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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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월부터 20253월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불멸의 화가 반 고흐><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반 고흐전은 그동안 32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많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그의 작품을 제법 감상했기에 이번에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러갔다.

 

카라바조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는 화가였다. 그의 본명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이며 카라바조는 화가의 이름이 아니라 밀라노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베르가모 지역의 도시 이름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이름이 같아 그와 구별하기 위해 출신 지역인 카라바조로 불리게 된 것이다.

 

1571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카라바조는 성격이 별나 가는 곳마다 사고를 쳤다. 소아성애이자 술버릇이 나쁘고 다혈질인 그는 자주 폭행사건을 일으켰고, 1606년에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카라바조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 후에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곳을 전전했고 결국 로마 남쪽의 한 해변에서 객사하고 만다. 이런 이야기들이 정확하지 않거나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카라바조가 불한당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17세기에서 18세기 유럽의 미술, 건축, 음악, 문학 등을 아우르는 예술 양식인 바로크(포르투갈어로 비뚤어진 모양을 한 기묘한 진주라는 뜻)의 출발은 성소에서 그림과 조각을 몰아낸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에 맞선 트리엔트 공의회의 반종교개혁의 공표였다. 그들은 오히려 신심을 고양시키고 로마(가톨릭)의 우세를 위해 그림, 장식, 문양을 장려했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한다.(나무위키)’ 그러한 특징의 바로크 미술은 카라바조에 의해 시작되었고, 루벤스와 램브란트가 그 뒤를 이었다.

 

[카라바조는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신비롭고 혁신적인 화가이다.

카라바조는 회화에서 뒷날 바로크 예술이라 이름 붙는 시기의 정점에 있었다.

그는 직설적인 언어와 극적 효과에 대한 탐구가 결합되어 빛과 어둠의 대조에서 오는 순간적인 긴박감을 그림에 부여했다.

- 카라바조 1571~1610, p.7, 47]



-“카라바조 그림에서 조명은, 위에 달린 단일 광원으로부터 반사광 없이 빛을 뿌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마치 검정으로 도배된 방안으로 단 하나의 창문을 통해서 빛이 유입되는 것 같았다.”

-줄리오 만치니-

 

빛의 대가답게 카라바조의 그림은 대부분 배경을 어둡거나 검은색으로 처리하고 사람이나 사물만이 채색되어 있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한 줄기의 빛이 포인트가 되어 강조하고 싶은 곳에 머물렀다. 배경이 어두운 탓에 시선이 분산되지 않아 엄청 집중이 잘 되었다. 한 그림을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종교화가 많아 가톨릭교도인 내가 생각할 것이 많았고, 경건하고 경외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미켈란젤로 메리시

 

곱슬머리 소년의 모습에서 카라바조의 얼굴이 보인다. 귀 뒤에 꽂은 꽃은 두 개의 잎사귀가 달린 흰 장미는 사랑의 열정을 상징한다. 소년의 오른쪽 눈꺼풀 아래 고통의 눈물이 보인다. 개인 소장인 이 작품 외에 다른 두 버전이 있다.

 

[도마뱀에게 손끝을 물린 순간, 소년의 놀란 표정은 영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과 결부된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처음 제시하였다....초록색과 갈색으로 칠해진 과일들은 오직 빛의 반사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카라바조, p.84]


-<성 토마스의 의심>-

 

예수는 스승이 부활한 사실을 믿지 못하는 제자 토마스에게 창에 찔린 자국에 직접 손을 넣어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체포>-

 

배신자 유다는 그리스도에게 입맞춤으로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린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 유다, 성 요한의 다채로운 모습을 그리면서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을 표현했다. 옆모습을 보이며 도망가는 성 요한은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병사들의 검은색 갑옷을 번쩍거리게 하는 빛은 화면 전체에 역동성을 더해 주는 동시에, 인물이 왼쪽으로 치우친 구도에서 균형을 맞춰 준다.

- p.123]


-‘조토두초<유다의 입맞춤>, ‘난처한 미술 이야기 5, 양정무, p. 148

 

배신자 유다의 입맞춤은 워낙 유명해 같은 소재로 여러 화가가 작품을 남겼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살아있는 사람처럼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골리앗의 머리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윗이 들고 있는 칼날에 적힌 글씨는 겸손함은 오만함을 죽인다라는 뜻이다.

-p.150]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프란체스코 바사노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와 대화하는 이 장면에서 마르타는 삶의 기쁨에 전념하는 여인으로, 마리아는 관상하는 삶의 모범적인 예를 상징한다. 조르조네 화풍의 풍경에서 빛은 구름 낀 하늘을 환히 밝히며, 이 순간의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강조한다.

-전시 설명 중에서]

 

성당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약간 울분을 토한 부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등장하는 구절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두 자매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르타는 하루 종일 힘들게 집안일을 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의 시중만 든다. 이에 마르타는 불만을 느끼지만 도리어 예수님은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는 느낌이라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같이 성경 공부했던 멤버들은 거의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들이라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물론 이 구절이 전하는 본래의 의미는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경청하라는 것인데, 다들 마르타에 빙의되어 마치 우리가 그런 일을 겪은 양 억울해하며 흥분했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마르타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생각하니 여전히 마리아가 얄미워 보였다.



바로크 미술의 또 다른 특징은 그림에 허무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러 정물 작품에 해골이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인간은 살면서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어차피 끝은 죽음이니 그냥 제멋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 후의 세계를 의식해야 하는지 언제나 확실하지 않다. 카라바조는 현재를 선택한 건 아닐까? 그러다 매번 눈물과 회한으로 구원을 기도하며 성 프란체스코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황홀경을 그린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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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04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술의 전당에 카라바조 그림 보러 갔다가 카라바조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을 쳤는데 사람들이 숨겨줬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아니 그건 그 전에 읽었던 책에서 알게된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게 참 의문이더라고요. 어떻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숨겨줄까? 그게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는 가능했던 것인가? 이래서 그림을 보면서도 내내 ‘살인자였는데‘ 하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숨겨주었다면 그 살인에 명분이 있었던걸까? 막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아 카라바조에 대한 평전을 읽어봐야겠다 생각을 했었는데요. 결국 책만 검색해보고 사지도 읽지도 않았지만. 그런데 소아성애라고요? 소아성애는 명분이 없으니 이해하기를 포기해야겠어요.

페넬로페 2025-03-04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 전시를 통해 카라바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어요. 카라바조에 관련된 책은 그의 연대기에 따라 행적과 그림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었어요.
이 화가에 대해서는 부풀려진 얘기도 많고 확실하게 검증된 것도 아니어서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아요. 그 시대는 수업도 도제식이고 예술가가 후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살인을 해도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에 대한 도덕적 평가보다 지금은 거의 그림에 대한 평가만 있는 것 같아요^^

hnine 2025-03-04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카라바조에 대한 영화를 두편이나 상영하고 있어서 보러갈까 하고 있던 참이랍니다. 그중 한편은 말씀하신 살인사건에 대한 것이더군요.
양정무님의 미술이야기 5권에 카라바조 이야기도 나오나요? 저도 가지고 있는 책인데 못찾았어요.

페넬로페 2025-03-04 13:50   좋아요 0 | URL
카라바조 전시가 고흐전에 비해 엄청 한산해서 쾌적하고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어요.
저는 그림들이 대체로 마음에 들었어요.

양정무의 책에는 카라바조에 대한 언급은 없어요.
저는 예수에게 입맞추는 유다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비교하기 위해 이 책을 가져왔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로크 예술에 끌리더라구요^^
처음 카라바조를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분노조절 장애가 아니었나 했습니다.
그의 재주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게 인상깊었던 카라바조의 작품은 골리앗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은 작품이예요.
제가 갔을 때는 관람객이 많았었는데...

페넬로페 2025-03-04 14:51   좋아요 1 | URL
처음에는 카라바조라는 화가가 궁금해 갔었는데
저도 완전 바로크 미술에 빠져 버렸어요. 한 작품마다 오래 멈춰 서 있었어요.
카라바조의 작품 모두 좋더라고요.
느낌인진 몰라도 다른 화가보다 카라바조가 좀 더 낫다는 편견도 가졌습니다 ㅎㅎ
그림 보면서 같이 간 언니에게 성경에 대해 설명하는 재미도 쏠쏠하더라고요 ㅎㅎ
미술관 전시는 복불복인 것 같아요.
비엔나 1900도 제가 갔을땐 한산했거든요^^

바람돌이 2025-03-04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워낙에 강렬한 그림을 그리고 재주가 출중해 교황이 그를 많이 아꼈어요. 그래서 온갖 사고를 쳐도 다 넘어갔다죠. 살인도 아마 제 기억에는 술먹고 싸우다가 그런걸로 들어던듯.... 결국 도망을 갔는데 그 후에도 계속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간절하게 보내고 하다가 결국 객사했다는 기억이 나네요. 그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츠바이크의 책에서 읽었던거 같은데 또 기억이 가물가물..... ㅠ.ㅠ

페넬로페 2025-03-04 23:15   좋아요 1 | URL
테니스를 치다가 상대방이 속임수를 썼다고 욱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고요. 그를 돕던 실력자들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몰타 섬의 감옥에서 탈출했어요.
츠바이크의 어느 소설인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림만 본다면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정말 좋더라고요.
확실히 눈에 띄어요^^

희선 2025-03-05 0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라바조가 램브란트보다 먼저였군요 빛의 화가라는 말 램브란트 이름 앞에서 본 듯도 합니다 성격이 별났군요 카라바조는 예전에 이름만 조금 들어봤네요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은 별로 안 봐서... 본래 이름이 미켈란젤로였다니, 미켈란젤로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했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5-03-05 08:26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름 정도만 아는 화가였는데 전시회가 있어 다녀왔어요. 램브란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림이 좋았어요^^
 














딸아이가 어렸을 때(4살이나 5살 즈음) 구립 도서관에서 무료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참여해 종이로 뭔가를 만드는 수업이었다. 소란스런 분위기에서 작품이 하나씩 완성되어 강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강사는 우리들에게 탁자에 남아있는 자투리 종이를 찢어서 소리 지르며 위로 날리라고 했다. 강사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깜짝 이벤트를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지도 않던, 갑자기 들어온 강사의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은 기쁘게 소리 지르며 종이를 찢고 흩날렸지만 난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감각을 느끼거나 즐겁지도 않았던 그 날의 내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딸아이는 아마 내 옆에서 종이를 날렸을 것이다. 난 딸아이가 종이를 찢고 날리는 것을 도와주며 막막하게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한강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는 내내 그 날이 생각났다. 이 소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껍데기와 그 속을 들여다보는 내용이라 그런 것 같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그 날의 느낌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소설로 내가 왜 그랬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둘러싼 껍데기가 너무 억세고 굵어 그것을 제거하고 내 속을 볼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아 나에게 종이를 찢고 흩날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남들이 보기에 동정을 느낄만한 지독한 상처가 별로 없는, 그저 하루를 평범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이 세상은 만만치 않다. 나를 다독거리며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더 많은 껍데기를 쌓아 올리며 버티고 나를 구슬리며 괜찮다고 자족하며 산다. 이러다 우리는 영영 속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예술 작품으로 시작된다. 조각가인 장운형은 사람의 신체에 석고를 입혀 그것을 떼어내는(라이프캐스팅) 작업을 한다. 글을 읽으며 그가 하는 작업을 상상해본다. 석고를 개어, 뜨고 싶은 신체에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다. 석고는 굳으면서 피부에 일어나는 화학 반응으로 점점 뜨거워진다. 뜨겁게 느껴지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다. 석고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끌로 신체의 선을 따라 절개해 떼어낸다. 몸의 껍데기는 주름과 터럭의 자국까지 남길 정도로 정교하지만 속은 시커멓게비어있다.

 

[결국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空洞)이었는지도 모른다. -p12]

 

어떤 형식이든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장운형은 큰 상처가 있어 자신을 학대하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의 몸을 집요하게 석고로 라이프캐스팅하기 원한다. 속을 보고 드러내기 위해 먼저 자신의 껍데기를 직시하게 한다. 겹겹이 쌓아 단단해졌다고 여겨진 껍데기는 사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허울이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조용히 뒷모습을 보이는 순간(p.270)’ 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껍데기를 깨부수며 안을 보기를 원했던 장운형은 E에 의해 자신의 몸이 라이프캐스팅 될 때 견디기 힘들어 한다. 공포와 노여움을 느낀다. 끈질기게 타인의 몸을 뜨기를 원했던 그는 정작 자신의 껍데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사람의 것 같다(p.312)’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몸이 고스란히 프린팅된 것의 이물감과 난처함으로 LE, 장운형은 껍데기를 깨부순다. 여태껏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몸에 감싼 채 살아온 집착은 허탈함만을 남긴다. 동시에 뭔가로 부터 꺼내어진 그들은 자유를 얻는다.

 

장편인데도 이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치밀하다. 한강 작가가 지금도 계속 붙들고 있는 폭력과 상처, 그럼에도 희망과 사랑으로 가는 여정이 여기에도 있다. 여러 에피소드로 연결된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것이 담겨 있어 좋았다. 읽는 재미도 있었다. 다만 마지막 E 부분이 약간 평범하고 신파적이기도 해서 아쉬웠다.

 

이 소설에는 채식주의자의 전편 정도로 여겨질 만큼 불편한 방식도 들어있다. 한강 작가 특유의 그 방식 말이다. 작가의 그 방식에 불편을 느끼는 독자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을 질책하거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에 반대한다. 예술에서의 소재와 방식은 예술가의 권한이자 독창성이기 때문이다. 작가마다의 고유한 방식을 존중하고 싶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312~313]



 

 











그대의 차가운 손L은 어릴 때의 상처로 인해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여성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먹기 시작한 음식으로 살이 찌고 그것으로 성폭력은 벗어났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갇히게 된다. L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살을 빼려고 한다. 강박은 L을 피폐하게 하고 그녀를 폭식증 환자로 만든다. 10분 동안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고 목구멍에 주먹을 넣어 토한다. 거기다 하제까지 사용한다.

 

언젠가 지인과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그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난다. 살집이 있는 어떤 여자가 단팥빵을 먹으며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인은 저렇게 뚱뚱하면서도 어떻게 단팥빵이 넘어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난 그 말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 침묵은 아마 긍정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평소 계속해서 먹어대는 먹방을 싫어하고 살이 찌면 당연히 먹는 것을 조절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나도 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아니타 존스턴의 달빛 아래서의 만찬을 통해 중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배고파서,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심리적 허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심리적 허기는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 위는 한정되어 있는데 음식은 들어온다. 몸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몸의 한 부분은 중독되어 있고 한 부분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대개는 이 싸움에서 패배를 선택한다. 상실은 너무 아프고 위로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그립지만 괴로운 대상들은 사막을 지나가다 잠시 스친 풍경들이다. 조우했을 뿐 오아시스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인생에 오아시스가 없다고 생각하면 익숙한 것들의 막강한 존재감이 다소 상대화된다. 중독보다는 생존의 힘이 세다고 믿는다.]

 

이러한 말들이 L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 맥락들과 이어져 있는 것 같다.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공부와 나의 각성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인터미션을 포함해 230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굳이 이렇게도 긴 러닝 타임이 필요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의도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결국 라즐로 토스라는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려면 그가 거쳐 온 생의 여정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잘 설명하고 알려주기 위해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라즐로 토스>의 삶엔 여러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내는 개인이 존재한다. 유대인, 예술가, 건축가, 홀로코스트, 이민자, 미국 자본주의와 백인 권위주의에 의한 폭력, 시오니즘, 마약 중독자 등이다. 이 모든 것이 그를 형성한다. 두꺼운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라즐로 토스의 아이덴티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통째의 삶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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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점점 타인을 이해하는게 어려워져요. 타인을 이해한다는건 정말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알지 않으면 함부로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5-02-26 00:0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이건 관심이나 측은지심의 문제와는 좀 다른건데, 그냥 섣불리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5-02-25 2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한강 작가님 좋아하는데 노벨상 수상 이후 약간 멀어진 느낌입니다 ㅜㅜ 노벨상 타시기 전에 많이 읽었어야 하는데 ㅡㅡ <그대의 차가운 손> 줄거리가 흥미롭네요. 조각=껍데기 라는 소재라니~!!

제가 요즘 심리적 허기가 생겨서 뭔가를 많이 먹나 봅니다...

페넬로페 2025-02-26 00:08   좋아요 3 | URL
한강 작가님 노벨상 수상 기념으로 읽은 책은 재독하고, 읽지 않은 책은 읽어 보려고 해요. 내용을 떠나서 문장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모국어로 읽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 넘 좋아요.

저도 오늘 10시 넘어 라면을 먹었어요. 조금씩 먹는 것 같으면서도 모아보면 엄청 많은 것 같아 고민입니다^^

2025-02-26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26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2-28 0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편은 이 책 하나 남았어요^^

페넬로페 2025-02-28 10:36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저는 올해 천천히 하나씩 읽어 보려고 해요^^

서니데이 2025-02-28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230분이면 재미있다고 해도 길어서 부담될 것 같아요. 시간이 길면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고요.
내일은 삼일절이라 연휴가 되겠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3월에도 좋은 시간 되세요.^^

페넬로페 2025-02-28 18:42   좋아요 1 | URL
영화가 괜찮았고 재미도 있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너무 길어 힘들었어요.

내일부터 3월이네요.
오늘 하루종일 봄기운을 느꼈습니다.
3월도 열심히 살아 보겠습니다^^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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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하지만, 신랄하고도 세심한 저자의 통찰은 책을 잊게 만든다. 지나간 시대를 나타낸 말들이 지금도 뼈를 때리는 건, 아직도 세상이 온전하고 경건하게 정진하지 못한 탓이리라. 지속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회적 거대 담론의 필요성을 이 책이 말해준다. 내게 독서인의 자세를 각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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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3-01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감탄했어요. 사고 영역이 확대되는 느낌이 들었죠.^^

페넬로페 2025-03-01 17:29   좋아요 1 | URL
네, 독서에 대한 감상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저는 늘
겉핥기식이어서 많이 각성했어요^^
 














역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어떤 내용이든 역사엔 지나간 것들에 대한 결과만이 존재한다. 완벽한 진실을 알 수 없는,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그것을 후대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해낸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서로를 죽이고, 빼앗고, 배반하고 배반당한다. 차가운 한 뼘 땅에 묻히고 말 그들은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처연한 이야기다. 주어진 처지대로 먹고 마시며 육체를 보전해 하루를 살아내야 되는 한 그 부질없음의 루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허무하고 모순되며 쓸모없음에도 를 보전하기 위해 지금의 현상에 매몰되어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 앞을 내다보기가 힘든 것이다.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의 영토는 동쪽의 파키스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쪽의 마케도니아까지,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이르렀다. 그리스인은 페르시아 인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지만, 페르시아 인은 매우 진보적인 문명을 이룩한 대제국이었다.

-‘전쟁 연대기’, 조셉 커먼스, 니케북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중에서.]

 

이미 거대한 제국을 이룬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는 바뵐론을 함락한 뒤 스퀴타이족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다. 인도에서 승리를 거둔 후였다. 이스트로스(지금의 도나우)강을 지나 우크라이나 지역과 흑해 지방의 남부 러시아로 전진한다. 헤로도토스는 스퀴타이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의 풍속, 관습, , 그들이 생겨난 경위와 스퀴티스 땅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다. 워낙 넓은 지역이라 볼일을 보기 위해 일곱 가지 언어를 위한 일곱 명의 통역이 필요할 정도이다. 이 부분은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알고 있는 대로 이 지역의 추위는 워낙 극심해 다레이오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한 넓은 초원을 넘나드는 스퀴티스 지역의 사람들은 유목 생활을 하며 활쏘기에 유능했고 잔인하면서도 용감했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p.389)’ 정도였다.

 

스퀴타이족은 다레이오스의 힘이 무서워 정면 대결을 하지 못하고 페르시아인보다 하루 행군 거리만큼 앞서 퇴각한다. 퇴각하면서 도중의 우물과 샘을 메우고 풀을 망가뜨린다. 페르시아인은 스퀴타이족의 나라를 지나며 파괴할 것이 없었다. 그들이 도망가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다레이오스에게 스퀴타이족 왕인 이단튀르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로 말하면 여태껏 어떤 인간도 두려워 도망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대가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 아니오....우리 스퀴타이족에게는 도시와 경작지도 없소이다. 그런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함락되거나 황폐화될까 두려워 서둘러 그대들과 맞서 싸우겠지요....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는 그대들과 싸우지 않을 것이오..그리고 그대가 내 주인이라고 말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해 주겠소.

-p.427]

 

결국 다레이오스는 스퀴타이족의 기습 공격과 물자 보급의 문제로 그들을 정복하는데 실패한다.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그 전철을 밟은 것 같다

다레이오스는 리뷔에도 정복하지 못한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인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킨다. 밀레토스의 참주인 아리스타고라스가 여러 나라를 다니며 반란을 부추긴다. 역사 5권은 여러 그리스 민족의 관계에 대해 지루하게 설명하고 있다. 읽기가 쉽지 않고, 읽고 나서도 내용을 기억하기가 어렵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는 참주의 지배를 받는 곳이 많았다. 사람들은 참주정체(독재정)에 대한 비판을 가하며 이런 지배자에게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페르시아와 전쟁을 해야만 한다고 한다. 아테네는 참주를 쫓아내고 민주정을 시작한 시기였다.

 

아리스타고라스는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을 설득하지 못했지만 아테나이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아테나이인은 이오니아를 돕기 위해 출정한다. 기원전 500년경이다. 페르시아는 6년에 걸쳐 이 반란을 제압시킨다. 이것이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다레이오스는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과 그것을 도운 아테나이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기원전 492년 다시 출정한다. 다레이오스의 조카이자 사위인 마르도니우스를 내세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한다. 기원전 490, 다레이오스의 조카인 다티스는 이오니아인과 아이올리스인도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에레트리아로 출정한다. 에레트리아인은 아테나이에 구원을 요청하고 아테나이는 이에 응한다.

 

페르시아는 에레트리아를 수중에 넣고 드디어 앗티케 땅의 마라톤에 상륙한다. 아테나이의 지휘자는 밀티아데스 장군이었다. 아테나이의 장군들이 맨 먼저 한 일은 직업적 장거리 주자(먼 곳에 심부름 가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필립피데스를 스파르테에 전령으로 보낸 것이었다. 필립피데스는 240KM쯤 되는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한다.

 

[필립피데스는 아테나이를 떠난 지 이틀 만에 스파르테에 도착해 당국자들에게 말했다. “라케다이몬인이여, 아테나이인은 여러분이 와서 도와주고 헬라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가 이민족에 의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수수방관하지 않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p.507]

 

라케다이몬은 아테나이를 도와주기로 결의했지만 만월이 되기 전에는 출동할 수 없다고 했다. 페르시아에 비해 열세였던 아테나이인은 훌륭한 전술을 이용해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다. 페르시아는 약 6400명이 전사했지만 아테나이 측은 192명만이 전사했다. 이것이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라케다이몬인은 만월이 되자 20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출정했으나 이미 마라톤 전투는 끝난 뒤였다.

 

역사를 읽으며 매번 저자인 헤로도토스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가 활동한 약 3000년 전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열악한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는 헤로도토스를 상상해본다. 엄청난 양의 사실들을 수집해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수록된 내용 중 사실이 아닌 내용이 있다할지라도 이런 면에서 어느 정도 허용이 가능할 것이다.

 

역사는 훌륭한 지혜서이기도 하다. 만약 이 책에 역사적 사건만이 기록되어 있다면 이토록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사람들의 대화나 각 나라의 풍속, 장례 관습에 대한 서술에서 느껴지는 울림은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역사라는 사실보다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준다.

 

[대제국이 되어 드넓은 땅을 얻었음에도 다레이오스 왕은 아무것도 없는 스퀴타이족의 나라를 정복하기를 원한다. 다레이오스 왕을 피해 말들이 먹을 풀을 없애고 우물을 메워버린 스퀴타이족은 정작 후퇴하는 페르시아인을 쫓아갈 때, 그 길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것이 지금은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p.434)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트라케의 트라우소이족의 관습은 이러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친척이 둘러앉아 아이가 일단 태어난 이상 고통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다고 비통해하며 인간의 온갖 고통을 열거한다. 반면 사람이 죽으면 이제 온갖 고통에서 해방되어 완전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희희낙락 떠들며 묻어준다.

p.470]

 

4, 5, 6권에서도 여전히 여성의 삶은 척박하다.

아마조네스족의 후예인 사우로마타이족의 처녀는 적군의 남자 한 명을 죽이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 그래서 결혼을 못하고 늙어 죽는 여자도 있다. 리뷔에의 나사모네스족 남자가 결혼할 때, 신부는 첫날밤에 모든 하객과 차례차례 교합해야 한다. 아우세에스족은 아테나 축제 때 처녀들을 두 패로 나뉘어 싸우게 한다. 그들은 돌과 막대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데 부상당해 죽는 처녀들을 가짜 처녀들이라고 부른다. 트라케의 크레스토니아 북쪽에 사는 부족은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데, 남자가 죽으면 그가 어느 아내를 가장 사랑했는지 아내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고 남편의 친구들도 논의한다. 거기서 뽑힌 아내는 가장 가까운 친족의 손에 의해 남편의 무덤 위에서 살해되어 남편 곁에 묻힌다.



-'손기정 기념관'에서

 

얼마 전, 서울역 근처에 사는 지인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지인이 사는 아파트 바로 뒤는 옛 양정고등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양정고는 손기정 옹이 다닌 학교다. 지금 양정고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고, 옛 양정고 자리는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손기정 옹을 기념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손기정 체육공원, 손기정 기념관, 손기정 문화도서관 등이 있다.

 

지인을 따라 그곳을 둘러보다 손기정 기념관에서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의 <필립피데스>였다. 마침 역사를 읽고 있어 반가웠다. 여태껏 나는 필립피데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후, 먼 길을 달려 아테나이에 승전보를 전한 후 장렬하게 사망했다는 사람이 필립피데스라고 알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도 필립피데스가 그렇게 설명되어 있는 곳이 많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페르시아가 앗티케에 상륙하자 라케다이몬의 원정을 요청하기 위한 전령으로 필립피데스가 달린 것이었다.

 

필립피데스와 손기정은 달리는 사람이다. 필립피데스는 직업인으로, 어린 손기정은 가난했기에 달리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에게 달리기라는 공통점과 영광이 있지만, 왠지 난 그들에게 슬픔을 느꼈다. 이틀 동안 240KM를 달려야하는 인간의 육체적 고통과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음에도 다른 나라의 국기를 가슴에 달아야했던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알 것 같았다. ‘역사는 이렇게 여러 모양과 감정으로 다가온다.

 

월계수 나무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 기념으로 받은 것인데, 한국에 가져 온 어린 묘목이 저렇게 잘 자랐다고 한다.



 

 









전쟁 연대기는 제목 그대로 연대기 순으로 세계사의 주요 전쟁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부터 미국 독립 전쟁까지 간략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정리된 책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서대로 서술되지 않아 다소 산만하고 어려운 헤로도토스 역사와 함께 읽어 도움을 많이 받았다. 중요한 부분만 콕 집어 잘 설명하는 역사 강의를 듣는 느낌이었다.

 

[고대의 전쟁은 수없이 잦았으나, 당대의 기록으로 믿을 만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전쟁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최초라 할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덕분이다....젊은 시절에 그는 바빌로니아부터 우크라이나, 이집트부터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여행하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숨은 진실을 탐구했다.]



-헤로도토스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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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2-20 07: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요새 역사책을 읽으시는군요~!! 이런 방대한 역사를 기록한 헤로도토스 완전 대단한거 같습니다. 내용이 흥미진진 하네요~!!

페넬로페 2025-02-20 08:09   좋아요 4 | URL
독서동아리에서 읽고 있어요. 내용이 많아 3개월에 걸쳐 읽고 있습니다. 워낙 내용이 방대해 읽기 쉽지 않지만,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 재미있어요. 헤로도토스는 완전 대단합니다^^

그레이스 2025-02-24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남았네요!^^

페넬로페 2025-02-24 23:30   좋아요 1 | URL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를 어떻게 서술해 놓았을지 엄청 기대됩니다^^

페크pek0501 2025-03-01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백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군요.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저도 긴 분량의 책을 두 권까지만 읽다 만 게 있어 찔리네요. 5권까지 있는데 남은 세 권을 읽어야 한다는 과제를 달고 삽니다.^^

페넬로페 2025-03-01 17:26   좋아요 1 | URL
벽돌책 읽기는 항상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역사>는 방대하지만 내용이 흥미롭고 재미 있는 부분도 많아 그나마 잘 읽히는 편이예요.
저도 읽다 만 책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