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판의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고 '홀든 콜필드' 를 잘 이해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읽을 책이 많음에도 항상 청소년을 접해야하는 나이기에 이 소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이번에 문예출판사판으로 다시 읽었다. 매번 그렇듯이 같은 내용의 책을 한 번 더 읽으면 첫째번의 나의 독서가 많이 빈약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런 내용이 있었나싶게 새롭고 생소한 장면들이 나와서 저번에 읽었던 책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그 얘기가 나와 있었다.
민음사판의 번역이 약간 정제된 느낌이어서 홀든의 내면을 좇아가기 좋았다면, 문예출판사는 민음사판보다는 거친 느낌이어서 다른 결과를 기대했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결국은 주인공에 대해 민음사판과 비슷한 결론을 얻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심하게 겪고 있는 홀든은 학교에서 계속 퇴학을 당하고, 줄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모든 것에 불만을 가지는 소년이다. 어찌보면 그의 행동이 탈선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말을 하나하나 듣고 있으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위와 위선을 싫어하며, 오히려 행동과는 다르게 생각은 도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형이 소설가에서 헐리우드의 시나리오작가가 된 것을 변절이라고 생각하고, 동생 앨리와 피비를 너무나도 사랑하며, 소박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두 수녀를 가식적이고 화려한 상류층의 여자들과 비교하며 수녀들을 따뜻하게 대한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반듯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홀든처럼 인간적이며 엉뚱하기는 쉽지 않다.
홀든은 지극히 꼰대를 싫어한다. 꼰대란 무엇일까? 딸아이는 나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방법이자 방어막으로 '그래서 엄마는 꼰대야' 하고 못박는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그런 말에 반박해야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어느 순간 꼰대가 된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럼에도 내가 꼰대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난 적어도 앤톨리니 선생 정도는 되고 싶다. 퇴학을 당하고 부모에게 말조차 못하는 갈 곳 없는 제자에게 비록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에게 질문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구두 표현 수업에서 즉흥 연설을 할 때, 어떤 학생이 조금이라도 주제에서 벗어나면 다른 친구들이 '탈선' 이라고 외치는데 홀든은 처음부터 끝까지 본론에만 충실하는 친구의 연설보다는 본론을 이탈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에 앤톨리니 선생은 본론에서 벗어나는게 꼭 나쁜건 아니지만 일단 본론에 대한 것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네가 뛰어들고 있는 타락은 일종의 특수한 타락인데, 그건 무서운 거다. 타락해가는 인간에게는 감촉할 수 있다든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바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본인은 자꾸 타락해가기만 할 뿐이야. 이 세상에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환경이 자기가 바라는 걸 도저히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단념해버리는 거야. 실제로는 찾으려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단념해버리는 거야. 내 말 알겠니?'-p276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p277'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만 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냐. 내가 말하려는 것은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밑바탕에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_이런 경우는 불행히도 드문데_ 단지 발랄한 재능과 창조력만 가진 사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가 쉽다는 거야. 그런 사람은 더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점이야, 알겠니? 내 말을?-p280
사람들이 생각하는, 특히 젋은이들이 생각하는 꼰대라는 말의 의미를 대충은 알고, 나도 동의하지만 그래도 내가 홀든을 만난다면 앤톨리니 선생과 비슷한 말을 해 줄 것 같다. 꼰대하는 말을 들어도 어쩔수 없다.
나중에 앤톨리니 선생의 행동에 실망했지만 그저 갈 곳 없는 제자의 앞날을 걱정하는 선생님의 태도로 받아들이고 싶다.
문예출판사판은 민음사판보다 책의 너비가 넓고 글자가 커서 읽기가 편했다. tvn의 '책 읽어드립니다' 에서의 홀든에 대한 해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홀든은 그냥 단순한 반항아가 아니다. 책의 앞부분에서 홀든이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민음사판에서는 '아프리카 탈출' 이라고 번역되었고, 문예출판사에서는 원어 그대로 'Out of Africa' 로 번역되어 있다. '아프리카 탈출'이라고 해서 검색해보니 내가 그토록 감명깊게 보았던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의 원작이었다.
영화로만 본다면 그 영화는 분명 '사랑'에 관한 것인데 직접 책을 읽어보면 어떤 내용일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남편에 의해 성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비행기 사고로 잃고, 내 기억이 맞다면 농장 경영도 실패해 아프리카를 탈출하고 싶은 여자의 얘기일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탈출'이란 단어는 거북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확실히 모르니 판단할 수가 없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p313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면 호밀밭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귀찮게 말을 시킬 것이다. 계속 질문할 것이다. 아무것에도 관심갖지 않고, 하고 싶은게 뭔지도 모르는 그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하나라도, 뭔가를 물어주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