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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재수의 눈물

 

 

  방학이어서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유진은 재수랑 운동장에 있는 농구코트에서 1:1 농구를 하고 있었다. 15점 내기였는데 재수가 10 : 7로 리드를 하고 있었다. 공격권을 갖고 있던 재수가 드리볼을 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재수의 삐삐가 울렸다. 재수는 잠깐 타임을 하고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 보았다. 소희한테서 온 문자메시지였는데 지금 자기가 공부를 하고 있는 미용학원으로 와 달라는 문자였다.

“이 경기는 내가 진 걸로 하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디 갈 데가 있거든. 밥은 내가 나중에 살게.”

재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농구공을 유진이한테 던져 주고 자리를 떠났다. 얼떨결에 혼자 남게 된 유진은 혼자서 천천히 농구를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나연은 저녁시간이 되어 저녁을 먹으려고 도서관을 나왔다. 학교 밖에 있는 음식점으로 가려고 교정을 걸어가던 나연은 운동장에 있는 농구코트에서 유진 오빠 혼자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연은 유진 오빠한테로 걸어갔다.

“오빤 왜 혼자 농구를 해요?”

“방금 전까지 재수랑 농구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있다면서 가 버렸어.”

“또요?”

“또라니?”

“저 번에도 민이 언니랑 저랑 재수 오빠랑 농구경기 보러 가려고 차 타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니까요.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글쎄.”

“아, 알았다. 틀림없이 여자 생긴 거에요.”

“응?”

“여자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요. 원래 모든 일의 발단은 다 여자인 거라고요. 여자가 언제나 문제라니까요.”

“그런 넌 여자 아니냐? 그래서 허곤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 거야?”

“오빤 누가 사고만 치고 다닌다는 거에요? 전요. 무결점의 여자라고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농구 한 게임 하는 거 어때? 봐 주면서 할게.”

유진은 갖고 있던 농구공을 가볍게 던져서 나연이한테 주었다.

“전 농구는 별로에요. 야구 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줄게요.”

나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장난삼아 농구공을 림으로 던졌다. 그런데 던진 위치가 3점슛 밖 라인이었는데 공이 보기좋게 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진이 놀란 얼굴로 나연이를 보았다.

“넌 정말 미스테리다.”

“어쩌다 한 번 들어간 거겠죠.”

나연은 공을 가지고 방금 전 던졌던 위치로 와서 다시 장난삼아 공을 던졌다. 그런데 공이 또 보기 좋게 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또 들어갔네.”

“이 참에 야구에서 농구로 갈아타는 게 어떠냐?”

유진이 놀라워 하며 말했다.

“오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한 번 야구팬은 죽을 때까지 야구 팬인거라고요. 전 지조 있는 여자라니까요. 근데 오빠 밥 먹었어요?”

“아니. 아직.”

“그럼 우리 짬뽕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아니. 내가 살게. 짬뽕 사 줄 돈은 있으니까. 공 갖다 놓고 올게.”

유진은 학과실에 농구공을 갖다 놓고 내려왔다.

 

 

  강의가 다 끝난 후 소희가 학원을 나왔다. 소희는 재수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일 있니?”

재수는 소희가 부른 이유가 혹시 소희한테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아니. 저 번에 오빠가 나랑 같이 사는 아저씨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 아저씨 만나게 해 줄려고. 가자.”

재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신이 쓸 데 없는 걱정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소희는 그 어느 때 보다 빛나게 살고 있었다.

 

 

  소희는 재수와 함께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왔다. 승훈 아저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재수는 방 안으로 들어갔고 소희가 저녁을 준비했다. 재수는 방을 둘러 보았다. 작은 방이었지만 소희의 정성이 묻어나 있는 게 보였다. 재수는 소희를 구해 준 그 남자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벨이 울려 저녁을 준비하던 소희는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주었다. 소희가 예상했던 대로 승훈 아저씨였다.

“오빠가 왔어요.”

“응?”

“저 번에 우리 오빠 한 번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응.”

승훈은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재수와 승훈은 서로 인사를 했다. 소희가 저녁상을 차린 후 상을 방 한가운데 놓았다. 세 사람은 같이 식사를 했다. 소희는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재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소희를 구해 준 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시간이 많이 늦어져셔 재수는 집을 나왔다. 재수는 버스를 타고 아버지와 자신이 살고 있는 2층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에선 김 판사가 안주도 없이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김 판사는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그 년은 찾았어?”

재수는 김 판사한테로 다가갔다.

“아버지, 이제 그만 하세요. 소희는 지금 잘 지낸다고요.”

“잘 지낸다니? 그 년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안다는 거야?”

순간 재수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야? 그 년이 지금 있는 데가?”

김 판사는 재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몰라요!”

재수는 아버지의 팔을 뿌리치며 일어나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그 때 뒤에서 아버지의 술주정이 들렸다.

“넌 아무 것도 몰라. 그 년도 그 년의 어머니도 다 맞아도 싼 년들이라고!”

재수는 모른 척 하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잊은 채 잠들고 싶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재수한테 가족이란 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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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 수업

 

 

  유진은 ㅅ 마을의 참빛 야학교를 찾아왔다. 손학수 교장은 그 곳에서 일하는 선생님들한테 유진이를 소개시켜 준 후 유진이를 학생들이 있는 교실로 데리고 갔다. 학생들은 처음 보는 유진이를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 교장이 학생들한테 유진이를 새로 온 영어 선생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유진은 자신을 소개한 후 첫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유진이의 수업을 들었다. 1시간이 지난 후 유진은 수업을 끝냈다. 유진의 첫 수업을 지켜 본 손 교장은 유진이의 수업에 대만족했다. 김 신부가 정말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유진은 야학교를 나왔다. 늦은 시간이어서 거리는 이미 어두워졌고 길가엔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유진은 그 가로등이 비쳐주는 좁은 길을 걸어 내려와 큰 길로 접어들었는데 검은 색 그랜저 한 대가 유진이의 앞에 와서 섰다. 희연은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타.”

“어떻게 된 거야?”

“너 마중 나왔어.”

“응?”

“안 탈 거야?”

유진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뭐 하러 왔어?”

“내가 온 게 싫어?”

“그런 게 아니라 괜히 니 시간 뺐는 거 같아서 그렇지.”

“나 별로 할 일도 없는데, 뭐.”

희연은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수업은 어땠어? 할 만해?”

“응. 오래 전부터 한 번 해 보고 싶었던 일이니까. 신부님한테 고맙지, 뭐.”

“그럼 앞으로 매주 일요일 날 성당 나오는 게 어때?”

“전도는 사양이야.”

“그럼 저녁은?”

“응?”

“너 아직 저녁도 안 먹었을 거 아냐?”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나야 원래 다 알지. 원래 누나는 동생일은 모르는 게 없는 법이야.”

“누나는? 나 보다 석달이나 늦게 태어났으면서.”

“어쨌든 어디 가서 저녁 먹고 집에 가는 데 이의 없지?”

“그래. 저녁이나 먹고 가자.”

도로로 빠져 나온 희연은 이미 봐 두었던 근사한 한식당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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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처음 가 본 놀이공원

 

 

  민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재수랑 1:1 내기 농구를 하고 있었다. 민이가 3점 슛 바깥 라인에서 던진 공이 그대로 보기 좋게 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또 민이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밥 사. 머저리.”

“별 수 없지. 내기는 내기니까.”

재수는 깨끗이 패배를 시인했다.

 

 

  그 시각 소희는 승훈 아저씨랑 서울랜드로 놀러 왔다. 소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와 본 것이었다. 가족 또는 친구, 연인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소희는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승훈은 소희를 데리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곳으로 왔다. 하늘을 달리는 롤러코스터를 보니 소희는 덜컥 겁이 났다.

“이걸 타자고요?”

“응. 재밌어.”

“아저씨 혼자 타세요. 전 무서워서. 여기서 기다릴게요.”

“혼자 무슨 재미로 타? 걱정 마.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소희는 여전히 겁이 났지만 승훈 아저씨의 말에 조금 용기가 나서 승훈 아저씨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승훈이 표를 끊었고 두 사람은 길게 늘어선 줄 뒤로 가서 섰다. 롤러코스터가 세 번 돌고 나서야 승훈과 소희가 탈 차례가 되었다. 둘은 앞좌석에 앉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탑승하자 롤러코스터는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다. 정점에 다다른 롤러코스터가 급히 낙하하자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소희는 무서워서 눈을 감았다. 롤러코스터는 엄청난 속도로 공중에서 곡예를 하며 철로를 달리더니 금새 종착점에 도착했다. 승훈과 소희는 안전벨트를 풀고 롤러코스터에서 내렸다.

“재밌었어?”

“다신 안 탈래요.”

소희는 방금 전 정말 무서웠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무서웠던 만큼의 스릴 또한 느꼈기에 다시 한 번 타고 싶다는 모순된 감정도 느꼈다.

승훈과 소희는 유령의 집에도 가고 서울랜드의 곳곳을 돌아 본 후 서울랜드를 빠져 나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둘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오자 승훈이 된장찌개 2인분을 주문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 봤어?”

“미용사가 되고 싶어요.”

“미용사?”

“예. 왜요? 아저씨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냐. 난 니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기뻐. 그럼 학원에도 등록하고 해야지. 내가 도와 줄게.”

“고마워요. 아저씨.”

갑자기 소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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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합격자 발표날

 

 

  1994년은 저물고 1995년의 해가 밝았다. ㄱ대에서는 신입생 합격자를 발표하고 있었다. 민이와 민규, 혜진은 합격자 발표 확인을 하느라고 ㄱ대에 왔다. 천문학과 합격자가 적혀 있는 대자보를 보던 혜진은 강민규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 있네.”

혜진이 민규의 이름이 적혀있는 곳을 가리켰다. 남매는 혜진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민규의 수험번호와 이름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민규의 얼굴이 환해졌다.

“축하해. 축하하는 의미로 점심은 내가 살게.”

혜진이 말했다.

“니가 돈이 어딨다고 니가 산다 그래? 내가 낼게.”

“어제 과외비 받았어.”

“과외비라니? 벌써 과외자리 구했어?”

“응.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혜진이 밝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세 사람은 학교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민규가 합격자 확인 발표를 확인하던 반대편에는 의예과 신입생 합격자가 붙어 있었다. 파란색 잠바에 청바지를 입은 곱상한 외모의 진수영은 그 곳에서 혼자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수험번호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수영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어 의대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수영은 한 번도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수영은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서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니?”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머니인 정미정이었다. 미정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합격했어요.”

수영은 신통치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합격을 했다면서 목소리가 왜 그래? 하나도 기쁘지 않은 거 같구나.”

미정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에요. 저 내려갈게요.”

수영은 충주로 내려가기 위해 ㄱ대를 나왔다.

 

 

  민규, 민이, 혜진 세 사람은 학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밥 먹고 우리 어디 놀러 갈까?”

혜진이 말했다.

“응? 니가 웬 일이냐? 놀러 가자는 얘기를 다 하고.”

민이가 놀라며 물었다.

“민규 합격했잖아? 민규는 어디 놀러 가고 싶은 데 없어?”

“그럼 우리 민속촌 가요.”

“민속촌?”

“왜요? 누나는 싫어요?”

“아냐. 그럼 밥 먹고 나서 민속촌 가자.”

세 사람은 밥을 다 먹고 나온 후 민속촌으로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민속촌에 놀러 온 혜진, 민이, 민규 세 사람은 주위를 구경하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외국인 남자 한 명이 다가와서 그들한테 영어로 말을 묻었다. 혜진과 그 외국인 남자는 잠시 동안 영어로 얘기했고 외국인 남자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역시 누나는 영어를 잘하는군요. 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던데.”

“난 별로 잘 하는 거 아냐. 우리과에 영어 진짜 잘하는 애 있어.”

“유진이 말하는 거야? 너 유진이 좋아하지? 유진이도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혜진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누구에요? 우리 혜진이 누나 건드리려고 하는 게.”

민규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꼴통아.”

민이가 민규한테 꿀밤을 먹였다.

“아야! 자꾸 이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니가 가만있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가정 폭력범으로 고소할 거야.”

“뭐?”

민이는 또 다시 민규한테 꿀밤을 먹이려 했고 민규는 재빨리 혜진이의 등 뒤로 숨었다.

“민아, 그만해.”

혜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혜진이 너 때문에 참는다.”

민이는 분을 삭이며 말했다.

 

 

  서울 강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떠난 지 2시간 후에 수영은 충주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미정은 의예과에 합격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전혀 기뻐하지 않는 수영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미정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들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남편이라는 것을.

한 시간 후 의과대학 교수인 수영의 아버지인 진중호가 집에 도착했다. 중호는 ㄱ대 의대에 합격한 아들이 자랑스러워 1층에 있는 수영의 방으로 가 방문을 열었다. 수영은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잘 했다. 난 네가 붙을 줄 알았어. 그리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건 염려하지 말고. 내가 잘 아는 친구한테 니가 살 데 좀 알아 봐 달라고 했더니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해 주겠다는구나. 어차피 넓은 집에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하면서. 다음 주 중에 올라가면 될 거야.”

“예.”

수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영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민속촌에 놀러 왔던 혜진, 민이, 민규, 세 사람은 민속촌을 나왔다.

“재밌었어?”

혜진이 민규한테 물었다.

“예. 누나, 우리 다음에도 또 놀러 가요.”

“그래.”

“어디 가서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민이가 말했다. 세 사람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걸어갔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수영은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리 속에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날라 다녔다. 사실 수영은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뭐 딱히 다른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영은 도대체 자신은 왜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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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크리스마스 이브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려는지 눈은 부잣집 마을에도 가난한 마을에도 공평하게 내리고 있었다.그리고 거리 곳곳에는 구세군이 울리는 자선냄비 종소리와 캐롤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혜진은 마당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있었다.

“웬 트리냐?”

일을 나갔던 순영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 있는 나무를 보고 물었다.

“크리스마스잖아요.”

“크리스마스가 우리들하고 무슨 상관 있다고?”

“우리가 크리스마스 기분 좀 낸다고 나쁠 건 없잖아요.”

“응?”

“할아버지 들어오시면 우리 같이 저녁 먹어요. 제가 맛있는 닭도리탕 해 놨거든요.”

“내가 껴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희한테 아주 잘 해 주시면서.”

  크리스마스 이브여선지 상욱은 일찍 집에 들어왔다. 상욱은 손에 이쁘게 포장된 네모난 상자를 들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제 오세요?”

부엌에서 연탄불을 갈고 나오던 순영이 물었다.

“예.”

“그건 뭐에요?”

“크리스마스고 해서 케이크 하나 샀어요. 혜진이랑 같이 먹을라고. 아주머니도 같이 드세요.”

“전 됐어요.”

“그러지 말고 같이 드세요.”

집주인인 순영은 마지 못해서 할아버지의 청에 응했다. 세 사람은 혜진이네 방에서 케이크를 먹은 후 혜진이가 해 놓은 닭도리탕을 저녁으로 먹었다. 세 사람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 밤하늘 가난한 달동네에 세워진 교회에서는 신도들의 예배소리와 캐롤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1994년의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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