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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살인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1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6월
평점 :
원제 - One, Two, Buckle My Shoe,
1940
작가 - 애거서 크리스티
이번에는 포와로가 나온다. 아쉽게도 헤이스팅즈는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난 왜 포와로가 나오면
당연히 헤이스팅즈가 같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던 걸까? 이건 어쩌면 셜록 홈즈 시리즈의 영향 때문인가 보다. 거기서는 홈즈가 나오면 와트슨은
거의 매번 같이 나온다. 사실 홈즈의 사건 수사 일지를 와트슨이 기록해서 발표하는 형식이기에, 그가 빠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와로 시리즈는 꼭 헤이스팅즈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앞서 읽은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같은 경우도 간호사가 기록을 했으니까.
이
책이 나온 시기는 1940년.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기존 세력에 반감을 느끼고 새로운
정치사상에 호기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나타난다. 특히 공산주의에 빠져서 기존의 정치세력이나 자본주의 개혁을 요구하는 청년과 부잣집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온 아가씨의 사랑이 곁들어져있다.
이건 1937년도에 나온 '나일 강의 죽음'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나온다. 예쁘고 부자이며 세상물정
모르고 오직 사랑에 올인하는 여자와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세상을 개혁해야한다 외치기만 하는 남자의 만남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원제는 동요 가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장은 제목에 나오는
동요의 가사이다. 어쩐지 이 책보다 일 년 먼저 나온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하다. 아무래도 크리스티가 좋아하는 특정 코드가 있는
모양이다.
한국 제목은 '애국 살인'이다.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범인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물론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 '아- 그래서 이 제목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힌트가 되고는 있다. 제목에서부터 약
40% 정도의 스포일러를 하고 있는 추리 소설책이라니!
소설 초반에 포와로가 겪는 치과에 대한 두려움을 읽고 있자니, 이 남자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온갖 망상이 들기 시작했다. 아, 포와로는 달걀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엔, 추리력이 너무 뛰어나잖아. 헉, 설마 내가 지구인이 아닌 건가? 적절한 잡생각은 두뇌활동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며, 망상은
여기까지.
포와로가 치과에 다녀온 날, 담당 의사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모두가 '네'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말 할 수 있는 포와로. 다들 자살이라고 하지만, 그는 타살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의 고객 중에 재계의 큰 손인 은행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치과의사의 고객 중에 한 명이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된다. 거기에 첩보원인 남편을 두었다고 알려진 여인의 사건까지 얽히면서
사건은 복잡해진다. 포와로 역시 중간에 범인이 쳐 놓은 덫에 걸려서 잠시 혼란스러워하지만, 곧 진상을 파악한다.
반스라는 정체불명의 전직 내무부 관리도 등장하는데, 그는 포와로에게 이런저런 힌트를 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뭔가 알고 있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어쩐지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중간에 포와로가 이런 말을 한다.
독재자에게는 으레 자신의 목숨은 부당할 정도로 소중하지만, 반면 타인의 목숨은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법이니까요. -p.225
딱히 독재자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자의식이 철철 넘쳐서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는 부류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을 무시하고 상처 입히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면 남도 중요한 법인데
말이다. 하긴 그런 걸 알면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들 젊은 사람들, 너무 세상모르고 날뛰지 말아요. 세상은 젊은이 것만 아니고 늙은이의 것만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모두의 소유물이오. 이 세계를 자유와 인간의 정이 넘쳐흐르는 곳으로 만드시오. 그것이 내가 부탁하고 싶은 말이오.
-p.237
포와로가 하는 당부의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을 듣는 청년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크리스티의 심정일지도 모른다. 요즘 애국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그게 진짜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욕망을 애국이라는 포장지로 덮은 것인지 의심이 가는 경우가 있다. 이 소설에도 그런 사람이 나오는데, 과연 누구를 위한 애국인지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