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 최고의 범죄학자가 들려주는 진화하는 범죄의 진실
이창무.박미랑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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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ㅡ개인화된 두려움과 타자화된 범죄

언젠가 ATM 기계에서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갔었다.
무심코 돈을 찾고 뒤돌아섰는데 그때 푸르스름한 것이
눈에 들어왔고 난 어떤 모자 쓴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청년은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옆에는 경찰들도 있었다.
들어 갈때는 몰랐을 정도로 그들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인과 눈이 마주친 난 섬뜩함을 느꼈고 좀 무서웠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언니와 굉장히 북적이는 도심지를 걷고 있었다.
근데 약간 느낌이 이상해서 옆을 보니 어떤 남자들이
우릴 에워싸고 있었고 그 중 한사람이 이미 언니의
핸드백에서 지갑을 반쯤 꺼내는 중이었다.
순간 난 그 남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고
워낙 주위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그냥 포기하고
그들은 가버렸다. 나에게 욕을 퍼부우며.
나도 참!
그때 무슨 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칼이라도 맞았으면 어떡하라고.
지갑을 도둑맞지 않았던 안도감보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해꼬지나 당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때문에 많이 무서웠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범죄의 현장을 맞닥뜨리면
‘두려움‘ 에 압도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당면하지 않고자 더 조심하고
내것을 단속하고
다른 범죄에 대해서도 빗장을 걸어버린다.
세상 사람들에게 범죄는 TV나 인터넷 매체에서만
접하는 경우가 많고 나한테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창무, 박미랑작가의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에서는 우리가 두려움을 키우는 것은 그 범죄들에 대해 우리가 무지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다양한 범죄가 소개되어 있다.
온갖 범죄의 종류에 대한 보고서이다.
범죄학자들의 의견과 굉장히 많은 수치도 동원된다.
하지만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나타나있지 않은 듯 하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개인화된 두려움과 타자화된 범죄‘ 를 얘기하면서
범죄가 일어나면 언론에 의한 잠깐의 이슈화로 부각되지만 곧 잊혀져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개인화된 두려움뿐이라고 한다.
이 두려움으로 우리가 울타리를 치면 칠수록 오히려
가해자들은 더 안전하게 범행을 저지르기 쉬우니
우리가 모두 빗장을 풀고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범죄예방에 동참하라는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인과관계가 뚜렷한 범죄엔 어느정도 이해를 한다.
박찬욱감독의 영화 복수 3부작에서
아주 잔인하지만 송강호, 유지태, 이영애의 복수가
이해되지 않는건 아니다.
물론 유지태를 복수하는 최민식의 복수가 뒤따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이유없이 폭력을 당한다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를 보면 정말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사실 우리 대다수는 범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말도 안되는 억울한 범죄엔 항상 노출되어 있는게 사실이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차별로 인해
우리는 항상 그들의 파괴의 표적이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흉악범은 수치상 이 사회의
약자가 더 많기 때문이다.

점점 심해져가는 서로에 대한 비난도 우려가 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행되는 폭력도 없어져야 한다.
물론 가장 없어져야 할것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어쩌면 시대착오적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범죄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에서
내가 바라는 건
서로의 관심과 이해로 미리 예방하자는 것이다.
범죄, 테러, 전쟁을.
이 모든건 불평등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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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화는 당연하다 - 내 감정에 지쳐갈 때, 마음 잠언 148
박성만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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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화는 당연하다]ㅡ박성만
ㅡ내 감정에 지쳐갈 때, 마음 잠언 148

난 성실한 사람이다.
책임감도 있는 편이고.
기본도 지키려 한다.
그래서인지
좀 깐깐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면에 융통성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
겉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은....

한편으로
난 무척이나 감정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화도 많고 욱하는 성질머리때문에 잃은 것도 많다.
그런데 내가 잘내는 그 화가
요즘은 약간 다른 성질을 뛴다.
젊은 시절에 냈던 화는 뭔가 활기도 있고 격정적이었다.
에너지가 가득 찼고 카타르시스적인 면도 있었다.
나이들어가는 요즈음 내가 내는 화는
슬프고 꼬이고 의기소침하고 쓸쓸하다.

그 변형된 화로 인해 내 마음이 힘들 때
난 내용이 뻔한걸 알지만 그래도
‘너의 화는 당연하다‘ 와 같은 책을 선택하여 읽는다.
필사까지 해가며 정성스럽게 읽어 나가다보면
심신수련을 받는 듯한 느낌이 오고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 책은 오랫동안 심리상담을 해온 저자가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
화를 다스려서 세상을 잘 살아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저자는 목회일도 병행하고 있어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많이 설명한다.
약간의 선문답처럼.
결국은
너의 화는 당연하지만
너의 화는 네가 다스려야 한다고 하네.
그 방법은 여러가지이고 각자가 자신에 걸맞게
선택해서 날 잘 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얘기하고 있는 대충의 것은ㅡ

각자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가 되어야 한다.

부모는 먼저 자신의 슬픔을 달래야한다.

공허를 이겨내려면 친한 인간관계를 만든다.

콤플렉스는 못하는 것을 잘하려다 생긴다.

사는 것은 아픔속을 헤매다가 어쩌다 진주 하나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았다면 나 자신이 일으킨 상처는
아닌지 되돌아보자.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진화가 덜 됐을 뿐이다.

고통은 뒤따르겠지만, 고통이야말로 아름다움중에
아름다움임을 사람들은 나중에야 깨닫는다.

용서 못한다면 용서 못하는 너 자신을 용서해라.

실망은 다음 에너지를 준비하는 그릇이다.

자식은 엄마가 키운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키운 대로 산다.

사람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삶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것이다.

버티는 자가 강자다.
........... ㅡㅡ

버티는 자가 강자다......
살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잘 버틸수 있을지 몰라도
이 말이 참 무섭고도 무자비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화가 당연하면
그 발산도 당연할텐데
이 책에서는 그 방법이 명쾌하지 않다.
자신이 변하고 생각을 달리하라고만 한다.
그래, 어쩔수없지만 그 말이 맞다.
명쾌한 방법이란 없다.
나 자신이 변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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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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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ㅡ 페터 한트케

2019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
그래서 당연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작가의 책, ‘소망 없는 불행‘
그러나 이 작품은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인 ‘소망 없는 불행‘ 과
딸을 혼자 키우면서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딸을 통해 느끼고
육아와 일의 양립의 고충을 얘기하면서
그래도 자신이 딸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듯한
산문같은 소설인 ‘아이 이야기‘ 가 들어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잔인하지만 그 이유를 궁금해하고
그 이유가 타당한지도 생각한다.
작가의 어머니에게 삶은
잠깐 동안의 반짝임을 제외하고는
생의 전체가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절에 누구나 겪었던 가난,
발전할 수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고정된 관념들을 가진 부모와 형제 밑에서
자라고 유부남의 아이를 낳았다.

ㅡ이런 환경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치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좋다는 안이함을 의미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 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들린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p 17


전쟁을 경험했고 한 남자와 결혼해서
다시 불행이 시작된다.
함께 살지만 그 남자의 아이를 낳기 싫어 꼬챙이로 직접 아이를 유산시키기도 한다.
세 아이를 유산시켜도 다시 아이는 태어나고, 태어나고....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말년엔 힘든 병마와도 싸운다.
그랬기에 그녀의 자살을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그녀의 아들이라면
분명 그 의미가 다를 것이다.
글쟁이인 아들은 글로써 치유를 시작한다.
글을 쓰면서도 작가는 표현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ㅡ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 하더라도 재구성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허구적인 것이 아닐까?
사건의 단순한 보고에 만족한다면 덜 허구적이겠지만,
자세히 표현하고자 하면 할수록 허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야기 속에 허구를 많이 집어넣으면
넣을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단순히 보고되는 사실보다는
허구적 서술에 보다 쉽게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p 24

ㅡ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 다음에 그 사실들을 서술하는 형식들을 모색했다. 그런데 서술 형식들을 찾는 동안 어느 틈에
내가 사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이 아니라 이미 써오던 서술 형식들,
즉 인간의 사회적 경험 속에 들어있는 언어군을
출발점으로 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러고서 나는 이 서술 형식들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나의 어머니의 삶에서 추려냈다.
p 39-40


소망이 없는 삶
그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생의 대부분을 그런 삶을 산 것 같다.

‘아이 이야기‘
아이를 키우는건 녹록지 않다.
그것도 혼자서 키우려면!
아이 이야기는 딸아이를 혼자 키우며 글을 써내야하는
작가의 투쟁기같다.
작가는 그래도 그 아이를 키우며 어떤 불만과 신세 한탄을
내보이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같은 아이를
사랑하고, 커가면서 보이는 아이의 변화를 잘 묘사했다.

페터 한트케의 문장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다 읽고는 또다시 돌아가서
천천히 또박또박 읽으며
글자 하나하나를 다지듯이 읽어내고
그 의미를 찾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
배경지식의 불충분한 설명 때문이기도 하고
굉장히 객관화시킨 어머니와 아이의 얘기라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얘기인지라
읽는 내내 공감했고 같은 느낌을 공유했다.

내게 존재를 준 엄마,
내가 존재를 준 아이!
단기기억을 자꾸만 잃으시는 치매를 앓고 계신 엄마,
이제 스무살이 되어 한발한발 독자적인 삶을 살아나가는
아이를 이 글을 읽으며 무수히 생각했고
특히 내가 19년동안 키운 아이의 변화와
아이를 키우면서의 보람과 공허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읽는 나를 자신의 글 속에만
묶어 둔것이 아니라 나를 있게하고, 내가 만들어 낸 존재들을 계속 생각하게 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페터 한트케는 자신이 속한 독일 민족이 저지른
엄청난 일에 대해 계속 경악했고 심지어 이 민족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러한 반성적인 글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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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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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ㅡ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을 이제서야 읽었다.
괴테의 문장은 굉장히 현학적이고 딱딱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순수하고 감성적이었다.
젊은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쓴 편지글을 읽으며,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나약할 것 같았던 베르테르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베르테르는 이 세상과 사람들을 차별없이 친근하게 대한다. ㅡ1770년도를 기준으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특히 가난하고 불쌍하게 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언제나 가지고 있던 돈을 주면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공명심이나 자만심도 없이 겸손하며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람이기에 로테에 대한 사랑도 강렬했을 것이다.
현실주의자가 아니기에 앞을 보고 옆을 보면서 이것저것
재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는 베르테르의 자살을 비난하지만
난 그를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슬픔이 넘쳐서 더이상 주체할 수 없으면 우리는 한번씩 극단적 선택을 한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 에서는 똑같은 상황에서
알랭 들롱은 친구를 죽여버리지 않는가?
베르테르는 순수한 청년이기에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나약한 사람의 패배라고 단순히 얘기할 수 있을까?

난 그동안 참 많이 잊고 살았다.
사랑을, 순수를, 열정을, 이웃에 대한 관심을.
무엇에 쫓기어 그렇게나 중요한 것을 잃고 사는지 모르겠다.
들여다보지도 않고 인식하려 노력하지도 않고 허둥지둥 안일하게 사는 나를 베르테르는 들여다보게 해준다.
베르테르는 이렇게 나를 일깨워준다.

이번에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같은 작품을 동시에 읽었다.
고전을 읽을 때 한번씩 그렇게 했는데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취향은 민음사의 승리다.
그렇다고 민음사의 번역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쉽게 풀어쓴 글보다는 거칠지만 직역의 묘미를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이제까지 늘 하던 대로 운명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조그마한 불행을 부질없이 되씹던 그런 습관을 이젠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겠어.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고 말야.

*그러나 내가 그들과 즐길 수 있는 것은 다만, 나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다른 많은 힘들이 남아 있는데, 그것들이 모두 사용되지 않은 채 썩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는 그것을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감춰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되살아나지 않을 때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제약을 받고 있더라도,
항상 마음속에서도 자유라는 즐거운 김정을 간직하고 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감옥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그런 자유의 감각 말이다.

*그녀는 그토록 총명하면서도 그토록 순진하고, 그렇게 꿋꿋하면서도 그같이 마음씨 곱고, 착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정말로 발랄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침착한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서로 곁눈질해 가며 살펴보는 추잡한 사람들의 그 번지르르한 모습과 그 지루한 꼬락서니는 어떤가!
한 발이라도 앞서겠다고 악착같이 눈을 번쩍이며 노리고 있는 그들의 출세에 대한 야욕, 그지없이 비참하고도 한심스런 노골적인 그 집념,

*그분은 그뿐 아니라, 내 마음보다는 내 지성과 재능을 더 높이 펑가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내 마음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오직 그것만이 모든 것의 원천, 즉 모든 힘과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아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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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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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ㅡ윌리엄 골딩

**한국어로 번역된 해외 문학을 읽을 때의 비애
특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ㅡ

외국어를 완벽하게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드물다.
나역시 다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원서로 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선택해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난 번역가에 의해 지배당하며
작가가 정말 이런 표현을 썼는지,
아님 적당히 번역가가 한국식으로 고쳐 썼는지도 모른채 그냥 읽어나간다.
이번 ‘파리대왕‘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남발되는 어려운 한자어로 시작하여
어떤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연결도 되지 않는다.
한없이 짜증나고 일일이 한자어의 뜻을 찾아보며 읽어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고전문학속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래도 참고 읽는다.
읽다보면 ‘그것‘ 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으며 말이다.
내게 있어서 ‘그것‘ 이란 어느 순간 주위의 여건에 간섭받지 않고 책 속에 빠져드는 행복한 몰입이 시작되는 것이다.
집중되지 않는 번역이지만, 원어로 읽지도 않지만 어느새 작가가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 온다.
훌륭한 작가의 작품에 있는 문장들이 외국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 순간 난 황홀하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은 번역가들 덕분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은 핵전쟁이 벌어져
한 떼의 영국 소년들을 비행기로 안전한 장소로 후송하는 공수 작전중에 적군의 요격을 받아 태평양상의 무인도에 소년들이 불시착하면서
겪는 일로 시작한다.
ㅡ해설중에서
이 소설은 알레고리의 형식을 가지며 섬에서의 소년들과 사물, 사건들이 모두 이차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글을 읽어나가면 어느 정도 그러한 것들이 어떤 뜻을 내포하는지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섬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신호인 봉화를 피우기 위해서는 모두의 협동이 필요하지만 소년들은 쉽게 분열된다.
돼지라는 이성적인 브레인을 둔 랠프가 대장이 되지만
고기라는 눈 앞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또다른 대장 잭의 등장으로 점점 소년들은 폭력에 노출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잭의 일당들은 살인까지 저지르고 집단 광기의 도가니로 빠지며 랠프마저 제거하려고 섬에 큰 불을
내지만 그 불이 내는 봉화의 신호로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영국의 순양함에 의해 그들은 구출된다.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속에서 그래도 믿을 수 있는건
인간의 악에 대항할 수 있는 돼지라고 표현되는
한 불행한 근시 소년의 ‘옳은 것은 옳기 때문‘ 이라는
절규이다.

‘파리대왕‘ 은 이 지구의 한 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인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세계 전체를 보여 준다.
권력, 지식, 리더, 지식인. 종교, 욕망, 인간의 본성, 악,
집단, 광기, 폭력, 법과 규범, 파괴, 문명등 축약된 이야기속에서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에 비추어봤을 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세상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탁월한 문장으로 보여주는 작가들의 위대성에 감사를 표한다.


내가 쓴 글자들과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본다.
이 많은 한자어의 남발은 무엇이지?
처음에 비판하고 투정부린 번역가에게 미안해진다.
어려운 이국의 문장들을 모국어로 표현해 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이해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다양한 작품을 많이 내주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게도.
다만 책 뒷표지의 말마따나 문학의 고전은 세대마다 새로 번역되어 오늘의 감수성을 좀 더 많이 전율시켜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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