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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시작

 

 

  작가 마가렛 미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주인공,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 ‘해는 내일도 떠오른다’ 는 그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 말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떠올랐다. 어제도 떠올랐고, 틀림없이 내일도 떠오를 해, 언뜻 보기엔 빛도 같고 모습도 같기에 그 해가 그 해인 것 같지만 오늘의 해에는 분명 어제의 해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나는 그것이 새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해, 오늘의 해에는 이미 어제의 해한테서는 사라져버린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망을 발판삼아 또 하루의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이고. 1993년은 우리나라에 그처럼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해였다. 1992년 12월18일에 있던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3당을 통합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9백 97만 7천 3백 32표를 얻어 건국 이후 14번째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2위를 한 김대중 후보가 얻은 표는 8백 4만 1천 2백 84표로 두 후보간의 표차는 1백 9십 3만 6천 48표였다. 김대중 후보는 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대권패배와 관련,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민자당의 김영삼 14대 대통령 당선자는 나의 승리는 바로 위대한 우리 국민 모두의 승리라며 이제 우리는 명실상부한 문민정부를 창조해 냈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후보는 청와대의 주인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이렇게 30년간을 지속해 오던 군사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고 국민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력직에 오르자마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자신의 재산은 물론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명하였고, 공직자들의 비리가 샅샅이 밝혀지자 펜으로써 그들을 가차없이 잘랐다. 확실히 문은 무보다 강하다는 옛 명언을 증언이나 하듯 시대는 분명 변하고 있었다. 시대 변화의 주역은 물론 김영삼 대통령이었고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70 ~80%를 넘나들고 있었다.

한편 대학가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군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80년대를 그렇게 떠들썩하게 했던 전대협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정권이 몰락해 자신들의 추구해 온 이상이 더 이상설득력이 없게 되자 한총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하며 새롭게 문민정부의 학생운동을 주도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또한 교육제도에 있어서도 학생들의 입시부담을 줄이기 위해 학력고사를 수능시험제로 바꾸며 미래의 교육을 이끌어 갈 새로운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1993년도의 시작은 문민정부라는 희망찬 출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이 그렇게 희망으로만 가득찼던 해만은 아니었다. 3월 28일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되어 사망 75명, 부상 105명이라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7월26일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로 60명의 사망자와 40명의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10월 10일 훼리호선 침몰사고로 300여명이 사망․실종됐다. 연이어 터지는 대참사로 국민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안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고 다음에는 지하철에서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낭설이 사회에 퍼지는 가운데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바람은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이 계속되면서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그러는 가운데 93년은 마무리 지어졌다. 그리고 93년과는 또 다른 94년의 해가 떠올랐다. 1년 전의 놀라운 국민들의 지지율에 비해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채 30 %도 안 되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미국이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을 더욱 강화하자 정부는 끝내 농산물 수입을 개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이 결정에 국민들은 분노하게 되고 재야 단체, 농민, 각종 사회단체, 한총련 대학생들이 4월 9일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11개 도시에서 농산물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갖기로 결정하는데......

 

  집회가 있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강의가 끝난 저녁, 거리는 서서히 잉크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맘때면 늘 그렇지만 학교 주변의 술집들은 학생들로 붐비기 마련이다. 목마르지라는 호프집도 마찬가지였다. 감미로운 노란 불빛이 실내를 감싸고 돌았고, 히트곡인 김건모의 핑계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술집을 꽉 채운 학생들은 저마다 서로간의 얘기를 주고 받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프집 중앙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벽쪽으로 예닐곱명이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자리가 있었는데, 그 곳에 세 남학생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핏처 하나와 값싼 감자튀김 안주 한 접시와 서비스로 주는 팝콘만이 초라하게 놓여 있었다.

“자 우리 한 잔 해야지.”

준석이 잔을 들었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의 외모도 체격에 걸맞게 흠잡을 데 없는 이상적인 얼굴이었다. 이마는 조금 넓었는데, 그 이마까지 검은 머리가 쓸려 내려와 있었고, 크고 강렬한 빛을 발하는 눈은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인상을 풍겼다.

“좋지.”

허공에서 ‘쨍’하는 소리를 내며 세 개의 잔이 부딪혔다.

“그나저나, 1년이 지나도록 이게 뭐냐? 멋진 애인 한명 구하지 못하고.”

준석이 잔을 내려놓으며 내뱉었다.

“넌 또 애인타령이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사귀면서.”

마주보고 있는 재수가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재수는 준석보다 조금 키가 작고 마른 체격이며 반곱슬이었다. 알이 네모진 안경을 쓰고 있었고, 입가에는 늘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는데 때때로 그 웃음기는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게 했다.

“그 애들은 그냥 친구일 뿐이야.”

준석이 관심 없다는 듯이 말하고 나니 삐삐가 울렸다. 준석은 바지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 번호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누구야?”

재수가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잠깐 전화 좀 걸러 갔다올게.”

준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후 준석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야?”

재수가 좀 전처럼 다시 캐물었다.

“아는 여자 애야.”

준석은 자리에 앉았다.

“또 여자 애냐? 넌 어떻게 여자 애한테서만 연락이 오냐?”

재수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내가 워낙 잘 생겼으니까 그렇지.”

준석이 제법 우쭐대며 말했다.

“뭐야?”

재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준석을 바라보았다.

“그럼, 뭐 하냐? 마음에 드는 애는 하나도 없는데.”

준석은 싱겁게 말하고 나서는 맥주잔에 가득 찬 술을 반쯤 마셨다.

재수는 더 어이없는 얼굴을 하며 옆에 앉아 있는 유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진아, 쟤, 저런 왕자병은 어떡해야 하냐?”

유진은 재수의 질문에 가볍게 미소를 보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피부가 하얗고 고왔으며 양쪽 볼에는 불그스름한 빛이 돌아 유순해 보였다.

“근데 말야, 우리 동아리 방에 매일 장미꽃 갖다 놓는 사람은 누굴까? 내 생각엔 분명 여자일 것 같은데.”

준석은 제법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넌 또 그 얘기냐? 그리고 그 사람이 여잔지 남잔지 니가 어떻게 아냐? 우리 동아리에 남자만 있냐?”

재수가 여전히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았다.

“그거야 분명 내 얼굴에 반했을 테니까 그렇지.”

“뭐야? 야, 그런 씨도 안 먹히는 소리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좋지.”

세 학생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그나저나, 얘네들은 왜 아직까지 안 오지?”

유진이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깡패가 언제 시간 제대로 지키는 거 봤냐?”

재수는 불만이 가득찬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야, 민이 걔 차라리 안 오는 게 낫지 않겠냐? 오면 또 둘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준석이가 끼어들었다.

“그야 그렇지만 이런 자리에 빠질 아이는 아니잖아?”

유진이가 말을 받았다.

“하긴 그래. 이런 자리에 안 오면 강 민이 아니지.”

준석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거리가 거의 잉크빛으로 물들고 나더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민이는 도서관 앞 가로등이 켜진 곳에서 희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게 깍은 머리가 제 멋대로 삐쳐 나와 있었는데 그 헤어스타일은 미소년 같은 민이의 동안인 얼굴과 잘 어울렸다. 몇 시쯤 됐을까, 시계를 보는 사이 도서관에서 희연이가 나와 낮은 계단을 걸어내려 오고 있었다. 희연은 단발머리에 간편한 캐쥬얼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희연은 왜소한 체격이었고, 얼굴은 조금 창백했으며, 목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금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나약하고 착하게만 보이는 희연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왠지 모르게 날카로운 차가움이 느껴졌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희연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냐. 나도 지금 왔어. 가자. 애들이 기다릴텐데.”

민이와 희연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넌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냐? 물론 곧 있으면 중간고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하는 거 아냐?”

“그래도 별 수 없어. 이렇게라도 해야 따라갈 수 있으니까. 경영학 정말 어렵거든.”

“어려우면 포기하면 되는 거 아냐? 중간고사 시험 한 번 정도 망친다고 인생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맨날 학사 경고야?”

“야!”

“에취.”

“감기 걸렸어?”

“응. 잠깐 약국에 좀 들렀다 가자.”

“그래.”

교문을 나선 두 여학생은 학교 앞 근처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희연은 조제한 약을 받아 가지고 민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두 학생은 다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목마르지 호프집으로 걸어갔다.

 

  희연과 민이가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왜 이제야 와?”

유진은 희연이를 보며 물었다.

“약국에 좀 들렀다 오는 길이야.”

희연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국? 약국엔 왜?”

유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기 때문에.”

“또야?”

“환절기 때만 되면 늘 이러는 거 알면서 뭘 그렇게 놀라?”

“괜찮아?”

“응, 별 거 아니야. 근데 아직 안주 안 시킨 거야?

희연은 핏처 한 병과 감자튀김 안주 한 접시뿐인 초라한 테이블을 보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야 말이지.”

준석이가 대답했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시켜.”

“역시 희연이가 있어야 한다니까.”

재수가 기쁨에 소리를 질렀다.

“야, 소주도 한 두어 병 시켜라.”

민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넌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소주만 마시려 드냐? 그렇게 쳐 마셔대니까 얼굴이 그 꼴이지.”

재수는 민이를 비꼬아 댔다.

“야, 넌 뭐 잘난 줄 알아? 꼭 머저리 사촌 같이 생겼으면서.”

민이도 지지 않고 대꾸를 했다.

“뭐, 머저리 사촌? 야 너 말이면 함부로 다 해도 되는 줄 알아? 그러다가 나한테 된통 당하는 수가 있어.”

“어이구, 누가 할 소리를.”

민이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휴, 또 시작이야. 도대체 너희들은 어째 만나기만 하면 그러냐?”

준석이 짜증을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같으면 이런 말 듣고도 열 안 받겠냐?”

재수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민이도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며 맞받아 치고 있었다.

“내가 말을 말았어야지.”

준석은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고는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은 끊일 줄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희연이는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을 재미있게 지켜 보다가 말을 꺼냈다.

“기장, 이제 다 모였는데, 싸움은 잠시 접어두고 술 한 잔 하는 게 어때?”

“그렇지. 한 잔 해야지.”

민이가 말했다.

“당분간은 좀 조용할 거 같네. 아주 속이 다 후련하다.”

준석이가 무거운 짐을 벗어내린 듯 시원하다는 투로 말했다.

“한울림의 앞날을 위하여.”

민이가 잔을 들었다.

“위하여.”

다섯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학생들은 각자 술을 적당히 마시고 나서 잔을 내려놓았다. 재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경고하겠는데 내 앞에서 담배는 피지 마. 난 담배는 질색이니까.”

민이가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내 담배 갖고 내가 피는 데 웬 참견이야?”

재수는 무시하고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자 민이가 재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재수의 입에서 약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니가 깡패야? 왜 남의 다리는 걷어차?”

재수가 성난 얼굴을 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내가 경고했잖아? 내 앞에서 담배 피지 말라고.”

민이는 아주 태연하게 말하며 감자튀김을 주워 먹었다.

“어휴, 이걸 정말?”

재수는 민이의 뻔뻔한 태도를 참을 수가 없어 주먹을 쥐었다.

“왜 때리실려고? 어디 한 번 때려보시지 그래?”

민이는 당당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휴, 내가 참아야지.”

재수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잘 생각했다. 더 맞기 싫으면 그게 상책이지.”

민이는 또 재수의 부아를 돋우고 있었다.

“뭐야? 내가 너 같은 걸 겁내서 그러는 줄 알아? 봐주면 적어도 고맙다고는 해야 될 거 아냐?”

재수의 가슴에서는 간신히 삭였던 화가 또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야, 너희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셈이냐?”

준석이 또 다시 짜증을 내며 말을 했다. 그러나 둘은 준석이의 말을 못 들은 듯 변함없이 둘의 말싸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젠 내 말은 씨도 안 먹히는 군.”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애? 안 그래 유진아?”

희연이가 물었다.

“쟤네들 일에 신경 쓸 거 없잖아.”

“하긴 그래.”

“야, 쟤네들 말릴 방법 좀 없겠냐?”

준석은 아이들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쟤네들을 무슨 수로 말려?”

유진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 때, 재수가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왔다.

“잠깐, 휴전하고 술이나 마시는 게 어때? 안주도 나왔는데.”

희연은 마침 술과 안주가 나오자 둘의 싸움을 좀 지연시켜 보려는 속셈으로 말을 꺼냈다.

“좋지.”

둘은 희연이의 말에 흔쾌히 응했다. 다섯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역시, 희연이 너 밖에 없다. 이제 좀 살 만하네.”

둘의 싸움이 멈추자 준석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얼마 못 갈 거야.”

희연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근데, 우리 오기 전에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희연이가 유진이에게 물었다.

“뭐, 특별히 한 얘기 없어.”

“맞아, 준석이 저 녀석이 애인타령이나 하는 거 듣고 있었다니까.”

재수가 덧붙였다.

갑작스럽게 준석이의 삐삐가 또 요란스레 울렸다. 준석은 삐삐를 들여다 보았다.

“또 삐삐냐? 아까 그 여자애야?”

재수가 물었다.

“아니, 다른 번혼데. 잠깐 전화 좀 걸고 올게.”

준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치겠군.”

재수는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부러우면 너도 나처럼 잘 생기면 될 거 아니냐?”

준석은 제법 우쭐대며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야, 소주도 나왔는데 우리 소주나 마시자.”

민이는 수저로 소주병 마개를 땄다.

“하여튼 술꾼은 어쩔 수 없다니까.”

재수가 또 민이를 건드렸다.

“야, 머저리, 잔이나 들어.”

재수가 잔을 들자 민이는 재수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야, 근데, 넌 아까부터 자꾸 나보고 머저리라고 그러는데 그러다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어? 깡패.”

재수는 잔을 내려놓으며 기어이 시비를 걸고 넘어갔다.

“뭐, 깡패?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한 번 덤벼 보시지 그래?”

민이도 다시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어쭈, 제법 자신 만만해 보이는데. 보나마나 한 방에 나가 떨어질 게 뻔한데 순순히 잘못했다고 항복하지 그래?”

“웃기고 있네. 너야말로 잘못했다고 빌지 그래? 그럼 내가 용서해 줄지도 모르잖아. 난 원래 마음이 넓거든.”

“또 다시 시작이군. 희연아, 쟤네들 싸움 좀 말릴 방법 없겠냐?”

이번에는 보다 못한 유진이가 희연이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쟤네들을 무슨 수로 말려. 쟤네들 사랑싸움에 신경쓰지 말고 술이나 마셔.”

희연은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유진이의 맥주잔에 따라 주었다.

“뭐, 사랑싸움?”

민이와 재수가 동시에 희연이를 돌아보았다.

“희연아,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저런 깡패는 트럭으로 갖다 줘도 하나도 안 반갑다고.”

재수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지껄였다.

“어이구, 누구는? 너랑 사랑하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

“사랑싸움 아니었나? 아니었음 말고.”

희연은 능청을 떨며 말했다.

준석이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준석은 재수와 민이가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리에 앉았다.

“또 시작한 거야?”

준석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얼마 못 갈 거랬잖아?”

희연이가 말했다. 그 때 재수가 괴성을 질러댔다.

“야, 너 정말 깡패야? 왜 자꾸 남의 다리는 걷어 차?”

재수는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내가 말조심 하랬잖아. 또 한 번 주둥아리를 놀렸다간 그 땐 각오하라고.”

“어휴, 이걸 정말? 이것도 여자라서 때릴 수는 없고.”

“내가 미친다. 정말. 야,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지 않냐? 그렇게 싸운 지 벌써 1시간이 다 되어간다고.”

“야, 준석이 넌 가만있어. 난 맞고도 가만 있을 수는 없다고.”

“그래, 준석이 넌 끼지 말아. 난 너한테까지는 감정 없으니까.”

“웬 일이냐? 너희 둘이 뜻을 같이 할 때도 있고.”

준석이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준석이도 왔는데 다 같이 소주 한 잔 하는 게 어때? 맥주도 이젠 다 비웠으니까.”

희연은 또 한 차례 둘의 싸움을 지연시켜 보려 하였다.

“그거 좋지.”

다섯명의 학생이 희연이의 제안에 찬성했다. 각자의 술잔에 술이 부어졌고. 그들은 허공에서 잔을 부딪혔다.

“에취.”

희연은 술을 마시고 나자마자 기침을 했다.

“괜찮아?”

유진이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응, 괜찮아. 에취.”

“이제 그만 마셔. 감기까지 걸렸다면서.”

유진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희연은 유진이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근데, 이번엔 어떤 여자애냐?”

재수가 준석이에게 물었다.

“은주라고 아는 애 있어.”

“그래 그 여자가 뭐라고 하대?”

“만나자고 그러지 뭐.”

“그래서 만나기로 했어?”

“아니. 별로 관심 없는 얘야.”

“아, 참 그러고 보니 깜빡할 뻔 했네.”

희연이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뭘?”

유진은 궁금증이 담긴 눈으로 희연이를 보았다.

“내 친구가 준석이 너 좀 만났으면 하는데.”

“날?”

준석이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응. 우리학교 무용학과 다니는데 내일 1시에 학교앞 아모르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어때, 만날 생각 있어?”

“그 애 니 동생보다 이뻐?”

준석이가 물었다.

“응.”

“정말이야?”

“난 거짓말 안 해. 그 앤 TV에도 나온 적 있다고.”

“TV에도 나온 적 있다니? 누군데?”

준석은 방금 전 시큰둥했던 반응과는 달리 한껏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그건 비밀. 내일 가서 직접 확인해 봐.”

“야, 누군지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별 수 없어. 그 애가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누군지 궁금하면 내일 가 보면 되잖아?”

“내일 1시, 아모르 커피숍이라고 했지?”

“응.”

“희연아, 너 어쩌다가 저런 플레이보이한테 중매까지 서 주게 되었냐? 중매를 서 줄려면 나한테 남자나 좀 소개시켜 주지.”

민이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아는 남자가 거의 없어서.”

“혹여 니가 소개를 받으면 뭐 하냐? 보나마나 퇴짜 맞을 게 뻔한데.”

또 재수가 끼어들어 민이의 화를 돋우었다.

“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더 맞기 싫으면 얌전히 있으라고.”

“정신을 못 차린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자기 주제는 생각 안하고 헛된 망상이나 하고 있으니 말야.”

“나 잠깐 화장실 좀 갖다 올게.”

희연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연은 손을 씻고 나서 거울을 보았다. 술기운인지 감기 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얼굴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희연은 스스로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이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단정히 하고 나서 희연은 화장실을 나왔다.

희연이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새 화제가 내일 있을 범국민적인 집회에 관한 얘기로 옮겨져 있었다.

“준석이, 너도 내일 집회에 한 번 와 보지 그래?”

재수가 물었다.

“지금 내가 그런 데에 신경 쓰게 생겼냐? 희연이가 말한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 죽겠구만.”

“하여튼 저 인간 머릿속엔 여자밖에 안 들었다니까.”

“걱정마. 머저리. 난 참석할 테니까.”

민이가 말했다.

“야, 넌 안 와도 된다고. 너 같은 깡패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이야.”

재수는 또 싸움을 걸고 있었다.

“정말 쓸모가 없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뭘 알고나 제대로 말씀하시지.”

민이는 또 재수의 말을 맞받아쳤다.

“유진아, 너도 내일 집회에 갈 거야?”

희연은 조심스럽게 유진이의 속마음을 떠 보았다.

“가야지. 뜻이 좋은 집회잖아. 넌? 갈 거야?”

“아니, 나 그런데 참석 안 하는 걸 잘 알잖아.”

“하긴.”

 

  다섯명의 학생이 목마르지라는 호프집에서 술을 마신지도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봐, 깡패, 좀 작작 먹지 그러냐? 그렇게 먹어대기만 하니까 살이 디룩디룩 찌는 거 아냐?”

재수가 민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머저리, 내가 말했지? 그렇게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다간 한 대 더 맞는다고.”

“어휴, 그러셔? 어디 한 대 더 때려 보시지 그래?”

재수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세 명의 학생은 둘의 말싸움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희연아, 쟤네들 싸움 좀 그만 두게 할 수 없냐?”

참다 못한 준석이가 희연이에게 또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방법이 한 가지 있긴 있어.”

“그게 뭔데?”

준석은 희망을 품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일어나자.”

희연이가 말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유진과 준석은 희연이의 말에 동의를 했다.

“뭐, 이제 10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가자고?”

민이가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래, 나도 벌써 가고 싶지는 않다고.”

재수도 민이처럼 희연이의 제안에 반대를 했다.

“가고 싶지 않으면 너희 둘이 여기서 계속 마셔. 그 대신 오늘 술값은 너희 둘이 다 내야 할 거야”

“희연아, 이건 너무 비열한 방법이야.”

민이가 말했다.

“그래도 어떡하냐?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인데.”

희연은 능청스런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다섯 명의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은 일어서면서 조금 비틀거렸다. 그는 준석과 함께 화장실로 갔다. 재수와 민이가 먼저 밖으로 나왔고 희연은 술값을 계산한 후 나왔다. 조금 있자 화장실로 갔던 준석이와 유진이가 함께 나왔다. 유진은 밖으로 나와서도 조금 비틀거리며 걸었다.

“너 취한 것 같은데. 집에까지 갈 수 있겠어?”

준석이 걱정을 하며 물었다.

“걱정마. 이 정도 마신 걸 가지고 뭘.”

“나하고 같은 방향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희연이가 말했다.

“사내 녀석이 저렇게 술이 약해서 어디다 쓰냐?”

민이가 투덜거렸다.

“야, 그러는 넌 뭐 잘난 줄 아냐? 여자가 소주를 물 마시듯 쳐 먹는 주제에.”

재수가 또 민이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너희는 어째 밖에 나와서 까지 그러냐? 이제 그만 좀 할 수 없냐?”

준석이 또 짜증을 냈다.

“먼저 갈게.”

희연이가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라. 압구정 부르즈아들.”

민이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희연은 민이의 농담에 가볍게 미소를 띄우고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도 그만 가야지.”

민이가 말을 꺼내자 세 명의 학생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은 걸어가고 있는 도중에도 끊이질 않고 계속되었다. 준석은 그들의 말싸움을 저지시켜보려 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준석은 하는 수 없이 둘의 말싸움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걸었다.

세 학생은 횡단보도로 들어섰다. 때마침 파란 불이 켜졌다.

“머저리, 건너가자.”

민이가 말했다.

“난 오늘 준석이네 집에서 자야겠다.”

“또?”

민이가 놀라며 물었다.

재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라.”

“잘 가, 깡패.”

재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민이가 주먹으로 재수의 배를 때렸다. 재수는 ‘욱’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내가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말랬잖아.”

민이는 말을 끝내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어휴, 저게 여자야? 무슨 주먹이 그렇게 세?’

재수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준석과 재수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버스가 도착하자 두 남학생은 버스에 올라탔다.

 

  네온싸인이 활개를 치고 시끄럽게 차들이 지나가는 밤거리를 두 남학생이 걷고 있었다. 준석과 재수는 그 화려한 네온싸인이 빛나는 거리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차들의 소음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어두운 길에 밤의 적막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재수였다.

“너, 아직도 방에다 소피 마르소 사진 붙여 놓고 있냐?”

“당연하지. 소피 마르소는 중학교 때부터 나의 영원한 연인이었는데. 내가 불문학과를 간 이유 저 번에 너한테 말했잖아? 프랑스 가서 소피마르소 만나볼려고 그런 거라고.”

“그 때쯤이면 그 여자도 늙었을 텐데 만나서 뭐 하냐? 야, 너도 이제 20살인데 이제 그런 사진은 띠어 버리고 정의로운 생각 좀 하는 게 어때?”

“정의로운 생각? 그게 뭔데?”

준석은 자못 궁금해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내일 같이 집회에 가자고. 아마 내일 보라매 공원에 쌀 수입 개방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엄청 모여들 거라고.”

“그게 무슨 정의로운 생각이냐? 그들은 피에 굶주렸을 뿐이야. 그들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내 형도 그들의 피해자...”

준석은 끝을 맺지 않고 말을 멈추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재수는 놀란 얼굴을 하며 준석을 보았다.

“아니야. 아무 것도.”

준석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을 흐렸다.

준석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다. 준석의 부모님은 지금은 조그만 햄버거 가게를 하시지만 예전에는 길거리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장마차를 하셨다. 부모님의 포장마차는 때때로 단속반에 걸려 무참히 부서지고 했는데 형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마도 그 때부터 형의 마음속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싹텄던 것 같다. 형은 대학에 들어가더니 운동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무렵, 이미 부모님은 틈틈이 모은 재산으로 조그만 과일 가게를 갖게 되어 더는 단속반원들의 행패를 받지는 않았지만 형의 마음속에 자리 잡힌 앙금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부모님이 데모를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지만 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2학년을 마치고 형은 군대에 가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전경으로 착출되었다. 데모를 하던 사람이 이젠 데모를 진압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위가 한층 심해진 날이었다. 형은 네 다섯명으로 둘러싸인 학생들의 무자비한 구타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네 차례에 걸쳐 대 수술을 했지만 끝내 형은 수술실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준석은 그 때의 충격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운동권이라는 학생들은 입으로는 민주를 부르짖었지만 정작 하는 일이라곤 동료를 죽이는 일뿐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준석은 운동권이라고 자부하는 학생들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넌 언제쯤에 집에 들어갈 생각이냐? 벌써 사흘째 아냐?”

준석은 화제를 돌렸다.

“내일은 들어가야지.”

재수는 맥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웬만하면 네 가족 좀 생각해라. 이렇게 매일 외박하지 말고.”

“그래야지.”

재수는 ‘가족’이라는 말에 힘이 쭉 빠진 채 대답했다. 재수에게 있어 가족이란 유감스럽게도 불행한 단어였다. 불쌍한 이복동생인 소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희를 생각할 때마다 재수는 가슴이 아려왔다. 소희의 친어머니는 소희가 어렸을 때 소희를 버리고 떠났고, 의붓아버지는 소희한테 성적학대를 일삼고 있었다. 재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아버지가 소희의 옷을 벗기고 몸을 탐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땐 너무나도 놀라고 낯이 뜨거워서 소희를 막아주지도 못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소희한테 그런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했다. 그러나 재수는 아버지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여전히 소희를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 재수는 그런 집안이 싫어 가능한 밖으로 나돌고 있었다.

두 학생은 서민 아파트인 동보 아파트로 들어섰다. 준석이의 집은 가동 301호였다. 준석과 재수는 가동으로 가서 계단을 올라갔다.

준석이 벨을 누르자 키가 작고 아주 앳되어 보이는 지은이가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왔어. 재수 오빠도 왔네요.”

지은은 깜찍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재수는 지은이의 밝은 얼굴을 보자 이복동생인 소희가 떠올랐다. 소희의 친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로 소희의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재수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잘 있었어? 꼬마 숙녀.”

재수는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우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분명히 경고하겠는데요. 다시 한 번 나한테 꼬마라고 했다간 이 집에서 내 쫓을 줄 알아요.”

지은이는 귀엽게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

“꼬마를 보고 꼬마라고 하는 건데. 뭐가 잘못이야?”

준석이가 재수의 편을 들었다.

“오빠, 난 꼬마가 아니야. 난 모델 지망생인 고등학생이라고.”

지은이는 여전히 깜찍한 목소리로 반박을 했다.

“야, 155cm로 무슨 모델이냐? 제발 그 헛소리 좀 이제 그만할 수 없냐?”

“오빤 내가 모델이 된 다니까 괜히 샘나서 그러지?”

“뭐야?”

준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은이를 쳐다보았다.

“근데 늦었는데 여태 안 자는 거야?”

재수가 물었다.

“공부 해야죠. 저도 이제 고등학생이라고요.”

지은은 대답을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3호선 지하철은 텅텅 비어 있었다. 유진과 희연이는 문이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는데 유진은 잠이 든 채 희연이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고 있었다. 희연은 그런 유진이를 행복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역은 압구정...... 압구정입니다. 다음은.......」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희연은 조심스레 유진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유진은 자신의 어깨에 와 닿는 촉감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다 왔어.”

유진은 희연이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두 학생은 조금 후 지상 위로 올라왔다. 유진은 다시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길가 구석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오바이트를 했다. 희연이가 뒤에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희연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응, 이제 괜찮아.”

유진은 토를 다하고 나서 말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네 앞에서 말야.”

“뭐가 어때서 그래? 남자들이야 다 술 마시고 그러는데.”

희연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유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술이 많이 깨었지만 발걸음은 아직도 조금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유진아, 너 내일 집회에 나갈 거야?”

희연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가야지. 우리 쌀을 지키냐 마느냐의 중요한 집회라고.”

유진은 확고한 신념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니가 안 나갔으면 좋겠는데.”

희연은 방금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나 요즘 운전 배우는데 내일 너랑 같이 운전 배우면 좋을 거 같아서.”

“나 기계에 질색인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리고 내일은 집회에 나가야 해. 쌀을 지켜야 농민들이 사니까.”

희연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유진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이지 유진이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유진과 희연은 유진이의 집에 도착했다. 유진은 걸어오는 게 숨이 찼던지 도착하자마자 벽에 기댄 채 앉아 또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희연은 벨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에서 강 여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예요. 어머님. 안에 아버님 계셔요? 유진이 지금 여기서 자고 있거든요.”

곧 유진이 아버지인 박 회장이 나왔다. 박 회장은 유진이를 업고 안으로 들어갔고 희연이가 그 뒤를 따랐다. 강 여사는 남편이 업고 들어오는 유진이를 보자 깜짝 놀랐다.

“어이구, 내가 저 녀석 때문에 못 산다니까. 저 녀석이 희연이 너 같으면 얼마나 좋겠냐?”

강 여사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어머님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하고 유진이 하고 어디 같나요? 그리고 금하건설을 이어 갈 아이인데 저 정도 객기는 있어야죠. 기분 좋게 마신 술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고맙다, 희연아.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예. 안녕히 계셔요.”

희연은 강 여사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유진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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