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사공은 말하였다........
“ 처음 책공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에는 빈객들이 문을 가득 매웠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자 대문 밖에서 작라(雀羅)를 쳐도 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책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이 교제하려 하였는데, 책공은 이에 그의 대문에다 크게 써 붙이기를 ‘한 명은 죽고 한 명이 살아 있으면 비로소 우정의 진심을 알게 되고, 한 명은 가난하고 한 명이 부유하면 비로소 우정의 태도를 알게 되고, 한 명은 출세하고 한 명이 천해지면 비로소 우정의 진심을 알게 된다’라고 하였다. 급암과 정당시 역시 이와 같으니, 슬프도다!”
-사기열전, 권 120, ‘급정열전’중에서, p1008
2, 중국 전국시대 말에 제나라 재상을 역임한 맹상군(孟嘗君)은 자신의 재산으로 빈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의 식객의 수가 무려 3000명이나 되어서 봉읍의 세금만으로는 그들을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제나라 왕이 맹상군의 명성이 그의 군주보다도 높고 제나라의 권력을 제마음대로 휘두른다고 여겨 그를 쫒아낼 때, 모든 빈객들이 맹상군이 파면되는 것을 보고 다 떠나버렸다. 뒤에 제나라 왕이 맹상군을 복권시키니, 풍환은 다시 빈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맹상군은 그에게 이렇게 탄식한다.
“식객들은 내가 하루 만에 파직되는 것을 보고 다 나를 저버리고 가서 나를 돌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선생에 의해서 다시 그 지위를 얻었지만, 식객들은 무슨 면목으로 나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다시 나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그를 크게 욕보일 것입니다.”
그러자 풍환이 말하였다.
“무릇 물건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그렇게 되는 도리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 결과이며, 부유하고 귀하면 선비가 많고 가난하고 천하면 친구가 적은 것은 일의 당연한 면모입니다. 선생께서는 아침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날이 밝으면 어깨를 비비고 다투며 문으로 들어가는데, 날이 저문 뒤에는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침을 좋아하고 저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물건이 그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기열전, 권 75, ‘맹상군열전’중에서, p213~227
3, ‘책공’의 말처럼 ‘우정’은 그렇게나 명료하고, 맹상군을 찾아오고 떠나가는 빈객들의 행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행하는 자연적인 이치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4, 8년간 참여한 독서 동아리가 반토막이 났다. 멤버중 한 사람이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겠다며 동아리를 떠난다고 했다. 다른 것을 추구하느라 책읽기가 시큰둥한 다른 멤버가 거기에 나쁘게 편승해, 사람이 중요하니 모임에 책을 없애자고 했다. 책이 없어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힐링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독서 동아리에 책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며 나는 심하게 반대했고, 모임에서 탈퇴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중요시하지 않는 인정머리없고 책만 읽는 나쁜 사람이 되었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다. 조기 축구회에는 축구가, 독서 동아리에는 책이 있어야 한다. 결국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만 남았다. 그것도 2달에 한 권을 읽는 걸로 결정됐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수용했다.
5, 하루 아침에 몇 억씩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책, 특히 문학이나 고전은 읽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전락했는지도 모른다. 책을 바탕으로 한 우정은 날이 밝으면 어깨를 비비고 다투며 들어갈 필요가 없는 하찮고 쓸모없는 문이 되었다.
6, 봄볕이 따스한 날 30분 정도를 걸어서 구립 도서관에 갔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한 그곳은 산뜻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책을 빌리고 잠깐 쉬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도서관 휴게실에는 거의 남자 노인들만 계셨다. 책이나 신문을 읽으시는 분도 계셨지만 의자에 앉아 잠을 자고 있는 분이 많았다. 내 노년의 버킷리스트중의 하나가 매일 도서관에 가는 것인데 도서관에 왜 여자할머니는 안보이는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나이 들어도 여전히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고 손주를 키워야해 시간이 없어서 도서관에 오지 못하는 것일까? 도서관에서 만나는 젊은 여자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 열람실로 향하는 엄마들이다. 세상이 많이 변한 듯 하지만 들여다보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7, 도서관 휴게실에서 북플을 열었는데 SYO님이 쓴 이주윤 작가를 향한 연서(戀書)가 있었다. 그 글을 읽고 이주윤 작가의 책이 읽고 싶어 내친김에 빌려와 내쳐 다 읽어버렸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는 이 나이가 되도록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나는 작가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솔직하고 담백한 문장들에 간간이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나는 책의 1부 보다는 2부인 ‘전기장판 위의 사색’이라는 생활 에세이가 더 좋았다. 세상을 살면서 부대끼며 얻은 여러 가지 경험과 생각들을 유머있게 그 본질을 잘 표현해 주었다.
8, 잠깐 책 속으로-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싫어도 싫은 티를 내지 못했다. 상대방이 언짢을까봐. 그런 그가 우리를 헐뜯을까 봐. 결국에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 그런데 세상을 좀 살아보니 남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눈치를 살피며 행동하는 대신, 싫은 건 싫다고 얘기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 것뿐.
“아뇨,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겠어요.” 요즘 내가 열심히 연습하는 말이다. 꽁하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말로 표현하는게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p94
정말? 그렇단 말이야? 그런데 이를 어쩌면 좋지? 미안하지만, 정말로 미안하지만 나는 그녀의 고민에 관심이 없다. 어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냐며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 기울지 않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내 한 몸 어르고 달래 살아가기도 힘에 부치는 마당에 다른 이의 불안까지 보듬을 여력 따위 내게는 없다. 너에게는 세상 가장 심각한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하찮은 푸념으로밖에 들리지 않음을. 본인이 가진 문제를 진지하게 염려하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너임을.-p205
무엇이든 네가 느끼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다. 남의 말을 너무 따라갈 필요는 없다. 너만의 방식대로 해서 누군가가 알아주면 좋은 거고 만약 알아주지 않더라도 너의 것이 남으니 그것 또한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러니 누가 시키는대로 하지 말고 무엇이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라.-p284
9, 내가 독서 동아리에서 강력하게 책을 남기자고 주장한 것은 독서 동아리에 책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솔직히 남의 징징거림을 듣기 싫어서이다. 그나마 책 얘기로 그것을 덮기 위해서이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를 읽으며 내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10,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의 책에는 4개의 단편소설이 들어있다. ‘책읽는 고양이’ 출판사의 ‘얼리퍼플오키드 시리즈’중 하나이다. 이 시리즈는 이전 세기를 산 여성 작가가 여성의 시각으로 쓴 여성들의 이야기를 묶은 단편집 모음이다. 프리먼의 작품들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집필되었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생각과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관습과 인습에 얽매여 살았던 시절에,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고 품위있게 말하며 행동에 옮기는 여성들의 삶이 너무 좋았다. 그 품위에 반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당연히 쉽지 않을테고 고단한 것인데도, 자기자신으로 살기 위해 댓가를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진취적이고 그 뒤에 누리는 편안함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또 받는다.
“목사님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 사람 간에도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요. 저는 수십 년 간 교회를 다닌 사람입니다. 저도 심신이 멀쩡한 사람이니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저는 신을 믿고 살 테니, 신이 아닌 분들은 제게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으셨음 합니다”-p34, '엄마의 반란‘중에서
루이자 엘리스가 자기만의 권리를 팔아버렸거나 자기가 누리는 유일한 만족이 흔들림 없이 계속 유지됐다면, 지금도 그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평온과 평안은 이제 그 자체로 루이자의 특권이 되어 버렸다. 루이자는 하루하루가 묵주 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부드럽고 흠 없고 순수하게 오랬동안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감사함으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p96, '뉴잉글랜드 수녀‘중에서
11,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 『미나리』를 보았다.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죽는 날까지 꾸역꾸역 살아감에 있어 매번 힘들고 신산스럽지만 그래도 어디선가에서 한줄기 빛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날이 있다. 이 영화가 그런 것 같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와 『엄마의 반란』에서 단호히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우고 정했지만, 이 영화가 나를 흔들며 혼란스럽게 한다. 또다시 묵직함과 답답함이 시작되었지만 한 줄기 빛 같은건 분명 느꼈다. 그거면 됐다.
12, 독서 동아리가 반토막이 나면서 단호히 결심한 것이 하나 있다.
나라도 더 열심히 책을 읽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