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선고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7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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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지금 이 책의 완독을,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의 거리, 그러니까 그 놈의 완독을, 불과 몇 미터 아니 몇 센티 아니 몇 페이지 남겨두고 있다. 완독하지 못한 채 리뷰를 쓰는 일의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 어떤 죄책감도 내게 통하지 않으리라는 막무가내식 막무가내가 막무가내로 달려들면서 나를 한량없이 기쁘게 한다.


2. <선고> <변신> <유형지에서>까지 차례대로 읽고 나니 어느덧 146쪽에 이르렀고, 그때 벌써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주파했다는 자부심으로 심장이 뜨겁게 차올랐다. 전력질주는 아니었다. 그런 걸 용납할 리 없다는 지레짐작으로 지레 겁을 먹었더니 전력질주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만 용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용을 썼고, 용의 콧구녕은 코빼기도 안보였고, 결국 용의 주도면밀함에 압사당할 뻔한, 뻔한 추억에 기대어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데, 나 참. 제일 유명하다는 명승지를 나름 한바꾸 휘돌았으니 이젠 나머지 잔챙이(?)들 몇 군데만 찍찍 밤무대 스텝을 밟듯이 하면 되겠다, 침을 퉤퉤 뱉으며(사실과 전혀 무관한 진술을 제가 하고 있어서 무척 놀랍군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 걸. 사람 주저앉히는 재주가 있었네? 이 카프카가?(사실과 다르게 놀라는 척을 하다니 무척 가증스럽군요)


3. <신임 변호사> <시골의사> <관람석에서> <낡은 책장> <법 앞에서> <자칼과 아랍인> <광산의 방문> <이웃 마을> <황제의 전갈> <가장의 근심> <열한 명의 아이들> <형제 살해> <어떤 꿈> < 


꺼,꺽쇠는 여기까지. 읽은 단편들 단편단편을 말하기 위해 줄기차게 꺽쇠를 꺽다보니 꺽쇠를 앞에 두고 그만 꺼,꺼억 신물이 올라온다(이런 웃기지도 않을 말장난을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나니 어머나 비슷한 증상이 올라오네요. 이건 좀 놀라운 일이군요)

암튼 여기까지 읽었고, 리뷰에 착수하면서 든 생각은 여기까지만 읽겠다가 되었다. 좋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머지 세 개의 단편 <학술원 보고> <최초의 고뇌> <단식술사>를 마저 읽는다 해도 내 선에서 해결되는 건 없다. 돌아서자마자 까먹을(아니 처음부터 이해불가였다) 내용을 읽는다는 건 인내심 함양도 조달도 독려도 뭣도 아닌 그냥 시간낭비일 뿐이다. 아주 멋대로 판단하고 혼자 좋아하는 단계에 온 걸 보니 대견하다. 진심.


4. 자, 이제 카프카의 대표작을 읽었으니 카프카는 어떤 인물인가. 역자 해설(합리성 너머의 세계에 대한 탐색)을 읽었다. 과연 속이 좀 풀리는 듯 했다. 좀 배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내놓을 수 있는 그저그런 일반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나에겐 통했다. 내 속이 어지간히 풀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뜻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신열에 들떠 마구 지껄이는 헛소리가 바로 카프카의 세계,라고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점잖은 교수가 그렇게 말하면 안되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 막중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아니, 카프카의 영향을 받은 세계적 작가들을 즐비하게 거론하면서,(어디 세계적 작가 뿐이겠는가. 세계적 철학자, 사상가들도 있다고 하니) 그렇게까지 막 나갈 수는 없었으리라. 카프카를 떠받치는 문화역사적 조류와 그 파장이 일으킨 막대한 영향력이 기정사실이라는 전제에 발 묶인 객관적 서술을 하다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존중은 당연한 미덕임이 분명하지만 존중이 지나치면 어디선가 무언가는 존중받지 못하는 구석진 그늘이 생기게 된다. 카프카적 세계가 일으킨 거대한 물결을 잘도 타고 넘나든 세계적 문인들과 사상가들의 세상에 꼽사리 한번 못 끼고 죽을 것만 같다고 해봤자 어차피 난 죽지도 않는다. 그런 걸로 죽고 싶으면 내가 오늘날 이렇게 시덥잖은 독수리 타법 앞에 어쩔어쩔 하면서 살고 있진 않을 테니까. 


5. 카프카 연보를 읽었다. 읽을 것도 없지만 꼼꼼히 이 잡듯이 읽었다. 1883년에 태어나 1924년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하기가지 그는 네 명의 여자와 썸(씽 스페셜)을 탔다. 맨처음에 만난 여자는 펠리체 바우어. 그녀와는 두 번의 약혼 과 두 번의 파혼을 한다. 그러다 1918년이 되지 율리에 보리체크를 만난다. 이듬해 1919년 그녀와의 약혼이 있고, 같은 해 밀레나 예젠스카라는 저널리스트를 만났는지 어땠는지는 모르나,(아 만났으니 그녀에 의해 몇몇 단편이 체코어로 번역되었다고 나오지) 아무튼 그 다음 해인 1920년 율리에 보리체크와 파혼하고 밀레나 예젠스카를 만난다고(또 만났네 또 만났어) 연보에는 나와있다. 그리하여, 여기가 끝이냐 하면 끝이 아니다.  그로부터 3년 뒤 1923년에 도라 디아만트를 만난다고 되어있다. 만나서 베를린으로 이주했다고 나온다. 참고로 그가 폐결핵 진단을 받은 해는 1917년이다.  


6. 이상으로, 카프카는 카프카적 글쓰기를 했고 카프카식 사랑을 했다고 봤을 때, 그리고 대략(?) 41년의 짧다면 짧은 생을 살았다고 봤을 때, 그리고 또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서 1908~1922년 은퇴하기까지 낮에는 생계를 꾸리고 밤에는 글을 쓰면서 근면하게 살았다고 봤을 때, 그리고 그 사이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직장 필수 인력'으로 징집에서 제외된 사실로 봤을 때, 그러니까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카프카는 참으로 열심히 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카프카가 있기까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한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는 조금도 놀랍지 않다. 다만 놀라는 척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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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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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1부(부제:상상도 하지 못한 일)에 해당하는 절반 정도의 분량을 읽으면서 눈물이 자동분출되는 경험을 했다. 왜 안그렇겠는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그렇다 치자. 누구나 그 정도의 준비는 하니까. 그리고 내 감정의 둑이 얼마나 부실한 시공으로 지어졌는지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눈물은 마땅한 일이었으나 내가 꼭 엄마라서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 어느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났고 그 주범인 학생은 자살했다. 그 학생의 엄마는 사건 이후 16년 동안의 기억과 기록을 되살려 글을 썼다. 그 글이 책으로 나왔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이 책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면 이 정도일텐데,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하다. 마음의 파고는 이미 격랑이 되었다.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에 대해 먼저 얘기했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해야 한다. 그 힘에 굴복하는 나를. 어떤 태도인지도 모를 그 어떤 태도가 필요해서 난 일단 찾았다.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겸허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노력해야 하는 태도였다. 여기, 그러니까 이 책, 하나의 끔찍한 사실이 존재하고 그 위에(안에) 어쩌면 더 끔찍한 진실이 있을 거라는 호기심. 나에게 아주 쉽게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이 호기심이었다. 강력하다 못해 천박할 수밖에 없는 호기심. 이 책의 중심에서 회오리처럼 돌고있는 가독성의 진실, 그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아, 난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섬뜩한 시선이 나를 이끌었고 결국 나도 한패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건가. 놀랍다. 정말 놀랍..은가. 아니다. 놀랍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사실이다. 놀랐다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사실이다.(내가 내 감정을 잴 때 사용하는 잣대가 있는데.. 좋든 나쁘든 옳든 그르든 유리하든 불리하든 상관없고 신경쓰지 않는다. 동물적 판단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게 참 늘 보면 위험천만한 것이어서 일생에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면 그냥 즉물적 판단이라고 해둘까. 아무튼 그 어떤 것으로도 가둘 수 없다는 것.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잣대라고나 할까. 무슨 잣대가 그러냐, 그건 잣대라고 할 수도 없다, 해도 이게 내 잣대요, 라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판단이든 사전에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결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주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나를 이끄는 방식에 대해, 내 손을 붙들린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따라가는 그곳의 진실에 대해, 난 주목해야만 했다. 그러던 끝에 난 무언가를 찾고야 말았는데, 그걸 말하려니 너무너무 두렵다. 그냥 이대로 리뷰를 끝내고 싶다. 결국 난 이도저도 아닌 감정의 낭비, 시간의 낭비, 글자의 낭비만 일삼다가 끝내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는 거짓자백이나 하면서 이 글을 끝낼 공산이 크다.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는 감정의 격랑이 수습이 되고 눈물도 어지간히 말랐다.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이 책의 본격적인 진가가 드러날 것이라고 작심하고 책장을 넘겼다. 저자 수 클리볼드는 그러나 처음부터 당시의 정황들, 사건 이후의 완전히 달라진 삶, 아들의 범죄사실을 인정하기까지의 고통의 시간들, 아들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애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법적 소송과 경제적 파탄에 내몰리는 피말리는 일들(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체적 언급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과 다른 언론 보도를 대할 때의 분노, 세상의 질시와 비난을 견뎌내는 동안의 수치심과 슬픔과 공포, 자신의 삶에 힘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무엇보다 아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자신 스스로에게 건네는 솔직한 애도의 과정들까지, 이 모두를 풀어놓는다. 이미 1부에서 원없이 다 쏟아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내용에 대해 어떤 할 말이 더 남았나 들여다 보게 된다.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고 그건 추악한 사실이지만 그 사실 너머에 이미 자살이 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자살충동이 먼저였고, 그로 인해 살인이 일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너무들 쉽게 사이코패스니 괴물이니 하는 것으로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녀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수 클리볼드가 엄마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말을 하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말의 진실에 대해 의심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나의 의지가 아주 사소한 연민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이 모든 게 근거없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실토가 될지언정 나는 밀고 간다. 그리고 다짐도 한다. 내 의지의 씨앗은 작은 연민이라고.(동정과 연민은 다르다는 전제하에, 연민이라는 말을 쓴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세간의 관심과 시선이 어떠할지, 저자야말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는 모험과도 같은 이 일에 뛰어들었고 지난 16년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시간들을 통과하는 동안의 상처와 고통(그녀 자신만의 고통은 당연히 아니다)에 대해 애도하고 또 애도한다. 그리고 그 애도에는 속죄가 따라 붙을 수밖에 없는데, 속죄에는 또 면책의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하지만 속죄와 면책은 그 시작부터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아들이 저지른 죄값을 엄마가 치러야 한다는 것이 맞다면(누구 죄없는 자가 돌을 던져보라고 했을때 기꺼이 돌을 던지는 것과 맞먹는다면) 그 속죄의 길은 끝이 없다. 그만큼 잔인하다. 그녀는 덜 욕먹는 길이 그 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녀는 속죄의 길'만'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면책의 길에 들어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면책은 택하고 말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녀에게 면책은 그녀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의 몫이다. 세상에는 속죄의 가치가 있고, 면책의 가치도 있다. 그럴 때, 그 면책이라는 것. 가볍다고 느끼고 무시하고 말 것이기 이전에, 그것과 동일선 상에 놓일 만한 새로운 좌표는 있을까. 이 책은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읽는 내내 가장 가슴 아픈 건, 그녀가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엄마로서 아들을 애도하지 못한다. 그것을 막는 사회와 그런 사회에 속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다. 이 책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애도를, 그 충분치 못한 애도의 과정을 어떻게든 회복해보려는 몸부림이다. 아니 매우 겸허한 항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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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7-01-19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가 두려워지네요.
리뷰를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요동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컨디션 2017-01-19 14:45   좋아요 0 | URL
표지와 제목이 왠지 마뜩찮아서 별 하나를 뺐는데, 정말 좋은 책이라는데 제 손목을 걸겠..(어쩌다 이런 표현을)..

몰아치듯 읽기에 좋구요, 아마 책읽는나무님이라면 폭풍처럼 쏟아지는 눈물콧물에 대비해 손수건 티슈 다 갖다놓고 읽으셔야 할 거예요.
 
인터스텔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마이클 케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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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가 개봉했을 때 사람들의 입에서 주로 나온 얘기가, 어렵다..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간다..였던 걸로 아는데..

 

나는 그 무렵(아니 그 이전) <그래비티>를 입체안경으로 경험했다. 13000원(?)짜리 우주여행의 쾌감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그 여파로 나는 이런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 더이상의 우주여행은 없다, 이걸로 끝이다. 내 인생에 다시는 그런 공포를 돈 주고 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마음 단단히 먹었다. 그러니까 감동은 아주아주 깊었고 그만큼 오래도록 유효했다. 그러니 인터스텔라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어렵다, 이해가 안간다, 일색이었으니 망정이지- 망정이지??) 인터스텔라 안보기로 했다. 워낙에 우주나 SF에 장르에 무지하니 관심도 궁금증도 아쉬움도 없기로는 식은 죽 먹기보다 편했다. 그러던 어느날(바로 어제였지 싶다) 난 드디어 인터스텔라를 보기에 이른다. 보게 된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원래 나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머피의 법칙'과 같아서 '일어날 일이니까 일어난다'. 하루 중에 가장 심신이 까무라치기에 좋은 시간에 봤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것도 없다. 영화는 당연히 이해가 안갔다. 주연배우가 마이클 케인이고 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사실도 리뷰 상품검색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 영화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답답하다. 이 영화. 영생을 거듭하는(피터팬처럼 늙지않는?) 한 초월적 인간의 우주 방랑기인가? 그냥 책장을 사이에 둔 부녀지간의 숨바꼭질? 아니면, 한 소녀의 천재성과 그로인한 망상이 빚어낸 도취적 인생회한? 


가장 나빴던 장면을 꼽으라면 토성 주변을 비행하고 있다면서 하늘(?) 높이 야구공이 그려지던 장면이고, 가장 좋았던 장면은 드론을 쫓아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달리는 장면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나의 영화 식성(?)은 지극히 아날로그다. 영화의 대사 절반은 상당한 우주이론지식이 없으면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들 천지인데, 그런 거 다 감안하고라도 그냥 단어로만 기억나는 몇 개를 나불댈까 하다가 속이 쓰릴려나 싶어서 관둔다.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뜬 눈으로 억지로 밤을 지새는 눈꺼풀을 하고 앉아 본 영화치곤 거의 졸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내 체력이 점점 상승선을 타고 있나? 그럴리가. 하찮기만 인간의 삶이 시간의 지배를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그런 터무니 없는 믿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것이 놀라움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 그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고? 그럴리가? 그럴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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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8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8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7-01-1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아무런 정보없이 그저 지인따라 갔다가 본 영화였거든요.
보면서 줄곧 이건 뭐지?
내 몸도 마음도 우주따라 둥둥~~
갑자기 고소공포증,폐쇄공포증이 쏠려 진땀 뺐었던 기억이 나네요
장장 세 시간을~~~ㅜ
그러다 집에 돌아와서 자료 찾아보니 내가 굉장한 영화를 본거였구나!!뒤늦게 실감!!^^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니 책장 뒷편이 우주의 미래?과거?공간이었다고 생각하니 그게 가장 놀라웠고 소름 돋았던 것 같아요.
저도 옥수수밭 풍경 괜찮았어요^^

컨디션 2017-01-18 22:32   좋아요 0 | URL
와, 책읽는나무님도 저랑 비슷한 지점에서 감전 당하셨다니 매우매우 반갑고 좋습니다.^^
그 왜 어느 행성에선가, 거대한 파도가 산인줄로만 보였던 그 거대한 물의 덩어리가 표현된 장면은 정말 숨이 막히더라구요. 극장에서 압도적인 스케일로 봤더라면 저도 그 공포에 진땀 깨나 뺏을 것 같더라구요.
뭔가 놀랍고 신비하고 또 서늘한 느낌까지 전하는 영화가 맞지 싶어요. 근데 예전의 그 조디포스터 주연의 <콘택트>의 또다른 버전 같기도 해서, 세월이 지나 기술적 측면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뛰어난 연출을 보여준 것 외엔 달리 할 말은 없는 영화 같기도 하고..뭐 그렇습니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학동네 시인선 88
문성해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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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시인의 시집을. 돈 주고 사지도 않은 내가 이래도 되는 지 모르겠다. 얼마전 문성해라는 시인을 선물로 받았다. 일전에 페이퍼에서 인중샷을 올리면서 좋아라 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했다. 그냥 내 기분에 취해 좋아하기만 했다. 싸가지 없어 보이려고 애쓴 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고집도 무엇도 아닌 그냥 바보다. 머리를 쥐어박는 경망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것을 인증하려면 또다른 경망이 필요해서 지금은 힘들다. 더군다나 지금 내가 울음이 터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후. 이제 겨울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오후. 문성해의 시집을 읽다가, 이미 읽은 시를 다시 또 읽다가 문득, 어떻게라도 리뷰를, 들어가도 될까요 노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자판 앞에 앉았다. 나는 몰라라. 널어야 할 빨래와 쓸어야 할 먼지들. 빨래와 먼지들의 관용이 아니더라도, 이래도 되는 지 모르겠다. 돈 주고 사지 않은 시인의 시집을. 여기 이렇게 몇 편 소개해도 될른지를. 차마 못하겠다 하지 말고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라고 누군가 응원하는 환청을 믿고, 나는 간다.  




삽살개야


- 문성해


더부룩한 얼굴에 

털이 눈을 가린 개야


네 몸의 털을 총체처럼 너풀거리며

네 다리를 비현실적으로 둥싯거리며

빗물을 걸레질하며 가는 개야


도로를 가득 메운 먼지도

털이 솟구치는 위험도

다 털 커튼 뒤에서의 일


세상은 완벽한 커튼이 쳐진 무대

매일매일 개봉되는 극장


오늘의 공연을 관람하러

너울너울 언덕을 내려오는 개야

하루하루가 흥미로운 개야


나도 치렁한 앞머리를 내리고말고

이 지긋지긋한 주인공에서

하루아침에 관객이 될 수만 있다면야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75쪽 

 


 

 

먼 데

 

  -문성해

 

 

지난해부터

공원 미니 동물원에

미어캣 다섯 마리가 들어와 살고 있다

 

모래를 파다가

쪼그만 두 발로 모래를 파다가

두 발로 곧추서서 먼 데를 본다

 

모래 밑에는

딱딱한 시멘트 공구리

파도 파도 들어가지지 않는 시멘트 공구리

 

동그란 눈에

뾰족한 하관으로

아지랑이 피는 먼 데를 본다

하루에도 수십 번

얼음땡 놀이를 한다

 

먼 데는

적이 오는 곳

까마득한 점으로부터

대낮처럼 두 날개를 펼친

맹금류가 오는 곳

 

있지도 않은 먼 데는 무섭다

올지도 모른다는 먼 데는 무섭다

 

피처럼 붉은 고기를 찢어 먹다가

또 먼 데를 본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먼 데를 본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88~89쪽

 

 

 

 

변덕스러운 사람

-백석풍으로

 

      -문성해

 

  삼월 하순 아파트 중턱에 걸린 해가 하마 사라질까 몸에

햇살을 들이며 앉았노라니 해에 구름이 들명 날명 아직

낮잠이 덜 마른 내 몸에 향기로운 대낮과 어스름한 저녁이

들고 나더니 기쁨도 설움도 날실 씨실로 얽히더니 나도 오늘

하늘의 변죽에 맞춰 아주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고 말아

 

  이런 날은 긴 공터의 햇살과 구름을 구불구불 등에 다 새기며

기어가는 푸르죽죽한 애벌레처럼 나는 그냥 홀로인 나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하고 그 공터에 솟아난 풀들과

날아다니는 비닐들과 엎드린 들고양이 맘도 이런 것이려니

그리하여 모든 한탄이나 탄성들은 아주 오래전 하늘로부터

연결되어 있었단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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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5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5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7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소년 2017-01-1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얼마전 문성해라는 시인을 선물로 받았다. 일전에 페이퍼에서 인중샷을 올리면서 좋아라 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했다. 그냥 내 기분에 취해 좋아하기만 했다. 싸가지 없어 보이려고 애쓴 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고집도 무엇도 아닌 그냥 바보다. 머리를 쥐어박는 경망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것을 인증하려면 또다른 경망이 필요해서 지금은 힘들다. 더군다나 지금 내가 울음이 터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




이번 글은 컨디션님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시집을 받고 좋아하는 문학소녀의 감성이 물씬 느껴집니다..^^

아마 순수한.. 맑음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았을 때 진심으로 좋아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겠지요..^^

굳이 값 비싼 물건이 아니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받았을 때.. 기뻐해주는 모습..^^

정말 아름답습니다..^^


컨디션 2017-01-19 00:09   좋아요 1 | URL
마지막 문장에 팍, 꽂히네요. ^^ 아름답습니다...(이왕이면(?) 아름답네요, 라고 해주시지, 했다가 그냥 아름답습니다..가 더 격조있고 진심이 묻어나는 듯하여 이대로 받아들일랍니다.ㅎㅎㅎ)

아, 저는 문학소녀의 감성과는 이제 아주 담쌓고 지냅니다. 그러니까 저도 언제였던가, 문학소녀처럼 (뒹)굴었던 시절이 있었나 본데요..사돈 남말하듯 딴청을 부리는 것만 배워가지고는, 제가 좀 이렇습니다. 상황이..ㅋㅋ
 
아트 스피치 - 개정판, 대한민국 말하기 교과서
김미경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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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부터 이미, 잘못 고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그 책을 집어드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이 그랬다. 나랑 상관없는 얘기일 게 뻔한데 중간에 그만두기 싫었다. 일단 읽기가 수월했고, 내 판단이 옳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건 있었다. 초대장 없이는 곤란한 자리에 초대장도 없으면서 우연히(아니 의도적으로) 가게 되었는데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상황. 그 곳에 던져진 나를 멀리서 팔짱끼고 바라보는 나. 그런 나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 판단이 옳았다.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자랑이다. 자기가 차린 스피치 학원(?) 홍보용 책자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 올라서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 사람들은 그들이 걸어온 역사와 일대기와 수많은 에피소드를 변방의 슬픔으로 탈바꿈 하는 크나큰 재주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눈물없인 들을 수 없는 얘기로 치환하는 재주가 있다. 자부심 또한 남달라 진정한 소통은 이런 거라고 소탈한 웃음으로 품위를 완성한다. 저자 김미경은(김미경도) 이 방면에 전문가다. 굉장한 실력을 자랑한다. 감동과 공감의 스피치. 그 힘을 세상에 알려서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의지의 산물로서의 책.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함께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나. 출판사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책 한권에 모든 걸 쏟아부었을 리 없는데(영업비밀을 떠나) 쏟아부은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런 재주는 낚는 기술에서도 기량을 발휘한다. 독자든 수강생이든 낚는 게 목적이니까 수단과 방법을 안가린다. 일단 자세를 낮추고(쉽게 말하고) 약장사의 기술(거침없이 말해서 정신 못차리게 하는)을 활용한다. 낚이고자 마음 먹은 사람에겐 이만큼 좋은 책도 없다. 챕터마다 성의를 다한 흔적들. 쉬운 말로 공략하는 놀라운 설득력. 겸손하게 안굴어도 매너 있어 보이는 사람. 인정욕구와 자신감이 이토록 잘 조화를 이룬 사람. 글을 글로서 대하지 않고도 글을 잘 쓰는 사람.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말을 한 것이지만 그것조차 위장하는 능력. 하긴 왜 안그렇겠는가. 말하는 재주가 타고났는데. 자신의 말이 단순한 수다의 차원을 넘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부단한 자기계발과 연구가 있었으니. 거기에 끈질기게 매달려 달려온 자의 뼈를 깍는 고통이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가장 주력한 포인트는 가진 자들의 세계에 철저히 복무하는 것이다. 방송에서 유명해진 이후로는 더욱 가속이 붙어서 앞만 보고 잘도 달린다. 성공의 지름길을 일찌감치 체득한 자로서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욕망했기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지 못한다. 세상이 다 떠받들어주고 약자든 강자든 다 매달리니까. 자신의 신념에 제동을 걸 기회도 없다. 그녀는 오직 바쁘다. 그리고 나쁘다. 라임을 맞추기 위해 쓴 말이 아니다. 바쁜 사람은 나쁘게 될 확률이 높다.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기 쉬운 세상에서 그녀를 나쁘다고 말하는 나를 본다. 내가 가진 한도내에서 책의 리뷰를 이렇게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배운 게 있다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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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1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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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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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15: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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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1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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