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나머지 모든 이들과 함께 본드 거리를 걸어가는 이 놀라운 그리고 약간은 엄숙한 행진이 있을 뿐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이 존재가 말이다. 
더 이상 클러리서가 아니다.
이 존재는 리처드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 P20

잎들이 어수선한 숲 깊은 곳, 영혼 속에서 가지가 지끈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발굽들이 꽂히는 것을 느끼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언제고 아주 만족스럽거나, 아주 안전하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언제라도 괴물이, 이 미워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픈 뒤로 이 미움은 그녀 등을 후비듯이 아프게 하는 힘이 있었다. 
또한 그녀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주었고 아름다움이나 우정, 건강한 것, 사랑받는 것, 그녀의 집을 기쁨이 가득 찬 반석으로 만드는 일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뒤흔들고 무릎 꿇고 굴복하게 만들었다. 
마치 정말로 괴물이 뿌리에서부터 파헤치는 것 같았다. 
마치 만족스러워하는 이 모든 차림새가 이기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미움! 모순, 모순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소리 지르면서 멀베리네 꽃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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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16 0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 댈러웨이 부인 읽고 계시군요. 저도 지금 읽고 있는데 말이죠.
같은 책을 우리가 어떻게 같게 또는 다르게 읽을지..... 너무 좋아요. ^^

2021-05-16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1-05-16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어요. 너무 유명해서...
그런데 왠지 지루할 거라는 생각에 그만 두었죠. 나중에 추천할 만한 작품이었는지 글 올려 주세요.^^

페넬로페 2021-05-16 17:33   좋아요 2 | URL
네,정말 읽기가 쉽지는 않아요~~울프의 글을 지금 나이들어 읽으니 공감되는 내용이 많은것 같아요^^
근데 젊었을 때 읽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남아요^^

레삭매냐 2021-05-17 1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를 좀 읽어 보겠다고
이 책 저 책 사두긴 했는데 한 개두
읽은 게 없네요 흠...

미국 사람들도 버지니아 울프의 책
들은 문체가 어려워서 어렵다고 하
더라구요. 위안 삼아 보렵니다.

페넬로페 2021-05-17 13:31   좋아요 0 | URL
두 달동안 독서동아리에서 울프 읽기를 하고 있는데 넘 힘들어요~~그냥 이 기회에 울프 책 좀 읽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으려 합니다^^
 

 

 

 

 

 

 

 

 

 

 

 

 

 

 

    

지지않는 하루는 암이라는 병 앞에 소환된 저자가, 1년 동안 일상과 생각을 기록한 글이다. 고통 속에서 암 투병을 하는 사람이 쓴 글이 맞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이 책에 있는 모든 문장들은 담백하고 담담하다. 수술을 받고, 여러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 중에도 여행을 가고, 사람을 만나고, 매일 아침 아이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 간다. 몸에 힘든 병을 지닌 채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에 고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천천히, 세심하게 보고 느낀다. 사물과 존재의 불완전함을 수용하고, 내가 예외일 이유가 없음을 받아들이며, 몽테뉴의 책에 위로를 받는다.

 

{암이라는 병도 비슷하다. 피레네의 종소리처럼 내 인생에 눈금을 긋는다. 병이 생기기 전과 그 이후로 자르고, 그 이전에 나는 무엇을 했는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사색하게 만들며 사는 일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 번씩 내가 아프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육신의 고통이야 말할 필요가 없고, 그보다 내 손이 미치지 못할 가족을 생각하면 더 암담하다. 나의 소진(消盡)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없다면 그들의 삶 역시 피폐해질 것이다. 병을 앓는 육신의 아픔은 온전히 개별자의 몫이지만, 시작하고 일궈놓은 관계에서조차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이 생각만으로도 신산스럽다. 이렇게 상상만으로도 암울해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무한히 위로해야 하는데도 정작 난 이 책을 읽고 위로를 받는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같은 반대적이며 이중적인 것들 모두 내 마음이 결정하며, 그저 담담히 인생과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난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써왔다. 그 일기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육아일기로 교체되었는데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일기를 쓰라고 누군가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도 전반적인 일기의 내용은 반성과 후회였다. 언제나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는지, 아님 스스로가 못나빠진 얼간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매순간 치열하고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왜 내 일기는 항상 그렇게 반성만이 가득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나의 문장들에 싫증이 나서 어느 순간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화열의 지지않는 하루를 읽고 다시 일기가 쓰고 싶어졌다. 다시 일기를 쓴다면, 이 책에 적힌 문장처럼 나의 일상을 묵묵히, 간결하게 기록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영리한 행복을 추구하는 글로 쓸 것 같다.

 

{의사가 물었다.

마담 르그랑은 무슨 일을 하나요?”

디자이너고 글도 씁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좋은 책의 주제를 준 겁니다.”

.............................

 

저녁 식탁에서 구역질 때문에 식사를 멈추는 걸 보고 올비가 말한다.

“6개월 뒤에 출산하는 거야. 이번에는 아이가 아니라, 새로운 자신을.”}

 

이왕이면 저 문장처럼, 기지와 충만한 위로가 가득한 글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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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09 1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러한 하루하루의 영리한 행복을 아프기 전에 알게 되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저도 일기 비슷한 메모는 쓰는데 이게 쓰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ㅎㅎ 페네로페님의 일기쓰기를 응원할께요~!!

페넬로페 2021-05-10 00:12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말씀이 맞아요~~영리한 행복을 하루하루 찾아내며 살아야 해요^^이 말은 오르한 파묵의 책에 있다고 하는데 세상에 읽을 책은 어찌나 많은지~~조금이라도 일기 쓰기 해야할텐데 ㅎㅎ
응원, 감사해요^^

미미 2021-05-09 19: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올비의 마지막 말도 의사의 말도 인상적이네요! 인생에 예상치 못한 불행들. 어쩌면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새로운 삶으로 건너는 다리가 될수도 끝이 안보이는 절벽도 될 수 있겠죠.🥲

페넬로페 2021-05-10 00:15   좋아요 3 | URL
그렇죠! 간결하면서도 의미있는 말들이 참 좋았어요^^잘 받아들여야 하는데 매번 이런 글들을 통해 새삼 또 다짐하고 있어요~~끊임없는 학습이 반복되어야 하니 저는 참 어리석은 사람 같기도 해요^^

scott 2021-05-09 21: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물과 존재의 불완전함을 수용하고, 내가 예외일 이유가 없음을 받아들이는...]
불완전함을 받아 들이지 못해 고집과 아집만 가득 늘어나는,,,
코로나 팬더믹에 페넬로페님이 오늘 올려주신 페이퍼 더더욱 공감하게 되네요.


페넬로페 2021-05-10 00:19   좋아요 3 | URL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서로 공유해야함에도 세상은 그저 욕망의 발산으로만 돌아가는 현실이 참 안타깝죠! 저자의 문장을 통해 많이 비워야함을 또 깨달았어요^^
우연히 오늘 올린 저와 scott님의 글이 통하는것 같아요^^
이화열 작가도 이 책에서 계속 몽테뉴의 수상록에 대해 썼거든요^^

cyrus 2021-05-10 06: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게 힘을 주는 글입니다. 저도 ‘지지 않는 하루‘를 보내도록 해야겠어요. 적은 시간이라도 글을 써야겠습니다.

페넬로페 2021-05-10 09:38   좋아요 2 | URL
네, 지지않는 하루를 보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 같아요^^
cyrus님의 글은 언제나 좋으니 꼭 계속 쓰시기 바래요♡♡


페크pek0501 2021-05-14 1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길게 몸살을 앓았어요. 다 나았나 싶어 나갔다 오면 또 몸살.
집안 청소를 하고 나면 또 몸살, 그렇게 길게 가더군요. 입맛이 없어 저절로 커피를 끊고 지냈어요.
다시 커피가 맛있어서 며칠 전부터 마시니, 아마 이제 몸살 끝인가 봐요.

아파도, 병이 있어도 의연하게 사는 사람들 보면 존경스러워요.

우리 모두 건강합시당~~~

페넬로페 2021-05-14 14:07   좋아요 2 | URL
페크님, 몸살로 고생이 많으셨네요~~
커피까지 끊으실 정도로 아프셨다면 그 힘듦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됩니다~~
우리가 책에서 많은 힘과 희망을 얻지만, 책에 있는 것이 다가 아닐것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 역시 그 의연함을 존경해요^^
건강 회복하셨다니 기쁩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길 기대해요**

 

책은 나에게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그 사람의 성공담이나 인생 역정보다 스타일에 더관심 있는 편이다. 몽테뉴는 나와 책을 읽는 습관이 꼭비슷했다.

난 책을 슬렁슬렁 읽지 자세히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렇게읽고 났을 때 내게 남는 건 그 책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책을 통해서 내가 판단한 것, 감동받은 것, 상상한 것뿐이다.
작가, 배경, 어휘들, 이런저런 상황들, 그런 것들은 당장에잊어버리고 만다.
_ 몽테뉴 - P144

행복은 추구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행복은 그저 하나의 단어일뿐이다. 추론이 아니다. 인생은 그냥 인생 지체로 좋은 것이다.
행복하다는 건 여행, 성공, 부, 기쁨 때문이 아니다. 그냥 행 - P258

복하므로 행복하다. 인생의 풍미가 행복이다. 딸기에서 딸기 맛이 나듯 인생에서 나는 맛이 행복이다. 햇빛은 아름답고, 비는 달콤하고, 세상의 소음은 음악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이것이 일련의 기쁨이다. 슬픔, 고통, 심지어 피로도 인생의 맛이다.
존재한다는 건 그냥 좋은 것이다. 다른 무엇과 비교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존재는 허무가 아니라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태어나지도 지속하지도 않았으리라. 눈을 즐겁게 하는 색깔을 생각하라. 느끼는것은 기쁨이다. 우린 삶에 갇힌 죄수가 아니라. 삶을 맛보며사는 것이다. 보고 만지고 판단하고 세상을 펼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아침 보행자 같다. 지평선에 쌓인 모든 것들이갖는 의미는 바로 내가 원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모든 삶은 기쁨의 노래다. 사람들은 베토벤이고통을 극복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도 .
그 나름의 승리를 쟁취한다. 거지나 개도, 의심할 여지없이.

알랭 ㅡ노르망디인의 어록 Propos d‘un Normands - P259

시간과 물로 흐르는 감을 보고,
시간도 강임을 기먹하라.
강처럼 무리도 사라지고
물처럼 우리의 얼굴도 스러짐을 말라.

깨어 있음은 또 하나의 꿈.
꿈꾸지 많는 꿈, 잠들지 않는 꿈이며,
육신이 두려워하는 건
매일 밤 죽음처럼 찾아보는 꿈이라 생각하라.

인간이 살아온 일상.
그 유구한 세월의 상징을 보고
세월의 횡포를 음악과 속삭임.
그리고 상징으로 바꿔라.

죽음과 석양에서 찾아낸 꿈,
그 서글픈 황금은 시일지니.
가난하고 불멸하는 사일지니,
시는 여명과 석양처럼 다시 온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학 Arte poeties - P13

겉장이 파란 노트 한 권,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연필깎이와
대리석 테이블들, 이른 아침의 향기, 맺힌 땀, 
그것을 닦기위한 손수건 한 장, 그리고 행운, 
이것이 내가 필요로 하는모든 것들이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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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5-09 00: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인생, 성공한 인생, 운이 좋은 인생,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조금 더 많이 그리고 조금 더 자주 찾아오면 좋겠어요.
사람마다 복권을 사도 행운의 결과가 다른 것처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요.
잘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 좋은 밤 되세요.^^

페넬로페 2021-05-09 10:46   좋아요 2 | URL
네, 정말요^^
모든 사람들에게 행운이 가득한 삶이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서니데이님!
행복하시길 바래요**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 밤의책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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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이때 소련군은 폴란드 장교 및 지식인을 대거 수용소에 가둔다. NKVD(내무인민위원회-스탈린의 통치 기간동안 행해진 정치적 숙청의 직접적인 실행 기관)는 포로들의 성향을 철저히 파악하여 소련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제거하자고 스탈린에게 제안했고, 스탈린도 이를 수용한다. 1940년 봄, 카틴 숲에서 수천 명이 학살된다(카틴 숲 대학살). 카틴 외에도 하리코프, 칼리닌 부근 수용소의 포로까지 합치면 당시 목숨을 잃은 폴란드인은 총 2만여명에 이른다. 결국 그 지역에 살아 남은 포로는 그랴조베츠 수용소에 있던 400여 명의 장교와 군인들 뿐이었다.(서문과 옮긴이 미주에서)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 중 몇 사람이 군사학과 역사학, 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p10

 

영하 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않아, 당시 우리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이 같은 각고의 지성적 노력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정신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었다. -p12~13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료들을 보며, 항상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그들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정신의 세계만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위태롭다. 인간의 육신은 그들의 지성과 정신을 위해 희생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히려 집요하게 유기적인 작동을 하고, 그 결과를 인식시키려 한다. 그러한 현실에서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지키려하는 그들의 모습은 숭고하다.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없고, 가진 것이라곤 프루스트 작품에 대한 기억만으로 강의를 하며, 육신의 피곤함 속에서도 모여 앉아 강의를 듣는다. ‘교외수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순간들의 시간은 그들에게 기쁨이었고,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로 남아 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폴란드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인 유제프 차프스키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그랴조베츠 포로 수용소에서 동료들을 위해 마르셀 프루스트를 주제로 강의한 그의 노트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숭고한 이야기에 내가 더 기대한 것은, 수용소의 현실과 강의를 듣는 그들의 느낌과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배경에 불과하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차프스키의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강의의 내용이다. 그것에 대해 살짝 실망했지만, 곧 그의 강의에 빠져들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세 번 정도 도전하고, 곧 포기해버린 책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꼭 읽어야 할 책이기에 차프스키의 강의는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좋은 입문서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프랑스의 문화적인 배경을 시작으로 프루스트에 대한 개인적인 소개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내용에 대해. 비록 조각조각, 자신의 기억만으로의 강의이지만 무척 훌륭했다. 이 책을 전혀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인 나에게 흥미를 주었으며,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에 대한 구절에서는 재미있기까지 했다. 10권이 넘는 대하소설의 내용을 기억하며, 생각을 꺼낼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열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만약 내가 그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난 우리의 정신을 위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고, 읽은 책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매일 매 순간, 책을 읽지만, 읽은 내용에 대해 정리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부족한 나이기에, 자신있게 기억으로만 얘기해줄 수 있는 책이 별로 없음을 실감한다. 이 책은 나의 책읽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하게 만든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프로스트의 작품에 대한 기억뿐이어서 어떻게든 그것을 정확하게 떠올려 보려고 정말로 애를 많이 썼다. 사실 이것은 문학 에세이가 아니다. 내 인생에 언제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싶은 책, 내가 정말 많은 빚을 진 어느 작품에 대한 추억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서문에서)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책은 내가 기대하지 않던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출판사를 바꿔가며 두 번이나 꼬박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아니 나에게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때까지 내가 생각한 좋은 소설이나 고전은 시대적인 상황과 작가의 이력을 배제하고(물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냥 글을 읽음(글 속에서)으로써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울프의 소설은 그러한 느낌에서 살짝 빗나갔다. 서사를 거의 배제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온 것들을 의식의 흐름속에서 계속 내뱉는 그 말들은, 작가의 배경을 잘 모르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등대로는 나에게 좋은 소설인지, 아닌지가 잘 판단되지 않았다. 차프스키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었던 시기는 프랑스어에 대한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 편이 아니었을 때이다. 문학적 소양도 많지 않아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책에서 주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프루스트가 다루는 이야기와 그것에 담긴 의미였지 문학적 질료나 형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의 조합으로써 심리를 해석하는 예지가 곧장 내 가슴을 밀고 들어왔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울프의 글에 대한 나의 느낌이 굉장히 편협적이고, 결국 나의 독서는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형식을 파괴하고, 내 안의 굳은 덩어리같이 뭉쳐있는 아집과 벽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가 얘기하는 것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이면의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차프스키의 문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뒤늦게 깨닫는다.

 

프루스트는 나이가 들면서 어떤 냄새나 어떤 향기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생애 마지막 몇 해 동안 전체를 코르크로 덮은 방에서 생활했다.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노역에 시달리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수용소의 삶 역시 사방이 코르크로 막힌 것처럼 단절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극단적인 곳에서, 프루스트와 살아남은 자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정신을 위한 강의를 듣는다. 그들은 그렇게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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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05 15: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런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이겠죠? 지식인들을 우선적으로 잡아가고 죽인걸 보면요. 정신적 의지란 전염성도 강한것 같습니다.제목부터 뭉클해요!🥲

페넬로페 2021-05-05 18:12   좋아요 3 | URL
철저하게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민들기 위해 지식인부터 죽이는것이 참 잔인하죠? 이 책의 제목과 짪은 서문에서 참 가슴 뭉클하고 숙연해져요^^

coolcat329 2021-05-05 16:0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입문서로 읽으면 좋군요. 기억에 의존한 강의라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작가의 열정이 대단했네요.
저는 방금 읽은 책도 선뜻 말하기 힘든데 말이에요.

페넬로페 2021-05-05 18:13   좋아요 4 | URL
네, 이 책이 제가 기대한대로의 서술로 이어지진 않지만, 프루스트에 대해서는 좋았어요~~

scott 2021-05-05 16:1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유제프 차프스키가 카틴 숲 대학살 사건에서(소련이 2만2000명의 폴란드 군 장교와 엘리트들을 카틴 숲에서 집단 학살시킴) 살아남은 79명중 한 사람입니다.
수용소 영하 40도 이하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면서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 한것 그자체도 믿기 힘들 정도네요 온전하게 살아 움직이는것 조차 힘든 상황이였을텐데
극한의 상황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 마저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나‘라면, 우리 라면,,,,

저도 지금 프루스트와 울프 여사의 책 번갈아 가며 읽고 있어서 인지 페넬로페님의 이 리뷰 읽고 또 읽고,,,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형식을 파괴하고, 내 안의 굳은 덩어리같이 뭉쳐있는 아집과 벽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페넬로페님의 이 문장에 깊이 동감!
카프카가 ‘책이란 우리 안의 꽁꽁 언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여야 한다‘ 라는 말을 남겼죠.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살아남아서 이런 글을 남긴 작가에게 무한의 감사를~

이책 장바구니로~ପ(๑•̀ᴗ•̀)* ৳৸ᵃᵑᵏ T৹ *

페넬로페 2021-05-05 18:16   좋아요 3 | URL
scott님께서도 울프 읽고 계시는군요~~저는 이 책 읽으며 scott니의 페이퍼에 올려주신 프루스트에 대한 글들이 많이 도움됐어요~~차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79명이라 살아남은 자의 고뇌도 많을것 같았어요 ㅠㅠ

새파랑 2021-05-05 1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 프루스트의 책을 읽을 수 있는건가요? ㅎㅎ ‘정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한 강의라는게 엄청 인상적인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에게 반성과 성찰을 하게 만든다니 꼭 읽어봐야 겠네요^^
(저도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게 ~~!)

페넬로페 2021-05-05 18:18   좋아요 3 | URL
확실히 이 책으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접근은 좀 쉬울것 같아요^^책을 그냥 읽는데 급급한게 아닐까하는 반성을 했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1-05-05 21: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결말에 가서는 이렇게
심오한 각성이 등장하게 될
줄이야.

저는 도저히 그 경지에 이르
지 못할 듯하여, 기존에 하
던 대로 편협하고 자기만족
적인 그런 독서를 하는 것으로.

쿨럭.

페넬로페 2021-05-05 22:41   좋아요 2 | URL
ㅎㅎ
제가 잘하는 것이 반성이고 각성이라~~
레삭매냐님은 충분히 독자적인 독서를 할 수 있는 분이시죠~~
그저 저는 중간중간 각성하며 따라가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5-05 21:1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어야겠군요.
우리의 일상에서도 무너지지 않기위해 책을 펼쳐드는 순간이 많지 않을까요?
저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저의 경우는 그런데...^^
마음이 너무 힘들때는 아주 어려운 책을 읽어요^^

페넬로페 2021-05-05 22:44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의 말씀이 맞아요~~
우리의 일상, 특히 여기 알라디너들은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을것 같아요~~
조만간 같이 프루스트 읽어요^^

mini74 2021-05-05 21: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읽은 책에 정신적 비상식량인 말이 있더라고요. 절박한 순간 필요한 건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ㅠ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리뷰 고맙습니다 ~

페넬로페 2021-05-05 22:46   좋아요 5 | URL
그 절박한 순간을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고 뭉클하더라고요~~
정신적 비상식량으로 더 치열하게 책 읽고 쟁여놔야겠어요^^ㅎㅎ

scott 2021-06-04 20: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유제프 차프스키!!
페넬로페님에게 땡 TO날린 리뷰

이달의 당선작!
제예감 적중 함요 ㅎㅎ
추카~*추카~*٩(๑❛ᴗ❛๑)۶

페넬로페 2021-06-04 23:21   좋아요 3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땡 to도요^^

그레이스 2021-06-04 20: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1-06-04 23:22   좋아요 3 | URL
에휴.감사드려요^^

미미 2021-06-04 2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1-06-04 23:22   좋아요 3 | URL
미미님, 이렇게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4 22: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페넬로페님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페넬로페 2021-06-04 23:23   좋아요 2 | URL
초딩님, 제 서재에 방문해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서니데이 2021-06-04 23: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1-06-04 23:24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님,
감사드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새파랑 2021-06-04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한번 더 축하드릴께요^^
 

만일 삶이 그 밑바닥에 어떤 바탕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만일 삶이 그 주인공이 채우고 또 채우고 또 채워야 할 그릇이라면, 나의 그릇은 틀림없이 이 기억 위에 서 있을 것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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