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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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가 뭔가 이상하고 믿기지 않아 책의 처음부분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기 실려 있는 아홉 편의 글이 츠바이크가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쓴 기록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작가 소개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있었다.

 

알려진 대로 유대인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를 피해 브라질까지 갔었지만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사람이 어떻게 이런 희망적이고도 따뜻한 내용의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경쾌하기까지 하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 특별한 사람을 세상 끝으로 내몬 집단적이고도 말이 안 되는 폭력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하느님은 먹을 것을 주시니, 하물며 인간인 너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절이 있다. 미래를 걱정하다가도 이런 구절에 힘을 얻기도 하지만 사실 효력은 오래 가지 않는다. 츠바이크의 말마따나 세계의 어느 지역에 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빵 한 조각, 맥주 한 잔, 잠잘 방 한 칸, 옷 한 벌을 얻으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돈은 절대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지 않는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서 성경 구절대로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정말로 교과서적으로 신을 믿는 삶을 사는 안톤은 한국의 홍반장(영화 홍반장’,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주인공)같은 사람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저런 사람은 가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츠바이크가 거주했던 작은 도시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때에 나타나 생색내는 일 없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는 안톤은 정직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다. 가난하지만 하루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원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많았던 츠바이크는 안톤이라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 세상을 대하는 지혜를 배운다. 그를 통해 자본주의적 속성만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타 할아버지에게 강남에 있는 한강뷰의 아파트를 받고 싶다는 초등학생의 대답이 현실과 세태를 반영해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그 학생을 무조건 비판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톤을 통해 그 초등학생에게 말해주고 싶다.

 

 

1923년 독일-오스트리아 통화인플레이션(3년이나 계속되었다.)으로 물가는 엄청나게 올랐고, 돈의 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츠바이크는 1년간 작업한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인세를 받았지만 인플레이션으로 그 금액은 원고를 보낼 때 썼던 우편요금보다 가치가 적게 되었다. 전쟁을 치르고 그 후로 돈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져 분명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었지만 오히려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강했다고 츠바이크는 말한다.

 

힘들지만 일상을 유지하려는 집중을 했고, 돈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삶의 오랜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고 했다. 29개월 동안 계속된 독일의 레닌그라드 봉쇄시기에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도서관에 모여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했을 때, 인간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느꼈지만, 그것은 특수성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츠바이크는 나에게 돈이란에서 그런 나의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 ‘돈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진수를 깨닫는다는 말의 진심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내가 돈을 무시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터다. 돈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자극을 나는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방문객에게 하듯이, 나는 돈에도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다. 하지만 돈은 방문객 그 이상은 아니다.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 ‘나에게 돈이란’, 중에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날, 그곳(콩코르드 광장)에서 가까운 센강에서는 수많은 낚시꾼들이 보통 때와 같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의 환호와 왕의 목이 바구니 안으로 굴러들어가는 역사적 순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물에 떠 있는 찌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일화에 대해 츠바이크는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극적인 날에 낚시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 뒤 츠바이크 역시 파란만장한 역사적 흐름을 몸으로 체험하고서야 그들의 일상을 인정하고 이해하게 된다.

 

비극이 계속될수록,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 있을수록 사람들은 그 자체를 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공포와 괴로움에 공감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닌, 평범한 삶에 대한 인간적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소망인 것이다. 고통과 참담함에 대해 너무 몰두하다 보면 인간은 피곤해지고 그것을 감당할 여력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난국의 시대에 일상에 충실한 사람을 너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너져가는 세계의 폐허를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는 것이다.

 

202412, 대한민국에서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사용되지 않을 허구의 단어라고 여긴 계엄이라는 말이 선포되었다. 몇 시간 만에 그것은 철회되었지만 충격적이었다. 그 말은 나라를 완전 두 쪽으로 나누었고, TV 뉴스를 여전히 장식하고 있으며 해결된 일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기함한 국민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채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이 와중에 읽은 센강의 낚시꾼은 지금의 상황과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매일, 매시간 역사적 사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츠바이크가 말한 이 내용은 많은 상징을 가지고 있고 의미가 깊다. 다만 일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폐허를 등지고는 새로운 것을 건설할 수 없다. 그것은 다음 세대에 더 많은 문제를 안겨주는 것이다. 피곤하고 지치더라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위해 집중해야 한다. 이 글의 제목처럼 어두울 때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거대한 침묵, 이 어두운 시절에, 하르트로트와 히틀러에서도 지금의 우리 상황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나치의 모든 죄악과 폭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 자유의 억압, 굴욕, 소설의 이야기들이 현실에 적용되는 사례들을 언급한다. 츠바이크가 조국에 대해 실망하고 억지로 그곳을 떠났지만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와는 갈라설 수 없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그러나 작가는 조국을 떠날 수는 있어도, 창작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는 갈라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독일어로 나치의 자기 신격화에 맞서 줄곧 싸워왔고, 바로 이 독일어야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입니다.

- ‘이 어두운 시절에중에서]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내용은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었다. 빈에서 츠바이크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모든 학생들이 신뢰하고 좋아했던 동급생이 있었다. 어느 날, 대형 금융회사 대표였던 친구의 아버지가 사기범으로 체포되었고, 2주 동안 친구는 학교에 오지 않는다. 3주째에 접어들어 그 친구는 학교에 왔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고개도 들지 않고 쉬는 시간에는 복도 끝으로 가서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10대의 아직 어린 그들은 친구가 힘들고 외롭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선뜻 다가가 위로해 줄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방법을 몰랐던 것이고 누군가 대신 먼저 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음날부터 그 친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그 뒤 빈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떤 종류든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렵고 나의 위로가 그 사람에게 다시 상처가 될 수도 있어 주저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이 부분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한다. 위로뿐만 아니라 사과도 마찬가지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별 것도 아닌 일에 좋은 사람을 잃는 경우도 많다. 츠바이크는 이 경험을 통해 쉽지 않지만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하라고 말한다.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다.

 


츠바이크가 로댕을 만나 그에게서 받은 영원한 교훈은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이미 아는 것임에도 새로웠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으며 다양한 감정이 들었고,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줄 수 있는 직접적인 힘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가슴에 새기고 전환시켜 바로 실천해야 하는, 나에게 주는 화두도 있었다. 무엇보다 츠바이크의 글은 항상 한 가지로 귀결된다. 그가 글을 너무 잘 쓴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책은 짧은 에세이를 수록한 것이라 더 그랬다. 그의 글 한 편 한 편이 완벽해서 내가 쓰는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은 사족에 불과하다

츠바이크의 글은 그저 읽기만 하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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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1-13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께서 쓰신 이 글이 저에게는 ‘안톤‘같은 존재입니다.
더 잘하려고 애쓸수록 무너지는 기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요즘이었어요.
봉쇄시기에서도 도서관에 모여 책을 읽었다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이야기에 감동받았습니다.
일상을 유지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힘은 누구에게든 그렇듯이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니깐요.
하지만 말씀해주신 삶의 오랜 가치,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진수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 글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돈, 재산, 권력 등등 언제든 세워지고 무너지는 것들 앞에서, 나 자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돌아보고 어떠한 가치를 지켜나갈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5-01-14 09:44   좋아요 1 | URL
일상이 정말 소중한데 우리를 둘러 싼 것들에 의해 쉽게 무너지고, 집중력도 잃게 되는 것 같아요. 마음으로는 힘을 내자고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많고 실천하기도 어려워요.ㅠㅠ
에세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단숨에 읽었어요. 지금 세태를 반영하는 듯한 좋은 글들이 많았어요. 근데 책 내용이 짧아 조금 아쉬웠어요.
제 생각에는 전야제님께서 안톤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요^^

희선 2025-01-14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위로할 말은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어릴 때는 더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무슨 말이든 별로 위로는 안 되고... 안 하는 게 나을지 뭔가 한마디라도 하는 게 좋을지... 밥은 잘 먹고 잘 자느냐고 하는 말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모르겠네요

어둡다고 안 보려고 하기보다 뭔가 보이는 걸 보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못할 것 같기도 하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5-01-14 09:49   좋아요 0 | URL
위로하는 말, 정말 쉽지 않죠. 상황에 따라 적절한 문장을 찾기도 힘들고요. 츠바이크가 말한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하란 것이 의미있게 다가왔어요.

어두울 때, 분명 보이는 것이 있고, 그것을 보려고 해야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희선님, 한 주가 시작되었어요.
건강하고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래요^^

새파랑 2025-01-14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는 소설도 좋은데 에세이도 좋군요. 역시 글잘쓰는 사람~!!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5-01-14 09:51   좋아요 1 | URL
역시 츠바이크는 글을 잘 쓰는 작가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글들이 짧은 에세이라 더 임팩트가 있더라고요.

새파랑님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

그레이스 2025-01-14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가 마지막 인사하던 글귀 넘 인상적이었어요.

페넬로페 2025-01-15 21:0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바질 이야기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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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하고 잘난 척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마음을 다잡고 노력했으나 꼭 마지막에 결정적 실수를 범하고 마는 바질이지만, 그럼에도 큰 그림을 향해 나아가는 바질이기에 안도하게 된다. 내 젊은 날의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좋았지만 나의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를 넘어서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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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1-06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새해 복 많이 받고 계시나요?^^
건강 잘 챙기시구요.
올 한 해도 굳건하게 잘 살아봅시다.
페넬로페 님의 평온한 독서 시간을 응원드리며…

페넬로페 2025-01-06 14:29   좋아요 2 | URL
순삭이란 말이 실감될 정도로 또 한 해가 지나가고 2025년이 되었어요.
올해는 저에게 조금 더 많이 특별한 해라 몸과 마음을 다잡아 더 의미있게 살아 보려고 해요.

저는 많이 좋아졌어요.
책나무님의 마음도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좋아지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컴백 기념 페이퍼,
기다리겠습니다^^

레삭매냐 2025-01-08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빛소굴 책이군요.

전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읽고
있답니다.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페넬로페 2025-01-08 15:52   좋아요 1 | URL
제가 읽지 않은 책이 넘쳐 나는데 출판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빛소굴 출판사 책을 처음 접하는데 관심 가는 책이 몇 권 있어 차차 읽어 볼 예정입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책도요^^

서니데이 2025-01-08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어제보다 날씨가 더 많이 추워지고 있어요.
한파주의보인 것을 보니 며칠간 추울 것 같아요.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5-01-08 20:52   좋아요 1 | URL
잠깐 나갔다 왔는데 바람이 매서워 얼굴이 시리네요.
내일은 더 춥다고 합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래요^^
 














아침 7시에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기 전에 엄마가 떠나셨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버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우리는 그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란 엄마와 관련된 일 뿐이다. 며칠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연락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엄마를 보러 가려고 했었지만, 결국 나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이 되었다.

 

머리와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캐리어를 꺼내 주섬주섬 뭔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이 겨울이고 날씨가 많이 추워질지도 모르니 그냥 이것저것 구겨 넣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오감을 통한 고통과 불편을 조금도 느끼기 싫은, 죽은 이보다 산 사람인 나 자신을 오롯이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아침에 택배가 왔다. 큰 스티로폼 박스에는 지인이 보내준 제주산 돼지 삼겹살과 목살이 엄청 많이 들어 있었다. 두껍게 잘려진 고기가 먹음직스럽고 신선해 보였다. 이 좋은 생고기를 냉동고에 넣어 얼리기 너무 아까워 친구 비아에게 전화해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고기의 반은 비아에게 나누어주고, 반은 끝까지 냉동고에 넣지 않고 냉장 칸에 넣어 두고 집을 나왔다.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여전한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겹고도 반복적인 그것은 조금의 정상참작도 허용하지 않은 채 나에게 부담을 주었다. 그 날 아침에 넣어 둔 고기는 여전히 싱싱했다. 보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는 핑계로 나는 고기를 구워 남편과 딸아이를 먹였다. 그 다음날엔 언니네 식구를 집으로 오라고 해 또 고기를 구워 먹였다. 집은 고기 냄새로 가득 찼다. 내 불경의 증거가 된 고기냄새가 신들의 저주를 불러 온 것인지 나는 바로 무기력증에 빠져 버렸다. 몸도, 마음도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다.

 

 

롤랑 바르트가 19771026일부터 1978621일까지 어머니를 잃은 후 2년간 써내려간, 상실의 슬픔을 표현한 애도일기는 모호할 정도로 순간의 느낌만이 있다. 상황을 잘 모르기에 그의 감정과 느낌에 바로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글을 읽어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난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르트의 느낌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들어 있었다.

 

상실의 슬픔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지 않다. 시리도록 날카롭거나 명료하기보다 뭉뚱그려진 감정으로, 축 쳐진 육체의 무거움으로 더 많이 다가온다. 현존에서 부재로 순식간에 바뀐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애틋함과 허무함이 느껴질 때마다 눈물이 난다.

 

바르트의 어머니, 앙리에트 뱅제는 스물두 살 때 어머니가 되었고, 스물 세 살 때 해군장교인 남편이 전쟁에서 전사함으로써 미망인이 되었다. 그 후 바르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바르트는 엄마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은 1980년에 사망했다.

 

나는 병들어서 죽어가는 내 어머니의 육체를 알고 있습니다.‘라는 바르트의 글처럼 우리 형제들도 서서히 소진되어가는 엄마의 육체를 정확히 알고 있다. 가벼운 알츠하이머로 시작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몸이 굳어져 간 엄마는 마지막까지 자연적으로 당신의 생명을 꺼뜨렸다. 병원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온전히 케어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엄마와 남은 우리 형제들이 유일하게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엄마의 영정사진은 정말 고왔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 본래 있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보정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 언니와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 길에서 영정사진 찍으라고 어떤 사진사가 호객행위를 했다고 한다. 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파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억지로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 다음날 언니가 출근하고 나서 엄마는 혼자 길거리의 사진사를 찾아가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영정사진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엄마는 당신의 죽음을 일찍부터 준비했다. 엄마 친정 동네의 솜씨 좋은 분에게 아버지와 당신의 수의도 미리 맞춰두었다. 수의는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려왔고, 몸의 모든 근육이 빠져나가 미라처럼(이런 표현을 딸아이는 끔찍해한다. 어쩜 할머니에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느냐며.)뼈만 남은 엄마를 부드럽고도 포근하게 감싸 안고 떠났다. 불꽃으로 곧 사라질 찰나의 순간뿐 이었지만.

 

 

고대 뤼디아 왕국의 왕인 크로이소스는 아시아의 헬라스인과 주변의 나라를 복속시켜 자신의 왕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당시에 헬라스의 모든 학자가 번영의 절정에 있던 뤼디아의 수도 사르데이스를 방문했는데 아테나이의 솔론도 그곳을 방문했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믿으며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솔론은 크로이소스의 기대와는 달리 끝까지 크로이소스라고 대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크로이소스는 화를 내었다.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나를 그런 평범한 자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다니 그대는 내 행복은 완전히 무시하는 거요?” 솔론이 대답했다.

크로이소스 전하, 전하께서는 제게 인간사에 관해 물으시지만, 저는 신께서 매우 시기심이 많고 변덕스러우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이다. 인간은 오래 살다 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이 보고, 겪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이 겪어야 하나이다.크로이소스 전하, 인간이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옵니다. 보아하니, 전하께서는 큰 부자에다 수많은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시옵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전하의 물음에 답할 수가 없사옵니다. 큰 부자라도 운이 좋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많은 거부(巨富)가 불운했는가 하면,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더라도 운이 좋은 사람도 많사옵니다.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고 부르지 말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 제가 말한 복을 가장 많이 타고나고 그것을 끝까지 누리다가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야말로 제가 보기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 같나이다.

p. 43~44, ‘역사’, 헤로도토스, 천병희 옮김, ]

 

죽음을 통해서만 행복을 알 수 있다는 솔론의 지혜의 말이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하게 느껴진다. 결국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엄마의 인생을 들여다본다. 당신의 삶은 죽음으로 행복을 인정받았는가? 그러기를 바라며, 엄마에게 받은 지극한 사랑으로 내 삶은 여기까지 운이 좋은 채로 왔다고 말해주고 싶다.

 

엄마가 항상 나에게 말씀해 주셨던 긍정의 말들이 떠오른다.

 

 

[이 당혹스러운 부재의 추상성. 그런데도 그 추상성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비로소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추상은 부재이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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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3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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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0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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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0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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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0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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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1-04 0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글을 안 쓰셔서 무슨 일 있으신가 했는데...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다 어머님 명복을 빕니다 지금은 편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아픈 마음은 낫지 않겠네요 살수록 아픔은 늘어가는... 페넬로페 님 건강 잘 챙기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런 말이라니...)


희선

2025-01-04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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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1-04 0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니를 떠나보내셨군요. 마음 속에 그분을 간직하고 있는한 돌아가신 분은 다른 형태로 아직 존재하고 계시다고, 저는 아버지를 보내드린 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로 했답니다. 제 방식의 애도인가봐요.
천천히 마음 잘 추스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긍정의 가르침을 주셨던 어머님, 좋은 곳으로 가셨을거예요.

2025-01-04 0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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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0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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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1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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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1-04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큰일이 있으셨군요 ㅜㅜ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힘내시길 바라겠습니다.

2025-01-04 1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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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04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죽음 앞에선 다 무너지더군요. 하지만 또 시간이 다시 세워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가잖아요. 모쪼록 남은 가족분들과 함께 서로 위로하며 슬픈 마음 잘 다독이시기 바랍니다. 힘 내시고요.
삼가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2025-01-04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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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04 14:50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잘 하셨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니 새해 인사를 못했네요. ㅎ 고맙습니다. 페페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5-01-04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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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1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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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2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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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5 0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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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넨세보 불가 내추럴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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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넨세보는 산미와 묵직한 바디감이 잘 어울려 조화롭다. 진하게 남는 커피 향과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하다. 나뭇가지에 아직 남아 있는 단풍 위로 엄청난 눈이 내려 신박한 겨울을 맞이했다. 뜨겁게 마셔도 좋은 이 커피와 함께 겨울에게 인사한다. 약간 머뭇거리며, 겨울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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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12-03 1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은 커피의 계절이죠. 오늘 커피 두 잔을 마셔(정확히도 한 잔 반) 오늘은 그만 마셔야 하는 현실이 아쉽네요. 커피가 보약이면 좋겠습니다.

페넬로페 2024-12-03 15:36   좋아요 2 | URL
식사하고 나서나 디저트를 먹을 때 커피를 꼭 마시는 편인데~~
너무 늦게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와 저도 하루 두 잔 정도만 마시려고 해요.

2024-12-23 1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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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18: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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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1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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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4 09: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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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4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곡 2025-01-01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5-01-01 08:31   좋아요 1 | URL
2025년이 시작되었어요.
서곡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서곡 2025-01-01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도 늘 건강하시길요 오늘 새해첫날 잘 보내십시오 !!!

2025-01-01 1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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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1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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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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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한 번씩 딸아이와 함께 가고, 자주 혼자 간다. 사는 곳이 흩어져있는, 1년에 서너 번씩 만나는 대학 동기들과는 중간 지점인 종로에서 만나 그들과도 가끔 궁에 들러 산책을 한다. 덕수궁 앞에서는 와플을 사 먹고, 경복궁에 갈 땐 인사동에 들리고, 창경궁이나 덕수궁에 갈 땐 대학로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에게 궁은 외롭고도 씁쓰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조선의 역사가 어디 한 번이라도 찬란할 때가 있었는가 말이다. 궁에 가면 그저 쇠락하거나 비굴했던, 제대로 된 개혁도 하지 못한 힘없고 우유부단한 왕조만 생각난다. 특히 덕수궁이 그렇다. 고종과 민비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고희를 즐겨 마셨으면 뭐하겠는가?

 

그래서 궁에 가면 되도록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냥 자연을 본다. 궁은 천천히 걸으며 산책하기 좋다. 인공적으로 수더분하고 아기자기하게 잘 가꾸어져 있어 그곳 벤치에 앉아 있으면 낭만적인 감상에 젖기 좋다. 창경궁은 가장 풍부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봄이나 여름은 푸름으로, 가을은 온갖 색깔로 물드는 낙엽으로 운치가 있고 종묘와 같이 있어 그것도 매력적이다.

 

창경궁은 한때 창경원이었다. 일본이 식민지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시키기 위해 궁을 식물원과 동물원으로 만들었다는 가장 많이 알려진 대로 나는 알고 있다. 역사의식이 있든 없든, 창경원은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봄에 벚꽃이 필 때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들었다. 케이블카까지 있었다.

 

내가 창경원에 처음으로 간 건 초등학생 때였다. 서울 누하동(지금의 서촌)에 살던 이종사촌언니와 단둘이 버스를 타고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잘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때는 초등학생이라서 지방 소도시에 살던 내가 분명 서울에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나 언니와 함께 갔을 텐데 창경원에는 대학생이었던 사촌언니가 왜 나만 데리고 갔는지 잘 모르겠다. 창경원 안에서 뭘 구경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언니와 버스를 타고 창경원 앞에서 내렸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강화의 석모도는 딸아이가 어렸을 때 가 본적이 있다. 차를 배에 싣고 갔다. 보문사에도 가고 바닷가도 갔다. 이 소설에서 석모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를 읽을 수 있었다. 강화도 쪽만의 사투리인지, 인천 사람들도 이런 말을 사용하는지 잘 모르겠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으며 자꾸 나와 연관된 생각만 했다. 좋은 소설은 소설의 알맹이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내가 있고 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하고 공유할게 있으면 더 좋다. 소설과 어우러져 어느 곳에서 만나는 순간에 희열을 느낀다. 그것이 단지 한 순간, 한 지점 일지라도 나에게 그 소설은 좋은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지 못했다. 끝가지 기대에 못 미쳤다. 마지막에 뭔가 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실망한 상태에서 책을 덮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이라서 나의 노스탤지어를 끌어오고 인물에 대한 연민도 가져보고 그들도 이해했지만 끝내 버무려지지 않았다. 내가 끌어온 것에 내 것만 남았다.

 

뷔페에 가면 오늘은 정말 많이 먹으리라 결심한다. 작정하고 음식에 달려든다. 이 코스 저 코스로 다니며 한 가지씩이라도 다 맛보자며 접시에 조금씩 담는다. 배가 불러와도 일어나 새로운 접시를 가지고 다른 음식을 담아 온다. 배가 터져도 맛있는 디저트를 포기할 수 없다. 커피를 계속 들이키며 여러 종류의 디저트를 먹고, 마지막에 꼭 아이스크림도 먹는다. 그렇게 많이 먹고도 뷔페를 나올 때,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맛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저 내가 낸 돈 만큼, 뷔페의 장점인 가성비를 달성했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내 몸 속은 부조화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딱 이 소설이 그랬다. 많은 맛있는 것이 이 소설에 들어 있었다.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 담당자라는 좋은 소재가 있었다. 정독 도서관과 원서동, 낙원 하숙이라는 과거(나에겐 진한 노스탤지어다)와 거기에 얽힌 영두, 안문자 할머니, 리사, 산아 등 여러 인물이 있었다. 창경원 대온실을 설계한 일본인의 회고, 문화재를 관리하는 공무원의 행태, 일제 강점기, 육이오 전쟁, 대온실 지하의 미스터리 등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결국 이것들이 하나로 버무려지지 않고 끝까지 각자 겉돌아 아쉬웠다. 장편 소설이지만 여러 단편 소설을 읽는 듯했다.

 

오랜만에 수리라는 말을 들었다. ‘대온실 수리라는 눈에 보이는 변화 이면에 깔리고 쌓인 여러 모습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각자의 수리보고서에는 과거로부터 시작된 역사와 환경, 사람, 슬픔, 인내, 아픔, 상실, 수난이 들어 있다. 수리되어 더 웅장하고 멋지게 변한 창경궁 대온실 처럼 나와 우리들의 삶의 수리도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많이 믿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내린 나는 주차해둔 차를 찾아 원서동으로 갔다. 낙원하숙도 대온실도 들어갈 수 없는 시각이지만 오늘은 그 공간 곁에 있고 싶었다. 창경궁으로 걷는 내 옆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고 발을 내밀면 잠시 아무것도 없는 공중인 것도 같았지만 허방을 짚는 듯한 실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팔짱을 끼듯 할머니의 스케이트를 옆구리에 끼고 고궁의 담장을 따라 걸었다.

-p.375]



-작년 6월에 갔을 때의 창경궁 대온실



이 소설을 다 읽고 창경궁에 다녀오자고 했다. 깡통만두 식당도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11월에 폭설이 내렸다. 아직 나무에 빨간 단풍이 매달려 있는데 그 위를 하얀 눈이 급습해버렸다. 아무래도 내년 봄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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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창경궁에 자주 소풍가고, 중학교때 사생대회도 여기서 자주해서, 커서는 잘 안가게 되요. 너무 황량했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은 잘 정비했겠지만,
전 창덕궁이 더 좋아요. 후원이 더 좋구요.^^
대온실이 여기를 말하는 건가봐요.

페넬로페 2024-11-27 23:47   좋아요 2 | URL
그쪽으로 소풍 많이 갔을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잘 정비되어 있어요.
소설에서 말하는 창경궁 대온실이예요.
직접 보면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아요.
이 소설 읽고 런던의 큐가든에 가 보고 싶어졌어요^^

망고 2024-11-27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페넬로페님 뷔페에 비유하신 점 너무 잘 이해가 됩니다ㅠㅠ
눈 덮인 사진 참 예뻐요😍눈은 가만 보고 있기에는 예쁜데 말이죠

페넬로페 2024-11-27 23:51   좋아요 2 | URL
많이 아쉬웠어요.
장편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별점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그렇다고 3별은 또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3.5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요^^

눈은 보기에는 예쁜데 밖에 나간 식구를 생각하면 그리 반가운 건 아니예요.
다들 눈길에 무탈했으면 좋겠어요^^

전야제 2024-11-28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뷔페에 관한 부분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내 몸 속이 부조화로 가득 차 있다니. 통찰이 너무 재밌습니다 완전 공감해요ㅎㅎ 저도 다음에 서울 여행갈 때 창덕궁이랑 창경궁 꼭 가봐야겠어요! 예전에 경복궁은 가봤는데 나머지는 못 가봤네요ㅠㅠ 겨울 지나서 봄 되면 어머니와 함께 궁궐 여행부터 가고 싶습니다ㅎㅎ 저도 눈이 그리 반갑지는 않네요. 폭설이라는데, 페넬로페님도 눈길 조심하세요!

페넬로페 2024-11-28 10:09   좋아요 2 | URL
좋은 소설에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유를 한 건 아닌지 작가님께 조금 미안했어요.
부조화를 말하려고 했거든요.
저한테 이 소설의 느낌이 좀 그랬어요.
전야제님, 봄이나 가을에 어머니와 궁에 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창덕궁, 창경궁도 좋은데
저는 종묘도 좋아하는 장소예요.
춘천에도 눈이 왔어요?
날씨가 춥지 않아 바로 눈이 녹아 완전 길거리가 질척 거려 걷기가 힘드네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4-11-28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니 제 바로 앞에 꽂혀 차례를 기다리는 책인데 한때 좋아하는 작가라 (아마도 아직도 이걸 읽고선 또 바뀔지도) 걱정되어서 아직도 못 펼치고 있습니다. 마침 며칠 전 뷔페가서 한 접시밖에 못 먹고 온 소갈머리 좁아진 인간이라 ㅠㅠ ㅋㅋㅋ

페넬로페 2024-11-28 10:13   좋아요 3 | URL
저도 김금희 작가 좋아해 더 기대가 컸는지도 모르겠어요.
열반인님 느낌은 다를수도 있고 다른 친구분들은 이 책을 선호했으니 한 번 읽어 보시길요.
˝어, 괜찮은데, 왜 그리 생각했지?˝라는 생각을 하며 읽을수도 있거든요.
뷔페가는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가면 그래도 여러 접시 먹고 오려고 해요 ㅎㅎ

달자 2024-11-28 17: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추천마법사가 오랫동안 추천해 주었지만 사서 읽지는 않았던...책인데그 이유는 뭔가 책 표지에서부터 이전의...김금희작가스러운 딱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비슷한 책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였어요 (논리 X) 제목이 살짝 SF라든지 판타지가 살짝 가미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보고서를 찾으러 과거로 떠난다든가... 암튼 그런 이유에서 읽지는 않았는데 페넬로페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창경궁에 대온실이 있는 지도 몰랐던 저...

페넬로페 2024-11-28 17:50   좋아요 2 | URL
책 뒤의 작가의 말에 저자가 20대때 창경궁과 창덕궁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참고 문헌도 엄청나게 많아요.
너무 많아 과유불급이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문화재를 수리하려면 그 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하는가 봐요.
이 소설은 그것을 쓰는 과정인데
여기에 많은 것이 가미되어 있어요.
보고서에 쓸 자료를 찾는 과정에 과거로도 가고 자신의 추억으로도 가더라고요^^

막시무스 2024-11-28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흐려져가는 단풍잎의 붉은색을 흰눈이 매워주니 분위기가 묘하네요!ㅎ 그래도 만두국은 겨울에 참맛이니 창경궁은 봄에 가시고 깡통만두는 겨울에 방문하시는게 어떠실까요?ㅎ

페넬로페 2024-11-28 22:11   좋아요 1 | URL
네, 안 그래도 뜨끈한게 넘 먹고 싶어요. 기회되면 가서 먹고 오겠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네요.
막시무스님,
감기 조심하시길 바래요^^

독서괭 2024-12-05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 작가가 욕심이 앞섰나봐요. 좀더 잘 가다듬어서 냈으면 좋았을 것을.
창경궁 사진이 멋지네요. 저는 가봤는지 안 가봤는지 기억도 안 나요 ㅜㅜ
저는 창경궁, 하면 <토지>에서 창경원 산책 장면이 떠오릅니다. 인실이랑 오가타, 선혜랑 권오성이 만났던 것 같아요(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찾아봤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4-12-05 18:36   좋아요 1 | URL
작가가 조금 더 탈고의 시간을 가졌다면 더 좋지 않았나 생각 했어요.
창경궁은 고궁보다 유원지의 이미지가 많았는데,
15년쯤 전, 가을에 갔을 때 너무 좋아 요즘은 자주 가요.

토지도 읽어야 하는데ㅠㅠ
그러면서 매번 똑같은 구호를 오늘도 외쳐 보아요.
언젠가는 읽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