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논픽션의 페르소나는 대리인이 아니다. 논픽션 작가는소설가나 시인이라면 거리를 둘 수 있는 변명과 낭패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소파에 드러눕는 거나매한가지다. 설령 작가가 자발적으로 그리 한다 해도 이런 전략은 대개 잘 먹히지도 않는다. 대체 몇 년이나 소파에 누워 있어야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넋두리와 푸념, 자기혐오와자기변명만 늘어놨다간, 작가 자신 말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지루해할 텐데 말이다. - P11

작가의 대리인이 아닌 서술자는 자신의 사소한 관심사를 널리 공감할 수 있는 초연한 이야기로바꾸어, 무관심한 독자에게도 가치 있는 글을 써내야 하는 엄청난 과제를 떠맡는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에세이나 회고록을 쓸 때는 그런 페르소니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조명 도구나 마찬가지다. 이게 없으면, 주제도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회고록이나에세이를 쓰는 작가는 그런 페르소나를 빚어내기 위해 소설가나 시인처럼 자기 성찰이라는 견습 기간을 거치며, 왜 말하는가.
누가 말하는가를 동시에 알아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 P12

모든 문학 작품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다. 상황이란 맥락이나 주변 환경, (가끔은 플롯을 의미하며, 이야기란 작가의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감정적 경험, 혹은 통찰과 지혜, 혹은작가가 전하고픈 말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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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5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5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보통 두 가지 경우가 생긴다. 책의 내용에 푹 빠져 작가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와 작가를 계속 의식하며 책을 읽는 경우이다. 나는 전자에 속하는 독서를 많이 하는데(주로 소설을 읽어 그럴 것이다), 백래시를 읽으면서는 계속 작가 수전 팔루디가 의식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촘촘하게 서술된 내용에 한 번씩 지치기도 했지만, 마지막 부분쯤 갔을 때,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거대 담론이나 무슨 주의(主義)보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팔루디가 했을 고민과 수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러 반격에 대한 부당함을 따지고, 세세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듣고, 법원의 판례와 책이나 연설문을 읽었는지가 보였다. 또한 그것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내 전달하고자 하는 절실함도 있었다. 너무 고생했다고 작가를 한번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저자가 피곤할 정도로 쪼개어 자세히 나열한 사례들은, 이 사회의 거대하고 부당한, 치졸하기까지 한 여성을 향한 반격에 대한 반박이었다. 설득력 있는 저자의 말들은 분명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사람들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백래시의 백미는 팔루디가 반페미니스트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을 논파할 때 드러나는 깊은 냉소와 서늘한 유머 감각이다. “페미니스트는 재미를 깨는 프로불편러라는 세간의 편견과 달리팔루디의 서술은 독자로 하여금 때때로 낄낄거리게 한다책을 읽다 보면 고도로 직조된 빈정거림이 아니라면 페미니즘을 둘러싼 현실을 포착하고 설명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한국어판 해제 중에서]

 

책을 읽으며 어이없고 기가 차서 나도 낄낄거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내가 백래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2016년에 출간된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를 보고 나서이다. 이 소설과 영화에 대한 수많은 논란은 다 제외하고(페미니즘이든, 백래시든),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김지영이 왜 나도 살지 않았던 삶을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너희들만 그렇게 힘드냐?”고 말하며 시작된 젊은 세대의 남성들이 보인 여성에 대한 혐오의 원인이었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면, 더구나 골수보수정부가 집권하고 뉴라이트가 기승을 부리는 이 즈음에 1980년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지금과 상황이 비슷한 이 책이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전 팔루디가 밝힌 반격의 이유와 움직임은

 

-평등에 대한 남성들의 반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저항

-남성들의 경제적사회적 안녕을 위협한다는 불쾌감

-여성들이 거둔 대체로 소소한 성과(혹은 그저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인식)에 발끈

-여성들의 근근한 진보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잉 반응

-여성들의 정치적 발언을 막아 버림

-반페미니즘이라는 트렌드를 미디어가 교묘하게 주도함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여성들의 삶의 역설반격에서 핵심으로 자리하게 될 그 역설을 처음으로 주류 청중들에게 제시하고 해설한 집단이 바로 언론이었다는 점이다그 역설이란 바로 여성은 많은 성과를 손에 넣었지만 대단히 불만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반격을 철저하게 파헤치는 대신 이를 유포하는 쪽을 택했다.]

 

-헐리우드의 합류(소심하게 체제 순응주의를 택함)

-반격의 출생지인 뉴라이트 집단의 혹독한 응징

-“여성은 남편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믿음

-여성들이 학대를 좋아한다는 주장(구타당하는 여성들을 가정폭력을 자초하는 마조히스트로 취급

 

이러한 반격은 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여성을 이용하고, 미스아메리카대회나 미용 산업으로 여성의 관심을 돌리려고 했다. 페미니즘을 옹호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입장을 뒤집어 반격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여성의 신비를 쓴 베티 프리던도 자기가 직접 쌓은 탑에 흠집을 내는페미니스트였다.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13일터14장의 부분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생각과 여성은 태생적으로 저소득 일자리를 선호한다는 편견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특히 블루컬러계층에서의 직장에서의 차별은 심각했다. 저소득층 남성들은 아내가 일하는 것을 원치 않음에도 그들의 수입 없이는 생활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술을 마셨으며 일하러 나가는 것을 방해했다. 어떤 남성은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아내가 다니는 직장에 취업해 그녀를 괴롭히고 폭력을 가했다. 여성들은 같은 직장의 남성들로부터 성희롱과 폭력, 성폭행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일하는 여성의 가장 큰 적은 직장 내 남성 동료들과 남편이었다. 언론계에서 일하는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사방이 온통 바리케이트로 막혀 있다는 기분만 들어요노란 불빛이 번쩍이는 바리케이트요그리고 한 발짝 떼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 또 다른 바리케이트를 내 앞에 던져 놓죠.” 하지만 법적인 싸움에서 패하고공포를 통해 군림하던 남편은 비참하게 죽고설거지나 하는 굴욕적인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자 했던 자신의 결심은 절대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 우린 이걸 바꿔야 해하고 말했다가 해고당했다면 그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가정사를 결정할 가부장의 능력이 퇴색된 데 대한 억울함은 여성 스스로가 출산을 통제할 기회를 빼앗았다. 여성들의 성적인 자유도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유타에서는 입법가들이 낙태 시술자들을 최고 5년까지 징역에 구형할 수 있게 만들려 했다루이지애나에서는 입법부가 10년의 강제 노동을 요구했고매사추세츠에서는 전기의자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법안이 두 차례 제출되었다]

 

1800년대도 아닌 198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이렇게 낙태 반대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낙태 비용 지원 보조금이 줄어들자 여성들은 불법시술을 받았고 멕시코까지 가야만 했다. 거기서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는 여성도 많았다. 복지 수급자였던 아이다호에 사는 열세 살 소녀 스프링 애덤스는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였다. 그녀의 엄마는 낙태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부담할 수 없어 포틀랜드의 저렴한 클리닉으로 딸을 데려가려고 했지만, 스프링은 낙태에 반대하던 아버지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1980년대에 낙태 반대의 상징은 아기 엄마가 아니라 태아였다.

태아는 산전 수술실에서는 주요 환자가법률 서적에서는 완전한 시민이법정에서는 핵심 원고가 될 판이었다실제로 1980년대 말경 태아는 어떤 영역에서는 살아 있는 아이보다 법적 권리를 더 많이 가졌다.]

 

임신한 여성의 건강보다 태아의 권리가 더 우선시 되었다. 하지만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인체에 유해한 환경의 작업장에선 여성 노동자들에게 불임수술을 강요했다. 산업 독성 물질 접촉이 남성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주는 것임에도 여성들만 일자리와 자궁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반격이 직장 여성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행위를 은밀히 진행했음에도 시어스 소송이 있었고, 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근 10년간의 전투를 하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새로운 공부를 한 다이앤 조이스, 팻 로랜스, 잔 킹의 사례를 읽는 동안 대학 1학년 때의 은사가 생각났다. 이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지만 그 선생님도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내 전공이 아닌 교양수업의 시간강사였던 선생님은 강의 도중에 한 번씩 자신의 처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곤 했다. 가족 수가 많은 시댁에서 살고 있었던 그녀는 어린 아이가 있음에도 공부를 하며 강의를 나온다고 했다. 시댁에서 해야 할 집안일이 많아 보통 와이셔츠를 두벌씩 겹쳐 다린다고 했다. 시집살이가 녹록지 않지만 그녀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말함으로써, 힘들지만 계속 해 나가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겨울이 되고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어스름 속에 뛰듯이 종종걸음치며 교문을 나서고 있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수업을 마친 우리들은 맥주를 마시러 갈 예정이었고 선생님은 급하게 시댁으로 달려가야 했을 것이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불쑥 선생님에게 자아실현 하세요!”라고 외쳤다. 선생님은 자신 앞에 있는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아실현 하셨을까? 아님 잔 킹의 말처럼 지더라도 시도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수전 팔루디는 백래시의 에필로그에서 단도직입적인 의제와 대중행동,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저항이 결합되어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고단언한다. 어떤 여성들은 착한 인내심을 가지고 소심하게 도전했다. 하지만 이런 저항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적극적이며 당당하게 전략을 구사하며, 여성들이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해결책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을 것 같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책이다.


읽기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지만, 분량이 많고 도중에 다른 책을 읽어야 해서 거의 세 달에 걸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가 이 책에 여러 사례를 집어넣고 그것에 대해 끈질긴 반박을 했기에 한 곳에서 오랫동안 읽기는 쉽지 않았다. 집 안에서, 카페에서,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KTX에서도 읽었다. 변화와 실천은 정확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계속 되새겼다.

 

-[ ]표시는 책의 내용을 인용했으며 페이지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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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0-09 14: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한 책이라는 말씀에 아프게 공감합니다. ‘변화와 실천에는 정확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도요. 저는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엄두를 내지 못해 미루고 있었는데 페넬로페님, 읽는 제가 후련하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 이 책 저도 ..무거운 내용임에도 많이 웃었어요.ㅎㅎㅎ

페넬로페 2023-10-09 17:47   좋아요 3 | URL
이 책에 나오는 사례마다 할 말이 많았는데 그걸 다 적으려니 끝이 없을 것 같아 적당히 정리했습니다. 와, 정말 졸렬하고 비열하고~~아직 멀었지만 또 하나의 인식을 한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3-10-09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멋진 리뷰입니다.
저도 중간부분까지는 낄낄거리며 웃었어요. 뒷부분으로 갈수록 좀 마음이 안좋았었는데 인용해주신 부분들을 읽으니 기억이 새록합니다.
‘적극적이며 당당하게 전략을 구사하며 실천하기‘가 저항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말씀 꼭 기억해야 할 명언이네요.
e북으로 읽기! 페이지 수가 많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고생많으셨어요.^^

페넬로페 2023-10-09 17:52   좋아요 3 | URL
정말 기가 차서 웃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리라 믿으려고요.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연대하며 움직이라는 팔루디의 말을 새겨 넣었어요. e북이 어디 다니기는 확실히 편했어요^^그리고 저에게 주는 칭찬, great도 슬쩍 넣었습니다. ㅎㅎ

독서괭 2023-10-09 18: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겨우 완독하고 리뷰는 못 쓰고 있는데 페넬로페님 넘 잘 정리해주셨네요!! 저도 작가의 노력이 참 고맙더라고요.
그 강사님… 시집살이에서의 도주에 성공하셨기를 ㅠㅠㅠㅠ

페넬로페 2023-10-09 18:10   좋아요 2 | URL
책은 잘 읽었는데 넘 내용이 많아 정리를 잘 못했어요. 작가가 저널리스트라 그런지 확실히 논리적으로 반박을 잘 하더라고요~^

저는 그 강사님이 자아실현 하셨을거라 믿고 있습니다^^

은하수 2023-10-09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님 리뷰와 모든 댓글에 좋아요 남기는 것으로 응원 대신합니다.
저도 곧 읽기에 동참해 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3-10-09 19: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은하수님께도 유익한 독서되시면 좋겠습니다^^

얄라알라 2023-10-11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페넬로페님, 멋지세요.

˝자아실현 하세요.˝
와이셔츠를 두 장씩 다리시던 그 선생님께 오래 기억될 응원이었을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10-11 11:57   좋아요 0 | URL
그때 ‘자아실현‘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의 뜻을 잘 모르면서도 마치 궁극적인 목적인 듯 남발했어요 ㅎㅎ 그것이 무슨 의미든 간에 아마 그 강사님은 제가 열심히 응원한다는 것을 아셨겠지요!

yamoo 2023-10-14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페넬로페 님 시계에 눈이 가네요..
잘 어울리십니다요!!ㅎㅎ

페넬로페 2023-10-14 12:24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된 시계인데요.
제가 시계를 좋아해요~~
요즘 나오는 스마트워치보다 저는 그냥 시계가 좋더라고요.
yamoo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2023-10-1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7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7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립백 코스타리카 라 알퀴미아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평점 :
품절


가을이 한창인 줄 알았는데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따뜻한 커피가 좋아지는 계절이다. 코스타리카 원두의 라 알퀴미아는 산미가 거의 없는, 무뚝뚝한 직진의 맛이다. 디저트와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다. 맛이 약간 아쉽지만, 남은 가을을 채워 넣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늘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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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0-06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무뚝뚝한 직진의 맛 ㅎㅎ 저는 쌀쌀해지니 커피보다는 슬슬 차가 더 땡기려고 합니다 감기조심하시고 금요일 저녁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0-06 22:11   좋아요 1 | URL
차가 몸에 좋은데 이상하게 잘 안 먹게 되네요. 그저 커피만 마시게 돼요.
서곡님,
주말 건강하게 잘 보내십시오^^

은오 2023-10-06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뚝뚝한 직진의 맛.. 맛이 아쉽지만 남은 가을을 채워 넣으면 괜찮지 않을까.. 크.. 100자평이 예술입니다 페넬로페님!! 😆

페넬로페 2023-10-06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사실 커피맛을 잘 몰라서 커피 리뷰에 계절을 많이 넣는 것 같아요. ㅎㅎ

독서괭 2023-10-06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뚝뚝한 직진의 맛이라니.. 어떻게 이런 감상을!!👍👍👍

페넬로페 2023-10-06 22:14   좋아요 1 | URL
가을이라 커피마시며 감상적으로 되는 걸까요!!
직진의 맛에 토스트 해 먹었어요^^

서니데이 2023-10-06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있는데 산미가 없다고 하시니 한번 시음해봐야겠어요.
이제 날씨가 차가워져서 따뜻한 커피가 좋은 시기가 되었네요.
페넬로페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10-07 09:04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커피에 물을 많이 넣어 연하게 마시고 있어요.
서니데이님!
건강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3-10-07 1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코스타리카 예전에 마셔보고 깜놀해서 그 후론 피했습니다. 넘 진해서요.^^;;
그집 커피가 진하게 로스팅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타리카만 내려 마시면 카페인 덕분에 잠도 잘 안 왔고...ㅜ
그래서 페넬로페 님의 ‘무뚝뚝한 직진의 맛!‘이라고 하신 구절이 무슨 말인지 확 와닿네요.^^
이 드립백은 #2번으로 로스팅을 해서 덜 진하려나? 좀 기대가 되긴 합니다.

페넬로페 2023-10-07 09:06   좋아요 2 | URL
이 커피가 미디엄 로스팅인데도 무뚝뚝해 약간 진하게 느껴집니다.
컬럼비아커피보다 더 무뚝뚝한 맛 같아요.
요즘 15000원을 넘겨야 무료배송이 되니 책 한권에 커피드립백을 넣으면 좋더라고요~~
 














20235, 한가람 미술관에서 라울 뒤피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뒤피는 내게 생소한 화가였다. 검색해보니 뒤피는 1877년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태어나 1953년에 생을 마감한 작가였다.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 당시에 워낙 유명한 화가가 많았는데 뒤피의 그림은 어떨까?’라는 호기심도 생겼다.

 

직접 본 뒤피의 그림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도 특이했다. 그림에서 받는 느낌이 독특해 생각보다 뒤피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뒤피가 만든 작품이 엄청 다양해 이 작가의 이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지껏 다닌 전시회장에서 이렇게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뒤피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마네킹까지 있을 정도였다. 영상으로 보는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의 <전기 요정>도 멋있었다.

 

라울 뒤피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르아브르에서 9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p.25)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세에 브라질 커피 수입상에 취업해 일찍부터 일을 해야만 했다. 그 뒤 미술학교를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책의 삽화, 장식 미술, 직물 패턴 디자인, 일러스트, 연극 무대 세트와 의상 담당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했다. 1937,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한 <전기 요정>이라는 제목의 250개의 패널로 된 거대한 벽화도 그린다. 그때 스페인 대표로는 피카소가 참여했었다. 피카소는 이때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나치 독일과 소련도 참여해서 신경전을 벌이며 경쟁을 했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르아브르는 모네가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모네는 외젠 부댕을 만나 인상주의 화풍에 대한 기틀을 다졌었다. 르아브르 태생인 뒤피도 당연히 처음에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모네는 평생 인상주의에 머물며 그 속에서 자신의 그림을 발전시켰지만, 뒤피는 세잔의 그림에 더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에서 야수파로, 그 뒤 입체파의 화풍까지 가져온다. 뒤피의 그림은 이 세 가지가 섞여 있어 묘한 느낌을 준다. 뒤피는 르아브르와 노년에 정착한 남프랑스의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뒤피의 그림엔 바다가 많다. 르아브르와 생트-아드레스의 해변, 여러 곳에서의 레가타(요트 경기)를 소재로 한 그림엔 뒤피가 얼마나 바다를 사랑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정겨움과 따뜻함이 있다.


마담 뒤피의 초상화(p.211~225)

 

대부분 화가의 아내는 화가의 뮤즈이자 모델이 되어준다. 뒤피는 패션디자이너인 외제니-에밀리엔과 결혼하지만 나중에 별거를 했다. 그 후 베르트 레이즈를 만나 동거한다. 뒤피는 이 두 여인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예술가와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그림으로 남겨진다는 것이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생활에 예술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좋을라나? 그림으로 남겨져 누군가가 계속 나를 쳐다봐 주는 것이?


20, 21, 24, 63, 68, 71, 76, 뒤피의 자화상(p.55~63)

 

뒤피는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세계 제 1, 2차 대전을 겪은 사람이다. 노년엔 류마티스 관절염에 시달렸다. 그의 삶에 분명 힘든 시기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에 인류의 재앙이나 자신의 병도 담기길 원치 않았다.(p.342)’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오로지 작가가 결정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꼭 시대를 그대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폭력과 폐허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환희는 분명 존재한다. ‘라울 뒤피라는 예술가가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인 변화에서 자신만의 뒤피스타일을 완성해가는 모습에 그저 감탄한다.

 

 

이소영 작가의 책, 이것은 라울 뒤피에 관한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뒤피에 관한 이야기가 풍성하다. 뒤피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고, 그림도 많이 수록되어 있어 전시회에서 보지 못한 뒤피의 그림을 감상하기에 좋았다.

 

[그가 남긴 말인 삶은 나에게 미소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지었다”, “내 눈은 추한 것은 지우게 되어 있다하는 문장을 곱씹어 보면 그가 죽는 날까지 그림에 고통과 슬픔보다는 희망과 행복, 낙관을 담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뒤피의 삶과 작품을 보면 세상은 끝끝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p.343]


동물 시집표지와 내지(p.190~192)

 

1911년 뒤피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동물 시집의 삽화를 목판화로 그린다. 이 책의 목판화는 별면 삽화 4점과 텍스트에 들어가는 삽화 26, 30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1880년에 태어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3일 앞두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기욤 아폴리네르의 동물 시집은 하나의 에피소드이다.(‘알코올’, 열린책들, 황현산 옮김, 역자 해설 중에서) 30편의 짧은 시와 30편의 목판화가 실려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동물들의 특징과 가치, 이미지들을 상징과 비유를 통해 서술되어 있다. 오르페우스의 등장과 그의 노래와 리라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 든 동물들을 표현했다. 보통의 언어로 쓰여진 시가 아니라서 그런지 작가 자신의 주석과 번역자의 주석이 함께 있다.

 

평소에 시를 잘 읽지 않기에 라울 뒤피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폴리네르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주는 상징이나 신화를 조금 알고 있으면 좋지만, 그런 것을 떠나 그냥 읽어도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시에는 위트도 있어 재미있다. 이번에 토끼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산토끼의 암컷은 이중임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고양이

 

내 집에 두고 싶은 것 :

사리를 아는 여자 하나,

책 사이를 거니는 고양이 한 마리,

하루도 거르고는 살 수 없는

사계절의 친구들.

-p.19]

 

사리를 아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역자의 해설에서 아폴리네르는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결혼했고 고양이는 집에 두지 못했지만 친구들은 늘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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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10-04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난 여름에 안산에 있는
어느 김밥집에 갔다가 이 작가
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것 참...

프랑스 출신이었군요.
‘바다‘ 그림이 정말 멋졌던 것
으로 기억합니다.

페넬로페 2023-10-04 23:06   좋아요 1 | URL
저는 어느 식당 화장실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과 만난 적도 있어요 ㅎㅎ
김밥집 사장님의 안목이 높으신 것 같습니다.

뒤피의 바다그림, 좋았습니다.

바람돌이 2023-10-04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라울 뒤피는 바다그림요. 어지러운듯 신나 신나 하는 느낌이 너무 좋았거든요. ^^
이 책도 지금 보려고 줄세워놨는데 언젠가 보겠죠. ^^

페넬로페 2023-10-04 23:11   좋아요 1 | URL
제가 바다를 좋아하다보니 뒤피의 바다그림이 눈에 바로 들어 오더라고요.
파도를 삼각형 모양으로 그린 것도 좋았어요.
이 책이 쉽고도 알차게 구성되어 있어 유익했어요.
바람돌이닝, 바쁜 일정 끝나서 자주 뵀으면 좋겠어요^

희선 2023-10-05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울 뒤피는 힘들 때도 그림에는 밝은 걸 나타내려고 했군요 그 시대를 담는 것도 있고 희망이나 꿈처럼 밝은 걸 담아도 괜찮죠 라울 뒤피는 여러 가지를 하다니 그것도 대단한 듯합니다 그런 거 하려고 해도 못할 것 같은데 그만큼 여러 가지에 관심을 가지고 잘 하기도 했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10-05 09:29   좋아요 1 | URL
한 사람이 타고난 재주가 엄청 많더라고요. 그림뿐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을 시도한 작가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어쩌면 편견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힘들때도 밝고 좋은 것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길러야 겠더라고요.

새파랑 2023-10-05 1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뒤피는 처음 들어보는데

그림이 매력적이네요~!!

페넬로페님 요즘 그림에 빠지셨군요~!!

그래도그림으로라도 남겨진다는건 좋을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3-10-05 12:50   좋아요 3 | URL
저도 라울 뒤피 작가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림이 좋더라고요.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림을 보려고 하는데 거기서 더 이상 들어가지는 않으려고 해요
그냥 감상만으로만 ㅎㅎ

서곡 2023-10-05 1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명하십니다 뭐든 그렇겠지만 정보만 상세히 찾으려고 해도 시간도둑 개미지옥...라울 뒤피 잘 봤습니다 환절기 조심하시고 이 달 잘 보내시길요!

페넬로페 2023-10-05 19:36   좋아요 2 | URL
예, 요즘 워낙 다양한 정보가 있지만 그걸 찾아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듯 싶어요.
날씨가 갑자기 왜이런지 ㅠㅠ
본래 이 시기가 이렇게 추운건지 항상 이맘때면 헷갈립니다.
서곡님, 감기 조심하십시오^^
 
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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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통틀어 제2차 세계 대전에 관련된 이야기만큼 우리에게 여러 매체로 다가온 것은 없을 것이다. 문학이나 영화,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진이나 다큐멘터리로 접한 그곳 현장에는 독재자의 광기로 인한 전쟁, 죽음, 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러나 특정한 주제를 부각시키려고 한 면이 많았기에 참혹함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미와 사랑, 심지어 낭만까지도 볼 수 있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남은 건 어쩌면 실제보다 그런 허상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1944년 독일 베를린의 분위기에서 시작되어 19455월 소련이 베를린에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연대기순으로 서술한 앤터니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는 전쟁에 대한 나의 허상을 지우고 다시 그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많은 자료로 세밀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된 베를린 함락까지의 과정에서, 전쟁이란 한낱 미친 인간에 불과한 한 개인과 그 추종자에 의해 집단이 조종되고 움직이며 그 결과로 인한 피해마저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의 내용이 연대기순으로 전개되었지만 군사작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스탈린에서부터 이름 없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실들과 생각, 감정까지 교차되며 서술되고 있어 지루하지 않았고 끝까지 책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알려진 대로 독소전쟁은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 열등한 슬라브인을 없앤다는 것과, ‘파시스트 짐승(p.33)’인 나치를 응징하고자 하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두 지도자의 세계관이 들어간 이 전쟁에 관용과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자신들의 신념이 관철되기까지 오로지 직진만 있었다. 소련의 침공을 누구나 예상했었고, 심지어 베를린 시민들조차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벙커안에서의 히틀러만은 인정하지 않았다.

 

[군사적 논리를 무시하는 히틀러가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제야 독재자의 카리스마가 범죄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선과 악에 대한 완전한 무시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틀러의 심각한 인격 장애는 정신 질환으로 정의되진 않는다 해도 분명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과 독일 국민을 완전히 동일시해 누구든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독일 국민 전체에 반대하는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독일 국민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었다.

-p.269]

 

히틀러는 정확한 정보를 믿지 않았으며 주변의 참모들은 무능했고 입을 닫고 있었다. 히틀러는 끝까지 소련과의 전쟁을 원했으며, 자신의 군대가 승리할 것이라는 망상에 집착했다. 서부와 동부전선에서의 이중적 적의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국민이 마지막까지 전쟁을 수행해 줄 것을 원했다. 젤로 고지의 오데르강에서 가미카제식 공격을 가하는 레오니다스 비행중대(p.387)’가 보여준 행동은 더 이상 독일이 전쟁을 이어갈 여력이 없음을 보여 준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스탈린은 오직 베를린 함락에만 집중한다파시스트를 전멸시키겠다는 대의에 숨겨진 스탈린의 속마음은 원자폭탄을 미국보다 먼저 만들겠다는 것과 독일의 공업기술과 공장의 기계을 빼앗고 폴란드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자 하는 야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탈린의 무조건적 전진명령에 붉은 군대가 지나간 길의 모든 곳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붉은 군대에 소속된 군인은 자신의 목숨을 아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NKVD와 스메르시에 의해 항상 감시당하고 있었고 여차하면 처형이나 굴라크로의 유형을 선고받아야 했다.

 

독일과 소련이 두 차례에 걸쳐 엄청난 물량을 쏟아 붓는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두 나라의 자력만은 아니었다. 독일은 유대인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고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폴란드를 점령해 많은 노예 노동자를 데려올 수 있었다. 스탈린은 군비확장을 위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위성국가들에 대해 무자비한 수탈을 했다.

 

[그는 독일 공장들이 1946년 봄에는 한 달에 자동권총 10만 정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사업이 나치 친위대의 강요에 의해 일하는 노예 노동자들에게 주로 의지한다는 사실은 물론 언급되지 않았다. 슈페어는 또한 노예 노동자들이 하루에 수천 명씩 죽어나가면서 숫자가 줄고 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이런 노동자들을 데려올 수 있는 지역도 점점 줄어들 참이었다.

-p.70~71]

 

소련이 독일로 진격할 때 해방된 강제노역자들에겐 또 다른 고난이 있었다. 그들은 사상에 대한 의심과 검열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 여성 노동자들은 붉은 군대에 의해 강간당한다. 전쟁 중 민간인들 또한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군대에 의해 모든 것이 약탈되었고, 피란민을 태운 배조차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는다. 1945130, 피란민을 태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소련 발트 함대 잠수함의 의뢰공격을 받고 침몰한다. 그때 날씨는 영하 18도였고 5300명에서 7400명 사이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다.(p.128). 특히 동부전선의 첫머리에 있는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라니아의 민간인들은 더 끔찍한 삶을 겪어야 했다. 민간인에 대한 약탈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서부전선에 있는 미군들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부터 책의 많은 곳에서 언급된 붉은 군대에 의한 집단 강간은 정말 충격적이다. ‘연령을 불문하고 소녀와 여성들을 집어삼킨(p.96)’ 집단강간에는 그 어떤 도의적 책임이나 인간에 대한 연민도 없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중요한 과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행위는 당연한 것이고, ‘전쟁에서의 불가피한 결과로 일축(p.100)’시켰다. 전쟁 중에 여성은 승리의 전리품으로 취급되고, 성적(性的) 분출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허용되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붉은 군대의 여성 병사조차 남자 군인들의 성적 파트너로 존재했다고 밝혔다. 소련은 아직까지 이 대량강간에 대해 말하기를 회피하고 있다. 무자비한 집단강간으로 시작된 여성을 향한 폭력은 나중에 많은 소련군 장교가 독일 점령군 아내와 정착하기를 원하는 이상한 형태로도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위기의 상황에서 인간은 성을 더 다양하게 분출하는지도 모른다. 함락직전 총통의 벙커에서도, 수많은 독일인들이 피해있던 불 꺼진 지하실과 벙커에서도 무분별한 성행위가 많이 목격되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소련의 포격을 당한 베를린 시민들은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낸다. 물과 전기가 끊기고, 식량이 부족했다. 폭격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고 베를린 여성 또한 집단강간의 피해자였다. 그들에게는 굶주림이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히틀러는 어린 아이까지 전쟁에 내보내어 끝까지 베를린을 사수하기 원했다. 히틀러의 참모들은 군인들과 민간인을 버려두고 먼저 도망쳤다. 이 전쟁에 승산이 없다고 인식한 장교들에 의해 병사와 민간인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도 있었지만 너무 늦게 시작되어 성공하기 힘들었다.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여러 에피소드 중, 프린츠-알브레흐트슈트라세의 게슈타포 본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죄수들에 대한 내용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위태롭고 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한 가운데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어도 소련군의 잘못 발사된 총 한 방으로 바로 죽을 수 있는 것이 전쟁 중의 인간의 삶인 것이다.

 

바라던 대로 베를린을 함락시켰지만 스탈린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지시대로 전쟁을 수행한 붉은 군대의 군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끝난 후 반혁명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독일에 의해 전쟁 포로가 되었던 군인들도 굴라크나 시베리아의 노동부대들로 보내졌다. 스탈린에 의한 반유대주의 폭행도 자행되었다. 베를린을 함락시킨 주코프 장군은 스탈린의 질투심에 의해 20년 동안 칩거해야만 했다.

 

[스탈린과 원수들은 병사들의 목숨을 신경 쓰지 않았다. -p.656

 

러시아의승리를 훼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 노선은 우리에게 역사적 승리를 안겨주신 우리의 위대하고 영명하신 군지도자 스탈린 동지오직 한 사람에게만 경의를 표했다. 스탈린은 뻔뻔하게도 전투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마다 전면에 나섰다. 재난 상황이 닥치면, 특히 자기 탓일 때면 사람들 눈에서 사라졌다. 지휘관들은 항상 스탈린의 현명함과 인도자로서의 손길을 인정해야 했다. 자기 자신에게 공적을 돌리는 것은 극히 위험했다.

-p.658]

 

히틀러와 스탈린의 광기와 허영심은 엄청난 숫자의 사람을 죽이고 불행하게 만들었으며 철저하게 개인을 말살시켰다. 하지만 히틀러를 비롯한 괴벨스, 힘러, 괴링은 그 어떤 재판도 받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P.598) 스탈린 역시-베리야에 의한 암살설도 있지만-자신의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책을 다 읽고, 이 책의 앞쪽에 실린 지도를 보며 다시 베를린 함락에 대한 복기를 해보았다. 소련군과 히틀러 유겐트, 베를린 시민들, 굶주린 피란민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 교수형에 처해진 독일 병사, 얄타 회담에서 웃고 있는 스탈린과 처칠의 사진을 보면서 독일 국경을 넘은 한 소련 병사의 회상이 생각났다.

 

폴란드와 달리 독일의 대부분의 집이 벽돌과 돌로 지어져 있고 작은 정원은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클로치코프는 ‘“생각이 없는 민족이 아닌독일인들이 어째서 유복하고 편안한 삶을 판돈으로 걸고 소련을 침략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p.150)’고 생각한다. 잘 살고 있어도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짓밟을 수 있으며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은 결국 더 큰 폭력을 가져온다. 지도에 그려진 진한 화살표는 이유와 명분이 없는 무조건적 명령수행을 나타내 주는 건지도 모른다.

 

앤터니 비버가 서문에서 서술한 국가사회주의 말로라는 주제가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요즘 독일의 십대들이 제3제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감탄하는 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중요성은 계속된다(p.54)라는 문장에 들어있는 감탄은 좋은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역사는 그 본질보다 왜곡된 것으로 이용되기 쉽다. 베를린 함락 1945에서 저자가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켜 묘사해준 글은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들에게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메시지를 준다. 이 책을 읽으며 독일의 소련 침공을 다룬 저자의 다른 책인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독일군이 러시아에서 한 짓(p.142), ’독일군이 소련에서 저지른 만행(p.206), ‘우리가 점령지에서 했던 짓(p.320)’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그것을 알아야 베를린 함락에 대해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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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9-26 0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이젠 역사책도 섭렵하시는 건가요? 2차세계대전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으면서도 안타깝습니다 ㅜㅜ
히틀러와 스탈린 ㅜㅜ 최악의 조합인듯 합니다 ㅋ

페넬로페 2023-09-26 10:24   좋아요 2 | URL
역사에 대한 논픽션을 좋아했어요.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왜 세계 최악의 인간이 같은 시기에 만나게 되었을까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3-09-26 0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독소전쟁의 시작부터 전개 과정을 다시 훓어보았습니다. 저자의 다른 책을 함께 읽는다면 더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듯 해요. 54페이지 문장은 저도 충격이었어요. 과거의 역사를 영웅적으로만 바라보거나 미화적 시각으로 인식하는 순간 이런 큰 전쟁은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에서 특히나 인간의 목숨은 너무나 하찮아지네요.

페넬로페 2023-09-26 10:26   좋아요 2 | URL
거리의화가님은 평소 역사에 대해 조예가 깊고 많은 책을 읽으셨기에 이 책에 대한 배경지식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54페이지의 내용이 약간 모호해서 제가 해석한 것이 맞나 고민했습니다. 전쟁의 끔찍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건수하 2023-09-26 15:41   좋아요 1 | URL
젊은 세대들은 그 때가 독일의 ‘리즈시절‘ 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일본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독일은 국가적으로 반성하고 역사 교육에 있어서도 유의한다고 들었는데 일본에서는..

미미 2023-09-26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269 자신과 국민을 동일시한다는 부분이 요즘 우리 나라의 상황과 닮았네요.
말 잘 듣는 무능한 참모들과 어리석은데 고집스러운 우두머리의 조합의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집단 강간도 그렇고 어떤 집단을 와해 시키기 위해 한 일들을 감안할 때
음흉한 것으로는 스탈린이 더 한 것 같아요.
당시 많은 희생이 있었던 만큼 페넬로페님 말씀처럼 뼈 아픈 교훈으로 남겨야 하는데
일부에게만 그런 듯하여 국제 정세가 걱정스럽습니다.<피의 기록,스탈린 그라드>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3-09-26 11:05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읽으며 지금 우리의 상황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ㅠㅠ 역사는 이렇게 나쁘게 되풀이 되는가봐요. 국제정서도 그렇고요.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제 마음이 위태로워요. 스탈린과 히틀러, 정말 막상막하, 도진개진 입니다.

건수하 2023-09-26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상당히 감성적이어서, 아픔은 와 닿았지만 규모는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페넬로페님 글을 읽으니 저도 (이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피의 기록, 스탈린 그라드>가 궁금해지네요. 페넬로페님 글을 먼저 읽게 되면 궁금증이 사그러들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리뷰대회 수상을 기원합니다 ^^

페넬로페 2023-09-26 15:57   좋아요 1 | URL
같은 주제라도 저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서술되는 것 같아요.
이 책에서 붉은 군대의 여군들은 집단 강간에 대해 별로 치를 떨지 않게 나옵니다.
본인들의 대업 수행에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더라고요,

이상하게 리뷰대회 끝나고 후기쓰면 뭔가 뒷북치는 느낌이 있어요 ㅎㅎ
그래서 결과 생각하지 않고 바로 올렸어요^^이제 백래시 마무리해야겠어요~~

잠자냥 2023-09-26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붉은 군대 병사들이 독일인의 생활상을 보고 열등감에서 증오로 돌변하는 지점이 인상 깊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더라고요... 전쟁터에서나 현실에서나 열등감과 증오란 참 사람을 야수로 변모하게 하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3-09-26 17:14   좋아요 2 | URL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전쟁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요.
잠자냥님과 저의 감상 포인트가 비슷한가봐요~~
이 책 읽으면서 남자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더라고요^^

레삭매냐 2023-09-26 18: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때 독일을 영광으로 휩쌓이게
만들었던 문제적 인간의 몰락이
이보다 더 극적일 순 없지 않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도 대단한 작품
입니다, 추천해 드리는 바입니다.

페넬로페 2023-09-26 18:10   좋아요 2 | URL
히틀러의 죽음에 관련된 것도 참 맘이 좋지 얺더군요.
그들은 죽음마저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있더라고요.

네, 꼭 읽어 보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09-26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까 자냥 님 리뷰도 읽고 왔는데 페넬로페 님 리뷰도 멋지군요.
책도 궁금해지구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보름달 보고 기원하겠습니다.ㅋㅋㅋ

페넬로페 2023-09-26 23:05   좋아요 1 | URL
보름달 기운까지 ㅎㅎ
감사합니다~~
그 기운 책나무님께서도 많이 받으시길요.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셔요^^

희선 2023-09-28 0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하는 사람은 거기에 빠지고 마는 것인가 싶기도 하네요 그때 일을 자꾸 이야기하는 건 그때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서겠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쪽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당한대로 하고... 무서운 전쟁입니다

페넬로페 님 명절 잘 쇠시고 연휴 동안 별 일 없이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페넬로페 2023-09-28 13:24   좋아요 2 | URL
네, 희선님 말씀처럼 전쟁을 하다보면 목적을 잃고 단지 전쟁놀이에만 빠지게 될 것 같아요
도덕도 양심도 없고 사람 목숨도 하찮게 되고요^^

희선님!
즐겁고 건강한 추석 명절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