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상드의 소설 ‘사생아 프랑수아’는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전원소설이다. 목가적인 전원을 무대로 그곳의 생활과 정경을 내용으로 한 것이 전원소설이지만, 정작 이 소설은 약간의 막장드라마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그런 전개로 권선징악적 형태로 끝나버리지는 않는다. ‘사생아 프랑수아’에는 다른 요소도 많이 들어있다. 상드는 이 소설에서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부유층의 무관심을 비판하고 자본에 의해 잠식되는 농부들의 고단한 삶을 묘사하기도 한다. 코르무에 방앗간 여주인인 마들렌 블랑셰에 작가 자신의 실제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녀를 통해 당시 여성이 받는 차별을 볼 수 있다. 예술가는 무엇을 통해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담겨있다.
샹피(들판에 버려진 아이) 프랑수아는 그를 돌보는 자벨과 가난하게 살아간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마들렌은 그를 돌봐준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싫어하는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녀를 구박한다. 이유 없이 고약해지고 심술을 부리는 그들에게 지고지순한 마들렌은 묵묵히 견디며 그들 모르게 계속 프랑수아를 돕는다. 열여섯에 결혼한 마들렌은 아이를 낳고 방앗간 일과 집안일을 하며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남편은 그런 마들렌에게 싫증을 느끼고 바람을 피우며 노동에서도 멀어진다.
[하지만 여자가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면 금방 매력을 잃어버리는 법이야. 더구나 아일 모유로 키웠다면 벌서 낡은 몸이야. 그래, 여자들이란 한때뿐이지. 한창때의 포도밭 같은 거야.
우리네 남자들은 아내를 사랑하기에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그래서 화를 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때론 구타까지 하지. 그것이 아내들을 슬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 아내들은 결국 집 안에만 쳐 박혀 지내게 되고 남편을 두려워하고 권태로워하고,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거야. 그때서야 우리 남자들은 만족을 느끼지. ‘내가 주인이다’라고!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엔가 아무도 자기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건 그녀가 이제는 추한 여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우여곡절 끝에 마들렌의 남편이 죽고 힘들게 살아가는 마들렌을 프랑수아가 사랑으로 구한다. 밤에 농가에서 시골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삼 재배인이 들려주는 액자소설 형식의 이 이야기에서 상드는 여성, 농부, 자본주의,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문제점을 부각시킨다. 그 당시 형편없었던 여성의 지위와 함께 사생아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비판한다. 사생아 프랑수아는 어른의 도움으로 잘 자랐지만 누구나 다 그런 행운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이 불행한 환경에서라도 어떻게 그들을 구제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일종의 투기였다. 그 농부들은 그들의 손에 일단 들어왔지만 채권자가 마음 내키지 않으면 도로 회수해 갈 수 있는 그 땅뙈기를 놓치기 싫어하는 한,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이자를 꼬박꼬박 바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 소득이, 파는 사람이 요구하는 이자의 절반도 못 되는 밭을 땀 흘려 경작한다. 그런데 반평생을 힘들여 땅을 일구고 나면 쇠잔해 버리고, 땅만이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비옥해진다. 그 땅이 두 배의 가치를 지니면 그때야말로 그것을 팔 시기다. 만일 제값에 잘 판다면 우리 농부들도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대개는 이자로 쪼들리기 때문에 서둘러 싼 금액에라도 팔아 버리게 된다. 만약 이를 거역하면 법이 강제로 그것을 집행시킨다.]
팜므 파탈, 사랑과 정열의 화신으로 불리었던 상드였지만, 작가의 사회비평은 강렬하다.
상드의 소설, ‘프랑수아 르 샹피’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민음사판)인 ‘콩브레’와 13권 ‘되찾은 시간’에 언급되고 있다. 화자는 스완의 방문으로 자신의 방에서 어머니의 키스를 받지 못해 슬픔에 빠진다. 이 에피소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관통하는 〈기억〉중 ‘의지적 기억’으로 대표되는 장면이다. 화자는 혼 날 각오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복도에서 어머니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혼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와 함께 잘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잠깐의 키스가 아닌, 온전히 하룻밤을 어머니와 보낼 수 있었는데도 정작 화자는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신경증이 병으로 인정받고 그것으로 인해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와 이상을 처음으로 포기했다는 생각으로 고통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히려 어머니가 화를 내시는 편이 내가 어린 시절에 알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다정함보다는 덜 슬펐을 텐데. 나는 이제 막, 눈에 보이지 않는 불경한 손길로 어머니 영혼에 첫 번째 주름살을 그었고, 첫 번째 흰 머리칼을 나타나게 한 것같이 느껴졌다. 이런 생각에 내 흐느낌은 더해 갔고, 이제까지 나에 대해 어떤 동정의 기색도 보이지 않던 엄마도 갑자기 내 슬픔에 전염된 듯, 울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p.75~7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그런 이유로 잠 못 드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화자의 생일에 주려고 할머니가 사 놓았던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 네 권 중, ‘프랑수아 르 샹피(사생아 프랑수아)’를 가져와 읽어준다. 처음에 할머니는 상드의 ‘앵디아나’를 골랐지만, 그 책의 내용에 정념, 간통, 자살이 들어있어 다시 상드의 전원소설로 바꿔 온 것이었다. 소설가의 전형으로 알려진 조르주 상드의 소설은 화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프랑수아 르 샹피』에는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운 것이 담겨 있다고 상상했다.....내게 새로운 책이란 그 책과 유사한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는 유일한 사람 같았다. 그렇게도 일상적인 사건들, 그렇게도 평범한 일들, 그렇게도 흔한 말들이 내게는 특별한 어조나 낯선 억양처럼 느껴졌다.
-p.80~8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내가 이 부분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상드의 ‘프랑수아 르 샹피’가 전원소설로 분류되지만 어린 아이에게 읽히기에는 좀 과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도 그렇고, 상드는 분명 부르주아에 대해 비판도 한다. 화자의 계급은 부르주아에 속했고 그들은 굉장히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 밤, 어머니는 잔재주나 꾸밈을 추방하고 따뜻한 억양으로 책을 읽어주셨고, 그것으로 화자의 마음의 가책은 가라앉았다.
‘기억’이라는 키워드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한 고 김진영 선생은, 화자의 어머니가 ‘프랑수아 르 샹피’를 아들에게 읽어주는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어머니가 이 책을 읽어줄 때 내밀한 연애장면을 건너뛰며 읽지만, 마르셀은 그것을 눈치 챈다. 프루스트의 글쓰기에서 ‘생략’이 중요한데, 김진영은 이 부분이 작가에게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했다고 한다. ‘문장들에 적합한 온갖 자연스러운 다정함이나 넘쳐 흐르는 부드러움을 표현하려는’ 어머니의 낭독은 음악적으로도 들린다.
[어머니 목소리에 들어있는 부드러움이 문장의 요청에 따라 문장으로 들어가면 문장이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어오는데, 어머니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마치 그 문장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위해서 쓰인 것처럼 흘러갔다. 이게 바로 프루스트입니다. 이게 바로 문장의 음악성입니다......프루스트의 문장은 다 이런 구조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와 문자가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죠.
-p. 142/364]
‘어머니의 책 읽기는 그가 나중에 어머니의 책 읽기 방식으로 사물에 대해 글을 써 나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이유는 결국 그가 글을 써야하는 당위를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 화자는 비의지적 기억에 의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삶과 문학이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작가는 그것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프루스트는 기억에 의해 삶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재해석하며 문학적 상상력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사생아 프랑수아’의 머리말에서 조르주 상드역시 똑같은 고민을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순수한 자연의 원초적인 것을 어떻게 예술로 나타낼 수 있을지, 그런 과정이 오히려 무의미한 건 아닌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로 인해 이런 아름다움이 소멸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프루스트처럼 글을 써야하는 의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신 오른편에는 현대어를 쓰는 파리 사람, 왼편에는 농부가 앉아 있는 듯이 얘기해 봐요. 그 농부가 이해하지 못할 단어나 문장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파리 사람을 위해서 명확하게, 농부를 위해선 꾸밈없이 얘기해야 할 거요.-‘사생아 프랑수아’, 머리말 중에서]
어머니가 어린 마르셀에게 ‘프랑수아 르 샹피’를 읽어 준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전쟁이 일어나고 마르셀은 건강상의 이유로 두 번이나 요양원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마르셀은 생루 부인(질베르트)의 집 서재에서 조르주 상드의 『프랑수아 르 샹피』를 꺼내든다. 화자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예술가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조르주 상드의 『프랑수아 르 샹피』였다. 지금 내가 하는 사유와는 너무도 일치하지 않는 어떤 인상으로 인해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불쾌했지만, 이내 그 인상이 내 사유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깨닫고는 깊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p.53
나는 본질적인 책, 유일하게 참된 책은 이미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임무와 역할은 바로 번역가의 그것이다.
-p.6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권]
‘프랑수아 르 샹피’를 통해 작가 프루스트와 조르주 상드가 만나는 부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재독하면서 좋은 책은 절대 한 번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두 번째이니 더 쉽게 더 빨리 읽히리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은 읽을수록 공부할 것도, 의미를 곱씹을 문장도 많아 오히려 더 천천히 읽게 된다. 특히 이 책의 1권인 ‘콩브레‘가 너무 좋다. 처음 읽었을 때 느끼지 못한 것들이 다시 발견되고, 프루스트의 문장을 매번 감탄하며 읽는다. 무인도에 가져갈 10권 중 한 권은 주저 없이 잃.시.찾의 ’콩브레‘가 될 것이다.
<나의 마들렌 효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마들렌’이 발견될 때마다 나는 마들렌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