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편과 2편의 ‘고장의 이름’은 이름과 고장으로 나눠진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이 화자를 과거로 안내했듯이, 그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발베크에서 묵었던 그랜드 호텔의 방을 떠올린다. ‘스완네 집 쪽에서’의 발베크는 화자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고장이다. 낭떠러지와 절벽이 있는 거친 바다에 접한 허구의 도시, 발베크에 대해 화자는 그 이름만으로 이미지를 상상한다. 베네치아와 피렌체도 ‘이름 고유의 법칙에 종속시킴(2권,p340)’으로써 미지의 도시를 욕망한다. 화자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름의 고장’으로 떠나지 못한다. 그는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를 만나고 첫사랑에 빠진다. 질베르트를 통해 스완과 스완 부인과도 교류한다. 오데트는 볼로뉴 숲에서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이처럼 세비녜 부인, 생시몽, 라신, 발자크, 플로베르, 보들레르로 이어지는 문학가들, 지오토, 카르파초, 베르메르, 램브란트, 샤르댕, 휘슬러, 모네, 르누아르 등의 화가들, 바그너와 드뷔시, 생상스, 프랑크 같은 음악가들, 고딕 성당과 채색 유리, 장식 융단과 보석 세공, 화장, 의상, 사진, 요리에 이르기까지 예술 전반에 걸친 성찰은 바그너가 말하는 총체적 예술로서의 문학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작품 해설 중에서, p414~415]
사건과 화자의 끝없는 의식의 흐름과 몽상이 교차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작품 해설에서 열거된 어마어마한 작가들이 실제와 은유로 등장한다. 프루스트의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작품을 같이 감상해야 할 정도다. 작가가 살았던 동시대의 전반적인 예술과 문화가 이미지와 은유로 담겨있는 프루스트의 문장 중, 특히 《고장의 이름》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서술된다. 프루스트는 사람과 풍경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낯섦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나타나고, 그것은 열망이 된다. 화자의, 또는 프루스트의 문장은 나의 경험과 상상으로 저장된 나만의 은유를 새롭게 의식 위로 떠오르게 한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화자는 몸이 안 좋아 피렌체로 가지 못하고, 할머니와 함께 발베크로 요양을 떠난다. 그 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사랑도 시작한다. 장소의 이동은 이름의 이동 일뿐만 아니라 습관과 활동의 변화도 가져 온다.
[여행의 특별한 기쁨은 우리가 피곤할 때 도중에 내리거나 멈출 수 있는 데 있지 않으며, 출발지와 도착지의 차이를 지각할 수 없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차이를 될 수 있는 한 더 깊이 느끼게 하여, 우리 상상력이 단 한 번의 비약으로 살던 장소에서 욕망하는 장소 한복판으로 데려다 주듯이 우리 상념 속에 있던 차이를 그 전체 안에서 그대로 느끼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거리를 통과한다기보다는 상이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지구상의 두 개별적인 고장을 결합하고, 하나의 이름에서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며, 또 기차역이라는 그 특별한 장소에서 실현되는 신비스러운 작업으로 압축되어 더욱 기적적으로 보인다.
기차역은 도시에 속한다기보다는, 표지판에 새겨진 이름이 그러하듯 도시의 본질을 함유한다.
-p12~13]
‘고장의 이름 2’의 첫 부분은 이런 멋진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고장으로의 떠남은 새로운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 바다, 자연, 건축물, 환경에서 받는 인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인상의 느낌은 각자의 은유로 표현되고, 그것은 존재 깊숙이 각인되어 나만의 습관으로 나타난다. 습관이란 내가 하는 행동만이 아니다. 습관은 내 생각과 인식, 느낌의 축적이기도 하다. 습관은 낯선 곳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고 위축시키지만, 결국 새로움이 더해지고 변형된 채 나를 따라온다.
화자는 발베크에서 ‘게르망트 쪽’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사람들을 만난다. 게르망트 공작의 고모인 빌파리지 후작 부인, 게르망트의 동생인 샤를뤼스 남작, 그의 조카인 생루를 만나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살롱 입성을 예감하게 한다. 생루는 귀족의 특권을 거부하는 진보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여배우 라셸을 사랑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다. 화자는 귀족의 삶과 사교계를 동경하지만, 급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의 저속함을 은근 풍자한다.
작가가 되고자 결심한 화자에게 베르고트가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주었다면, 발베크에서 만난 화가 엘스티르에게는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암시를 받는다. 엘스티르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며 은유와 상징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종의 실험실(p321)’같은 아틀리에에서 작가의 창작 행위는 본래의 사물의 이름을 제거하고, 거기에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재창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거기서 각각의 그림이 가진 매력이 우리가 시(詩)에서 은유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일종의 재현된 사물의 변형에 있으며, 만물의 창조주인 신이 명명함으로써 사물을 창조했다면, 엘스티르는 사물로부터 그 이름을 제거하고 다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사물을 재창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스티르의 작품은 자연이 시적(詩的)인 상태로 있는 드문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은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땅과 바다를 비교하면서 그 사이에 놓인 모든 경계를 삭제하는 은유였다.
-p322~323]
엘스티르의 모델이 ‘클로드 모네’라면 프루스트는 이 책에서 완벽하게 모네의 그림을 설명하고, 표현해내는 것에 성공한다. 직접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프루스트의 문장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적 감각과 시선에 감탄하게 된다.
질베르트는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금발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알베르틴 시모네’는 발베크의 해변가에서 여러 소녀들의 무리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검은 머리에 통통한 뺨까지 폴로 모자를 눌러 쓴, 쾌활하지만 약간은 고집스러운 눈을 가진(p336)' 자전거를 타고 있는 소녀인 알베르틴을 엘스티르의 아틀리에에서 다시 만난다. 항상 병약한 화자에 비해 소녀들은 역동적이며 당돌하다. 그는 꽃과 같은 소녀들에게서 사랑의 모습들을 상상하며 성적인 욕망을 표출한다. 알베르틴은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가난한 고아 소녀로서 보수적인 화자의 가족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 같다. 그와 알베르틴은 신분적으로, 또한 절대적인 자유인의 표상인 그녀와 성격적인 면에서도 잘 맞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 험난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권 역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느끼고 곱씹어도 그것은 온전히 내 것이 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잘 몰라도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이 너무 좋다. 아름답고, 슬픈 감정들과 나의 경험과 의식들이 서로 연결되며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따뜻해지고, 모든 존재들에 내 시선과 생각이 퍼진다. 거기서 거두어들인 인상은 나만의 은유와 상징으로 저장된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이 책을 많이 읽었다. 도서관의 한 부분이 숲으로 연결 되어 있기에 나는 매번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으로 숲의 초록을 볼 수 있는 곳에 앉았다.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으며, 가끔씩 눈을 들어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문장을 되새겼다. 날이 저물 때면 숲 속에서 온갖 새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새들을 상상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은유만이 일종의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프루스트의 말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