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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ㅣ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박완서의 ‘노란집’이 있는 구리 아치울 마을에 간 건 2014년 10월이었다. 딸아이가 중학생 이었을 때, 다니는 학교에서 주관한 학부모 독서 모임에서 만난 우리는 그 해 봄부터 계속해서 박완서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있었고, 선생이 사신 곳에서 ‘박완서 읽기’ 마무리를 하고자 간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온통 단풍과 낙엽으로 둘러싸여 가을 그 자체였던 그곳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미 선생은 계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노란집’ 주위를 몇 바퀴 돌고 낙엽이 깔린 벤치에 앉아 박완서 집중 읽기의 소감을 나누었다.
박완서의 작품 중 몇 권을 필독서로 선정해 열심히 책은 읽었지만, 정작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독서 모임 때는 책에 대한 감상을 깊이 나누지는 못했다. 그때 우리 모두에게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갑작스런 이유 없는 반항에 뒤통수를 맞은 상태에서 내 존재마저도 부정당한 것 같은 슬픔과 암담함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가 생소해 보이기까지 한 시기였다.
독서 모임 날, 시작은 선생의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을 가볍게 주고받는 것이었지만 곧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물꼬를 트고, 우리는 거기에 공감하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에게 그 달의 필독서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독서 모임은 독서보다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의 역할을 더 많이 해주었다.
불쑥 찾아와 나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 사춘기 아이만은 아닐 것이다. 20대부터 계속해서 박완서의 소설을 거의 읽어 왔지만 내 인생을 침범하는 종류도 다양한 많은 것들과 싸우느라 선생의 소설에 온전히 빠져들 여유가 없었다. 그의 문장에서 매번 느껴지는 차가운 도도함도 싫었다. 세상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가차 없이 날리는 그의 펀치가 조금 불편했다. 내가 바깥에서 선생과 함께 안을 바라보든, 아니면 안쪽의 중심에 나를 놓아두든 상관없이 작가의 글을 읽는 순간 몸으로 바로 체득되는 서늘한 날카로움에 어떤 반발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써낸 글을 바로 또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단순한 것이 될 수 없다. 작가의 문장과 함께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운과 온갖 말들, 생각들이 합쳐져 내 속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똑같은 책이라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은 박완서의 『나목』은 한 번도 박완서의 소설을 읽지 않은 것처럼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나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같이 읽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주는 무거움과 거기에서 우왕좌왕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아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분투(奮鬪)하는 한 여자가 보였다. 노오란 은행잎으로 뒤덮인 융단 같은 낙엽더미에 누운 채로 발버둥 치며 살아있고, 살아내고 있으며,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경(李炅)이 있었다.
이경에게도 불쑥 혼란스러운 것들이 찾아온다. 전쟁, 오빠들의 죽음, 뿌연 회색 속에 웅크리고 있는 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미군 PX에서의 근무.…‘한쪽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 나간’ 음산한 집에서 엄마와 같이 견디며 정을 나누고 살고 싶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내부에서 무엇인가 자꾸 균형을 잃으려 하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심술궂게도, 꾀바르게도 살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지울 수는 없다. 자기 때문에 오빠들이 죽었다는 죄책감과 죽은 영혼만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엄마에 대한 애증에 이경은 견디며 버틸 방법을 찾는다.
남들과는 다른 우직한 옥희도에게 아버지와 오빠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을 보상받는다. 이경 역시 옥희도의 결핍을 상쇄시켜준다. 미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붙들고 있다. 딴 여자들과는 좀 달라야 한다’고 대놓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평범하고도 뻔뻔한 젊은 황태수는 이경에게 현실을 보여준다. 황태수는 자꾸만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신을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매줄 사람이기에 이경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결혼한다. 사랑이 아닐지는 몰라도 이경이 지켜야 할 어느 한 쪽만은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황태수는 준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사람에게 기대하고 기댈 수 있는 것, 그것도 일종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완전히 허의 세계에 빠져있는’ 이경의 어머니는 그녀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밥상을 차려준다. 시금털털한 멀건 김칫국이나 김치뿐인 밥상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매번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행위이다. 이경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 놓았다’는 어머니의 말에 분노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억울함에 부연 회색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밥상을 차려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끝내 알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난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나와 조금 울었다. 눈앞에서 자식의 죽음을 목격한 어머니가 꾸역꾸역 밥상을 차려내는 그것이 숭고하기도, 신산스럽기도 했다. 이경이 옥희도의 집에서 자고 온 날 밤 내내 어머니는 이경을 기다렸을 것이다. 표현할 힘이 없을 정도로 ‘허의 세계’에 빠져버렸지만, 이경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어머니는 그 날 밤 마지막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목』 전체에 깔려있는 선명한 색깔의 묘사는 이경의 생각을 드러낸다. 노오란, 뽀오얀, 비췻빛, 부연 회색, ‘순백의 홑청에 붉게 물들인 처참한 핏빛’을 따라가며 그의 내면의 변화를 온전히 느꼈다. 고가를 해체하면서도 후원의 은행나무만은 그대로 두어 자신의 존재만은 지키려 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故) 옥희도 유작전에서 이경에게 ‘한발 속의 고목(枯木)’이 나목(裸木)으로 변하고, 그 앙상함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 것은 그녀의 완벽한 살아냄 때문이었다. 과거를 털어내 버리지 않고 그것을 잘 간수 할 수 있는 힘이 이경에게 남아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비비언 고닉이 『끝나지 않은 일』에서 ‘다시 읽기‘가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도 좋지만, 한편으로 지금 헤쳐 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년 째 와상환자로 누워있는,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경과 똑같이 1932년에 태어난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이경이 지나온 길에 나의 엄마를 데려 간다. 그 길에 닿는 순간 내 엄마는 활기차게 걸어 다니며 즐겁게 웃고, 당신이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긴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낸다. 일제 강점기와 육이오 전쟁 속에서 엄마 역시 힘들었을 것이다. 병약한 남편과 자식 네 명을 온 몸을 다해 보살핀다.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치매를 앓으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딸의 아침 출근을 위해 밥을 하고 계란을 부쳐 밥상을 차려줄 수 있는 정신 줄만은 놓지 않는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의 부연 눈을 들여다본다. 그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감정을 표현해 내는 엄마에게도 이경과 같은 젊음과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독서 모임엔 5명만 남아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모임을 떠나고 남은 우리는 그것을 잃지 않고자 열심히 책을 읽고 또 다른 아치울 마을에 간다. 우리에게 이젠 사춘기 아이들이 없다. 다 자란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삶은 조금 편해졌지만 우리에게는 ‘나목’과 같은 앙상함과 황량한 늙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경의 “전쟁은 누구에게나 재난을 골고루 나누어주고 끝나리라.”고 한 심술궂은 말이 떠오른다. 전쟁이란 말 대신에 인생을 넣어본다. 우리는 누구나 골고루 슬픔과 기쁨, 앙상함을 얻을 것이다. 매번 “광적이고 앙칼진 열망과 모순에 자신을 찢기고” 살지라도 여태껏 살아낸 것만으로, 그것이 쌓아 올린 융단 같은 노오란 낙엽더미가 어디엔가 있다고 믿는다. 나도, 독서 모임의 사람들도, 내 엄마도 감긴 태엽이 풀어질 즈음이면 언제든지 가서 뒹굴 수 있는 그 희망적이고도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노오란 것들 말이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p.376]
-2014년, 아치울 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