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불길한 예감
“똑똑.”
희연이 노크를 하고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희연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일을 하고 있던 박 회장은 희연이 온 것을 보고 무척 반가워 했다.
“니가 어쩐 일이냐?”
“아버님, 아직 점심 안 드셨죠? 그저께 제가 부탁드린 일 해 주신 답례로 유부초밥 좀 싸 가지고 왔어요.”
“뭘 그런 일을 가지고? 너나 나연이나 다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박 회장은 여비서를 불러 가지고는 쟈스민차 두 잔을 내 오라고 한 후 희연이랑 같이 중앙에 놓인 소파에 가서 앉았다.
“드셔 보세요.”
희연이 가방에 싸 가지고 온 유부초밥을 꺼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박 회장은 젓가락으로 유부초밥을 하나 집어 입 속에 넣었다.
“드실만 하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아마 니가 우리 집사람 옆집에 가게 차리면 우리 집사람 가게는 며칠 못 가서 망할 거다.”
“아버님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여비서가 쟈스민차를 가지고 와서 두 사람 앞에 내려 놓았다.
“이거 하나 먹어보지 그래?”
박 회장은 여비서한테 유부초밥 하나를 건네 주었고 여비서는 하나 먹어보더니 그 맛에 감탄했다.
“이거 아가씨가 한 거에요?”
“예. 어때요? 괜찮아요?”
“이렇게 맛있는 유부초밥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걸요. 아가씨는 도대체 못하는 게 뭐에요?”
“너무 그렇게 비행기 띄우지 말아요. 저도 못하는 거 많으니까. 아버님, 저 그럼 가 볼게요. 수업 있어서요.”
희연은 박 회장한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서 회장실을 나왔다.
풍물패 연습이 끝난 후 유진, 재수, 준석, 민이, 희연 다섯 명의 학생은 학교 앞에 있는 커피숍에 모였다. 기장인 민이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였다.
“깡패, 왜 모이자고 한 거야?”
재수가 말했다.
“넌 기장한테 그런 식으로 밖에 말 못해. 그저께 무단 땡땡이 친 것도 그냥 넘어가 주었더니만.”
“또 시작이군.”
준석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시작은 뭐가 시작이야?”
“하려는 얘기가 뭐야?”
희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단풍도 들고 그랬는데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북한산에 등산 가자고.”
“난 찬성.”
유진이가 말했다.
“나도.”
유진이가 간다고 하자 희연이도 동의했다.
“나도 갈게.”
준석이 말했다.
“그럼 다 가기로 한 거지.”
“야, 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재수가 말했다.
“너 따윈 안 와도 상관없어.”
“내가 왜 안 가? 나도 갈 거야.”
“으이그, 진짜 저 머저리를......”
“몇 시에 만날까?”
희연이가 물었다.
“10시에 북한산 입구에서 만나자.”
다섯 명의 학생은 그렇게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커피숍을 나왔다. 거리는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여서 네온싸인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진아, 나 오늘 너희 집에 가서 자면 안 되냐?”
재수가 물었다.
“어려울 거 없지.”
“넌 또 남의 집에서 잘 생각이냐?”
민이가 쏘아붙였다.
“걱정마라. 너한테 재워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
갈림길에서 준석과 민이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고 유진, 재수, 희연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유진, 재수, 희연 세 사람은 압구정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왔다. 늦은 시간이라 주위는 어두컴컴했으며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량도 별로 없었다. 세 학생은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근데, 너흰 언제부터 사귄 거냐?”
재수가 물었다.
“사귀다니? 무슨 말이야?”
유진이가 되물었다.
“야, 시치미 뗄 걸 떼라. 너희 둘이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다고.”
우린 친구야. 소꿉친구일 뿐이라고. 난 좋아하는 여자 따로 있어.”
유진은 가슴속에 마음에 두고 있는 혜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순간 희연이의 얼굴에 놀란 빛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유진도 재수도 그것을 눈치채진 못했다.
“그래, 그거 의외인데. 누구야? 니가 좋아하는 여자?”
“재수야, 저기 말야.”
희연이는 유진이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 재수한테 일부러 말을 걸었다.
“응? 왜?”
“너 왜 집에 잘 안 들어 가? 집에 무슨 일 있는 거야?”
“희연이, 너 나한테 관심 있냐?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면 다친다.”
“그런 게 아니라 민이가 궁금해 해서.”
“민이?”
재수가 놀라며 물었다.
“응, 니가 자꾸 집에 안 들어가는 게 조금 걱정되나 봐.”
“하여튼 그 깡패는 왜 사사건건 남의 사생활에 간섭이야.”
세 사람이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는 사이 갈림길이 나타났다. 희연은 두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 자기 집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 유진이가 한 말,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말이 자꾸 귓속에서 맴돌았다. 두려웠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속으로 수없이 되뇌이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유진이가 자신을 여자로 봐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유진이 집에 도착한 유진과 재수는 거실에 앉아 쥬스를 마시고 있었다. 재수는 쥬스를 마시면서도 연신 거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자꾸 보냐?”
유진이가 물었다.
“역시 재벌이 좋긴 좋구나. 이렇게 넓은 데서 살고 말이야.”
“좋긴 뭐가 좋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세 사람뿐이어서 이렇게 넓은 데는 무섭기만 하다구. 내 방으로 가자.”
유진이가 쥬스를 다 마시고 나서 말했다.
두 사람은 유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재수는 유진이의 방이 너무나 넓어서 또 한 번 놀랐다. 그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책상위엔 언제나 그렇듯이 원고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이건 니 방 하나가 우리 집 거실만 한데. 야, 이런데 살면서 그렇게 짠돌이 행세 할 건 또 뭐냐?”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냐? 아버진 나한테 돈을 별로 안 주셔. 나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거든.”
“왜?”
“우리집은 천주교 집안인데 난 성당 같은데 안 나가거든. 게다가 경영학과 가라고 했는데 소설가 되고 싶다고 영문과에 가 가지고.”
“니 아버지가 널 별로 안 좋아할 만도 하군. 이게 니가 지금 쓰는 글이야?”
재수는 책상위에 수북히 쌓인 원고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원고지 맨 첫 장에는 ‘비창’이라는 제목이 쓰여져 있었다.
“응.”
“내가 좀 봐도 돼?”
“지금은 안 돼. 다 쓰고 나면 보여줄게.”
“야, 그 때까지 언제 기다리냐?”
“어쨌든 안 돼. 난 다 쓰지 않은 글은 절대로 남한테 안 보여주는 주의거든.”
“그건 무슨 주의냐? 그런 주의는 난생 처음 들어본다. 하여튼 글 쓰는 인간들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니까.”
“늦었는데 그만 자자.”
유진은 잠옷으로 갈아 입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