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열전(列傳) 제126권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동방삭'은 재치있는 말과 글로 한무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항상 황제의 측근이었고 어전에서 말을 하면 황제가 기뻐하였다. 황제가 내린 돈과 재물을 모두 여자에게 써버리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반미치광이라고 여겼는데, 이에 동방삭은 '나와 같은 사람은, 이른바 조정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네' 라고 말한다. 건장궁 후각에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을 때, 황제가 동방삭에게 조사하게하니 그는 '신에게 술과 기름진 쌀밥을 내리시어 실컷 먹게 하옵소서. 그러면 신이 곧 말하겠습니다' 라고 했고 왕은 음식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말과 행동하나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강력한 군주의 시대에 능청스럽게 왕에게 먹을 것을 먼저 달라고 하는 동방삭은 가늘고 길게 사는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그에게는 많은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 번씩 왕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능력이 있다고 다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은 아니다. 동방삭은 익살스럽고 재치있는 변설에 능해 왕을 웃게 하였다.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양하지만, 사람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는 유머를 가진 것이 가장 큰 능력이자 기술이 아닐까한다. 동방삭은 그런 재주가 있었기에 길고도 오래 남을 수 있었다.
동방삭은 자기만의 처세술과 유머 감각으로 살벌한 궁중 정치를 비켜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회피나 외면이 아니었다. 그만의 지혜로운 방식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동방삭을 장수의 대명사이자 도교의 신으로 받들었다. ‘삼천갑자동방삭’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사기를 읽다, 쓰다‘, 김영수, p217
'골계(滑稽)'라는 말의 뜻은 말을 잘하고, 유창하여 막힘이 없는 것이며, 후에는 해학, 유머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태사공은 말하였다.
"천도(天道)는 넓고도 넓다.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말도 은미(隱微)함 속에도 이치에 맞아서, 또한 이것으로써 일의 얽힌 것을 풀 수 있다."-p1101
제 84권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나오는 초나라의 애국지사 ‘굴원’은 초 회왕의 좌도(左徒)였다. 그는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으며, 치란(국가의 흥망성쇠)에 밝았고, 문사(교제하며 주고받는 언사)에도 능숙하였다. 그러나 상관대부의 모함과 회왕의 배척으로 굴원은 파면되고 유배를 간다. 안색은 초췌하고, 야윈 모습의 굴원이 강가에 나타나자 그를 알아본 어부가 이렇게 말한다.
“대저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되지 않고 능히 세속의 변화를 따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미련한 자존심만을 움켜잡고 추방을 자초하셨습니까?”
이에 굴원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으로서 또한 누가 자신의 깨끗함에 더러운 오물을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뱃속에서 장사를 지낼지라도, 또 어찌 희디흰 결백함으로서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쓰겠소!” 라고 한다.-p359
그리고 나서 굴원은 ‘회사(懷沙)라는 부(賦)를 짓고는 바위를 품고 멱라강에 빠져 죽는다.
시류에 편승하고, 좋은게 좋은것이라는 생각에 편하고 쉽게 사는 사람은 굴원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유별나고 피곤하게 세상을 산다고 비난하고 조롱하지만, 바른 길로 가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강직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죽음의 길로 간다.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이 더러운 세상에서는 풀 수 없다.
“온 세상이 혼탁하나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 있으나 나 홀로 깨어 있어.”-p359
사기-열전의 마지막인 제 130권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저자인《사마천》은, 사기를 지은 이유를 여러 가지 설명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릉의 화‘에서 연유한다.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한 ’이릉‘을 사마천은 변호하고 이에 화가 난 한무제는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을 선고한다. 이때 사마천은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사마담‘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유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이 못다한 ’사기‘ 저술을 끝까지 완성하고, ’태사‘ 의 직분을 이으라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소자 비록 불민하오나 선조대대로 편열해놓은 구문(舊聞)을 어느것 하나 빠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p1210
만약 부당함에 항거해 자결로서 생을 마감해 버린다면,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스스로 남자의 성기를 절단하는 궁형(宮刑)을 자처하며 목숨을 구한다. 대의를 위해 치욕을 감수한 사마천은 그렇게 희대의 걸작을 완성한다. 그때 죽음을 선택했다면 사마천의 ‘사기’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릇 『시』나 『서』에서 뜻이 은미하고 언사가 간략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역』을 추연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에서 액난을 겪고 나서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추방된 뒤에 『이소』를 지었으며.........『시』 300편도 대체로 현성들이 자기의 비분을 촉발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으되 그것을 시원하게 풀어버릴 방법이 따로 없어서 이에 지난날을 서술하여 미래에다 희망을 걸어본 것이었다.-p1215~1216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사는 모습은 그때와 다르지만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가의 경우의 수는 비슷하다.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이 기술한 전국시대와 진, 한의 시대역시 극변의 장소였다. 그런 세상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우리가 갈 길의 방향을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