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일정표를 봤는데, 대학원생들을 위한 자리는 여전히 빈곤한 상태였다. '이단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생'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계에서 학문을 이야기하게 만들겠다던, 그 말은 결국 '액세서리'에 불과하단 걸 매년 배신감 느끼듯,느끼게 된다. '이단'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단적인 공부 공간과 시간,그리고 연대의 자리.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런 자리가 필요한 곳이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이 아닌가, 다시 마음을 잡게 된다. 헤르만 헷세의 말처럼, "실천의 결과가 고민이 아닌, 고민의 결과가 실천인 게 낫다"는 그 말을, 지킬 시간을 만들고, 다가오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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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스스로 만들고 찾아가시는군요?
믓쪄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하도 과거를 게을리 살아서요.^^;
 

어제,오늘 apouge님이 쓰신 <인문학의 죽음, 그리고 대학의 죽음에 대해>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대학이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대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학엔 (과거의) 대학이란 유령만이 떠돌 뿐이다."라는 제 나름대로 명명하자면, 이 급진적인 회의주의 형태의 수사에서, 우리는 현실의 절망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고, 또 그런 체감과 더불어 오는 자극에 따라, 더 나은 희망 한 움큼을 쥘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마운 글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서, 이 대학의 모순을 교수와 학생의 관계로만 설정할 것인가에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분명한 '적대'로, 교직원의 문제를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수와 학생 관계에서 오는 교육의 모순을 은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저는 좀 더 미시적이고, 경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미천하지만, 몇 년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이 경험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 사회에서 총장보다 왕은 '교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직원'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교직원이 갖는 그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학생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냥, '서비스'차원에 머무른, '보조'의 차원에 머무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들알다시피 교직원이 갖는 그 모호함, 보이지 않음의 권력은, 교육에 대한 신성함의 추락을, 교수와 학생들 간의 관계만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특히, 교직원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토대로, 학생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합니다. 예로 들어, '등록금 문제'가 있겠지요. 소위 '교육 투쟁'이라는 것 안에서 늘 제기되는, 등록금 문제에 있어, 학생회 측은 주로 교직원들을 상대로 학교 측 예산의 투명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산설명회를 촉구하거나, 예산 내역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만, 교직원들은 너희가 평소 잘 모르는 용어가 많다, 모르는 부분이 많다며, 또 행정 상 비밀이 되는 것이 많다며, 공개하기를 꺼려합니다. 주로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오지요.  

더 문제는, 그런 전문적인 문제를 공부해와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전문성'을 너희들이 뭔 데 문제삼느냐며, 행정일을 맡는 교수를 이용해서, 학생들에게 '(교직원 그들의 )  권위'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대리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가집니다. 그렇게되면,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서 오는 그 교육을 매개로 한 예기치 않은 불편함은, 대학 사회 내 구조를 파악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사기를 꺾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례로 저는 2009년에, 대학원 내 문제이긴 하지만,  제가 원하지도 않은 명목이 등록금 항목에 책정되어, 방학 중에 교직원을 상대로 질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직원은 이 때, 이러한 예산 책정은 '본부에서 하는 것이라며, 자신들은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말이 가진 여리고 동정심 느껴지는 언어 속에서, 권력의 생기는 솟구칩니다. 저는 그것을 '평상심의 권력'이라고 제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저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다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저는 성의있는 답변을 원했습니다만, 돌아온 것은 학교 홈페이지에 가면, 대학 정보 공개 문서가 있으니, 그걸 참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2008년 말이었나요. 그때부터 시행된 제도인데, 그 공개 정보는 그렇게 정확한 내역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돌아온 것은 비간접적인 경로였지만, 교직원 그들의 심기가 불편하단 뒷말이었습니다. 게시판을 통해, 뉴스 내용을 언급해가며, 이런저런 구조적 문제를 제기해도, 그 문제에 대한 답보다는, 나중에 대리자를 통해 '학생인데,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하나는 교직원과 학생들이 갖는 '친밀성'과 '내밀성'의 문제입니다. 이런 친밀성과 내밀성의 일반화 속에서 제가 경험했던 것은, 제가 '예비역 권력'이라고 명명한 현상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서, 학생회를 맡으면서, 또 예비역 출신 학생회장, 임원들을 보면서, 그들이 결정적으로 학교 부패에 저항하지 못하고, 현실의 모순에 타협하게 되는 걸,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직원들의 고의적 전략이라고 무리하게 해석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뭐랄까요. 이건 한국적 현상이라고 할까요. 저도 군대를 갔다오면서, 그런 우를 많이 범했지만, 일이 서투른 친구들을 욕하게 되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친구들이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걸, 교직원들과 함께 구경하면서, '으이그, 세상 물정 모르는 놈, 네가 군대에 갔다 와봐야 알지'같은 말을 서로 공유하게 되지요.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대학 내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는 시기, 그 모순을 실천으로 변혁해보려고 하면, 부딪히는 것이, 그런 친밀성에서 오는 양보입니다. "야, 그냥 이번엔 넘어가자. 알 사람 다 아는 걸..뭐. 유연하게 행동해." 이런 우연치 않은 친밀성의 고리가, 그들만의 내밀한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비단 예비역들의 정체성을 훼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고리가 우연하게 만들어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의리와 정, 인연 때문에, 옳음의 순간을 양보하게 되지요. 그런 '일반적인 인맥'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건 수많은 연관성 중에 하나겠지요.

이 안에서, 부딪히는 모순. 교직원과 교수의 관계 문제이겠죠. 뻔히 잘 아는 관계 안에서, 학생들의 '태클'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갈라지는 건. 87년 민주화 때, 상징적인 활동을 하며, 국가의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도, 학내의 민주화에 대해선 조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표현은 그냥 비유일 뿐입니다. 바깥에서 진보를 외쳐도, 학교 문제에는 꿀먹은 진보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수들에게 그런 부담을 너무 줄 수 없는 문제 아니냐는 반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동의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그 연결고리죠. 이 세상에 대학이 썩었다는 걸 모르는 교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대부분 썩었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고 생각하고 모순의 연결고리를 부여잡고, 학생들에겐, "너희가 좀 양보해라..어쩔 수 없는 문제야..", 교직원들에겐, "그런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그 학생 잘 말할께요. 염려하지 마세요."  결국 교수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고 온 학생들은 이단들을 위한 자리(http://dangbi.tistory.com/52-> 이 포스트에서 인용했습니다.)를 만들 용기를 포기하게 되겠지요.  

이 포기와 양보의 순간은 생각보다 너무나 조용한 일상성 속에서 그냥 퇴색됩니다. 그리고 그 포기와 양보는 앞으로 다가올 학생들의 저항과 변화의 몸부림을, 또 하나의 관행으로 치부해버리는 공포 효과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그 효과가 뿌리잡은 곳에서 남은 건, 너무나 좋은 봄 날씨. 흩날리는 벚꽃,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안락한 공간들, 그리고 정상성의 독재입니다. 요구하고 저항하면, 나를 비정상으로 몰아버리는 이 정상성의 독재.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하게 도사리고 있는 각각의 요인들. 그 요인들 중에서 오늘 하나, 교직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부족한 잡글로 돌아봤습니다.  

 

좀 다른 형태의 <호모 아카데미쿠스>를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 성찰성의 방향과 미래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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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아, 대학원이나 가볼까 주의자'였다. '아, 대학원이나 가볼까 주의자'들에게 붙은 단서는, '아심뽀까'(아,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와 같다. '심심한데~'라는 그 앞 말이 붙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대학원 안에 들어오면서 조금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이렇게 공부라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었나를 확인/점검하게 되었다.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보면(물론 나는 정말 모르는 놈이라는 것을 밝힌다) 질투심이 생기고, 내가 안 읽은 책을 누가 잡고 있으면, 슬그머니 눈으로 메모했다가 장바구니에 담거나 도서관에 들렸다. 그러다보니,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애정보다 '절박함'이라는 게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 '절박함'을 때론 분노와 함께 동여매고 산다. 직장다니는 사람들을 술자리에서 만나면, 그들은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오빠, 형, 뭐뭐야.. 공부할 때가 좋은 거에요.."라는 그 진부한 칭찬도 아니고 비하도 아닌 말들. 그 말을 몇 년 째 듣다보니 요즘엔 그런 자리도 잘 안나가게 되었다. 한편으론 '공부 좀 더 해볼까'라는 그 말을 ' 다니는 대학원 어때요?'라는 말과 함께 붙여 물어보는 사람을 나는 싫어했고 지금도 그렇다. 귀찮아서 대충 대중문화를 공부하고 있단다라고 하면, '재미있겠다'라고 웃으면서 '형 ,오빠 뭐 준비해야 되요?'라는 말들, '영어 점수 몇 점 이상이어야 해요?', 등등을 물어보며, 나를 일일 입시 강사로 만들어주는 이들의 대화. 나는 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서, 그런 친구들의 이름이 휴대폰에 뜨면 전화도 일부러 안 받곤 한다.  

 

친구와 함께 신촌의 모 카페를 들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장을 한 젊은 남자가 큰 노트북 가방을 들고 와서 혼자 팬케잌을 시켜 먹으며, 서핑을 하고 있더랬다. 나는 원래 공부하면서 사람 관찰을 잘 하는 편이라, 그 사람이 신경 쓰였다. 뭘 서핑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웃고 진지해지다가 그 사람은 전화를 받았다. 대화 중에 내가 유심히 들은 말.."나..지금 일 중이야...그러니까..가만 보자.." 나는 그 날 집에 와서 그 남자 생각을 했다. 그냥 인터넷 서핑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나를 돌아보니, 그 남자의 말이 이해가 갔다. 대낮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시간에, 서핑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은, 분명 스스로의 이미지에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는 것 같다. 어느 낮 시간. 누워서 공부때문에 뭘 생각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면, 모처럼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예민한 친구들은 첫 인사가 여보세요가 아니다. "너 잤지?' 그러면 나는 좀 죄인 취급 받는 기분이 들어서 약간 신경이 곤두선 채로, "아니야. 책보고 있었어"라는 말로 때운다. 책보고 있다는 말은 대학원생이라는 위치를 아는 친구들에게 그나마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테니까.  

 

대학원에 있으면 내가 '죄인-게임'이라고 부르는 대화를 동료들끼리 한다. 유감스럽게도 낮에도 밤에도 쓰고 읽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자폐적인 게임은 이상한 우울함과 쾌감을 준다. 우울함을 쾌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임인 것이다. "어제 내 친구한테 전화 왔는데. 증권회사에 취직했대. 그 친구 예전에 별로였는데..인생 참.." 그러면 나오는 후렴구는 "에효..나는 뭔지.."  

 

카페에서 본 그 남자에게 낮은 강박적 시간이었을 것이다. 낮에 자신이 해야 할 행위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채워야 할 어떤 업무들. 그 안에서 그 남자는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카페에서 팬케잌을 먹으며,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을 '일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 '나 지금 바빠'라는 말로 감춘 채, 일말의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밑에 내가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닌 범주의 사람.그 안에서 공부는 잉여적 존재가 된다. '평생 공부'라는 말을 믿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살면서 많이 봐왔고, 지금도 보고 있지만, 그 말에 뜨거운 박수를 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입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팔자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걸 많이 봐 왔다. 공부를 절박한 심정으로 하는 사람을 존경이라는 가식적인 포장 아래 잉여라는 외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 그 사회 안에서 전혀 느껴도 되지 않을 죄책감으로 공부와 일의 우열관계를 회한으로 따지고 살아가는 운명. 과연 우리 시대에 일이란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일까. 이 골치 아픈 생각들이  요즘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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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4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4 01:13   좋아요 0 | URL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10-05-04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4 15: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비로그인 2010-05-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아심뽀까...
요거 울 남편한테 쓴 작업멘트였는데...
그딴 짓이나 하지말고...아심대까...했어야 했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4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잼있네요.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가끔 연구실 울타리를 벗어나, 직장인이 된 학부시절 친구들을 만나거나, 혹은 술에 취해 택시 아저씨와 예상하지 않았던 친밀한 사담을 나눌 때, 나오는 초반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oo야, 너 지금 전공이 뭐라고?", "학교는? 그럼 전공은?" 그럼 나는 머릿속에 조금 계산을 해야 한다. 내 전공명을 미리 밝히자면, "영상커뮤니케이션"이다.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 그럼 뭐 영화 이런거 공부하나?"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대부분 "그게 뭐 공부하는 곳이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나는 이런 경우를 여러번 학습했으니, 다음에 그런 상황이 또 생기면, 나름의 대처를 해야겠다고 머리를 굴린다. (친척들이나 부모님 친구분들에게는 혹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그냥, 신방과라고 할까?", 아니면 (공부에 관심있는 친구들에게는) "문화연구한다고 해?" 뭐 이정도로 대답을 준비해놓는 것이다.   

"예, 신문방송학 전공입니다.."이정도로 포장해서 얼버무리면, 이내 돌아오는 대답은 "언론고시 준비해야지?" 라든지, 좀 세세하게 뭘 안다고 표시하시는 분은, "조선일보 들어가. 거기 페이 두둑해"정도 같은 친근한(?) 멘트를 쳐 주신다. 내가 세세하게 알려주는 경우, 조금 피곤하거나, 아니면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나도 모르게 세세하게 설명해주다가 목에 힘이 들어가고, 남은 전혀 관심없는 전문용어로 나도 모르게 브리핑을 하니 말이다.  (친구들은 벌써 고개 숙인 채 안주 먹거나, 지들끼리 딴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만의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이 공부하는 동료 연구자들도 똑같이 겪고,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웃거나 진부한 농담들을 늘어 놓는다. (하지만, 가끔은 진지한 것 같은 농담) "에이..그러고보면 결국 기술 배우는 게 최고야,최고"(대부분 인문사회과학 한다는 친구들의 진부한 넋두리) "그냥 학교 앞에서 포장마차 하나 차릴까"(이럴 땐, 구질구질하게 '석사박사' 같은 꼭 먹물 티를 내는 간판을 구상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나 웃든, 농담을 늘어놓든 그것이 끝나고 난 후의 분위기는 우울한 어색함이다. 결국 한 숨으로 귀결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원망하던 논문을 손에 부여 잡고 기계적으로 연두색 형광펜으로 줄을 좍좍 긋는다.  

그러나, 몇 주 전부터 드문드문 듣고 있는 중앙대 사태를 생각해보면서, 나는 밥상에 반찬은 별로 없지만, 너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있단 걸 명심하라는 기도를 하는 엄마와 그 기도를 듣는 아들의 식사 장면 같은 기분을 요즘 늘 느끼고 산다.(하지만, 동정을 넘어서, 우리는 진정한 연대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그리고 오늘 알라디너 로쟈님의 블로그에 들어가 업데이트된 기사를 보며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전공을 밝히다/전공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전공의 '쓸모 /기능'보다 더 중요한 걸 우리가 이미 선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그 전공과 연계된 내 삶의 방식 그리고 의미이다. 지금 정리대상에 포함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는 어문학부 학생들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놓은 '쓸모-경계선'에서는 하나의 '명함-기능'으로 치부될 지 모르지만, 그것보다 우리가 더 깊게 바라봐야 할 것은, 그 안에서 그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생존의 권리다.  

여기서 생존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와 가까이 하는 시한부적 학문 연구의 삶이 아니라, 얼마든지 스스로의 학문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보람을 느끼며,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누려왔던 지적 양분을 우리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사유와 행동의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삭발을 감행하고, 고가다리에 올라가 울부짖으며, 극단적인 몸부림도 마다하지 않는 친구들의 삶을 단순히 '명함-기능'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기능이라면, 자신의 삶을 사람답게 살고 싶은 기능. 내가 와서 우연이든,필연이든 나도 모르게 젖어버린 학문의 내음을 마음껏 맡을 기능인 것이다. 

외부의 시선에서는,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지 모르겠다. (지금의 대학 문화, 그리고 취업이라는 현실의 장벽 등등)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쓸모와 기능을 물어보고, 대충 듣고선 "아. 그런 곳이구만.."한다. (결국 이런 인식이 이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어쩌면 오랫동안 누적된 사회적 '문제')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 당신이 정리하려고 마음 먹은 그 물건은 그렇게(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질문한 당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더 중요한 쓸모를 가졌다고.  

그 신념을 안다면, 그들은 '쓸모의 경계'를 함부로 재단할 권리가 없다. 지난 김예슬 양의 이야기부터, 쭉 흘러오는 어떤 맥락들. 대학을 '버스정류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일침.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라는 수사 안에서 우리가 대학 안에 계속 남아 있다는 자괴감 대신, 대학이 우리를 계속 밖으로 몰아내려 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아있으면 죄인이 되는 곳. 그건 "논문 잘 되가요"라며 은근히 제 때에 졸업 못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견주는 상투적 인사가 횡행하는 대학원도 마찬가지다. 이게 우리의 현실. 묵과할 수 없고,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현실이 주는 잡음들이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을 권리는 또한 없다. 중앙대 사태는 공부를 여전히 '여가'로 여기며, 공부를 삶 그 자체로 여기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주는 묵직한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난, 여전히 "대학원 다녀? 편하겠다.."라는 투로 "나도 대학원이나 가볼까.."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아마 이런 시선에 대한 분노가 이번 중앙대 사태에도 겹쳐져 있다면, 나는 그 학생들의 무의식속에 쌓여진 분노를 충분히 지지하고 싶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삶을 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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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iked-83 2010-05-0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친구 결혼식에 가서 전공이 "미디어 정치경제학"이라고 했다가 분위기를 망쳐놓고 왔는데, 오늘 이런 글을 보게 되네요. 처음 와보는 서재인데, 공감과 지지를..

얼그레이효과 2010-05-02 14:55   좋아요 0 | URL
'미디어 정치경제학'? 제가 학부 시절, 가장 약한 분야였는데ㅜ.ㅜ , 반갑습니다.^^ 건승하십시오!
 

응원과 기도 고맙습니다. 저는 5월 17일을 시작으로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원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싸우다는 표현은 제게 과분한 것입니다. 저는 역사가 보여준 투사가 될 여력도 능력도 없습니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지성인들이 깨어있길 원합니다. 

제가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논문자격시험이라고 불리는, 종합시험. 이 시험의 비용이 6만원입니다. 한 분야당 2만원씩인데요. 제가 며칠 동안 서울의 주요 사립대학원을 조사한 결과, 학과마다 사정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거의 이 비용을 안 내고 시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 논문을 쓰기 위해 부득이하게 정식 학기를 초과한 경우, 원생들이 등록을 해야 하는데요. 이 비용도 상대적으로 엄청난 고비용을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물어본 타 대학원 원우들이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해줄 정도였으니까요. 

 학교 측에서는 제가 소속된 대학원 분류 체계가 전문대학원이라 그렇다고 하지만, 제가 학칙을 보니, 이 종합시험의 비용 납부에 관한 내규 조차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니는 이 전문대학원은 사람들의 외부 인식과 달리, 풀 타임으로 다니는 원생들이 많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수업을 듣는 곳이 전문대학원이라는 그 이미지가 주로 있지만, 예외적 상황이 제가 다니는 곳에 발생하고 있지요.) 그동안 원생들은 이 사실조차 공부한다고 제대로 찾지도 않고, 그냥 내고 다녔는데, 분노하신 분도 계시고, 물론 그냥 학교에서 내라고 하면 내는거지 라고 반응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종합시험비용을 거두는 과정에서, 교직원들의 갈팡질팡하는 모습들이 드러나(이 상황에 대한 익명의 제보자들의 고마운 증언으로 인하여), 지금은 제가 보기에 속된 말로 '빼도 박도'못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 많은 부조리들이 있으나 그 내용량을 보면, 이 페이퍼 스크롤 바가 너무나 길 정도로, 대학원 사회는 전반적으로 썩어 있었습니다. 힘을 빌리기 위해 연락한 총학생회는, "아니, 학교가 내라고 하는데, 학생이 어쩔 수 없지요"라며 제 행동을 이상하게 인식하는 발언을 하더군요. 학생이 학생의 처지를 모르는 현실입니다. (그것도 총학생회가 그러니 더 암울하지요)

저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하여 서울대학교 대학원 등 국립대학원 및 주요 사립대학원의 총학생회 간부 및 지인, 원우들과 접촉하여,  제가 다니는 이 곳이 얼마나 부당하게 학생들에게 납부 비용을 청구하고 있는지 글을 올리는 과정입니다.  

교수들은 정작 힘들게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원우들의 사정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대학원을 포함해 제가 조사를 하러 연락을 취했을 때, 일부 교직원들은 학생이 왜 이런 걸 물어보냐고 오히려 저에게 화를 냈습니다. 

저는, 이럴수록 신이 나고 힘이 나더군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가자는 마음이 솟구칩니다. 

고맙습니다. 

관심가져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힘이 됩니다. 

- 얼그레이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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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5-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정은 잘 모르지만... 등록금을 내고 있는데, 시험비를 따로 걷는 게 저도 이해가 안 가네요. 건투하시길 바랍니다. 결과가 무엇이든 문제제기만으로도 이긴 싸움인 거 아시죠?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27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공감 고맙습니다. 저도 이해가 안 가더군요..몇 년전부터,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잘 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결과가 무엇이든 문제제기만으로도 이긴 싸움인 거 아시죠? 라는 말..감동적입니다.(진심) (나중에 써먹어도 되지요^^?)

saint236 2010-05-2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공부하는 이들의 무관심이 제일 힘든 부분이긴 하지만 힘내세요. 화이팅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확산되는 분위기인 것 같아. 힘내려고 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욧

비로그인 2010-05-2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싸우는 방법이 홀로 단식을 하거나 그런 거라면 경험자의 조언을 듣고 참고하시는 게 좋겠네요.
다행히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함께 싸워나갈 동료들을 규합해야지요, 혼자는 너무 외롭잖아요?
아무튼 몸은 해치지 마시고 꼭 승리하시길...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29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제가 워낙 미약한 존재라, 아직 극단적 방법까진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저는 투사가 될 자격도 없는 걸요. 최대한 예의있고, 논리적으로 일단 글을 통해 접촉하는 중입니다. 그것이 안 될 경우엔. 제가 숨겨놓은 비장의 무기들을 꺼내야지요..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