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중얼
신천희 지음 / 새론북스 / 2008년 3월
구판절판


홀로살이를 하다 보면 자기 나름대로 하루 일과를 짜놓고 일상을 지어가게 된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일과표에 따라 반복적인 일상을 이어간다.
날마다 빼먹지 않고 해야 하는 것 중에 정말 귀찮고 성가신 것이 방 청소다.
혼자 사는데 뭐 그렇게 매일 청소할 필요가 있겠느냐 싶겠지만 청소와 주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 또한 정리가 되지 않게 마련이다.
수행자는 마음만 가지런해서 되는 게 아니다.
주면 사물 또한 마음처럼 정결하고 가지런해야 자기의 마음자리에 들 수 있다.
암자는 대체로 가구나 부수적인 살림살이가 없어 바닥 공간이 많다.
그래서 방바닥을 닦는 일이 제일 큰일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이 걸레다.
오늘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방 청소를 마치고 걸레를 빨았다.
걸레를 빨아 널고 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빨래를 할 때는 세제와 섬유 유연제를 함께 넣는데 걸레를 빨 때는 당연하다는 듯 세제로만 빤 것이다.
그것이 분별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 몸에 걸치는 것은 소중하고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해 주는 걸레는 그냥 걸레라고 무시하는 것 아닌가.-304~305쪽

아직도 눈에 보이는 치장에만 눈독을 들이는 이 요사스런 중이 한심하지 않으면 누가 한심하겠는가! 자신을 더럽히며 남을 깨끗하게 해 주는 걸레!
그는 충분히 대접받을 만한 존재다.
지금이라도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걸레를 꺼내 수건처럼 깨끗이 접어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절이라도 한번 올려야겠다.-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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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10-12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매와 언니는 행주와 걸레를 사용하고 나서 삶아준다..
그러고 나면 행주와 걸레는 뽀얗다...^^
 
중얼중얼
신천희 지음 / 새론북스 / 2008년 3월
구판절판


눈송이가 가로등 앞에 모여든 하루살이처럼 날리는 날이다. 넓은 강으로 공부하러 가던 시냇물들이 한쪽에 모여 땡땡이를 치다가 바람한테 들켜 가슴이 꽁꽁 얼어붙도록 혼나고 있는 그런 겨울 풍경도 보인다.
그런 겨울날, 방 안에는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초청한 적도 없고 문을 열어준 적도 없다. 그 불청객은 다름 아닌 똥파리다. 그것도 파촐소장은 거뜬히 하고도 남을 만큼 덩치가 큰 녀석들이다. 처음에 어쩌다가 한 마리가 보일 때만 해도 명절이라 찾아왔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장난이 아니었다. 하루에 서너 마리씩 나타나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출몰한 수가 청와대를 습격하러 내려온 김신조 부대와 실미도 대원의 수와 비슷한 서른 한 마리 정도는 족히 되고도 남는다.
아무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지만 나처럼 홀로살이하는 중한테서 뭘 얻어갈 게 있다고 찾아올까!
아마도 짐작컨대 여름에 천장에다 알을 매달아 놓았지 싶다. 그런데 실내 온도가 높으니까 시절을 잘못 알고 깨어난 것 같다. 똥파리에겐 미안하지만 보이는 족족 바깥으로 내몰았다. 체질상 경찰관 친구가 하나도 없듯이 똥파리하고는 친하지 않다.-178~179쪽

눈살을 찌푸리며 똥파리를 내몰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똥파리가 어디에 꼬이는가? 똥 아니면 썩은 생선 같은 더러운 것들에 꼬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 방에서 똥 냄새가 나든지 아니면 내 정신이 썩었다는 이야기다.
이 황당할 정도로 자명한 사실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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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스님 외 지음, 정성욱 엮음, 명정 옮김 / 노마드북스 / 2005년 10월
품절


가을바람이 펼쳐져 있는 책갈비를 넘깁니다.
문 밖에 낙엽 지는 소리가 사락사락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만행 끝에 잠시 머문 이 해인사 문지방에는
가을이 때늦은 봇짐을 풀어놓고 나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붓을 꺼내 그 가을의 향기를 그리려 하나
흰 종이에 그린 것은 오로지 점 하나뿐입니다.
이런 날이면 무엇 때문인지 자꾸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마 번뇌가 내 몸속에 남아 있는 탓이겠지요.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의 삼독번뇌를 벗지 못하는
이 중생의 모몰염치冒沒廉恥 때문이겠지요.
시냇물에 몸을 씻어 번뇌를 지우다가 지우다가
끝내 다 지울 수 없어 망연히 지는 잎을 바라보지만
부끄러운 생각에 그만 등줄에 땀만 흐릅니다.
아마 아직도 수행히 부족한 탓이겠지요.
스님 이만 허튼소리를 줄이겠습니다.-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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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스님 외 지음, 정성욱 엮음, 명정 옮김 / 노마드북스 / 2005년 10월
품절


인간의 한 잎이 팔공산에 떨어지니
빛깔에 안팎 있어 바로 가을잎이라.
그 가운데 무슨 비밀이 있는 듯하나
떨어진 꽃 한송이 가지로 다시 올라가네.-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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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스님 외 지음, 정성욱 엮음, 명정 옮김 / 노마드북스 / 2005년 10월
품절


새벽에 이곳 절에도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눈길을 더듬어 걷다가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산토끼의 발자국 같았습니다.
눈 위의 첫 발자국을 아마 산토끼가 남겨놓은 듯했습니다.
그 발자국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따라갔습니다.
어느 틈에 눈이 다시 내렸는지 발자국은 사라졌지만
나도 모르게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내 발자국도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끼의 발자국처럼 그다지 아름답지는 못했습니다.
어찌 내 발자국을 그 작고 아름다운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삶은 자기가 살아온 길에 대한 흔적이라 생각합니다.
환경스님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저는 이곳애서
묵은 세끼 공양과 더불어 차나 즐기고 있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해야 스님의 고통을 더불어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잃은 슬픔, 민족을 잃은 슬픔, 언어를 잃은 슬픔
제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조차 잃은 지금,
깊은 탄식만 앞을 가립니다.
구구절절이 말을 해본들 죄다 탄식뿐이니
이만 말을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침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햇살을 머금습니다.
동자童子가 빗자루로 토끼와 내 발자국들을 지웁니다.-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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