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1) 높은 사람들의 횡포


1. 높은 사람들의 횡포


요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언행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얼마 전에 서울대 음대 교수의 제자 폭행사건이 있었고, 고려대 의대 교수는 조교에게 폭언과 협박을 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다음엔 민주당 소속 시의원이 주민센터의 동장에게 폭언한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동장은 “큰 충격을 받아 이틀 동안 병원에 다녔다. 사람들 있는 데서 그렇게 모욕을 주다니 생각만 하면 손이 덜덜 떨린다”며 눈물을 흘렸다(국민일보, 2011. 4. 7.)고 한다.


혹시 그들은 사람을 둘로 나누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자신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서 무시해도 좋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권력자는 남을 무시해도 되는 자리인가. 이런 사건들을 알고 나니 사람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상처를 주는 사람과 상처를 받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사람과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중요한 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정말 잘못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깨달을 때 반성할 수 있다. 그런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잘못을 하고서도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산다면 자신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들도 생기지만 자신 또한 불행해진다. 좋은 인간관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안에서만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생텍쥐페리)’라는 말이 있다. 모든 불행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서 생긴다. 모든 감정의 그 기저에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깔려 있다. 인간이 완전히 홀로 산다면 사랑도 미움도 상처도 분노도 없을 터이니 불행도 없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에겐가 상처를 준 적이 없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은 남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남의 인격에 대한 무시는 반드시 부메랑 효과를 낸다(서양속담)’라는 말이 있다.



2. 이 글과 관련한 책들

  

<좋은 지도자에 대하여>


노자는,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고 했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 노자, <도덕경> 56쪽.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이 그 무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그를 해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즐거이 받들고 싫어하지 않습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 노자, <도덕경> 279쪽.





 노자는, 지도자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 노자, <도덕경> 83쪽.





이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라고 한다. 아마도 그런 지도자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지도자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한 사람을 겨냥한 악의적 댓글이 그 당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작은 고통으로도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아니 작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삼자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이고 당사자에겐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로 여겨지는 일도 자신의 일이 되고 보면 큰 일이 될 수 있다. 또 사람에 따라 고통의 느낌엔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되기도 한다.


만약 작가가 소설에서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폭언을 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을 그렸다면, 그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세상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그 고통에 독자가 공감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바람직한 세상이 되기 위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얼마나 슬퍼할 수 있을까. 남의 고통은 그저 남의 고통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게 아닐까.


수전 손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202쪽.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일입니다.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210쪽.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영역이 아닌 타인의 삶의 영역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좋은 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고통은 그저 타인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연결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다.


조세희가 쓴 소설에 이런 글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삶의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그 전쟁에서 날마다 이기는 사람들은 가진 게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둘로 나눠져 승자가 되거나 패자가 된다. 작가는 난장이로 상징되는 못 가진 자가 패자가 되어 고통을 받고 사는 세상이 과연 옳은 세상인지를 묻고 있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그 부당함을 깨닫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가진 자들의 ‘죄’와 못 가진 자들의 ‘고통’이 대립하는 이 소설은 사랑이 없는 욕망을 비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그는 폭력에 대해 일침을 가하듯 이렇게 썼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타인에게 직접 고통을 주는 폭력이나 폭언은 어떠한가.




 

소개한 책
  

노자, <도덕경>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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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글> 봄날의 갖가지 상념들


1. 비의 낭만을 잃은 날

어제 비가 내렸다. 경기도교육청은 각 초등학교가 학교장 재량으로 휴업하도록 했다. 비가 인체에 해로운지를 떠나 학부모들의 자녀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짐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젠 비가 갖고 있는 낭만의 이미지가 사라질 시점에 와 있다. ‘방사능 비’가 내릴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앞으론 비가 내릴 때마다 좋아하기보다 건강 걱정을 하게 될 것이다. 비를 낭만적으로 맞을 수 있는 시대는 이렇게 해서 끝나는 것인가.


2. 우리는 하나

생선도 야채도 안심하고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원전사고는 일본에서 일어났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오고 있다. 역시 지구는 하나였고, 우리는 하나였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이 곧 나의 삶의 일부가 된다. 이런 글이 떠오른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약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대륙이나 모래톱이 그만큼 작아지듯,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3. 인간의 한계

일본의 원전사고는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한다.



인간은 세상의 여러 문제를 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먼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고 다음으로 문제를 파악하는 것으로써 한계에 이르는 존재로 태어났다. - 괴테어록 32쪽.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이었다. 그것은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괴테어록, 32쪽.






오로지 인간만이 불가능한 것을 이룩할 수 있다. 인간은 구별하고 선택하고 판단한다. 인간은 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 괴테어록, 33쪽.




4. 커피의 맛에 집중하기

3일 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잠을 푹 자고 싶어서다. 심각한 불면증 정도는 아니지만, 몇 시간에 한 번씩 자꾸 깨어 아침에 일어나면 푹 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문제다. 20프로 수면 부족의 느낌.


커피중독자인 내가 커피의 유혹을 이겨내고 3일이나 마시지 않았으니 오늘은 내게 상을 주기로 하고 커피를 마시기로 하였다. 원래 내 습관은 아침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실 때면 신문을 펼쳐 드는 것인데,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다 보니 커피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커피보다도 신문의 내용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피의 맛에 집중하기 위해 그 습관을 바꿨다. 신문을 볼 때는 신문만 보기로, 커피를 마실 땐 커피만 마시기로 했다.


우리 집은 방마다 벽의 한 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찻길 부근에 있는 고층 아파트라서 창가에서 활기찬 도시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창밖엔 자동차가 분주하게 오가고 사람들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난 이 풍경이 아주 맘에 든다. 요즘 숲 속에 있는 아파트가 인기라고 하지만 그런 아파트가 운치는 있겠지만 특히 밤에 느껴지는 적막한 숲보단 불빛이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이 난 좋다. 고독한 풍경이 아니라서 좋다.


그리하여 새로 만든 습관은 커피를 마실 때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앉는 것이다. 창밖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면 커피의 맛에 집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최대한으로 커피의 맛을 음미하며 마실 수 있다. 오늘 창가에서 며칠 만에 마시는 커피의 맛은 아주 달콤하여 그 좋은 느낌이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마셨을 때 커피의 맛을 50% 느낄 수 있다면, 이렇게 마시는 것은 100%의 커피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생의 기쁨은 크지만, 지각이 있는 생의 기쁨은 더욱 크다. - 괴테어록, 39쪽.




이것을 흉내 내어 쓰면, 커피는 맛있지만 음미하는 커피는 더욱 맛있다.



작은 일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보거든 그가 이미 큰 일을 이룩한 것으로 생각하라. - 괴테어록, 187쪽.




이것을 흉내 내어 쓰면, 커피를 마시는 작은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을 보거든 그가 이미 큰 일을 이룩한 것으로 생각하라.


작은 것에 감사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


5. 처신의 어려움

어느 친척의 장례식장에서 밝은 웃음을 띤 얼굴을 한 적이 있다. 사촌 언니와 오빠, 동생 등 여럿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명랑하게 말하며 즐겁게 웃었던 것. 식사하는 자리에서였다. 삥 둘러앉은 낯익은 얼굴들을 보니 즐거운 모임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에 빠진 모양이다. 난 그때 그곳이 장례식장임을 잠시 잊었다.


물론 장례식장에 들어서며 영정을 보면서는 울음을 참지 못해 눈이 빨개지도록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자 그 울음이 웃음으로 변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례식장이란 장소에 맞지 않게 웃고 있던 내 모습이 생각나자 몹시 부끄러웠고 죄의식마저 느꼈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관찰이라도 했다면 나를 얼마나 한심한 사람으로 봤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나’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줄 아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은 날이다.



6. 신정아 자서전

최근에 출판된 신정아의 자서전 ‘4001’이 많이 팔려 화제다. 그녀는 학력 위조 사건이 발생한 2007년 5월 이후 써 온 일기․메모 등에서 일부를 추려 책으로 냈다고 한다. 이 책에서 그녀는 어느 정치인을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슬쩍슬쩍 나의 어깨를 치거나 팔을 건드렸다”며 그는 “겉으로만 고상할 뿐 도덕관념은 제로였다”고 썼다고 한다.


이 글을 그(어느 정치인)의 가족이 보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에 대해서 그녀는 한 번쯤 생각해 봤을까. 한 남자의 가정이 파탄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글이면서 동시에 한 정치인의 생명력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까. 아무리 거짓 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그녀의 인격을 의심하게 만드는 글이다. 그래서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책은 사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녀의 책 내용이 공개되기 전까지 난 그녀의 책 출판 소식을 알았을 때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다. 책 출판을 재기의 기회로 삼아, 쓰러진 몸을 일으켜 다시 일어나길 바랐다.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해서 비난을 삼가고 싶은 연민이 일었다. 그런데 신문을 통해서 그녀가 쓴 책에 그런 내용의 글이 실렸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빠져 있다는 것은 의외다. 왜냐하면 한 번 아파본 사람은 그런 아픔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7. 카이스트 또 자살

카이스트 학생이 어제 또 자살을 했다. 올해 들어서 학생 4명이 잇따라 자살한 것이다. 성적 스트레스로 자살한 학생도 있다고 한다. 현재의 즐거움 없이 미래를 위해서만 산다면 그건 불행하고도 슬픈 일이다.  




미래를 위해 자신을 준비하며 현재를 즐겨라. - 괴테어록, 68쪽.




8. 황사

오늘은 전국적으로 황사가 나타난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봄은 곱게 오지 않았다. 흙먼지 일으키는 봄바람과 꽃샘추위와 황사를 동반하며 봄은 왔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완연한 봄인가 싶으면 바로 여름이 되고 만다.


예전엔 ‘봄’하면 떠오르는 것은 따스한 햇살이었는데, 이젠 ‘봄’하면 황사가 떠오르게 되었다. 시간에 따라 계절의 이미지도 변한다. 또 무엇이 변할까.


지금 이 시간에도 무엇인가가 조금씩 변하고 있을 것이다.


9. 괴테어록

괴테를 알고 싶어서 괴테어록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은 글은 이것.



재물을 잃는다는 것 - 이것은 얼마간을 잃는다는 것이다.

명예를 잃는다는 것 - 이것은 많은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용기를 잃는다는 것 - 이것은 모두를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 괴테어록, 55쪽.




그러므로 무엇이 되고 싶고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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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글> 논문은 끝났고 새해는 밝았다



1.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석사논문이 완성되어 끝이 났다. 에이포 용지 백 장쯤 되는 분량의 논문이었다.



처음엔 어떤 목표에 의해 학위가 필요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몸이 점점 지쳐 가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포기하자니 나의 무능력과 게으름 때문에 논문 하나 끝내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꼬리처럼 내 삶을 따라다닐 것만 같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논문을 반 이상 쓴 다음부터 나를 지배한 생각은 다른 것, 오직 하나였다. ‘꼭 논문을 완성하고 싶다’였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완성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은전 한 닢’이란 수필이 있다. 늙은 거지 하나가 은전 한 닢을 애지중지하였다. 그 거지가 그것을 애지중지한 이유는 이러하였다.




“... 나는 한푼 한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다양(大洋)' 한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렸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요?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피천득 저, <은전 한 닢> 중에서





그 거지가 은전 한 닢을 갖고 싶었던 것은 무엇을 사고 싶다거나 무엇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은전 한 닢이 갖고 싶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논문을 반 이상 쓴 다음부터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학위의 필요성이나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꼭 논문을 완성하고 싶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거지처럼 나도 자기만의 ‘생각의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 감옥에는 타인의 시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은 조용하고 고독했다. 밖에선 눈이 온다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밖에선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의 감옥은 조용하고 고독했다. 그 세계는 아주 작으면서도 큰 우주였다. 나는 그 세계에서 논문이 완성되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만의 ‘생각의 감옥’에 갇혀 지내곤 한다.


2.

새해가 되었다.


새해에 바라는 나의 가장 큰 소망은 한 가지.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것’이다.


입맛을 잃을 정도로, 잠을 설칠 정도로 괴롭거나 슬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입맛이 달고 잠이 달다면 건강 걱정, 가족 걱정, 돈 걱정, 그 밖의 걱정이 없는 삶이다.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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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과 관련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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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1-0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홀로 고독한 작업을 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무엇엔가 몰두할 수 있는 건 고독하지만 하나의 행복입니다.
 


단상(10) 무엇을 안다고 할 때


빗나간 예측 1


지난 추석에 연휴가 길어서 고속도로가 예전에 비해 크게 막히지 않을 것이란 예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연휴가 길었는데도 추석 전날과 당일에만 차가 많이 몰리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여성에게 명절은 가사 노동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귀성을 늦추고 귀경은 서두르고 싶어 하는 며느리의 선택의 결과라는 분석(chosun.com)이 나왔습니다. 시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는 아내들의 선택에 남편들이 수용해 준 결과라고 합니다.


빗나간 예측 2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옷을 기부하는 것은 좋은 일일까요? chosun.com이 소개한 책에 의하면 꼭 좋지만은 않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상인들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헌옷 수거함에 버려지거나 재활용센터에 모인 옷들을 헐값에 사들여 사람들에게 판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값이 싼 이 옷들 때문에 아프리카 섬유산업은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합니다. 한 예로 18개의 섬유공장이 있던 잠비아에는 지금은 공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며 일자리를 잃은 재단사들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모두가 행복한 지구촌을 위한 가치 사전>이란 책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원숭이를 닮았다


우리 개인의 인생에 대해서는 분석해 주는 누군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릅니다.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장자, 현암사, 91쪽).


양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한쪽만을 보는 시각을 가진 우리 인간은 원숭이들을 닮았습니다.


무엇을 안다고 할 때,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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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


<모두가 행복한 지구촌을 위한 가치 사전>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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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글> 서울입니다 2 

누군가가 말하기를, 이 더운 여름엔 그냥 살아 있는 것만 해도 큰일을 하는 것이랍니다. 날씨가 덥다고 글도 읽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위로가 되는 말이지요.   

살아만 있어도 큰 일을 한 것이라는 이 계절에 저는 서울로 이사를 했답니다. 이사한 지 9일째. 더워서 더 힘들게 느껴졌는데, 요즘 좀 시원해졌네요. 

살림정리는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이삿짐 나르는 사람이 해 놓고 간 그대로랍니다. 둘째아이의 교복과 구두와 체육복을 사러 다니고, 전학을 시키고, 수학과 영어를 가르칠 개인지도 과외선생을 구하고, 큰애의 핸드폰을 새로 구입해 주고, 제 것도 고장이 나서 새 핸드폰을 구입하고, 전화와 인터넷을 설치하고, 집의 손 볼 곳과 고칠 것을 해결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친정에 갖다 드리고, 매일 친정어머니와 걷는 운동을 함께 하고, 게다가 서울친구가 방문하는 날이면 하루가 그냥 날아가고... 등등, 바빴어요.  

오늘부터 옷정리와 그릇정리와 책정리를 하나씩 해나가려고 합니다. 신발장과 현관과 욕실 청소까지 다 하려면 한달은 걸릴 듯해요. 휴우...

논문은 언제 쓰나요? 

블로그에 올릴 글은 언제 쓰나요? 

이렇게 바쁘다 보니 유유자적의 행복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쁨이 행복한 이유는 바쁜 일 뒤에 찾아오는 한가로운 휴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루에 해야 할 일을 끝내 놓고 샤워를 하고 난 뒤의 그 한가로움을 즐깁니다. 그 한가로움의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바쁜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행복은 늘 한가한 사람은 갖지 못할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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