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지국 막내공주전 1
신순옥 지음 / 청어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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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내 아가.
너를 버려 후계를 얻으려는 네 아비를 용서하지 말거라.
너를 지킬 생각은 않고 꿈속으로 달아나기만 했던 이 어미도 용서하지 말거라.

아가, 내 아가.
지금 어디를 떠다니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
살아 있기는 한 것이냐. 벌써 풍랑에 휩싸여 저승 문턱에 닿았으냐.

아가, 내 아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버려진, 바리데기 내 아가.
함에 넣어져 바다에 버려진, 바리데기 내 아가.
어미도 너를 따라 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지만,
너의 여섯 언니들이 너무 어리디어리구나.
어미 없는 이 궁에서 여섯 공주가 겪을 설움을 생각하니,
차마 너를 따라갈 수가 없구나.

아가, 내 아가.
어화둥둥, 품에 안고 젖 한 번 못 물린 내 아가.
아비 어미는 너를 버렸으되, 너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란다.
왕자가 필요한 이 왕조가 공주를 버렸을 뿐, 네가 버려진 것은아니란다.

아가, 내 아가.
네가 만약 하늘의 뜻으로 살아난다면
이 비정하고 참혹한 궁으로 돌아오지 말거라.
네 만약 살아 난다면
너를 버린 이 궁을 그리워하지도 찾지도 말고,
버려졌다 슬퍼하지도 말고 잊혀졌다 아파하지도 말고
훨훨 자유롭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거라.-17~18쪽

아가, 내 아가,
너를 버린 이 아비 어미를 용서도 이해도 하지 말거라.
살아만 있다면, 살아만 난다면 꼭 그리하거라.
어미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 몸 안의 씨앗을 말리고 너를 잊지 않는 것 뿐이구나.

그날 밤 가락이 대동해 온 의원이 왕후의 처소를 다녀간 후, 길대부인 다시는 회임하지 못하였다.-18쪽

한편 왕후가 속히 오라는 전갈을 보낸 다섯 딸들은 제각각 처한 입장 복잡하여 제가 사는 나라에서 늦게 출발하니 아흐레가 되도록 도착하지 못하였다. 누구는 시아버지 상중이고, 누구는 남편이 다쳤고, 누구는 자식이 아프고 또 누구는 해산을 앞두고 있으니 쉬이 친정으로 걸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오지 못하고 있는 다섯 공주와 중해져 가는 어비대왕의 병세로 궁 안팎이 소란스러운데, 바리는 바리대로 길대부인이 명하여 받는 가르침마다 일을 터뜨렸다. 글공부하라 글선생 붙여주니 글선생과 내기 장기 두어 글선생이 갖고 있는 서책이며 문방사우를 싹쓸이로 쓸어담고, 무예 익혀라 칼선생 붙여주니 어디서 그런 암수는 배웠는지 검으로 제압당할 것 같아지자 모래를 확 뿌려대 칼선생 눈을 이레 넘게 장님을 만들고, 국궁 쏘아라 활잡이 붙여주니 뒷산에 있는 토끼 잡는다고 마구 활을 쏘아대 내관 엉덩이에 활을 꽂지 않나, 이번엔 기마라도 익혀라 경마잡이 붙여주니 어떻게 말을 몰았는지 궁궐 대대로 가꿔 온 모둠꽃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아닌가.
그뿐이면 아직 배움이 설어서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막내공주 하는 짓이 또 가관이었다.-246~247쪽

시동 아이들 모아놓고 품바타령 가르치니 궁 이곳저곳에서 얼씨구씨구 절씨구씨구 안 죽고 또 왔다 노래를 해대고, 겨울 대비해야 한다면 궁 뒷산에 있는 귀하디귀한 소나무 잣나무를 베어다가 차곡차곡 장작을 쌓아놓질 않나, 냄새 잘 맞는 검덕이 풀어 시녀와 내관들이 제 처소에 숨겨놓은 곶감이며 밀과를 싸그리 빼내어 할매 할매 갖다준다 숨겨놓으니 이를 지켜보는 시녀와 내관들이 막내공주 오늘은 무슨 일 칠까 불안불안 제 처소에 둔 음식 사라졌나 기웃기웃 정신이 없었다.
허나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바리가 일을 치는데, 왕후 길대부인 대왕마마 중해진 용태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 아니면 바리 하는 짓이 모다 귀엽기만 한 것인지 시녀와 내관들이 꼬박꼬박 막내공주 사고 친 일을 아뢰어 바칠 때마다 흐뭇해하며 고개만 끄덕이는구나.
막내공주가 글선생과 내기 장기한 일에는 우리 막내가 그리 영특하냐며 되묻는가 싶더니, 칼선생에게 모래 뿌린 일에는 우리 막내 맞대응이 보통이 아니구나 칭찬을 하고, 내관 엉덩이에 활 꽂은 일은 우리 막내 그 조그만 사람 엉덩이 어떻게 활을 맞혔을꼬 신기해하고 -246~247쪽

모둠꽃밭 쑥대밭 만든 일은 원래부터 그 꽃밭 진력이 나던 참이었는데 이참에 갈아엎고 새로 심어야겠다며 역성을 드시었다. 그뿐이랴. 시동 아이들에게 품바타령 가르친 일은 궁 안에서도 바깥세상 알아야 하느니라 오히려 제대로 배워라 훈계하시고, 소나무 잣나무 베어낸 일은 우리 막내가 그리 부지런하냐 흐뭇해하시고, 검덕이 풀어 궁에 있는 요깃거리 싹 쓸어가는 일엔 애가 못 먹고 커서 그런다며 가슴 아파하시니 시녀와 내관들 막내공주 좀 다스려 달라는 심정으로 달려왔다가 한숨만 내쉬며 곤전을 나섰다.-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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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지국 막내공주전 2 - 완결
신순옥 지음 / 청어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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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머니 병이들어 어의에게 진찰하니
약방약도 무약이요 백사약도 무약이라
약없다고 탄식하니 궁에계신 나랏님이
약을써서 편지했네

그편지 읽어보니 수라져라 깊은물에
단도라지 좋다해서 단도라지캐러 나는갈래
그때가 삼사월인가 오만풀잎은 만발되고
싹잘몰라 못캐겄네

오던길로 돌아서니 뒷동산에 상여꾼들
하늘같은 우리부모 둥치둥치 잘매주소

언니머리 여자머리 내머리는 대자머리
질염질염 솎아다가
물레에 금베틀에 수실좋게 메여짜서
아랫물에 씻어갖고 웃물에다 흔들쳐서
베꽃같이 바랜베를 밀꽃같이 다듬어서
언니야 이레장에 엄마사러 나는갈래

엄마엄마 울고가니 저건네에 바위틈에
숨은새가 하는 말이
오만전은 다있어도 부모전은 없는기라
그말을 깊이듣고 베한필을 펼쳐놓으니
귀족도 내리좋다 백성도 내리좋네
그베한필은 좋건마는 부모팔이 어딨겠소

그말을 깊이듣고 대작대기 움켜잡고 치마앞이 못이졌네
그것도 샘이라고 잉어한쌍 붕어한쌍 쌍쌍이 돌아오네
잉어야~ 붕어야~
네어디뜰때 그리 없어 눈물강에 네가 떴냐
강물도 강이지마는 뜻이있어 내가 떴네-7~8쪽

삼년묵은 먹을갈아 사년묵은 붓대들고
그려보자 그려보자 어머님의 화상을 그려보자
어머님화상을 그릴라해도 눈물이 강물되어
글발젖어 못 그리네-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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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지국 막내공주전 2 - 완결
신순옥 지음 / 청어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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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우물쭈물 염라대왕 앞으로 나아갔다.
"너는 어찌하여 나이도 어린것이 살생을 하였느냐?"
바리, 뜻밖의 말에 대경하여 반문했다.
"예? 살생이라뇨?"
염라대왕의 얼굴 진노한 듯 엄하고 무서웠다.
"벼랑에 저 약한 끈을 감고 매달린 것은 결국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 아니냐. 그것이 너 자신을 살(殺)하고, 너를 낳아준 부모를 살하고, 너의 형제자매를 살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함깨 왔던 일직사자도 그 말을 듣고서야 왜 바리가 살생과 도둑질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에게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리는 발설지옥에 가게 될까 봐 얼른 손을 내저으며 연유를 설명하였다.
"대왕님,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한 것은 아니고요. 죽어서라도 저승에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삼신산의 약려수를 구하기 위해서요.""
"약려수?"
바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온 것이다 하니 염라대왕 잠시 말이 없으시더니 업경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업경대가 바리의 죄상을 낱낱이 비추기 시작했다. 염라대왕은 업경대로 바리가 살아 온 십육 년을 살펴보시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94쪽

"네 마음이 갸륵하여 웬만하면 보내주려 하였는데, 빌어먹고, 혼자 먹고, 안 나눠 먹고, 숨겨 먹고, 뺏어 먹고, 훔쳐 먹고, 등쳐 먹고, 많이 먹고, 놀려 먹고, 몰래 먹고...... 먹는 걸로 꽤나 죄를 지었구나."
염라대왕의 말이 계속될수록 불안스레 손톱을 뜯던 바리가 문득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 그래도 가......가끔은 나눠 먹었는데요."-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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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각양 한국 무협 명작 컬렉션 2
한상운 지음 / 로크미디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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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늙고 주름진 손이다.
손가락은 젊은 여자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예쁜군."
손의 주인이 중얼거렸다.
"좀 시들긴 했어도."
겁먹은 듯 여자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손의 주인은 달래듯이 말했다.
"겁먹지 마라. 나는 그리 무서운 사람이 아니니. 긴히 구해야 할 물건이 있어서 이러는 것뿐이야. 물건만 구하면 즉시 널 풀어주마."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코와 입술을 지나 목을 건드리고 가슴에 닿았다. 여자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지만 몸을 피하진 않았다.
손의 주인이 중얼거렸다.
"이 두둑한 건 뭐지?"
손가락이 여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손아귀에는 한 움큼의 전표가 들려 있었다.
"오호? 굉장한 거금이군."
일견 수백 냥은 될 듯했다.
손이 가볍게 펼쳐졌다. 전표가 떨어져 바닥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난 돈에는 관심이 없지."
손의 주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물이 흘렀다.
"단지 그 책! 그 책만을 원할 뿐이야."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의 주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됐지?"
"장강오살이 죽었습니다."-813~814쪽

손의 주인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멍청한 놈들. 다섯이서 하나를 못 당했다고?"
"...... 그리고 방희태의 시체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방희태가?"
손가락이 턱을 톡톡 두들겼다.
"그렇게 눈치 빠르고 싸움 잘하는 놈은 처음이었는데...... 결국 죽어 버렸군. 유상진이란 놈의 짓인가?"
"그게...... 처음에는 저희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조사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럼?"
"방희태의 머릿속에 삼시뇌충이 들어 있던 모양입니다. 그게 머릿속을 다 파먹었더군요."
"삼시뇌충? 그게 왜 그 녀석의 머리에 있었지?"
"그것까지는 저도......"
"어쨌든 유상진이란 놈,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하긴...... 그러니까 지금껏 세가를 피해 다닐 수 있었겠지. 놈은 지금 어디 있나?"
"죄송합니다. 찾고 있으니 곧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상관없다. 녀석이 올 곳은 이곳뿐이니까. 돈도 여자도 이곳에 있는데 제 놈이 어딜 가겠나. 녀석이 오면 순순히 들여보내. 방희태를 없앤 실력을 직접 견식해 보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손은 다시 유희를 시작했다.
손의 주인은 야차왕이었고, 그의 맞은편에 선 여자는 유가영이었다.-814~815쪽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무렵 무한의 남문대로에 한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유상진이었다.
그는 문국루를 향해 걸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가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날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거리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푸르게 무성했던 잎들은 색이 변했다.
유상진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기분으로 문국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낙엽이 지고 있었다. -815~8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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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1-1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뭐야? 여기서 끝이라니... 무슨 완결이 이래?
야차왕과 유상진은 만났을까... 둘이 싸웠을까? 누가 이겼을까?
그럼 가영이는.. 이거 너무하다구~!! ㅜㅜ

실망한 김에 이 책을 방출해 버릴꺼나...ㅋㅋ

카스피 2011-01-11 22:57   좋아요 0 | URL
가끔보면 무협지중에 뜬금없는 것이 있더군요.아마 이 작품도 그런것 같네요^^

후애(厚愛) 2011-01-12 08:44   좋아요 0 | URL
작가한테 실망했습니다. 저렇게 끝나니.. 너무 속상해요.ㅜㅜ
 
장길산 2 황석영 대하소설 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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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허니 얘기나 해보라니까."
"원 참 옥여스님두, 무슨 얘깃거리가 있다구 늘 만날 적마다 그러십니까?"
하며 모가비 임가가 말하자, 거사 하나도 사양한다.
"우리네가 지껄여봤자 음담패설입지요."
갑송이와 감동이는 묵묵히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넣었는데, 옥여는 놓인 술잔에 입도 대지 않고 그들에게 얘기만을 독촉하였다.
"그럼 지난 가을에 우리 행중에서 실지루 있었던 일 하나를 말씀 드릴까요?"
"그래, 해보게나."
"우리가 한양 올라갔을 적이지요. 남촌 초동의 어느 마당에다 놀이판을 벌여놓고 한판 벌이는 참이었지요. 웬 이목이 수려한 미동자 하나이 구경을 하는데, 놀이가 다 끝나구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갈 생각을 않는 것이었습니다그려. 우리가 하두 이상히 여겨서 물었지요.
여보 총각, 어째서 갈 줄도 모르고 거기 서 있소? 집을 모르면 우리가 데려다드리리다.
했는데도 그 총각은 여전히 꼼짝도 않고서,
나 같은 사람이 집에 간들 무엇 하오.
하며 대답할 뿐이었지요. 제가 거동을 보고는 저렇게 잘 생긴 미동(美童)은 구하기 어려우니 잘 꾀어다가 행중에 넣어 무동을 시키면 벌이도 좋으리라 생각했었지요. 그래서는,-194~201쪽

얘야, 네 성명이 무엇이며 네가 집에 가도 별 재미가 없다니 우리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노래나 부르고 산천경개나 구경하면 어떠냐?
하니까 그 소년은 즉시 응낙하더군입쇼. 그래서 제가 그 소년에게 기예를 가르쳐주니 위인이 영리하여 동료들의 뜻을 잘 받아주고 재주를 금방 익혀서 우리 행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지나간 봄의 일입지요. 해서 그애는 우리 사당아이들보다도 더욱 돈벌이에 요긴하였소이다. 절에서 가져간 부적도 잘 팔릴뿐더러 아이들이 몸을 팔지 않아도 제법 벌이가 되었지요. 이것이 모두 그 무동이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동이의 소문이 향촌에 널리 펴져 있어 모두들 그애를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한가지 이상한 일은 다른 때엔 그렇지 않다가도 밤 되어서 잘 때만 되면 언제든지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자질 않고 으레 문을 꼭 잠그고 혼자 기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괴이하게 여겨서 여러 번 그러지 말라구 타일러도, 다른 일에는 거역하는 일이 없다가 그 일만은 듣질 않았지요. 정 그렇다면 행중을 떠나겠다고 그러잖습니까. 우리네 함께 다니며 가락이나 맞춰주는 거사들은 모두 제 사당이 있는지라,-194~201쪽

내 생각하기를 저놈은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음양의 화합을 이루지 못하여 애를 태우는가 하여 우리네 애사당과 짝을 맞춰주기루 했습지요.그애가 바루 도화(桃花)라는 아이입니다. 이 사람 집에 같이 살구 있지요. 제가 오년 전에 원주서 흉년든 농가에서 다섯냥에 사들인 계집아이였습니다. 스님께선 꾸짖으시겠지만 기왕지사 헐벗고 굶주려 죽게 된 집안에 사느니, 저희 부모도 구명시키고 저도 우리 틈에 끼이면 비록 몸은 천하나 밥을 주리는 일이 없으니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하여튼지 이년이 그때에는 늘상 제 부모가 자기를 팔았다 하여 포한(抱恨)을 품고서 놀이판에 나서서 곱게 노래는 하여도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께는 아주 밉상이었습죠. 그렇게 웃지두 않던 도화가 버들쇠 소년이 행중에 들어온 뒤부터는 언제든지 웃음을 띠고 그 앞을 떠나기 싫어하며 흔히 은근한 말로 속삭일 적두 있구 애달픈 표정으로 바라볼 때두 있었지요. 헌데 짝을 맞추어주었는데도 역시 그 녀석은 도화라는 년을 버리구 저 혼자 풀밭이나 헛간에서 잠을 잔단 말입니다. 우리들두 은근히 궁금하여 버들쇠 총각과 도화가 어떻게 되는가 지켜봤습니다.-194~201쪽

허허, 가을이 다 되도록 아무 변화가 없습디다.
그러니까 그것이 지난 추석이었던가요? 경기도 어름에서 썰렁한 추석밤을 새우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이년이 버들쇠의 곁으로 파고든 모양입니다. 헌데 이 녀석이 자꾸 돌아눕기만 하니 도화도 아무리 사모는 하겠지만 여자의 오기가 있는 터에 너무 사내를 밝힐 수야 있겠습니까. 그래 하염없이 울고 앉았으니까 우리 거사 하나가 그 울음소리에 잠이 깨어서는 슬쩍 일러주었지요. 사내란 술을 마시면 계집 생각이 나는 법이니 몰래 술을 먹이구 정을 맺도록 하라구 말입니다.
자, 이 지경이니 아무리 애사당이라지만, 사내가 많은 철광산이나 저자에 나가면 계집이 모자라는 터에 한 년이라두 아쉬운데, 이년이 해우채를 벌 생각을 해야 말이죠. 추석 이튿날은 달도 밝았고 음식도 푸짐하여 놀이판이 아주 흥청댔지요. 달 밝은 상당산성에서 두견새가 울어예는데 참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처량해지는 밤이었지요.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도화가 그날 밤에 단단한 결심을 했던 모양입디다. 둘이 숲속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데, 어린것들이라 그 정경이 더욱 아기자기했지요.-194~201쪽

우리들두 그날 밤에 성사가 되지 않으면 버들쇠놈을 쫓아낼 작정이었거든요. 도화와 버들쇠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다가 서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다가 어느덧 술에 만취가 되었죠. 헌데 술자리가 치워지자마자 버들쇠놈은 전처럼 헛간으루 들어가더니 역시 고리를 딱 걸어잠그었단 말입니다. 도화가 정말 노했지요. 제아무리 철석 간장일망정 이럴 수야 있겠는가 하고, 저 사람이 여자라 한다면 수염자리가 보일 리 없고, 남자로서 자기 애타는 심정을 몰라준다면 차라리 죽여 미련을 끊음만 같지 못하다며 살기등등했지요.
결심한 도화가 행중에서 쓰는 큰 칼로 버들쇠가 자는 방문을 곁쇠질하여 열고 들어가보니, 서창의 달빛이 낮같이 환한 방안에 홀로 누운 버들쇠가 술에 취하여 사람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곤히 잠들었고, 베갯머리는 눈물로 젖어 있더랍니다. 도화가 염치 가리지 않고 버들쇠의 곁에 달려들어 허리띠를 끄른 다음 그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지요. 어, 이게 웬일이란 말입니까. 지금까지 미소년인 줄로만 생각했던 것도 한바탕 꿈이요, 도화는 허전한 마음으로 손을 꺼냈다는 것입니다.-194~201쪽

있을 것이 잡히지는 않으나 버들쇠는 분명히 소년이었습니다그려. 도화는 비로소 버들쇠가 혼자서 잠자리를 버티는 이유를 알았습죠. 도화는 봄부터 버들쇠를 사모했던 정회가 이렇듯 허무하게 끝난것도 야속하거니와 버들쇠의 처지가 불쌍해졌지요. 그래서 도화는 다시 밖으로 나가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서 방으로 들어갔지요.
이 한 칼로 내 팔자는 정해진다. 버들쇠가 죽어지면 나도 살인한 죄로 따라서 죽을 것이요, 천만다행히도 그가 완전한 사내로 되어진다면 내 소원은 그밖에 다시없다. 라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도화는 버들쇠 총각의 바지를 헤쳐 내려놓고 불룩한 살주머니를 사정없이 쭉 쨌단 말입니다. 버들쇠가 놀라서 저를 죽이려는가 하여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잠이 깼습니다. 도화는 버들쇠가 고함을 지르거나 말거나 계속 째어보니 피가 낭자한 가운데 살 속에서 사내의 것이 튀어나와 있더란 말입니다. 버들쇠는 벌떡 일어나 흘러내린 피를 씻을 사이도 없이 도화를 껴안았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요. 도화와 버들쇠는 서로 껴안고 웁디다.평생을 불구자로 보낼 줄 알았던 버들쇠가 감격했던 것입지요.-194~201쪽

도화가 반 울며 웃으며 하는 말이,
그런 까닭으로 쌀쌀하게 구는 것을 모르고 내가 사내들께 몸을 팔아 더럽게 여기는 줄 알았어요. 당신을 몰인정한 사람으로만 알고서 죽일 작정으로 문을 부수고 칼을 들고 들어왔건만.......
이튿날 행중이 길을 떠나는데 두 사람의 거동을 보니 애틋하고 살뜰하여 젊은 것이 부럽습디다. 헌데 이것들이 정을 알고 사내 계집의 재미를 알게 되니 머물러 사는 세간의 생활이 그리워지지 않을 리가 있겠소이까.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해두었건만 아마도 달아날 생각을 하구 있는 게 틀림없습디다. 실은 저두 어렸을 적에 애사당과 정분이 나서 둘이 도망쳤던 적이 있었지요. 허지만 우리 거사패와 사당이란 것들은 팔자에 역마살이 진동하여 양민의 생활을 이룰 수가 없지요. 한 두어 달만 정착해보면 좀이 쑤시고 갑갑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어 훌쩍 떠나게 되지요. 계집은 계집대로 다른 사내와 눈이 맞거나 여하튼지 역마살과 도화살을 면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날부터 도화와 버들쇠는 의논을 했던 모양입디다.-194~201쪽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난 탓으로 이 몹쓸 구렁창에 빠졌으나 당신은 아마 몸이 불구임에 상심이 되어 이런 패거리에 빠졌군요. 이제는 정로를 밟아 다시 살으셔야죠.
저 구렁이 같은 모가비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데, 언제 어디로 빠져나간단 말요.
하, 이렇게 의논들을 했답디다. 버들쇠는 알고 보니 양반댁 도령이었지요. 즉 사대부댁 외아들이었다 그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퍽 귀엽게 여기시면서도 한편으로 늘 섭섭하게 한숨지으시는 것을 보았지만, 어려서는 물랐다가 십오세가 넘으면서 부모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되었지. 그래서 나도 병신 된 한스러움이 날로 깊어져 공부를 하려 해도 머리에 들지 않고 멍하니 섰거나 이것을 잊으려고 놀기만 했었소.
라구 얘기를 하더랍니다.
부모님들은 내 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는데, 그날 사당패가 초동 집 근처에서 판을 벌였기에 구경을 갔다가 도화의 거동과 노래에 그만 정신을 잃어서 멍하니 서 있었지. 모가비가 가자 하여 깊이 생각지 않고 서슴없이 따라나섰던 것이외다. 실상은 도화를 따라나선 것이었지. 그뒤 도화의 눈치를 짐작은 하였으나 그럴수록 내 병신 된 것을 감추려고 쌀쌀히 굴었던 것이오.-194~201쪽

나중에야 이들이 빠져나갈 계획을 했던 것을 알았지요. 양반의 아들인 버들쇠와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우리가 광주서 송파를 휘둘러보고 있던 어느날 두 사람은 우리의 눈을 피하여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들은 사람을 잃으면 각 향시를 떠도는 무리들께 통문을 보냅니다. 행중에서 발을 뽑겠다면 누가 안 놓아줄까봐서 밤을 타구 달아나버렸단 말입니까. 해서를 골짜기마다 돌고 보니 곧 겨울입디다. 그래서 월정사루 들어왔는데, 그 도화란 년이 먼저 와서 기다리구 있었다 그겁니다. 그래 일부러 매도 때리지 않고 뭣 때문에 도로 왔느냐구 살살 캐물으니까, 다음을 기약하구 헤어졌다는데 필시 버림을 받았던 모양입디다. 우리네가 겪어봐서 알지만 정분의 맛을 본 사당은 이미 장사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내쫓았지요. 이제 너는 우리 행중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떠나가서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구 말입지요. 허 그랬더니 도화란 년이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기를 그 양반댁 아들이란 총각은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총각이 죽게 된 얘기는 바로 이렇습니다.-194~201쪽

초동의 유승지 댁으로 두 사람은 찾아갔었더랍니다. 유총각이 없어진 뒤 승지 댁에서는 그가 병신 된 것이 한이 되어 물에라두 빠져 죽었나 싶어 한강에서 토정리까지 다섯 줄기를 샅샅이 훑어보아도 전혀 자취두 없더라지요. 할 수 없이 지면 있는 자가 지방관으루 내려가면 수소문하여 알아달라고 부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병신 된 것으로 하여 더욱 애처로운 아들은 집으로 돌아오질 않았으니, 유승지는 양자를 들이게 되었답니다. 총각과 동갑이며 그에 못지않은 미남자에다 글도 열심히 읽는 시골 선비의 막내아들을 양자로 들여놓았고, 그해 식년시에는 과거도 보여 초시를 따고 이어서 홍패까지 받았답니다. 유승지는 가내에 엄명하여 버들쇠 총각이 행방을 감춘 사실을 절대 함구하도록 하고서, 양자를 버들쇠 총각으로 못박아 바깥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지요. 이제는 과거에도 나아갔고 또한 남자의 구실을 하여 대도 이을 수 있는 아들이 생겼으니 승지 댁은 전화위복이 된 것입지요. 헌데 이렇게 모든 일이 정해진 다음에 사라졌던 총각이 이상한 꼬락서니로 나타났단 말입니다. 양반의 아들이 유랑 광대패가 되어 가무를 팔아왔고,-194~201쪽

게다가 창녀 애사당까지 달고 돌아왔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승지 댁에서는 모처럼 고생 끝에 돌아온 아들을 바깥사랑에 머물도록 하고 안에는 들이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승지는 그의 부인이 알게 되면 일에 지장이 있을까 하여 안채에 알려지지 못하도록 하인들 단속을 단단히 해놓았지요. 그날 밤에 힘깨나 쓰는 하인 네댓 명이 사랑을 덮쳤답니다. 그들은 불문곡직 버들쇠와 도화를 자루 속에 넣고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 밖으로 떠메고 나갔지요. 이제는 그가 돌아온 것이 바로 양반댁의 환난이 되어버린 것이었습죠. 원래 유승지의 지시는 마포에 내다버리라 하였으나 그중에 유총각을 동정하는 노비가 있어서 삼개쯤 가서 풀어주며 멀리 떠나라고 권고하더랍니다. 도화는 다시 행중에 돌아가자 하였으나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양반댁 도령이 어디루 가겠습니까. 도화가 잠든 틈을 타서 그자는 강에 투신하구 말았습죠. 사당년들이란 아무리 나이가 어려두 사는 게 모질다는 걸 아는지라 아주 독합지요. 도화는 강에서 버들쇠의 시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답니다. 서강에서 시체가 떴다지요. -194~201쪽

도화는 동작나루에 있는 아는 사당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여 소년의 시체를 수습하였답니다. 이렇게 기담 비슷하게 지껄이기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얘깁지요. 네, 우리 아이들은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것들입니다."-194~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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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11-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길산 읽고 계시군요. 재밌죠? ㅎㅎ

후애(厚愛) 2010-11-30 06:10   좋아요 0 | URL
요즘 이것저것 읽고 있어요.^^ 네 재밌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