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 책이 들어있는 책을 좋아한다. 책 속에 들어있는 책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작가가 걸어온 각각의 인생과 닮아 있어 내가 지적할 사항은 아니다. 다만 내용이 허술한 건 싫다. 다른 책 여기저기에서 문장만 잔뜩 빌려와 짜깁기를 해 놓은 것이나, 그 문장에 자신의 경험과 말을 살짝만 올려 마치 모든 것을 자신이 생산했다고 착각하는 도둑 심보를 좋아하지 않는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는 그런 내 기준에 맞는 책이다. 인용한 책의 내용과 선생 자신의 말과 생각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뭔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든다. 저자 소개란에 씌어진 ‘끊임없이 읽고 쓰는 사람’ 답게 본래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과 세계를 이해하는 통찰이 뛰어나다. 엄청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저자는 젊은 시절에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책을 재독하며, 그때의 느낌과 지금 다르게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오래된 지도를 다시 보다’라는 문장이 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잘 설명해준다. 연배는 다르지만, 내가 겪은 정치적ㆍ사회적 상황이 선생과 비슷해 이 책에 소개된 책이나 저자의 말에 많이 공감했다. 뜬금없이 옛 생각이 나기도했다.
[지금까지 내 삶에 깊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이 책들은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 들었던 것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독자도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p.7]
이 책에서 반가웠던 건 언제나 나에게 1순위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여기서도 첫 번째로 소개된다는 사실이었다. ‘가난의 책임이 가난한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있을지 모른다는(p.17~18)’는 생각은 여전히 나도 가지고 있다.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선생의 생각도 같다. 선생은 재독하며 ‘두냐’가 다시 보였지만 나에게는 ‘라주미힌’이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지나간 시대의 지식인과 반골을 대변하는 고유명사였다. 최인훈의 『광장』은 필독서였다. 세미나를 이끄는 선배들이 ‘광장’에서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나에게 ‘광장‘은 슬픈 사랑과 허무로 읽혔다.
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여겨지는 고전이 나에게 몇 권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맬서스의 『인구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모두 읽다가 포기한 책들이다. 대학 교양 수업 시간에 무수히 언급된 책들이지만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다. 언젠가 완독할 수 있을까?
사마천의 『사기』는 몇 년 전에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권력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휘의 이면에 인간의 참혹한 비극이 놓여 있음(p.157)’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사기열전과 세가에 나오는 인물은 거의 다 끝이 비극적이다. 온갖 영화를 누리던 사람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권력과 인생의 무상이 절절하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후의 악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끝내 한신을 죽이고, 유방의 후궁인 척 부인의 손과 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병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살게 하며 척 부인의 아들이 그것을 목격하게 한다. 내가 사기를 읽었을 때도 이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는데 유시민 선생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도 이 부분을 인용해 놓았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름의 잃어버린 명예』는 꼭 읽고 싶은 책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 부와 빈곤, 사회적 계급, 언론의 횡포는 여전히 인간의 보편적 삶과 행복을 침해하고 있다. 그것은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더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다. 오래전에 경고된 사회악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의기소침해지고 허무주의에 빠진 나에게 유시민은 이렇게 위로한다.
[헤드라인이 신문의 일상적 무기라면, 작가에게는 때로 소설이 무기가 될 수 있다.
p. 284]
내가 소설을 열심히 읽는 이유이다.


『청춘의 독서』에 소개된 책 중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있어 이번 기회에 읽었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2012, 다른세상)』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소련과 노르웨이(스웨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두 나라 사이에 포로 교환이 있었다. 소련 쪽에서 풀려난 노르웨이 포로들이 노르웨이 진영으로 넘어오자 동료들은 반갑게, 따뜻하게 그들을 안아 주었다. 하지만 노르웨이 쪽에서 풀려난 소련 포로들이 자기 나라 진영으로 갔을 때, 그들은 바로 배반자로 낙인찍혀 비난받아야 했고 감금 상태에서 말도 안 되는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1942년 2월, 이틀 동안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네 사람의 동료와 함께 탈출한다. 그들은 숲과 늪을 헤매다가 우군 부대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즉석에서 사살되고, 한 사람은 부상이 깊어져 죽었으며, 슈호프와 나머지 한 명은 독일군 포로였다고 이실직고함으로써 괘씸죄에 걸려 강제노동수용소에 가게 된다. 8년째 복역 중인, 이빨이 반이나 빠진 슈호프는 40세가 되었고 아직 복역기간이 2년이 남아있다. 그가 갈 다음 행선지는 유형지다.
상식적으로 감옥과 수용소는 죄를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지만 여기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슈호프와 그와 같이 수용된 수감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갇혀있다. 슈호프가 들어올 때는 ‘무조건 10년 형을 언도받았지만, 1949년 이후로는 일단 걸려들기만 하면 25년 형’을 언도 받는다. 그들은 진짜 죄인인가?
몹시 추운 날씨에 딱딱한 빵 한 덩이와 멀건 수프 한 그릇으로 연명하며 자유를 잃은 채 그들은 살아간다. ‘밀림의 법칙’만이 통하는 수용소에서 그저 하루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눈치와 비굴함을 가지고 혹독한 노동을 해야만 한다. 뭔가 재수 없게 걸려들어 영창이라도 가게 되면 평생을 두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은 악화되고 결핵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 슈호프에게는 ‘하루’를 무사히 지내야 하는 소명만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평범한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상을 가졌거나 반역자가 아니다. 수용소의 하루를 통해 본 그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족들의 생활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절대 자신에게 편지와 보급품을 보내지 말라고 하는 양심 있는 가장이다. 그런 사람에게 가해진 이유 없는 국가의 폭력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경험을 토대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소설은 분량이 길지 않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슈호프를 비롯한 여러 군상의 인간들의 하루에 스탈린 시대 소련의 실체가 압축되어 있다. 사실적이고 담담해 보이는 이 소설에 솔제니친은 엄청난 풍자와 고발, 철학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에서 슈호프가 모르타르가 금방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벽돌을 쌓는 장면을 인용한다. 그런 슈호프를 보며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을 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강제 노역에 동원된 죄수가 노동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난 이 부분에서의 유시민의 해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좋은 쪽으로 아니면 확대 해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작업량을 채워야 하기에, 영창에 가지 않기 위해서, 빨리 작업하지 않으면 모르타르가 얼어버리므로, 벽돌 쌓기가 비뚤어지면 다시 쌓아야하기에 슈호프는 악을 쓰며, 열성적으로 몸을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잃고,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사람에게 존엄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극한 환경 속에서 정신이 육체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현상은 드물다. 설사 그렇더라도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복으로 마감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의 하루가 비극인 것이다. 행복은 슈호프의 허상이며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다.
[슈호프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 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