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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정치사
노중국 지음 / 일조각 / 2018년 12월
평점 :
지루하고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생각보다 쉽고 재밌게, 마치 소설책 읽듯 쭉 읽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람들 사는 이야기라 그런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읽을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백제의 기원을 밝히는 초반부가 복잡해 다소 어려웠다.
저자는 기원전 3세기 무렵 한인과 예인이 한강 유역에 정착해 초기 철기문화를 만들었고 이들이 바로 백제 주민의 원류라고 본다.
한인은 고조선과 삼한 사람들이고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인데 이들이 웅진과 사비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기존 선주민들까지 합해져 하나의 백제인으로 융합됐다는 것이다.
다른 책에서는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익산으로 온 것을 하나의 전승에 불과하고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사실로 추정한다.
연나라 유민인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와 결국 기자 조선을 무너뜨린 것처럼, 고조선 왕실의 유민들이 마한으로 내려와 기존에 존재하던 진국을 해체시키고 다시 연맹체가 성립됐다는 것이다.
또 고조선이 역계경이 2000호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진국이 멸망했다고도 한다.
진국 세력은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로 진출해 거기 있던 선주민들과 합해져 국을 형성하고 그들이 이룬 게 바로 진한연맹체라고 본다.
진한을 옛 진국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그런 이유라는 것이다.
단순히 역사 기록 외에 고고학적 증거가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기술이 없어 아쉽다.
저자는 백제 선조들이 부여 왕실의 후예라고 했는데, 다른 책에서는 백제가 한강 유역의 토착민들이 세운 나라이고 대외적으로 오래된 선조를 끌어 들이기 위해 부여를 조상이라고 선전했다는 주장도 들었다.
마치 신라가 김일제를 조상으로 내세운 것처럼 일종의 숭조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풍납토성의 고고학적 유물들이 3세기 무렵이기 때문에 삼국사기 기록처럼 기원전 1세기에 백제가 건국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 시작은 작은 읍에서 비롯됐고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이 3세기일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역사서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이 합쳐져야 입증이 될 것 같다.
신라가 왜 박석김이 돌아가면서 왕위를 이었나 신기했는데, 저자는 이것이 연맹체적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수장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백제에서도 초기 왕들은 4대 기루왕까지 해씨였고, 온조의 형제인 비류계였다고 본다.
그 후 온조계인 초고왕으로 계통이 이어지면서 부여씨가 왕권을 독점했다고 한다.
형제 설화는 이 두 세력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태조왕 앞까지는 해씨였고 태조왕부터 고씨로 왕실 세력이 바뀌었다고 한다.
단순한 추론인지 물적 증거가 있는 주장인지 궁금하다.
저자의 주장들
1) 구이신왕의 어머니 팔수부인은 왜계 귀족일 것이다.
2)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명이인일 것이다. 그러므로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의 정복활동은 4세기 근초고왕 때 이루어진 것이 맞다. 영산강 유역을 이 때 정복했을 것이다. (백제의 영산강 정복이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옹관묘의 존재나, 목만치와 목협만치가 동일인일 것이라는 주장을 들어 사비 천도 후에나 이루어졌을 거란 반대 주장도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천황이 목라근자에게 출정을 명하고 임나가라 지역을 정복한 후 식읍으로 내렸다고 하는데, 저자는 이 주체를 근초고왕으로 해석한다. 특별한 물적 증거 없이 주체를 바꿔도 되는 것일까?
3)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다.
4) 무왕은 법왕이 아들이 아니고 익산에 살던 방계 왕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자왕의 모후가 되는 첫 아내는 신분이 낮았을 것이고, 두 번째 왕비가 선화공주이며, 사리봉영기에 나오는 사택 왕비는 세 번째 왕후일 것이다. (저자의 단순 추론이라 수긍이 안 간다)
<오류>
331p
신라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원손으로서 신라 하대에 와서 석씨로서 왕이 된 첫 임금이다.
-> 신덕왕은 석씨가 아니라 박씨다.
470p
양원왕 말년에 중부인의 소생을 지지하는 추군 세력과 소부인의 소생을 지지하는 세군 세력이
-> 양원왕이 아니라 안원왕 말년의 일이다.
535p
효명제는 낙양으로 천도 후 518년에 북위 최대의 황실사찰인 영녕사를 다시 조영하면서
-> 효명제가 아니라 효문제 때 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