스펙트로의
책을 읽는 중입니다.
 
줄라이, 줄라이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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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년 만에 팀 오브라이언 작가의 <줄라이, 줄라이>를 다시 펼쳤다. 140쪽 정도 읽었었나. 나머지는 단 이틀 만에 다 읽었다. 나의 책읽기는 그런 것이다. 사실 앞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읽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뭐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3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서 완독에 성공했다. 뿌듯하다. 그리고 팀 오브라이언의 <카차토를 찾아서>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 책은 5년 전에 산 책이더라.

 

서른 번째 다턴 홀 대학동창회(1969년 동창들)를 기념해서 만난 친구들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68혁명세대이자, 베이비부머 세대인 미국의 청년들에게 1960년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동시에 지구 저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베트남 전쟁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득 오래 전에, 보스턴에서 만났던 베트남전 참전 베테랑 노숙자 아저씨의 말이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징집되어 베트남에 파병되었는데, 소싯적 친구들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서 복귀하게 되었노라고. 그리고 그의 삶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전쟁은 그런 것이다.

 

빌리 맥맨은 196971일인가 징집을 피해 캐나다 위니펙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면서 캐나다 시민이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아가씨와 결혼해서 살았다. 그가 행복했을까? 아니다. 빌리는 미국 고향에 자신의 애인 도러시 스타이너가 있었다. 도러시는 빌리를 따라 위니펙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에 남아 론과 결혼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유방암에 걸려 자신의 한쪽 가슴을 절제하기 전까지는. 과연 도러시는 빌리에게 어떤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빌리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나중에 자신의 아내를 교통사고로 죽게 만든 당사자가 자신의 회사에 취직해서 그 사실을 고백한다. 그녀와 썸을 타기도 하지만, 둘의 관계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상처를 가해자에게서 속죄하듯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설사 둘이 다시 연애 혹은 결혼 관계에 돌입한다고 하더라도,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목사님 폴렛 하슬로는 유부남을 사랑했다. 나중에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뒤, 자신이 그에게 보냈던 편지를 되찾으러 남의 집에 불법으로 침입했다가 일자리와 명성 모두 잃게 된다. 그것도 과연 그럴 만했던 행동이었을까? 그런 불법적인 행동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다가 오기 마련이다. 고인의 미망인에게 걸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을까. 그냥 도덕적으로 그러면 안될 텐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사랑했지만 선을 넘지 않았으니 그냥 인정해 주어야 하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정말 무 자르듯 그렇게 딱 떨어지는 관계는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죽은 친구 둘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은 살해되었고, 또다른 치과의는 불륜 상대와 몰래 여행을 떠났다가 익사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가정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엘리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결국 나중에 엘리는 자신의 남편에게 사실을 털어 놓는다. 그렇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으면서 속죄를 하고, 고뇌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남편의 용서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캐런 번스는 살해당했다고 하던데, 내가 3년 전에 읽은 부분에 나오던가. 조금 궁금해져서 다시 찾아보고 싶긴 한데 또 귀찮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데리고 멕시코 여행에 나섰다가 알고 보니 버스 드라이버가 무언가 석연찮은 밀수업에 종사한다는 걸 알게 되었던가. 치매기 있는 어르신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죽일 거라고 계속해서 떠들어 대고 말이지. 아니 진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었나.

 

문득 팀 오브라이언들이 들려주는 베트남전쟁이라는 일대 사건을 정통으로 관통한 미국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중년에 접어들어 겪는 위기들이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젊어서 읽었다면 그네들의 감정선에 도달하지 못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그런 걸 보면 책과의 만남도 어느 정도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줄라이, 줄라이>도 무려 3년을 묵혔다가 그렇게 다시 만나지 않았던가.

 

데이비드 토드는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귀향했다. 그런 그와 결혼한 말라 뎀프시. 그 둘이 과연 행복했을까? 경제적 곤궁을 데이비드의 가구 사업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데이비와 말라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데이비는 자신의 다리와 죽은 친구들을 베트남 정글에 두고 왔다고 해야 할까.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데이비를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빗자루와 대걸레 사업을 하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이혼남 마브 버텔은 새로 사귀게 된 여자친구에게 하필이면 자신이 소설가라는 허풍을 떨었던가.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은 모름지기 되돌리기가 어렵다. 완벽하게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거짓말에 거짓말을 보태야 한다. 뚱보에서 다이어트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마텔은 완벽한 거짓말의 노예가 되어 살이 걷잡을 수 없이 그렇게 빠진다. 적당한 무명작가를 팔 것이지, 말도 안되게 자신을 유명 작가로 포장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그야말로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더 매혹적이란 말이지.

 

팀 오브라이언의 <줄라이, 줄라이>를 다 읽고 나서 역시 나는 산 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다 읽는다는 나만의 원칙을 고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왠지 언제 여유가 된다면, 언제고 다시 한 번 읽어야 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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