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다들 가고 싶어한다는 뉴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캐슬린(릴리 테일러 역)은 여기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친구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카사노바라는 이름의 뱀파이어에게 목을 물리고, 그녀 또한 뱀파이어가 된다. 카사노바는 그녀를 물기전에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꺼지라고 말해!" 하지만, 캐슬린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겁을 먹고 체념한다. 이제 캐슬린이 카사노바의 역할을 수행할 차례다. 아벨 페라라 감독과 그의 고교 동창인 작가 니콜라스 세인트 존 콤비가 만든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어딕션>(1995)은, 캐슬린에게 "당신이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난처한 질문을 영화 속 숙제거리로 선사한다. 이건 비단 캐슬린 만의 문제가 아니다. 캐슬린은 이 질문을 자신의 주변 동료들에게 우회적으로 꺼낸다. 그리고 그녀는 수업에 흥미를 잃고, 점점 더 그녀가 고민하는 세계에 몰두한다. 그녀는 흡혈귀가 되면서, 공부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관객이라면, 그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성찰-게임'을 시작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동료들의 피를 빨아야 한다. 늦은 밤, 피를 빨기 전, 오늘의 먹잇감을 찾고, 그녀의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공부에 대한 이야기, 학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는 흡혈귀가 되면서 예전부터 가졌던 공부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과 회의를 더 직설적으로 표출한다. 예민하게 더욱 예민하게. 가령 이런 장면이다. 





전쟁터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시체를 보면서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고뇌. 주인공 캐슬린은 역겨워서 세상을 보기 싫어한다. 그녀는 영화 내내 냉정한 눈빛을 뜨는 시간 이외엔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보는 것과의 단절을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공부와 식욕. 글을 읽고 본다는 것과 욕구의 병렬.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것과 글을 읽고 본다는 것의 병렬.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것과 글을 읽고 본다는 것, 먹는다는 것의 병렬. 


캐슬린은 친구가 카페테리아에서 제공하는 햄버거를 한 입 물고, 바로 책을 펴자, "어떻게 먹으면서  읽을 수 있니?"라고 묻는다.    



친구는 말한다. "학위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캐슬린은 철학의 거장들을 자유의지를 가장한 사기꾼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는 동료들의 소극적 태도에 불만을 가진 채, 그 혹은 그녀들에게 더 거칠고 강한 그리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의 극단. 그 경계 안에서, 오늘도 동료들은 캐슬린의 제물이 된다. 캐슬린은 자신을 흡혈귀로 만든 카사노바가 한 말 그대로 동료들에게 돌려준다. "나에게 꺼지라고 말해!" 그러나, 동료들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2002년에 나온  문학비평집 <문학의 광기>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문학평론가 권명아는, 책을 통해 늘 자신이 갖고 있던 공부에 대한 고뇌를 영화 <어딕션>을 통해 사유하고자 한다. 권명아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딕션>에서 자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타인의 피를 요구하는 흡혈귀의 본성은 자신의 <현존>을 위해 <타인의 지식과 생명>을 빨아대는 지식인들의 본성과 일치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한 지식에 중독된 자들, 그들이 <오늘날의 지식인>이다. 그들은 악과 구원과 자유의지를 논하지만 자신들의 악과 구원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페라라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렇게 질문한다. "박사학위를 따면 지옥의 문이 닫힐까." 그렇다면 이렇게 만연한 악에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에게 말해라. 꺼져버리라고, 애원하지 마라, 애원 따위는 통하지 않으니까"라는 흡혈귀의 전언은 악과 타협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페라라의 전언이기도 하다. 이를 타락한 대학사회를 비판하고(28)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도 대학제도에서 발을 빼기보다는 최후의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오늘도 비굴한 웃음을 띠고 학회를 전전하는 <우리 지식인들>모두에게 던지는 신랄한 질문이기도 하다.  

피의 먹이사슬로 얽혀 있는 이 지식시장 속에서 나 하나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것인가, 내가 뭐 그리 잘난 존재라고, 꼭 대학교수가 되려고 한다기보다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지>. 이러한 자조와 타협, 자기포기 속에서 악은 중독되고 확산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지식인의 존재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포기한다, 고로 존재한다>또는 <나는 중독된다, 고로 존재한다>인 것이다. <영혼을 팔지 말 것>,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영혼>을 두고 거래하지 말 것. 페라라는 이 단순한 대답을 여러 작품을 통해 제기하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던 동료를 만나, 캐슬린은 포이에르바흐를 이야기하자며, 그녀의 집에서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고 그녀는 지식인의 태도를 물으며, 그녀의 밤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촉구한다. "왜 싫은 걸 싫다고 못해?"  



그녀는 뱀파이어가 된 이후, 그동안 자신이 처절하게 고뇌했던 내용을 담아, 열정적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철학은 선전입니다" 



캐슬린은 박사 학위를 딴다. 그리고 파티를 연다. 이 파티엔 그녀를 알고 있는 교수들과 동료들이 참석한다. 그러나 이 동료들 몇몇은 캐슬린의 이에 물린 또 다른 뱀파이어들이다. 피의 제전이 시작된다. 이것이 지식노동자의 삶이다.   

당신은, 공부와 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공부와 피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고 생각하는가. 공부는 처절한 것이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이를 만만하게 본다면, 오늘 이 수많은 지식노동자들은 단결하여 뱀파이어가 될 필요가 있다.  고로 공부와 피의 거리는 멀지 않다. 공부는 인간의 피를 통해 윤리를 되묻고, 스스로가 존재하는 이유를 점검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지식 사회는 점점 이 피의 존재를 잊고 산지 오래다. 이 존재를 다시 깨달을 때, 우리는 인간 앞에서 떳떳해진 앎의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통한 나의 상처는 오직 나의 몫, 이를 통해 맺어질 열매는 당신의 것, 그것이 '진보의 피'일지니.  우리는 이 처절한 피의 격문같은 삶을 멀리할 이유가 없다

며칠 전, 돌아가셨던 어느 시간강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경험은 생각보다 평범했고, 낯익어 보인다. 그런 시끄러움도 없고, 어떤 비극도 없이, 조용하다. 그것을 기대하고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이런 고요한 순간 속에서 삶의 어떤 흥미로운 기운을 다시 느낀다. 영화에서 보던 흥미로운 혹은 무서운 장면들이 실제로 삶에 나타날 때, 사람들은 생각보다 낯익게, 생각보다 친숙하게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상황을, 사건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받아들임을 삶의 또 다른 무서움으로 생각해야 할 지, 아니면 어른이 되는 과정으로 여겨야 할 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너무나도 편안히 삶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 낯익은 자리가 조금 낯설다. 

꿈이었으면, 팔뚝이라도 꼬집어보련만.  

<하하하>에서 문소리의 대사처럼, '대의'라는 것도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가 그 옛날 '대의'가 있는 세상을 꿈꾸었을 때, 그 세상 속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역사책을 이럴 땐 새로 쓰고 싶어진다.   

대의는 있었던 것일까. 혹은 급조된 것이었을까. 우리가 기념하는 대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꼭 우리는 이 대의 안에 풍덩 빠진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까. 

나는 왜 정작 풍덩 빠지지 못한 채, 또 미안한 마음으로 그 풍덩 빠진 사람을 애도해주는 역할에 머무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전에 제가 소속 대학원에 느끼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나름의 보이콧을 할 거라고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의 조사 과정을 거쳐, 데이타를 만든 후, 오늘 학교 게시판에 제 소신을 전하고, 저번 항의처럼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표했습니다. 

거창하게, 개혁과 저항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여력도,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살고 있는, 내가 공부하는 공간 안에서,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하는 것, 그리고 

나를 소비자 취급하는 대학원 사회의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오늘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대화를 촉구한 것에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대학 사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정작 그 안에서 늘 대학원은 주변화되어 왔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늘 마음걸렸던 걸, 부족한 한 사람이지만, 소통의 가능성을 믿고, 묵묵히 이겨내보려 합니다. 

저를 알고 있는 분들,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 마음이 연약해지지 않도록. 

교수와 제자의 위계,로 인해 침묵하지 않도록. 그냥 내고 다니면 되지라는 다수의 안전함/편안함/무관심과 친해지지 않도록.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05-17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05-1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1   좋아요 0 | URL
화이팅입니다! 아자!

비로그인 2010-05-1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일을 시작하셨군요.
종교가 없어 제 기도는 무용지물이겠고 다만 마음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2   좋아요 0 | URL
응원 고맙습니다. 정상적으로 논문도 쓰고, 책도 다시 읽기 시작하고, 이제 저도 좀 챙겨가며 하려구요.

비로그인 2010-05-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은 아닐까...걱정이 많이 됩니다.
제가 얼님을 안지 얼마 되지 않지만...줏대와 소신이 있는 분이라 강하게 느꼈던 바...
걱정 안할랍니다.
지치지 마시고 소신을 위해 끝까지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2   좋아요 0 | URL
지치지 않도록 밥도 꼭 챙겨먹고 합니다. 마기님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2010-05-18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8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직 미약한 존재라, 해볼 때까지 해볼려구요. 응원 잊지 않겠습니다.

비로그인 2010-05-1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기를 빌어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번 한 주, 용기란 말이 이렇게 소중한 건지 몰랐어요.

2010-05-18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8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과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주눅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공부한다는 것을 정상과 비정상의 양분된 구획 속에서 모호한 감정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차라리 상대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적대로 삼는 것은, 겸양된 자세와 오만한 태도를 모호하게 감춘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존재, 고민하는 존재인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공부하고 있음을 공유하는 사태에 대해, 그것 자체를 오만함으로 연결짓는다. 그들에게 겸손은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한다는 것을 감춘다는 자세에 기인한다고 믿는 것인데, 나는 그 자세에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동의하는 것은, 내가 공부하는 것 자체에 대한 열의와 신념만큼, 그것에 반대되는 입장을 유연하게 수용하고, 다시 고민해보는 태도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늘 격문의 태도로 글을 써 왔다. 매번 선언하고, 매번 좌절하고, 매번 재선언하면서, 시대와 함께 했다. 그는 정말 영화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난 정말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나는 정말 공부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유감이나, 쉽게 답할 수 없다. 

하지만, 입술에서 어떤 말 한 자라도 꺼내기 위해, 매번 선언하고, 매번 좌절하고, 매번 재선언을 할 수밖에. 

공부의 상처는 내 몫이나, 

공부의 열매는 '당신'의 것이기를. 

결국 그것이 내겐 '진보'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0-05-17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우가 무대위에서 죽고싶고, 운동선수가 필드에서 죽고싶듯이...공부를 위해서 죽을 수 있진 않겠지만, 죽을때까지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실것 같다는 생각이....
ㅋㅋ아녜요?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6   좋아요 0 | URL
그러면 좋지요^^ 근데 언젠가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려합니다.

조선인 2010-05-17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의 열매가 당신의 것이기를... 그 격언을 잊고 살았네요. 반성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7   좋아요 0 | URL
저도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천이 쉽지가 않네요. 언젠가 나도 모르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길 희망하며 공부합니다.
 

가끔 안타까운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괜찮은 사람이었다가도,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통화. 참 싫다. 학벌에 대한 문제 또한 그렇다. 더 정확하게 범위를 좁혀보자면, 학벌을 둘러싼 무의식 같은 거다. 난 학부는 3류를 나왔어, 그래서 편입을 생각해. 혹은 좋은 네임 벨류의 대학원으로 가려 해. 이건 지난 번에 '죄인 게임'이란 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을 했다. 내가 말하는 건, 3류라고 간주되는 대학을 나와서, 대학원은 사회가 속된 말로 '쳐주는 곳'을 나온 사람들의 불쑥 튀어나오는 피해의식 같은 거다.  

난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대학교를 나오진 못했다. 하지만 대학원은 -또,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곳을 다닌다.(하지만, 이 '좋은 곳'의 의미와 범위는 과연 무엇일까?-'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갈치를 먹다 걸린 가시같은 질문이다) 그러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선배들이나 몇몇 지인들이 전화를 하면, 대뜸 난 묻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선생이 좋아야 해. 대학원 이름이 좋은 게 다가 아니라구."란 말은 한다. 그러면서, "아, -예전에 다닌- '우리'대학에 대학원 있었으면 편히 다닐텐데."란 말로 친절하게 자신의 심리를 설명한다.  혹은 '결국 사회에서 쳐주는 건, 학부 학벌이더라구. 대학원 학벌이 아니더라.'는 말을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꺼내는 대학원 선,후배들이 있다.  왜 그런 말을 나만 만나면 먼저 하는 것일까. 나는 2년 전부터, 누적된 이런 경험에 신경질이 나서, 그냥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 다른 안타까운 풍경은, 대학원 내에서, 자신의 대학교 학벌이 좋지 않다는 것을 공부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짊어지고 가는 대학원 친구들이다. 간접적으로 많은 위로와 자신감 불어넣기를 해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 들을 때, 그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그러한 '결정주의'가 "난 솔직히, 이 대학원 온 거 그런 목적도 좀 있단다..'라는 말과 엮어질 때, 그 모호한 분위기는, 공부한다는 것의 외부와 내부는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 풀기 어려운, 현실과 이상의 고리와 벽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런 시선이 이른바 권력을 비판하고, 그것에 나는 좌파요와 진보요를 꼭 표시하거나 들먹거리는 친구들의 입에서 나올 때, 자신들이 다니던 옛 대학을  '지성의 온정적 향수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정체성, 그 정체성을 보존하는 교수들의 지성을 존중하는 것은 좋으나, 그 대학의 외부 현실에 대해서는, 이상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대학 사회의 더러움으로 환원시킨다. 그 더러움 안에, 자신이 다녔던 학교는 좋은 선생이 가득하고, 다른 곳은 속물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하며, 지성의 정수를 훼손시키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몰아가는 의견들이 있다.  

그런 이들 중  공부보다, 공부 외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교수들의 신상 캐기에 더 바쁜 것이 씁쓸하다. 그러면서, 자신 스스로 그러한 담론의 감옥을 만들어 놓고, 그 감옥 안에서 학문의 순수와 불순의 경계를 만들어버리려는 '의로움으로 포장된 것 같은 지적 분노'가 불편하다. 한편으론, 하나의 이슈를 꺼내면, 그 이슈에 이상한 지적 참조를 달면서,  자신은 열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투로 지적 전투에 임하는 친구들도 안타깝다.  

그러면서, 공부가 좋아서, 선택한 곳으로서의 대학원은 이데올로기에 복속되고, 나는 그런 선택의 자유에 대해 늘 사회가 간주하는 현실 세태의 눈 안에서 분석된다. '좋은 대학원 가니 좀 나아진 게 있던가?'라는 호기심, 그리고 그 질문에서 새어 나오는, 전도된 학문 세계에 대한 비판 의식. 과잉된 분노가, 과장된 비난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진중권-되기'의 열망으로, 이름 알리기에 열심인 친구들도 있다. 텍스트에 무조건 정치라는 말을 넣기 좋아하고,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너무 '저널리즘적'으로 보려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깊이 있는 텍스트에 시의성의 개입을 시도하고, 그 텍스트를 쉽게 풀어쓰고, 타인에게 전달하고, 그 타인의 반응에 힘을 쏟는 친구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대학원을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될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이건 내가 우석훈의 책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북 리뷰에서 '이름값 효과에 대한 단상'으로 돌아본 적이 있는 내 주위 현상이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네 지도교수가 누구냐, 묻고. 아, 그 교수.. 그리고 이어지는 현황 공개와 분석. '잘 지내니'라는 말 뒤에 바로 나오는 그런 말들로 귓가를 따갑게 만드는 지인들의 안부 인사가 참 싫다.

편하게 공부를 하고 싶다. 사람들을 제대로/깊이 안 만난 지 2년이 넘었다. 참고로, 2년은 내가 대학원을 다닌 기간이다.  

학문을 가십거리로 만드는 이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기간이기도 하다.  

학벌과 학문을 섞어 만든 칵테일을 권하는 이들의 이름을 휴대폰에서 지운 기간이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0-05-1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집과 자존심이 멋진 얼그레이님의 홀로서기!
ㅎㅎ홧팅!!!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