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강 여사의 부탁

 

 

  풍물패 회원들은 연습을 끝마친 후 달빛을 벗 삼아 동아리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리에 다 앉은 후 오늘 했던 연습에 대한 총평을 했다. 총평이 끝나자 회장인 경철이 말을 꺼냈다.

“오늘 다들 수고 했어. 이번 주 연습은 이걸로 마치기로 하지. 그리고 다음 주에는 광주에 있는 ㅈ대에서 한총련 출범식이 있는데 많이 내려갔으면 좋겠어. 우리 풍물패는 언제나 민중과 함께 하니까. 그럼 오늘은 여기서 끝내지.”

회장인 경철의 말이 끝나자 회원들은 동아리 방을 나갔다.

 

  재수, 민이, 준석,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야, 너도 다음 주에 한총련 출범식에 내려가는 게 어때?”

재수가 준석에게 물었다.

“내려 갈려면 너희들이나 가라. 난 그 날 마리하고 약속 있다고.”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지자 재수와 민이는 준석이랑 헤어지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머저리, 이제 9시밖에 안 됐는데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 하는 게 어때?”

민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자 말했다.

“또 술이야? 넌 어떻게 된 여자가 밤낮 술타령만 하고 있냐? 그러니 얼굴이 그 모양 그 꼴이지.”

재수가 또 비꼬는 투로 말했다.

“니가 또 몸이 근지러운가 본데 그러다가 되게 맞는 수가 있어.”

“어휴, 그러셔. 어디 한 번 쳐 보지 그래?”

둘은 또 티격태격 하며 자주 가던 술집으로 걸어갔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유진이와 희연이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아, 너 다음주에 한총련 출범식에 내려갈 거야?”

희연이가 물었다.

“응.”

유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 내려가면 안 돼?”

희연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 있는 게 아니라, 그 날 피아노 연주회 있는데 너랑 같이 갔으면 해서.”

“그런 거라면 너 혼자 가도 되잖아? 이번 한총련 출범식은 쌀 수입 개방을 저지하기 위한 출범식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꼭 내려가 봐야 해”

희연은 더 이상 유진이를 설득하려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유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곧 지하철이 들어왔고 두 학생은 지하철에 올라탔다.

 

 

  다음날 저녁 희연은 강 여사가 하는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여느 때처럼 손님들은 환호의 박수를 쳐 주었고 희연은 답례의 인사를 하고 강 여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제 끝났구나. 희연아, 잠깐만 저기 가서 앉아 있을래? 너하고 좀 할 얘기가 있는데.”

“저하고요?”

“그래. 저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거라.”

“예.”

희연은 강 여사가 가리키는 곳에 가서 앉아 있었다. 조금 후 강 여사가 희연이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와서 앉았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는 게......”

“희연아, 너도 다음 주에 그 한총련 출범식인가 뭔가 하는 데에 내려 갈 생각이니?”

“아니요. 전 그 날 피아노 연주회에 갈 생각인데요.”

“유진이, 그 녀석도 너와 생각이 같으면 얼마나 좋겠니? 근데 그 녀석은 한사코 내려갈 거라고고집을 부리고 있거든. 너도 잘 알잖니? 그 녀석이 고집이 좀 센 거. 그래서 말인데 네가 같이 가 주었으면 하는데. 혹시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별 일은 없을 거에요, 어머님.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그래도 혹시 아니?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데모에 참가했던 녀석이라 도통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니가 같이 가 주면 안 되겠니?”

“그렇게 할게요.”

희연은 강 여사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희연은 여지껏 강 여사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강 여사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맙다. 아, 그리고 이거 받아라.”

강 여사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에요?”

“돈 좀 넣었다. 아르바이트비라고 생각하고 받아.”

“어머님, 저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아버님이 이미 저한테 넉넉하게 돈 주시는데 어떻게 어머님한테 돈을 또 받아요?”

희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지.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아니에요. 전 정말 됐어요. 아르바이트라기 보다는 좋아서 하는 건데.”

희연이 계속해서 거절하자 강 여사도 더는 어쩔 수가 없어 도로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럼 저 그만 가 볼게요. 어머님. 누구 만나기로 해서요.”

“그래.”

희연은 강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희연은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리는 이미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희연은 그 곳으로 가서 앉았다. 종업원이 오자 희연이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갑자기 뭔 바람이 분 거야? 나한테 술을 다 사 주겠다고 하고.”

마리가 물었다.

“사실 너한테 사과할 게 있어서.”

“사과? 뭘?”

“아마 조만간에 우리 사촌 오빠가 너희 집에 찾아갈 거야.”

“니 사촌 오빠가 왜 우리 집엘 찾아와?”

“내가 사촌 오빠한테 니네 집 위치랑 전화번호 가르쳐 줬거든.”

“야! 그런 걸 왜 가르쳐 줘?”

“저 번에 내 동생하고 공연보러 갔을 때 너한테 첫 눈에 반했는지 하도 가르쳐 달라고 사정하는 걸 어떡하냐? 그래서 가르쳐 줄 수 밖에 없었어. 미안해.”

“넌 애가 왜 그렇게 마음이 약하냐?”

희연이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왔다.

“그러니까 이걸로 용서해 줘.”

“이걸로 안 돼.”

“그럼?”

“이번 주 일요일에 나랑 같이 우리 아버지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가자. 보육원에서 하루 동안 요리사로 일해 주면 용서해 줄게.”

“별 수 없군.”

“너 약속한 거야?”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난 약속은 지켜.”

희연은 마리의 비어 있는 잔에 맥주를 따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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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수께끼

 

 

  2층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연은 물을 마시려고 거실로 내려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나연은 인터폰이 있는 곳으로 가서 누가 왔는지 확인했다.

“오빠 왔어요.”

유진이 온 것을 확인한 나연은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 준 후 2층에 있는 희연이의 방으로 올라갔다.

희연은 자기 방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 밖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연상시키듯 빠르고 경쾌하고 시원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집안에 울려 퍼졌고 희연은 점점 더 연주에 몰입해 가고 있었다. 이젠 손놀림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점점 더 빨라져 가고 있었다.

“언니.”

나연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순간 희연은 연주를 멈추며 말했다.

“피아노 칠 때는 방해하지 말랬잖아.”

“누가 왔는지 알면 생각이 바뀔 걸.”

“유진이 왔어?”

희연은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하여튼 언닌 못 말린다니까.”

나연이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방을 나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희연도 피아노 뚜껑을 닫고 거실로 내려 왔다. 유진이 와 있었다.

“왜 연주를 멈춘 거야? 훌륭하던데.”

유진이가 물었다.

“형편없는 연주인 걸, 뭐.”

“형편없긴? 아주 훌륭하던데. 근데 무슨 곡이야?”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야.”

“뭐 마실래?”

“응, 커피.”

“언니, 나도.”

“넌 언니 부려먹을 줄 밖에 모르지.”

희연이 조금 못 마땅한 듯이 말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희연은 커피를 타 가지고 나와서는 유진과 나연이한테 주었다.

“커피 맛이 일품인데. 넌 정말 커피를 잘 탄다니까.”

희연은 유진이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무슨 일이야?”

“일은 무슨?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

“하긴. 저녁은 먹고 왔어?”

“아니. 아직.”

“뭐 하느라 여태껏 저녁도 안 먹었어? 밥은 아직 안했는데 내가 라면이라도 끓여 줄까?”

“됐어. 사실은 너랑 같이 어머니한테 갈려고 온 거야.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하거든.”

“어머님이 나를?”

희연은 조금 놀란 듯 눈이 크게 떠졌다.

“그래, 우리 거기 가서 저녁 먹자. 사실 그럴려고 여지껏 저녁도 안 먹은 거야.”

“그래? 그러고 보니 어머님을 안 찾아 뵌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네. 조금만 기다려. 나 금방 옷 갈아 입고 나올게.”

희연이는 기분 좋게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 옷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가자.”

“그렇게 보여?”

“응.”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이는 유진이의 말대로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가기로 했다.

“나연이 너도 갈래?”

유진이 물었다.

“됐어요. 전 공부해야 돼요.”

유진과 희연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 차 타고 갈까?”

희연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진이에게 물어보았다.

“차는 니 아버지가 가지고 나갔을 거 아냐?”

“내 차 있어.”

희연은 차고 문을 열었다. 차고 안에는 번쩍 번쩍 빛나는 검은색 그랜저가 놓여 있었다.

“이게 니 차야?”

유진은 매우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진이 놀란 이유는 번쩍번쩍 빛나는 새 차 때문이 아니라 딸에게 이런 고급 승용차를 사 주는 아버지와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희연이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 면허증 따니가 아버지께서 한 대 사 주셨어. 근데 왜 그렇게 놀라?”

희연은 의아한 눈으로 유진이를 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단지 학생한테는 좀 과분한 거 같아서.”

“니 말이 맞아. 그냥 지하철 타고 가자.”

희연은 여태까지의 자신의 태도를 180°도 바꾸며 차고 문을 닫았다. 유진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희연이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멍한 눈으로 희연이를 보았다. 소꿉친구로 같이 자라온 아이였는데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다. 유진이는 그 때마다 희연이를 알다가도 모를 아이라고 생각을 했을 뿐 희연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런 이상한 행동에 대해 유진은 희연이한테 묻지도 않았고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희연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였다.

 

 

  강 여사가 경영하는 정통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빈 레스토랑은 잠실역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유진과 희연은 조금 걸은 후 강 여사가 경영하는 빈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희연은 강 여사를 보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희연이, 왔구나.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저기 앉아서 뭐 좀 시켜 먹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강 여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예, 어머님.”

유진이와 희연은 가운데에 있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유진이와 희연이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뭐 먹을래?”

유진이가 물었다.

“너는?”

“난 안심 스테이크 먹을래.”

“난 해산물 스파게티 먹을게.”

“그거 갖고 돼?”

“응.”

웨이터가 오자 희연은 안심 스테이크와 해산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강 여사가 그들의 자리로 왔다.

“어머니, 이제 소원 푸셨어요? 희연이 좀 데려 오라고 그렇게 안달이더니 말이에요.”

“그래, 이 녀석아, 자주 좀 데려오지 않고.”

“죄송해요. 어머님. 제가 자주 찾아 뵈야 하는 건데.”

“아니다. 니가 죄송하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냐? 다 이 녀석이 못나서 그렇지.”

“어머니는 또 저만 구박이에요.”

유진이는 웃음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어머님, 근데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응. 너한테 좀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무슨?”

“이 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던 아가씨가 며칠 전에 그만 뒀거든. 그래서 니가 좀 연주를 해 줬으면 해서.”

“제가요? 하지만 저 이 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니? 넌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피아노 콩쿨대회의 상은 다 휩쓸었잖니? 대학에서도 특기생으로 널 데려가려 했었고. 그 실력이 어디 갔을라고?”

“그래 한 번 연주해 봐. 나도 네 연주 듣고 싶어. 아까 연주한 것도 훌륭하던데.”

유진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청했다.

“그럼 한 번 해 볼게.”

희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 흰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가서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후 두 손을 건반위에 올려 놓았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두 손이 건반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환상적인 음율이 실내를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도 모르게 피아노 연주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연주가 끝나자 실내에 있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연은 답례의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 강 여사와 유진이가 앉아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마에는 아직도 땀이 배어 있었다. 희연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쳤다.

“거 봐라. 다들 좋아하잖니? 이렇게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난 니가 여기서 연주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할게요. 어머님.”

“고맙다.”

“고맙긴요? 이런데서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인걸요.”

“그럼 마저 얘기들 나누거라. 난 또 할 일이 있어서.”

강 여사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넌 정말 음악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거 같아. 근데 난 암만 생각해도 도무지 널 이해를 못 하겠어.”

“응?”

희연은 유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음대에 가지를 않은 거야? 넌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 되고 싶어했잖아?”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또 그 소리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난 피아니스트가 될 재목이 못 된다고.”

희연이는 입가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넌 충분한 재능도 있고 노력도 남달리 하잖아.”

“그래도 난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 지금 수준에 머무르는 게 전부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디?”

“누가 한 소리가 아니라 그냥 내 판단이야. 그리고 난 지금 내가 택한 학과에 만족해. 경영학도 나름대로 재미있거든.”

자신이 택한 학과에 만족한다는 데는 유진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희연이가 피아노를 포기했다고는 하나 희연은 피아노 연주회가 있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피아노 연주회를 보러 갔다. 그처럼 피아노에 열정을 가진 아이가, 더군다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꿈꿔 왔던 아이가 입시를 한 달 남기고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유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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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리의 아픔

 

  울퉁불퉁한 비포장된 길을 달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마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 곳에서 내린 사람은 마리 한 사람뿐이었다. 버스가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자 마리는 바다의 집으로 가는 길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그리 가파른 언덕은 아니었지만 초여름 같은 더위에 마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는 아버지와 친 동생 같은 보육원 아이들을 곧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바다의 집 보육원에는 지금 12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 동안 마리의 아버지인 윤 원장이 운영하는 보육원을 졸업해 나간 아이들도 다수 있었으며 그 중에 한 명은 민이의 아버지인 강 사장이 운영하는 조그만 카센터에서 일하는 성필용이었다.

 

 

  원장실에서 녹차를 마시던 윤 원장은 창문을 통해 마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윤 원장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윤 원장은 마리가 자신의 뒤를 이어 이 곳을 이어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 원장은 마리한테 그런 고생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윤 원장은 마리가 무용가인 어머니의 뒤를 잇기를 바랬다. 그래서 여진과 이혼할 때도 마리를 여진한테 보낸 것이었다. 마리는 무용가인 어머니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 받아 춤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유명한 무용가인 어머니를 두고 있었고 천부적인 그 재능으로 자연히 사람들한테 알려져 고등학생일 때는 CF를 찍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유명세를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무용학과에 가긴 했지만 마리가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곳은 윤 원장이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윤 원장은 마리한테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힘든 일을 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의사는 윤 원장한테 길어야 1년이라고 말했다. 윤 원장은 폐암 말기였다. 1년 후 자신이 떠나게 된다면...... 그 땐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이젠 마리한테 이 아이들을 부탁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윤 원장은 마음이 복잡했다.

마리가 노크를 하고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버지, 저 왔어요.”

“왜 또 왔니? 오지 말라고 했잖니? 이러면 니 어머니가 싫어한다고. 넌 니 어머니 곁에 있어야 돼.”

“어머니가 싫어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어머니는 명성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니 어머니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윤 원장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진 용서하셨는지 몰라도 전 아직도 그 날을 잊을 수 없어요. 전 그럼 나가서 일 할게요.”

마리는 원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마리는 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어머니를 미워했다. 어머니가 가족도 내팽개친 채 명성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마리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의 일도 그랬다. 어머니는 그 때 무용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 인기 때문에 공연도 거의 매일 잡혀 있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계속 피를 토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던 마리는 어머니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극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마리가 극장 관계자한테 들은 말은 공연이 끝나는 대로 전화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그 날 마리는 어머니한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어떻게 명성을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장실을 나온 마리는 아이들 점심 준비를 하기 위해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걸어가다가 식당 옆 프로그램실에서 소녀의 기도라는 피아노곡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프로그램실은 토요일까지는 만들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 수업이 있었지만 일요일은 수업이 없었다. 그 곳을 일요일 날 쓰는 사람은 피아니스트가 꿈인 수아 밖에 없다는 것을 마리는 잘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리의 예상대로 수아가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수아는 누가 온 것 같아 피아노 연주를 멈추고는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문 앞에 사람의 형체가 있는 것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누구에요?”

“나야, 마리 언니.”

마리는 대답을 하고는 피아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수아한테로 걸어갔다.

“언니 왔어요?”

수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에 연주한 곡이 소녀의 기도지? 정말 훌륭하던데.”

“너무 띄우지 마세요. 피아니스트 되려면 아직도 실력이 한참 모자라니까.”

“난 띄우는 거 아니야. 수아, 넌 틀림없이 피아니스트 될 수 있을 거라고. 그건 그렇고 눈은 좀 어때?”

“점점 더 안 보여요. 의사 선생님이 이런 진행속도라면 내년쯤이면 완전히 시력을 잃을 거래요.”

수아가 담담하게 말하는 바람에 마리는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팠다.

수아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진중했다. 그런 수아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더니 이상해졌다.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 아이인데 식사를 할 때마다 음식을 흘리기 시작했고 어딘가에 자꾸 부딪혔다. 마리는 수아가 이상해서 수아한테 어디 아프지 않냐고 물었지만 수아는 괜찮다고만 했다. 하지만 수아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걱정이 된 마리는 수아를 데리고 춘천 시내로 나와 안과로 갔다. 시내에 있는 조그만한 병원이었는데 의사는 망막색소변성증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으로 가서 자세히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큰 병원으로 가라뇨? 위험한 병인가요?”

그 때까지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리가 놀라서 물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서 실명에 이르게 되는 병입니다. 현재로서는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치료법도 없는 병입니다.”

“예?”

마리는 너무나 놀란 상태로 수아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언니, 나 무서워. 나 방금 전에 의사 선생님이 말한 그 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니가 앞을 못 보게 된다니 그게 말이 되니?”

마리는 그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운명은 잔혹했다. 큰 병원에서의 검사결과 수아는 망막색소변성증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었다. 의사는 약으로 진행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을 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혼이 나간 상태로 마리 언니와 같이 병원을 나온 수아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언니 나 어떡해? 이제 어떡하냐고?”

그 날 이후 수아의 중학교 생활은 최악이었다. 심지어 몇 번이나 죽으려고도 했었다. 그렇게 절망 속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을 거 같이 살던 수아는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마리 언니와 같이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이주희 피아노 독주회를 보러 가게 되었다. 그 날의 공연은 수아한테 다시 살 희망을 주었다. 수아는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선율에 사로잡혔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후로 수아는 피나는 연습을 했고 원래부터 음감이 뛰어난 아이여서 수아의 피아노 실력은 급성장했다.

“난 그만 나가볼게. 점심 준비해야 해서.”

마리는 음악실을 나왔다.

 

  여진은 집에 돌아와 있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마리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딸이 어디를 갔는지 여진은 짐작이 갔다. 그렇게 그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귀가 따갑도록 얘기했는데도 딸은 자신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이혼한 남편인 상훈때문이었다. 여진은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무용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여진은 상훈의 재능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했다. 여진이 상훈과 결혼 할 때 상훈은 무명 화가였다. 하지만 여진은 상훈의 재능을 알아차렸다. 그의 재능이라면 틀림없이 국선에 입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선에 입선할 생각으로 그림에 열정을 쏟아 붓던 상훈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림을 포기하고 춘천 외곽지역에서 보육원을 하기 시작했다. 여진은 배신 당했다고 느꼈다. 상훈의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설득을 다 했으나 한 번 마음을 정한 상훈은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그 일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진은 이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아이가 생겨 이혼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마리는 그렇게 금이 가 있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리의 출생으로 상훈과 여진은 부부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유지되던 관계는 마리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의 일로 깨져버렸다. 그 날, 여진은 공연이 있어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극장 관계자가 딸이 전화를 했다고 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있던 여진은 공연에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에, 또 별 일 아닐 거라는 생각에 끝나고 전화를 한다고 딸한테 얘기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진은 공연히 끝난 후 집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신호만 계속 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순간 여진은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남편하고 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찾아 나서려고 했지만 어디서부터 찾아야 될 지도 막막해서 집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1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마리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여진은 급히 물었다.

“아버지가 걱정되긴 하시는 건가요? 하마터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뻔했다고요? 그렇게나 명성이 중요하세요?”

여진은 화가 잔뜩 나 있는 딸의 말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여진은 더욱 더 공연에 매달리며 명성을 쌓아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그것 밖에 남은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1년 후 여진과 상훈은 마리는 여진이 키우기로 하고 합의 이혼했다.

마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 니 아버지 있는 곳에 갔다 오는 거야?”

여진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런 곳엔 더 이상 가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대체 그 병신이나 거지 같은 녀석들이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거야?”

“그 애들은 병신이나 거지가 아니라 제 동생이에요.”

“동생?”

여진은 코웃음을 쳤다.

“너랑 피 한방울 썩이지 않은 애들인데 뭐가 동생이라는 거야? 정 그렇게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 집에서 나가 버려!”

마리는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옷가지를 대충 가방에 넣어가지고는 문을 열고 나왔다. 딸의 행동에 여진은 기가 막혔다.

“뭐 하는 거야?”

“나가라면서요. 그래서 나가는 거에요.”

마리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여진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딸을 잡으려고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다 전남편인 상훈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집을 나온 마리는 잠실역에 있는 공중전화로 희연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방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던 희연은 핸드폰이 울리자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마리.”

“이 시간에 웬 일이야?”

“나 너희 집에서 자면 안 돼?”

“응?”

“가출했어. 어머니랑 싸웠거든.”

희연은 기가 막혔다.

“지금 어디야?”

“잠실역.”

“기다리고 있어. 지금 바로 갈 테니까.”

희연은 통화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는 거실로 내려왔다. 거실에선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어디 가니?”

채 여사가 물었다.

“친구가 잠깐 보자고 해서요. 금방 들어올게요.”

집을 나온 희연은 운전면허를 따자 아버지가 사 준 그랜저를 차고에서 꺼내 타 가지고는 잠실역으로 갔다.

 

 

  희연은 잠실역에 도착했다. 잠실역 5번 출구에 가방을 들고 있는 마리가 보였다. 희연은 차를 몰고 그 곳으로 갔다. 마리는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색 그랜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연이 조수석쪽의 창문을 내리고는 말했다.

“타.”

마리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장관 딸은 역시 다르군. 학생이 그랜저라니? 난 꿈도 못 꿀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가출이라니? 어디 가서 얘기나 좀 하자.”

희연이 다시 악셀레이터를 밟으며 출발했다.

 

 

  희연은 가까운 곳에 있는 삼원빌딩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 1층에는 커피숍이 있었다. 희연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마리와 함께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커피숍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나, 너희 집에서 며칠만 지내게 해 줘. 어머니랑 싸우고 집을 나왔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갈 데가 없더라고.”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희연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우리 부모님은 가출한 여자 받아주지 않을 거야.”

“가출이 아니라 출가인 거야. 가출은 미성년자나 하는 거고 난 성인이라고.”

희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빤히 마리를 보았다. 마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시골에서 친구가 올라왔는데 아직 집을 못 구했으니까 며칠만 지내는 걸로 하면 될 거야.”

“잠실이 시골이냐?”

“우리 아버지는 춘천 시골에 살고 있으니까 내 말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거다.”

“난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

“넌 천주교 신자니까 나처럼 어려운 사람 도와줘야 하는 거야. 그래야 이 다음에 니가 바라는 대로 천국 갈 수 있다고.”

“점점 하는 말하고는...... 커피 다 마시면 일어나자.”

“역시 니가 내 부탁 들어줄 줄 알았어. 넌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애니까.”

커피를 다 마신 후 희연과 마리는 커피숍을 나왔다.

 

 

  희연은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한 장관과 채 여사는 희연이 같이 데리고 온 젊은 아가씨를 보고 놀랐다.

“누구니?”

채 여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학교 무용학과 다니는 제 친구인데 춘천에서 지금 올라왔어요. 집 구할 때까지만 잠깐 제 방에서 같이 지내게 했으면 하는데 그래도 되죠?”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얘기하지 왜 지금에 와서 얘기를 하니? 우리가 그런 부탁도 안 들어줄 거 같니?”

한 장관이 나무라듯 말했다.

“죄송해요.”

“근데 학생은 그럼 그 동안 춘천에서 학교 다닌거야?”

채 여사가 물었다.

“예......뭐.”

“힘들었겠네.”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던 나연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나왔다.

“누가 왔어요?”

나연은 계단으로 내려 오려다 발을 잘못 디뎌서 굴러 떨어졌다.

“다치지 않았니?”

채 여사가 걱정이 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저 몸 하나는 튼튼하니까.”

나연이 일어났다.

“어쩜 저렇게 덤벙대는지......내 동생이야.”

“안녕. 윤마리라고 해.”

“안녕하세요. 한나연이에요. 근데 언니 정말 이쁘네요. 저 보다 이쁜 사람은 처음 봐요.”

“너 보다 이쁜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어.”

“그래도 언니보단 내가 이쁘다고. 유진 오빠도 언니보다 내가 이쁘다고 했어.”

“넌 정말 언제 철들래? 저흰 그만 올라갈게요.”

희연은 부모님한테 인사를 하고는 마리를 데리고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희연이의 방은 넓고 깨끗했으며 오른쪽 벽쪽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으며 그 옆에 놓인 책장에는 어렸을 때부터 희연이 피아노 콩쿨대회에 나가 탄 상장들이 이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마리가 말했다.

“뭐가?”

“왜 음대에 안 간 거야? 난 너 음대 갈 줄 알았어. 그 재능을 썩히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재능은? 별로 잘 치지도 못 하는데.”

“정말로 하는 소리야? 아니면 예의상 하는 소리야?”

“응?”

“어느 쪽이야?”

“그만 자자. 벌써 12시가 넘었다고.”

희연은 대답을 피하며 옷장에서 자기가 입을 잠옷과 여분의 잠옷을 꺼내서 한 벌은 마리에게 건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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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짝사랑

 

  나연은 시계를 보더니 책가방을 챙기고는 도서관을 나왔다. 맑고 따뜻한 토요일의 오후였다. 투명한 햇살이 나연이의 얼굴로 쏟아져 내려 쓰고 있는 금테안경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연은 따가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책가방에서 OB라고 쓰여 있는 야구모자를 꺼내 썼다. 파마를 약하게 해서 웨이브진 나연이의 머리가 모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벚꽃, 교정 안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잎들은 간간히 미풍에 날려 한껏 운치를 더해주며 떨어졌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더없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연은 혼자서 교정의 호숫가를 걸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나연은 이런 날 야구장에 갈까 하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혼자 가는 것은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 그 골치 아픈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연은 집에 가서 낮잠이나 자야 겠다고 생각하며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교정을 나서려는 순간 나연은 앞에 재수 오빠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연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연은 재수오빠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그만 재수한테 거의 다 와 가지고서는 넘어졌다.

“오빠, 안녕하세요.”

나연은 일어나면서 청바지를 털었다.

“안녕. 덤벙이.”

“오빤 덤벙이가 뭐에요?”

“그러게 좀 조심하고 다녀라. 넌 어째 허곤날 넘어지고 그러냐? 그러니까 준석이가 너한테 2% 부족하다는 소리나 해대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내가 어디가 2% 부족하다는 거에요?”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준석이가 한 말이라니까.”

“하여튼 그 바람둥이 오빠는...... 뭐, 바람둥이니까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토요일인데 학교엔 웬 일이야?”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하려고 했는데 날이 좋아서 그런지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공부가 안 되네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근데 오빠 어디 갈 데 있어요?”

“아니. 그건 왜 물어?”

“그럼 저하고 야구나 보러 가지 않을래요?”

“야구?”

재수가 되물었다.

“왜요? 오빠는 야구 싫어해요?”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럼 저하고 야구나 보러 가요. 괜찮죠?”

“그러지. 뭐. 나도 마땅히 할 일도 없는데.”

재수는 순순히 나연이의 청에 응했다.

나연은 속으로 ‘야호’라고 외쳤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은 180도로 바뀌고 말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애인처럼 정답게 주고 받아?”

민이가 재수의 어깨를 탁 쳤다.

“말 조심해라. 난 몰라도 나연이가 어떻게 생각하겠냐?”

“그런가?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너도 나 잘 알잖아? 워낙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타입이라는거.”

민이는 이번에는 순순히 재수의 말을 수긍했다.

“괜찮아요.”

나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지만 속이 좀 씁쓸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필 이럴 때 민이 언니가 나타날 게 뭐람?’ 민이 언니는 재수오빠와 같이 있을 때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근데 둘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민이가 다시 물었다.

“나연이가 야구 보러 가자는데 너도 같이 갈래?”

“그거 좋지. 그러고 보니 오늘 OB 와 LG경기가 있는 것 같던데.”

나연은 민이 언니하고는 같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암만해도 토요일 오후, 최고의 황금시간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써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연이 넌 OB팬인가 보지? OB모자를 쓰고 있는 걸 보니까.”

민이가 물었다.

“네. 언니는요?”

“난 LG팬인데. 그럼 우린 라이벌인가?”

민이는 큰 소리로 웃었다.

‘라이벌이라도 됐으면 좋겠네요. 재수 오빠한테는 언니만 있으니 어디 제가 끼어들 공간이 있어야죠?’

나연은 속으로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 학생은 잠실 야구장을 찾았다. 서울의 라이벌 전이라 그런지 관중석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응원전도 여느 때보다 열띤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시합은 그야말로 명승부였다.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9회말 2사 만루의 상황에서 LG 3번 타자의 끝내기 안타로 경기가 끝나고 말았다.

‘야구도 언니한테 졌네요.’

나연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 학생은 야구장을 나왔다.

햇빛은 많이 수그러져 있었고 거리엔 제법 찬바람이 불었다.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가는 게 어때?”

민이가 말을 꺼냈다.

“넌 무슨 여자애가 또 술타령이냐?”

“넌 마시기 싫으면 그만 둬라. 나연이 하고 마시면 되니까.”

 

  세 사람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근데 돈은 있는 거냐?”

재수는 의심쩍어 하는 눈초리를 하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그게 무슨 걱정이냐? 우리한텐 장관 딸이 있는데.”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나연은 나즈막히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거부감이 담겨 있었다.

민이는 나연이의 딱 부러진 말에 조금 놀랐다.

“미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됐어요. 그만 술이나 시키죠.”

술과 안주가 곧 나왔고 또 다시 술자리에서의 재수와 민이의 말싸움이 이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나연이가 끼어들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 사람이 있는데도 나연은 혼자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나연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세 학생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나왔다. 거리는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재수는 먼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민이는 나연이를 부축한 채 걷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나연은 걸음을 제대로 못 걷고 있었다. 둘은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왔다.

“집에 갈 수 있겠어?”

민이가 물었다.

“걱정 말아요. 갈 수 있으니까.”

나연이는 지갑에서 패스를 꺼냈다.

패스를 개찰구에 넣고 안으로 들어간 후 나연은 민이를 돌아보았다.

“언닌 참 좋겠어요.”

나연은 말을 마치고 나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민이는 나연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멍한 표정을 하며 서 있었다.

나연은 지하철이 들어오자 지하철에 올라탄 후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오늘도 재수 오빠는 민이 언니하고만 있었다. 그 자리에 자신은 없었던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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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대받는 소녀, 소희 

 

 

  김 판사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소희는 알몸인 채로 방바닥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김 판사는 자주 술을 마시고 취해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소희의 몸을 요구했다. 처음엔 소희는 반항했었다. 그러나 매번 김 판사의 승리로 끝났고 소희는 언제부턴가 반항할 힘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옷가지들이 방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지만 소희는 주워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앉아서 흐느낄 뿐이었다. 그래도 한 때는 희망이 있었다. 친 어머니를 찾아가면 되리라는 희망. 그 희망으로 버텼었는데......

소희는 배다른 오빠에게 애원을 하고 또 애원을 해서 기어코 어린 자기만을 남겨두고 떠난 어머니를 찾아냈었다. 어머니는 대궐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에게 소희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소희를 모른다고 하며 냉정하게 잡아뗐다.

그 날 소희는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증오스러웠고, 정말 죽고 싶은 생각밖에 달리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방에 있는 창턱에 걸터앉았다. 2층에서 밑을 보니 그야말로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소희는 차마 뛰어내리지를 못했다. 자살이란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독한 마음을 품기에는 소희는 너무 여린 아이였다. 하는 수 없이 소희는 다시 창턱에서 내려왔다. 그 후로 소희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성폭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듯이 살아오고 있었다.

 

 

재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다행이네.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으니.’

재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려고 하자 소희의 가느다란 흐느낌이 재수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래서 집에 오는 건 싫다고. 정말 싫단 말이야!’

재수는 마음속으로 세차게 소리치고 나서 소희의 방으로 걸어갔다.

재수는 소희의 방문을 열었다. 소희가 알몸인 채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었고, 옷가지들은 방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오빠 왔어?”

소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또, 또 그런 거야? 아버지 어딨어?”

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정말 아버지에게 대들고 싶었다.

“오빠, 그러지마. 부탁이야.”

소희가 문을 나서려는 재수를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황급히 불러세웠다.

재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나 오빠 마음 잘 알아.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잖아. 그래봤자 오히려 오빠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야.”

재수는 소희의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나선다고 달라질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실이 더욱 더 재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만 옷 입어.”

재수가 마음을 돌리며 말했다.

“응. 오빠도 가서 자. 술 마신 거 같은데.”

재수는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집을 나가버린 새 어머니, 딸을 학대하는 아버지, 그리고 학대를 받는 이복 여동생, 재수는 이런 가족이 싫었다. 또한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은 더욱 싫었다. 재수는 술을 마시기를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을 것 같았다. 재수는 눈을 감았다. 술김이 올라와 어서 빨리 잠이 들고 싶을 뿐 가족에 대한 생각은 더는 정말 하고 싶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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