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와 관련해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부분 중 하나는. 남자 선수의 결혼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결혼이란, 남자 선수의 성적 향상을 위한 도구로 늘 표현되는 듯하다. "이제. 누구누구 선수. 곧 결혼을 하면. 마음도 안정이 되고.."라고 시작하는 말들.  이러한 표현을 자주 하는 사회를 하나 더 꼽자면, 그것은 바로 '학문 사회'일 것이다. 대학 안에 자신의 방 하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리는 여유란, 미혼인 대학원생들의 연애에 늘 '사회학적 개입'의 시선을 던지는 것이리라. 그리고 거기에 맞장구 쳐주는 '딸랑이'들(갓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 

여자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학문을 '잘'하는 데 필요한 일부분이며, 그들은 '예언자적 색조'로 학문 후배의 안녕과 축복을 기원하는 인사로써, "그래 네 나이 때는 있는 게 낫지.."라고 하는 말들이 술자리에서 사정없이 널부러지는 것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것을 주워담을만한 기운이 없는 그들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있는가를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없음을 타인에게 공개해버리는 태도, 그것이 결국 자신이 살아온 삶의 최종 태도라면? 아니, 그것보다 결국 글과 삶이 따로 노면서, 자신의 그 분열적인 속성 자체가, 딸랑이들에 의한"야. 그래도 이 분의 삶을 배워야지. 너 그러면 다 되는 거야"라는 소스와 버무려질 때. 

나는 여전히 그럴수록 "네가 아직 삶을 덜 살아봐서 그래.."라는 답에 대해 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더 만들고 있다는 걸 감추고 싶지 않다. 

학문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의한 발열을 알게모르게 당신에게 감추지 않는 '오빠'를 만나고 있는 여성분들이 있다면, 만약 그런 '오빠'들과 장미빛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 여자들이라면, 나는 당신이 결혼이라는 가시밭길 중, '교수의 아내'라는 가시밭길은 제발 가지말기를 당부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오빠가 '교회에서 만난 오빠'와 '대학원 다니는 오빠'들인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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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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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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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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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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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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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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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0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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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1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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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0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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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을 전공한 후배 녀석들이 가끔 이런 고백을 자주 털어놓는다."선배,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요.언론학이 재미가 없어요." 물론 '재미의 기준은 각각 다른 것이니까요'란, 식상한 생각으로 상황 자체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적당한 예의로, 그냥 우리 갈 길 가면 되는 거 아니요,란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선 안된다는 생각이 몇 년 동안 들었다. 나도 후배들의 고백에 담긴 고민을 어떤 선배, 어떤 스승들에게 똑같이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칼럼 자체가,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업계(난 이상하게 '학계'란 표현보다 이게 더 현실적인 것 같다)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된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단서. 반복이 계속된다는 것은,한편으로 안정적으로 현상을 사고할 수 있다는,  그리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그 상황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노련미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반복이 가중되면, 점점 쌓이는 건, 정체감이다. 뭔가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늘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그 미디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우리에게 신선하며, 도발적인 공간을 마련해주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3  

저널리즘 분야에 대한 칼럼도 마찬가지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널리즘을 바라보는 업계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 정의롭다. 정의의 선이 굵고 명확하다보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리고 경계를 긋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의 정의는 이상하게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관점이라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내세우는 데이터,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밝혀주고 있는 현실은, "나, 그래도 이 방송사 현실 잘 알지?"정도로만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미디어 트렌드에 대한 소개나 그 수용에 대한 감각적 제시를 잘하는 곳은, 언론학이 포진되어 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kt경제경영연구소'같은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권력은 이미 이동했다.(현실의 껍질을 더 까보면, 새로운 미디어 관련 예측 보고서의 경우, 많은 언론학자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런 경제경영연구소의 예측 결과, 현실 분석을 베끼고, 그냥 정리하는 수준에서, 한 편의 완성된 논문을 냈다고, 오늘 내 할 일 다했다고 자위한다. 그리고 전문가 소리를 듣길 바라는 게 언론학의 현실이다) 

미디어라는 오늘날 대중과 가장 친숙한 사물 그리고 생각의 매개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의 생각을 너무나 모르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너무나 규범적인 비평들이 득세한다. 도덕의 언어 차원에서 부르디외가 말했던 '하강하는 부르주아지'의 언어에 담긴 단순한 '포르노크라시'의 언어만 툭 던져놓고 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또 미디어 소비에 있어서, 그 현상의 이면을 더 깊이있게 바라보려는 노력 대신 표피적인 사색, 그것보다 더 무서운 '관용어구'적인 사색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6

언론학 분과 안에 있는,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가 있다면서, '늙은 나이'에 내가 그래도 이 정도로 젊은 아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디냐는 교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뻔뻔하게 칼럼에서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 경향'을 논하며, 문화의 권위자 노릇을 하고 있다. '불성실'이 성실보다 추앙받는 현실 안에서, 그 어떤 좋은 분석안이 나올 수 있을까.  

가장 큰 문제는, 언론학에 있는 많은 업계 사람들이 자신의 '밥줄'이 끊길까봐 그 누구보다 전전긍긍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나마 '미디어'라는, 분명한 대상이 있으니까 연구 프로젝트 따기도 쉽고, 어느 정도 수익도 보장된다는 무시할 수 없는 그 점 하나로, 이 안의 현실과 친해지자는 생각으로 버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누구보다 신문계, 방송계, 뉴미디어계 현실을 잘 안다고 떠벌릴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들의 시선은 '밥그릇'차원에서 진행되는  토픽에만 열을 올린다. 대중들에게는 전혀 다가가지 못하는 '정의의 문제'만을 토픽으로 삼아 지면을 채운다.  

그들에게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는 단순한 기능이자 실용일 뿐이다. 그들은 정작 그릇된 미디어 소비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구축하는 담론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문화가 없고, 교양이 없고, 인문이 빈곤하고, 사유는 닫혀 있으니, 아무리 젊은 자가 들어가도 이내 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게 이 곳 언론학이다. 그 누군가가 "교수님 어제 방송 출연하신 거 잘 봤습니다. 어제 신문 칼럼 잘 읽었습니다"라는 말 대신, 빨간펜을 들고, "적어도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사람이, 이렇게 진부한 생각으로 현상을 바라보세요?라고   대꾸할 때가 되었다. 이미 누군가가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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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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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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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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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2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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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들어와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 문제. 논문의 첫 머리에 소설 몇 구절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예전에 이 대화의 내용을 졸업논문 준비 세미나 시간에 발표했고, 지도교수와 동료들은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어쩌면 지난 날 내가 무심코 저질러버린 짓에 대한 반성. 논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연구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한 성찰과도 이어진 것이었다.  

내 경험을 소개하자면, 나는 2008년에 대학교 총학생회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문화기술지를 쓴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연구를 통해 과거 pd나 nl같은 노선에 의해 좌우되었던 기존 연구의 시선에서 벗어나, 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교수와의 관계는 좋은지, 바쁜 시간 쪼개어 연애는 하는지,혹시 선배가 등떠밀어 출마한 것은 아닌지, 등등 관련 연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질문들을 준비했고, 나름의 틀을 구성하여, 그들이 차마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어떻게 그들을 차갑게 보는 학생들의 시선과 대립되는지를 조명하고자 했다. 문화기술지라는 연구 방식을 아우르는 질적 연구의 경우, 최근에 강조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치유적 글쓰기'인데, 이는 연구를 하는 사람과 연구 대상이 된 이들이 함께 연구 문제를 놓고 서로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상처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부분들을 고민해보는 것이었다. 특히 이 경우 연구를 하는 나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런 그들의 상처를 오해하지 않도록 오히려 더 냉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더 돌아봐야 한다.  

특히 난 당시 논문의 그 '딱딱함'이 싫었고, 내 연구 주제를 뭔가 재미있게, 뭔가 따뜻하게,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문화연구라는 '혼성과 절합의 지식 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욕심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제는 논문을 다 완성하고 나서, 그리고 발표를 하고 나서, 지도교수와 동료들에게 칭찬을 듣고 나서부터 발생했다. 어떤 죄책감? 내가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같은 생각들이 논문을 쓰고 난 지 일 년 후(2009년),  세게 닥쳤다. 폭풍의 눈은 이것이었다. 내 논문에 인용된 소설들. 내 기억으론 강석경의 숲속의 방과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중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한 대목이었다.  

난 논문을 쓰던 당시 나를 이렇게 합리화시켰던 것 같다. "그래. 나는 딱딱한 논문만 읽는 사회과학도가 아니라구. 난 평소에 소설도 읽으면서, 이렇게 내 감성도 키워가고 있다구." 난 거북 등껍질 같은 그 딱딱함이 싫었고, 그래서 한때 '문학 같은 논문'을 쓰고 싶다는 대책 없는 선언을 동료들,그리고 교수들에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내 글쓰기 자세에 대한 반론이 들어왔다. 국문학을 전공한  오랜 친구가 나의 논문을 보더니, 일침을 놓는 것이었다. "오빠, 난 이렇게 요즘 문화연구자들, 자기 연구에 소설을 딱 앞에 갖다 놓고 시작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문학에 대해. 소설에 대해" '무례'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난 도대체 내가 인용한 소설에 대해 어떤 무례를 저질렀던 것일까? 

5  

바로 지점을 콕 찝어보면, 내 무례는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한계에서 시작한다. 문화연구는 미학적 관점에 약한 부분이 있다. 미학적 판별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제도, 환경, 기술 등등에 밀착하다보니, 내가 읽고 있는 /접촉하고 있는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독해는 사라지고, 그 독해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위'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사람들의 행위에만 집중하다'란 측면에서 두 가지 문제를 쉽게 지나치고 말았다. 첫째, 내 서재에 있는 소설 중, 요 놈이 이번 내 연구에 적절한 참고가 되겠어. 내 논문을 적당히 부드럽게 만들어 주겠지? 난 그래도 통계돌리는 놈들과는 차별된 그 무엇이 있겠지?라는 어긋난 과시. 결국 나는 연구 대상자가 아닌 '내 행위에만 집중한 꼴'이 되고 말았다. 둘째. 소설에 대한 어림잡기였다. 이는 저자에 대한 어림잡기이기도 했다. 그래, 이 구절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네, 라는 그 추측으로 인해 핀셋에 걸려버린 몇몇 문장들에 대한 내 예의없음. 그래서 나는 적어도 그 구절들이 나오게 된 맥락들을 꼼꼼하게 챙겨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 소설 속 사람들의 말을 죽이고, 내 말을 살리고 만 꼴이 되었다.  

소설을 논문의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문화연구자들(나를 비롯한)의 오류는 이것이다. 그들은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생활을 연구하는 만큼, 소설에 담긴 내용을 생활 자체로만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그래서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다다르지 못한 생활상에 대한 접촉, 그것에만 머무른다) 그랬을 때, 우리가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책을 만지면서, 글자를 쓰다듬으면서 생기는 새로운 입체적 시각들, 그 황홀함에 대한 깊은 고민들은 사라지고, 소설의 구절들은 단지 내가 접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실천으로만 머무르게 된다. 

특히 나처럼 문화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오류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들은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빌어, '문학'과 '상상'이라는 어감이 주는 '부드러운 창조력(?)' 같은 자신만의 기대치를 만드는데, 이것은 깊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이들의 관용 표현을 꼽자면, 이와 같다 "역시, 소설을 읽어야 해. 왜 내가 이걸 몰랐지? 소설이 주는 그런 맛이 있거덩요. 문학이 주는 그런 감수성이 필요합니다"같은 과장)그것이 과연 소설 몇 구절을 인용한다고 해서 해결 가능한 것일까? 오히려 이런 '인용의 빈번함'으로 인하여, 연구자인 '나'는 오히려 나의 '지적 빈곤' 그 자체를 과시해버린 것은 아닐까? 소설이 논문의 액세서리가 되었을 때, '억압된 것으로서의 소설'은 결국 내 목을 조를 날이 온다는 것을 안다.  혹시 주위에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휴대폰 고리에 걸고 다니는 이들을 발견한다면(<-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감수성을 조심하라.  최근에 나온 소설들을 두루두루 이야기하면서, "정말 재미있지 않아?", "난 그거 별로던데"라는 말 정도로 오랜 시간 수다를 떠는 이들,'(원딩)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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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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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8-1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0년간 IT 분야만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인문 쪽 용어들이 정말 어려워요.
웃으시겠지만, 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구, 사회과학적이 무엇인지두 잘 모르겠구.
아마.. 제가 전산 관련 용어로 무엇인가를 다룬다면, 그 분야를 모르는 분들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

가끔 동시대를 사는 사람인데, 아아, 난 왜이리 모르지 라는 생각과 함께 흥미롭기도 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7 02:42   좋아요 0 | URL
그것도 몰라요?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겠죠..^^

2010-08-17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끔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발표하러 온 교수들이 말이 아닌 주먹으로 붙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예의'로 포장된 유사 논쟁 속에서, '반대'의 언어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막전막후'처럼, 백분토론이 끝나고, 서로 할퀴고 뜯던 이들이 웃으며 악수하고 단체사진을 찍듯, 이 바닥에선 '명함의 의리'만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넥타이를 벗고, 소매를 걷고 차라리 주먹으로  서로를 엄청나게 패는 장면을 상상했다.(지루한 논쟁, 포장된 격론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일이 유일한 것이다) 왜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걸까? 이런 말을 그들에게 늘 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해괴한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이들이, 오히려 그런 해괴함 자체가 주장의 강건함을 보여준다는냥 과시할 때, 나는 그 태도들이 싫었다고. 왜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냐고. 사랑하는 것 자체를 왜 이렇게 변태처럼 비비꼬아서, '합리'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그럼으로써 그 미움이 자신의 사랑을 더 표현할 수 있을 것임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그럼으로써 여기에도,저기에도 양다리를 걸친 채, 시시한 사랑 고백을 글로,말로 채워놓았냐고. 

그래서,나는 그들에게 격투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차라리 시원하게 주먹으로 치고 받은 후, 질질 짜거나, 격함 이후에 온 그 멍한 상태에서 온 솔직한 고백들. 그게 우리가 하고 싶은 진짜 말, 진짜 고백, 진짜 언어가 아니겠냐고. ,난 반-지성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우리의 세계를 더욱 더 환하게 비쳐주길 바라는 쪽이다. 하지만, 매번 '긴장감의 유지'라는 말로, 학문 세계가 요구하는 규범 효과에 적셔져 있는 나의 가슴을 볼 때, 남아있는 건, 애정보다는 내 애정을 얼마나 예쁘고 젠틀하게 보일 수 있을지 염려하는 '방식'밖에 없다는 한 숨 뿐이다.   

4

이 바닥에 필요한 건 어쩌면 지긋지긋할 정도의 감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성의 동료를  정말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정말 진정으로(내 사랑때문에) 미워할 수 있는 감성.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을 혐오할 정도로 사랑하는 단계까지 갔음을 고백하고 쟁투할 수 있는 감성의 단계. 이 단계를 가려면, (엉뚱하게도) 빼어난 논문 발표보다는, 주먹이 필요하다는 상상.  

 '고고한 자'들의 분노가 정작 학회나 세미나가 아닌,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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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으루다가 추천 한방~^^ 근데, 사진의 남자분들이 모두 저렇게 다리를 올려놓고 있네요, 허 참~ 쩍벌남하구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때려주고 싶은 부류입니다..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52   좋아요 0 | URL
하하하.그러고보니 다들 왜 저런 포즈를.^^

로쟈 2010-08-1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와 지젝이 '실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부른 거로군요.^^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16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로쟈님. 참고로 '고고한 자'라는 표현은 예전 로쟈님 블로그에서 본 '고고한 표범'에서 변형된 것입니다.^^(뒤늦게 양해를 구합니다.^^;;)

穀雨(곡우) 2010-08-1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백분토론 후 펼쳐지는 이종격투기 엄청난 시청률이 예상된다는...^^ 맞아요.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포장된 논쟁의 표출이 때로는 토론 자체를 떠나 혐오스러울때가 있더라는 사실. 한 대 쥐어박음 좋겠다 싶으면서 말이지요.ㅋㅋㅋ
역시 고고한 자는 모두 젠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군요. 고개숙인 저 친구, 너므 불쌍해요...^^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23   좋아요 0 | URL
한때 지하철에서 제 모습이었습니다. ㅡ.ㅜ

미지 2010-08-1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학계뿐 아니라 일상 전체를 지배하는 바로 그 포장 '방식'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술을 많이 먹게 되는 걸까요?
폭탄주... 분노의 어두운 폭발... --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5:0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 쓰고 나서, 저도 가끔 학계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누군가에게(제 동료들에게)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어 두렵군요. 그래서 술은 자제하는 편입니다.크윽.

마녀고양이 2010-08-1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계는 모르겠지만, 회사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보면
회의 석상에서 엄청난 주장, 다툼, 심지어 재털이까지 날아다닙니다.
매번 서로의 입장은 평행성을 긋죠... 그런데 진짜 웃기는건,
지들끼리 슬쩍 술자리에 가서 여차저차 웃기는 매듭을 지어 온단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들이나, 그런 상술에 익숙하지 않은 벤처 업체들은 먹히기 어렵죠... ^^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24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회사 프로젝트 회의 풍경도 궁금합니다.

pjy 2010-08-1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거시기 하게도 멍석깔아주면 못하는 이상한 분들이 많죠~~
대부분의 확실하고 솔직한 의사표현과 제대로 된 타협은 회의말고 딴 곳에서 이루어지죠ㅋ 저도 완죤 공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3 01:18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확실하고 솔직한 의사표현과 제대로 된 타협은 회의말고 딴 곳에서 이루어지죠ㅋ -> 공감입니다!
 

졸업논문을 준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건, 사실 '무엇을 더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내 결과물이 주위 예상보다 오래 걸리는 건, '뺄셈'의 위력을 스스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만두피 안에, 고기도 넣고, 이런 저런 야채도 넣어보자는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건, 그런 욕심이 누군가 나의 만두를 젓가락으로 찝었을 때, 쉽게 부숴질 것 같다는 예상이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졸업논문을 가득 채운 분위기를 표시하는 한자를 꼽으라면, '無'가 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뺄셈이 그동안 내가 준비한 것들을 다 무너뜨리는 것 같아도, 요즘은 그런 쓰라림이 이상하게 좋다.  

변태는 화려하지 않다. 지극히 기본/근본적인 것이 변태적이다. 내가 준비하는 성과물에 바라는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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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8-0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 비유가 정말 촌철살인입니다. 두 학기를 막 끝낸 저도 슬슬 논문의 압박이ㅜㅜ

얼그레이효과 2010-08-04 20:03   좋아요 0 | URL
바라님은 잘 하실 겁니다.^^!

비로그인 2010-08-05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만의 독특하고도 탁월한 만두를 빚으실 거라 믿습니다.
더운데 건강도 챙기시면서 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8-05 14:1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오늘 제 만두 내용의 알짜배기 하나를 페이퍼에 공개할려고 합니다. 관심있으신 대목이라면 같이 고민 공유하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