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삽니다
안드레스 솔라노 지음, 이수정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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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하는 생각이지만 나에게 도서관은 보물창고 같다고나 할까. 지난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이러저러한 책들을 고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책이 콜롬비아 저널리스트 출신 글쟁이 안드레스 펠리페 솔라노의 <한국에 삽니다>란 책이었다. 원어로는 아마 그 뜻이 아닐텐데... 스패니쉬를 모르니 알 수가 있나 그래. 대충 <봄에 온 노트> 정도인가.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는 우리네 일상에 대한 스케치는 흥미로웠다. 펼쳐들었을 때는 당장에라도 읽을 것만 같았지만, 또 너튜브도 보고 또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온갖 뉴스에 휩싸여 있다가 어제 저녁에 분발해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2014년에 발표된 책이니 아마 그 즈음의 시절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 북한에서는 계속해서 미사일을 쏴대고, 콜롬비아 대사관에서는 자국민들의 대피를 걱정하던. 처가댁인 부산을 떠나, 서울 이태원에 둥지를 튼 국제부부의 고단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미스터 솔라노는 글 쓰는 일로 돈을 벌어먹고 살겠다는 결심으로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타향살이에 일견 무모하게 도전한다. , 그가 쓴 글을 부인인 이수정 씨가 번역했다고 한다. 그는 글을 스페인어로 쓸까? 아니면 영어로 쓸까. 보아하니, 그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다국적 노마드 같은 작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원에서 일거리를 맡기도 하고, 또 단편 영화의 배우로 등장하기도 한다. 한국에 정착한 얼치기 이방인이 아닌 쏘주와 김치찌개를 즐길 줄 아는 수도(pseudo) 코리언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또 동시에 드는 생각이 아무래도 한국 독자들도 상대해야 하다 보니 아주 신랄하게 한국 정서를 비판하는 글은 좀 자제해서 쓰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글쓰기는 애시당초 존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아 그를 통해 독일 작가 빌헬름 게나치노를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냉큼 달려 나가서 절판된 게나치노 작가의 책을 사들였다.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전개, 대환영이다.

 

책의 어디선가 미스터 솔라노가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를 닮았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궁금해서 그의 사진을 검색해 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굳이 사실을 확인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지. 책에서 만난 사실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아닌가 싶어서.

 

무슨 일이든 해서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명제는 한국에 사는 이방인 뿐 아니라 이 땅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족쇄 같은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다만, 아무래도 이방인이다 보니 그게 쉽지 않은 미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한국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않은 다양한 기회가 열려 있다는 점에서 또 기회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관영방송이라고 그렇게 욕을 먹는 KBS에서 다양한 언어의 방송을 송출하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래서 세계 각처로부터 다양한 내용의 편지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흥미로웠다. 한국 아내를 구해주세요부터 일자리 그리고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독서쟁이들이 계속해서 책을 가까이 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방송국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해남 여행에 나선 부부의 이야기도 재밌다. 그 여행길에 그는 오늘 행복을 맛보았다고 했었지 아마. 진부하지만,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오늘 쓰리닷커피에서 바닐라 라떼를 마시며 수다를 떨면서 조금 행복하지 않았나.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과 지겨움 그리고 날씨 때문에 싸운다는 말에 공감이 가기도 하고. 사람살이는 어디서나 다 비슷하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이라고나 할까.

 

역시 책에서 소개된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 레너드 코헨의 <부기 나이트>를 듣는다. 코헨 특유의 늘어지는 목소리에 잔잔하게 깔리는 베이스 라인이 이 추운 겨울밤에 참 어울리는구나 그래. 동시에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느끼는 절대적 고독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이 여름에 즐기는 냉면(콜드 누들) 먹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우리의 미스터 솔라노는 아마 예외인 모양이다. 이미 코리언 패치가 된 지도 모르겠다.

 

자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나 그래. 참 애덤 존슨이라는 작가의 <고아원 원장의 아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절판된 책이라고 하네. 내일 도서관에 가게 되면 한 번 빌려다 조금이라도 봐야지 싶다. 분량이 700쪽이나 되네. 책이 발표된 지 10년이 지났는데, 미스터 솔라노가 여전히 한국에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모쪼록 글로 벌어 먹고살겠다는 그의 미친 생각이 성공을 거두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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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의 참새 캐드펠 수사 시리즈 7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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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도서관을 이용해서 읽을 수 있는 TCBC 시리즈는 8권과 9권을 빼고는 모두 다 읽었다. 명절에 잠시 독서 슬럼프에 빠졌었는데, 명절 전날 중고서점에서 산 궈창성의 <피아노 조율사>를 읽고 나서 또 달리기 시작했다. 시작만 하고 주춤하던 <성소의 참새>를 다 읽었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다시 시작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읽기가 쉽지 않다. 이달은 넘기지 말고 다 읽어야지.

 

또 서설이 길었군. 때는 1140년 어느 봄날, 다시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자. 수사들의 새벽기도를 깨는 불청객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떠돌이 음유시인 릴리윈이었다. 살인과 절도 혐의를 뒤집어쓰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도피성 같은 수도원으로 피신하게 됐다. 그를 추격해온 흥분한 일단의 무리들은 수사들이 새벽기도를 드리는 성소라는 개념도 없이 그를 마구 두들겨 팼다. 우리 수사님들이 이런 불쌍한 참새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그를 구하고, 행정관의 정당한 판결을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그에게 40일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일가친척 하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기예를 팔아먹고 사는 릴리윈에게는 불리하다. 월터 아우리파버네 집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서 좌중의 흥을 끌어 올리도록 고용된 릴리윈은 아우리파버 집안의 실질적 주인인 줄리아나 부인의 차주전자를 깨먹고, 원래 받기로 되어 있던 3페니 중 1페니만 받고 쫓겨난다.

 

그 날 밤에, 금세공인 월터 아우리파버는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죽었고(죽은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결정적으로 그가 금고에 보관 중이던 재화들을 도둑 맞았다. 앙심을 품고 쫓겨난 릴리윈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다. 이렇게 40일의 유예기간을 채우고 법정에 서게 된다면 그의 운명은 교수형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한 태도를 취하는 우리의 주인공 의사이자 수사 캐드펠 형제는 흠씬 두들겨 맞은 릴리윈을 치료하고, 그의 진술을 듣고 나서 그가 이런 사악한 범죄를 저지를 법한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로 파악한다. 나중에 등장하게 되는 슈롭셔의 행정 보좌관 휴 베링어 역시 캐드펠 수사의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진범이 잡히지 않는다면 릴리윈의 운명은 뻔할 뻔자가 아닌가 말이다.

 

추리물답게 누가 월터 아우리파버를 공격한 진범인가에 대한 추적부터 시작해서, 이제 막 며느리로 들어온 대니얼의 아내 마저리가 유부녀 세실리와 통정한 남편을 개스라이팅해서 아우리파버 집안의 대권을 그동안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해온 수재너로부터 어떻게 빼앗는 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과정이 소개된다. 엘리스 피터스 작가는 기본적으로 모두가 범인이 될 수 있는 가정 아래, 그네들의 사정을 전개한다. 이런 게 바로 미스터리물의 기본이 아닌가.

 

캐드펠 수사와 행정 보좌관 휴 베링어는 한 때 라이벌이었지만, 이제는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되었다. 캐드펠이 신의 영역에서 일하는 의사이자 탐정 그리고 해결사라면, 휴 베링어는 인간계를 관장하는 관리로서 시리즈에서 맡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아무래도 케드펠이 수사라는 신분에 있다 보면, 관헌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휴는 그러한 캐드펠 수사의 필요를 충실하게 채워준다. 사사건건 캐드펠의 수사가 관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상충하게 된다면, 그 또한 답답한 설정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휴가 출장 나간 틈에 벌어진 사건에서 독자는 그런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한편, 릴리윈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수재너의 하녀로 일하는 래닐트와 연정을 키워 나간다. 깐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악당처럼 보이지 않는 수재너는 래닐트에게 하루 휴가를 주고, 릴리윈에게 흠뻑 빠진 래닐트는 잔칫날 남은 음식과 수재너가 건네준 대니얼의 낡은옷을 가지고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둘은 거칠 것 없는 그런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어김없이 발생하는 살인사건이 등장할 차례다. 미스터리의 극적 전개를 위해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서 살인사건 역시 필요악이라고나 할까. 대충 월터에 대한 살인미수 그리고 절도 정도로는 약하다는 걸까. 그날 밤 일어난 사건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마스터 월터의 세입자이자 자물쇠 제조공인 볼드윈 페치가 세번 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유명한 낚시꾼인 그가 익사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유능한 탐정 캐드펠 수사는 페치의 사인이 사가 아닌 질식사라는 걸 밝혀낸다. 다른 편에서는 살인사건이 대개 초반에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늦게 등장한다.

 

바로 전 6편에서는 정말 스펙터클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면, 이번 시리즈는 좀 쉬어 가는 그런 느낌이랄까. 웨일스 근방의 중세 영국을 공간적 배경으로 해서, 살인사건과 그에 따른 미스터리 그리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로맨스를 적절하게 배합해서 빚어내는 서사가 역시 일품이다. 가족이라는 굴레에 갇힌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욕망과 권력의 파노라마, 마스터 월터의 주체할 수 없는 재화에 대한 욕심, 집안의 모든 걸 통제하려는 줄리아나 부인의 노욕 그리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성소로 날아든 참새 같은 이미지의 순수한 청년 릴리윈의 사랑 이야기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변주가 어우러지면서 엔딩의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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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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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 작가의 신간 <폴란드인>을 읽으면서, 쇼팽의 녹턴 21곡을 듣는다. 예전 같으면 쇼팽 녹턴 전문가의 연주를 찾아서 들었겠지만 뭐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녹턴 두 번째 곡은 내가 예전에 정말 자주 즐겨 듣던 다니엘 바렌보임의 곡이라 너무 반가웠다. 물론 소설이 쇼팽의 피아노곡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2023년에 발표된 존 맥스웰 쿳시의 <폴란드인>을 물 흐르듯이 그렇게 읽었다. 역자의 표현대로 간결하고 검소한 진행이었다. 기본 줄거리는 노년의 폴란드 피아니스트 비톨트 발키치예비치가 피아노 서클에서 만난 바르셀로나 여성 베아트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다. 폴란드인 칠십대 노인이고, 바르셀로나 여성은 사십대의 유부녀다. 모든 글쓰기가 자서전이라는 말을 인용한다는, 노년의 작가가 품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섬세하지만 엄격한 피아니스트 비톨트는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쇼팽의 녹턴을 바흐 스타일의 진지함으로 연주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폴란드 남자와 바르셀로나 여자는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감정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경험해 보지 못해 알 수가 없다. 동일한 언어로 말을 나누어도 오해가 발생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감정선의 사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중요하고 동시에 미묘한 감정들이 왜곡 없이 상대방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폴란드인이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여성은 완벽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녀는 늙다리 아저씨의 거침없는 고백공격을 정중하고 무난한 방식의 회피기동으로 피해나간다. 하지만 또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야 하는 게 소설의 전개상 맞는 일이지 않겠는가. 브라질 연주여행에 동행해 달라고 하고, 또 나중에는 마요르카까지 베아트리스를 찾아간다.

 

분명 단테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베아트리체의 에피소드 그리고 또다른 폴란드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이야기들을 연상시키지만 정작 그들의 사연에 대해 자세히 모르니 그냥 어느 정도 추론할 수밖에 없다. 비톨트는 베아트리스의 사랑을 간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게 되었을 때조차도, 베아트리스의 말대로 그녀의 삶에서 조용하게 사라져 버린다.

 

베아트리스가 폴란드인에 대한 기억을 잊을 법한 시점에, 그가 죽었다는 연락이 도착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남긴 유품을 바르샤바에서 찾아가라고 했던가. 그녀는 비톨트의 유품을 택배로 받고 싶어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결국 자신이 직접 폴란드에 가서 그가 남긴 84편의 시를 수습해서 귀국한다. 분명 자신에 대한 연시일 텐데, 비톨트는 둘의 공용어인 영어 대신 폴란드어로 시를 써서 베아트리스를 번거롭게 만든다.

 

이 또한 쿳시 작가가 마련한 하나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서로 다른 언어로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건 이미 전술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일방적 사랑의 표현이 등장한다. 그것도 영어로 쓰인 시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로 쓴 84편의 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톨트가 남긴 시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번역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산문도 아닌 시의 번역은 좀 더 어려운 건 기본이 아니던가. 역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누군가 폴란드어를 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게다가 그 번역을 의뢰하기 위해서는 비용도 필요하다.

 

베아트리스가 비톨트가 남긴 시들을 수령하는 순간, 그녀는 비톨트가 설계한 프레임에 갇히게 된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남긴 글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과정은 시간과 번거로움 그리고 심지어 비용이 든다고 하더라도, 호기심이라는 강력한 감정을 이길 수는 없었으리라. 누가 과연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겠지 하고 넘겨 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번역되어 자신의 손에 들어온 시를 보면서 당혹감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베아트리스.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차라리 피아니스트만큼, 쇼팽의 음원을 기대했다면 너무 진부한 걸까. 노년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사랑에 빠진 시인으로 변신해서 수수께끼 같은 시들을 남긴다니. 놀랍지 않은가. 어쩌면 이건 시간을 초월한 권위의 아우라에 편승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예전에 이언 매큐언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고로 이언 매큐언과 존 맥스웰 쿳시의 모든 전작을 거의 다 읽었다. 최전성기를 지난 노작가들의 글들은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다는 그런 느낌이다. 시간에는 끝이 없다지만, 작품의 퀄리티에는 아마 적용이 되지 않겠지. 그냥 아련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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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스파이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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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나의 독서는 비교적 순항 중이다. 어젯밤에는 한 열흘 전에 구입한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를 마저 읽었다. 아마 <국수> 이래 김숨 작가의 책은 처음인가 싶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작년 가을에 가서 읽다만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태평양전쟁 말기, 19454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역이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키나와 본토는 아니고 오키나와 인근의 어느 작은 섬이다. 사쓰마 번에 의해 일본에 복속된 이래,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인에 비해 2등 시민 차별을 받았다. 그 오키나와 사람들 아래에는 진짜 식민지 조선에서 이주한 '조선인 고물상' 아저씨 가족이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이들이 대부분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인 고물상만 이름이 없다. 오키나와 언저리의 어느 섬에서 그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이 드러난다.

 

섬에 압도적 화력과 병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상륙하고, 한줌의 일본군들은 옥쇄 모드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전의 사이판이나 오키나와 본토에서 벌어진 옥쇄전에 비하면 이들의 결의는 이전만 못하다. 그들 역시 일본의 패전이 불가피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30명 남짓한 해군통신대 기무라 총대장이 이끄는 패잔병들은 무엇보다 스파이 색출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들에게 스파이 때문에 전쟁에 지게 되었다는 거짓 프로파간다를 퍼뜨린다. 전쟁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전형적인 대본영으로 대표되는 일본 군부의 악질적 행태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일본 국왕 역시 전쟁 후에 아무런 단죄를 받지 않았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몇몇 수괴들만 전범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건 모두 전쟁이 끝난 다음의 일이고, 지금 당장 스파이로 몰린 섬 주민들 9명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섰다. 기무라와 이케다 등은 마을에서 모집한 소위 "인간 사냥꾼"들을 동원해서 9명의 스파이 혐의자들을 잔혹하게 처단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그들은 스파이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비겁한 패잔병들의 전형적인 책임전가가 이런 끔찍한 방법으로 재현된다.

 

초반부터 이런 사건으로 시작하다 보니,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전쟁이란 광기에 휩싸인 인간 사냥꾼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게다가 그들은 심지어 어린 십대 소년들이다.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넋을 잃는 게 당연할 지경이다.

 

기무라와 인간 사냥꾼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할 희생양들을 찾는다. 그러다 1세 스파이까지 등장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값의 후환이나 복수를 걱정해서, 어린아이까지 예외 없이 처단하는 비인간적 처사에 기가 막힌다. 기무라 잔당들은 주민들을 약탈하고, 그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없는 스파이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경방단장을 필두로 해서 누구도 예외가 없다. 기무라 스파이 리스트에 오른 이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가족들의 운명 역시 시간문제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일제 치하의 식민지 백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강자와 약자로만 세상을 구분하는 파시즘의 광기는 약자부터 공격하기 마련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일본의 패전으로 종전이 되었음에도 전쟁광들의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질적 무력을 지니고 있던 기무라들은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린다. 그렇게 정의는 지연된다. 그리고 인간 사냥꾼들의 학살은 계속된다. 전쟁 중이었다면 덜 억울했을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다 끝난 마당에 왜 이런 비극이 벌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일본 국왕의 항복 선언으로 안도하던 독자는 호되게 뒷통수를 맞은 것 마냥 얼얼하다. 이게 다 끝난 게 아니었어?라고 말이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혹은 외부인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오키나와의 비극은 그런 점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조선인 고물상이 처음 섬에 왔을 적에 주민들은 선량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무엇보다 해군통신대가 주둔하고 가혹한 스파이 색출과 사냥에 나서면서부터 마을의 인심을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포와 불안 속에, 그렇게 그들의 눈동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 한줌의 땅이 필요했지만 섬 주민들 누구도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아내 후미에게 땅을 내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기무라도 대표되는 일본 군부가 심은 타자에 대한 의심과 증오의 씨앗이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빌드업된 비극은 엔딩으로 치닫는다.

 

작가가 구사하는 거대한 비극의 서사에 그만 넋을 빼앗긴 느낌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라는 물음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죽을 때가지 싸우라는 공허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무라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던 대로 장렬한 방식으로 옥쇄를 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은 전쟁이라는 이름의 광기에 편승해서, 어린 소년들을 노예로 만들고 조종해서 인간 사냥을 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종전과 평화가 아닌 영속적인 전쟁 상태를 원했을 지도 모르겠다.

 

무고한 이들의 계속되는 죽음으로 점층되어가는 비극적 서사의 무게가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책을 덮었다. 마치 작년 가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처럼. 조금 용기를 내어 다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각처에서 출현하는 이상한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각종 일탈과 기이한 현상들 때문에 세월이 하 수상하다.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는 이런 혼돈의 시기를 경계하라는 그런 메시지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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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옮기는 사람 제안들 37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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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목욕탕>에 이어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을 읽었다. 원래 다른 책 읽고 있었는데... 순서가 무슨 상관이겠냐만. 워낙에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었다.

 

자전적 이야기인지 소설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책 정보를 검색해 보니 소설이란다. 아 그렇구나. 카나리아 무리의 어느 섬으로 번역가인 화자가 내과의사네 별장 신세를 지게 된다. 아 미션이 있었지. 짧은 단편소설을 번역해야 한다. 아마 독일어 작품인 거 같고, 자신의 모국어(일본어)로 번역해야 한다지.

 

주어와 술어가 뒤죽박죽된 성 게오르크의 용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히 화자의 번역 작업물로 끼어 들고, 화자는 예의 섬에서 원주민과 만나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서사를 옮긴다. 참 그리고 보니 이 소설의 원작이 <문자이식>이라고 했던가.

 

섬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정작 바다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거나 그러진 않는 모양이다. 뭐랄까, 화자는 다와다 요코 작가처럼 어쩌면 철저한 이방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섬의 풍경에 대해 작가적 시점에서 예리한 진단을 내린다. 섬에는 물이 부족한데, 그건 바나나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바나나 나무를 키우지 않으면 되지 않나?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바나나를 재배해서 돈벌이를 해야 하니까. 카나리아 무리에서 바나나 재배를 하나 싶다. 그 동네 일에 대해 잘 모르니. 그렇다고 해서 부러 검색해서 모르는 지식을 채우고 싶은 욕망도 생기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원래 리뷰의 제목을 <선인장, 바나나 나무 그리고 드래곤 바람>이라고 할까도 싶었다. 그 정도로 작가는 카나리아 무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섬에는 염소 외에는 모든 가축 키우기가 금지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치즈도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만 있는 모양이다.

 

병행해서 진행되는 번역 작업물은 왠지 비밀암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와 술어의 순서가 엉망이다. 그렇지만 굳이 재조립해서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또 넘어간다. 그냥 여유작작하는 나의 독서 스타일인가 보다. 굳이 무언가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과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집필 의도가 무엇인가하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이걸 독서의 내공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무식한 독서 방식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읽는다. 소설의 어디선가 만난 문구처럼, 내가 읽은 것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들은 나의 뇌리 속에서 사라질 건 사라져 버리겠지.

 

그 다음에 또 무슨 이야기가 있더라. 곧 섬에 올지도 모른다는 신비에 휩싸인 게오르크가 있었던가. 그것은 마치 마감에 맞춰 번역에 집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다는 작화자의 게으름과 상충하는 그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게오르크-용가리-공주의 삼위일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화자는 공주로 대체될까. 에이 그건 아니겠지. 어느 의미에서 사악한 용가리는 일상을 파괴하는 요물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 게오르크는 일상의 회복을 가져다 주는 그런 인물일까.

 

자 다음은 화자가 몰입하지만 또 성과를 내지 못하는 번역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중언어자답게 번역은 창작만큼이나 작가에게 밥벌이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번역의 과정은 타자의 창작물이 나의 시선과 사유를 거쳐 다른 방식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게 아닐까. 어느 순간, 역자인 화자는 자신이 번역한 작품을 자신도 모르겠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걸 알 수 있겠냐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나도 마찬가지다. 난해함의 연속인 다와다 요코 작가의 책들을 만나면서, 내가 다와다 요코가 아닐진대 어떻게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을 무슨 수로 다 소화해낸단 말인가.

 

정신없이 그렇게 읽다 보니 다와다 요코의 <문자이식>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오늘 아침 짙은 안개를 헤치고 출근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두 번째 만남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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