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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 태조에서 순종까지, 왕의 사망 일기
정승호.김수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5월
평점 :
제목은 아주 흥미롭고 좋은데 역시나 컨텐츠가 부족하다.
비교적 괜찮은 책들을 잘 고르는데, 이번에는 실패다.
저자 약력을 안 본 게 실책인 듯.
의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이라 사료에 나온 질병 관련 기사와 일반적인 의학 상식을 1:1로 매칭하니 깊이있는 분석이 나올 수가 없는 것 같다.
사실 사료 부족으로 왕들의 사망 원인을 정확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이집트 미이라처럼 시신을 직접 조사한다면야 모를까 현대의학 체계와도 전혀 다른 당시 질병 기록, 더군다나 양도 매우 부족한데 무슨 결론이 날 수 있을까.
단순히 왕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개연성을 추론하는데 그치지 않고 저자만의 독특한 평가를 덧붙여 더 공감이 어려웠다.
이를테면 태종과 세종, 세조로 이어지는 왕들이 왕위 찬탈을 했기 때문에 매우 야비하고 잔인하며 정상적이지 않다는 식의 평가?
태종과 세조는 정변을 일으켰으니 혹시 유교적 포폄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으나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남긴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까지 야비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이 책에서 처음 봤다.
또 태조가 아들에게 쫓겨나지 않았다면 영락제의 반란으로 어수선했던 중원을 공격해 천자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홧병이 났다는데 정말 이런 가정법도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새로 세운 나라의 국명까지 황제께서 정해 달라고 사신을 보냈던 이성계가 중원의 황제를 꿈꾸다니?
저자는 어쩌다 이런 논리적 비약을 갖게 된 건지 궁금하다.
역사 속 인물들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도 안 되는 거지만, 반대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요즘 관점에서 재해석 하는 것도 잘못된 역사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의 건국자들이 갖고 있던 사대주의 정책을 요즘 개념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 정도로 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시각이다.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조선의 왕들이 종기 때문에 고생하고 죽기까지 했다는 점에 관심이 생긴다.
위생 상태가 안 좋은 시절이고 항생제가 없으니 감염으로 인한 죽음이 흔하긴 했겠으나, 면역력이 정상인 젊은 사람이 단순히 피부 감염 정도로 죽지는 않을텐데 기저 질환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왕이 모든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이니 오늘날의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긴 했겠지만 스트레스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이 무려 67세까지 살았고 역시 나라를 잃은 고종도 68세까지 살았으며 아들에게 쫓겨난 태조도 74세로 천수를 누렸다.
수명은 확실히 유전적 요인이 큰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201p
인조는 죽기 전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저주를 걸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성리학은 질병의 원인을 저주나 사기에서 찾는 행태를 배격하고 사람의 마음에서 찾는다. 치료도 마음의 근본을 돌아보는 수양론에 무게를 둔다. 1633년 예조참의 이준은 인조의 저주 타령에 강력한 제동을 걸면서 왕의 병이 국상을 치를 때 과로한 탓이며 이것을 치료하려면 의원들의 처방과 성리학적 수행을 제대로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220p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농사에 어려움을 겪자 현종은 자책하면서 "차라리 죽어버려 이런 말을 안 들었으면 한다"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한다.
(최고 권력을 누리는 것은 좋았겠지만 왕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집중되어 있으니 정말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 같다. 오죽하면 저런 말을 했을까!)
253p
영조는 숙종만큼이나 불같은 성격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이고 눈물도 많았다. 게다가 신하들에게 대놓고 욕을 퍼붓기도 했다. 심지어 종묘보다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을 먼저 가서는 안 된다고 신하들이 말하자. 한겨울에 연못에 발을 담그고 이대로 빠져죽겠다고 울기도 했다. 그래서 찬 음식이나 찬 약을 먹어 그렇다는 자가 진단과 달리 영조 역시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에 시달렸다.
<오류>
134p
야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종과 폐비 신씨는 상당한 미남과 미녀였으므로 연산군도 남다른 용모를 가졌을 것이다.
-> 폐비 신씨가 아니라 윤씨이다.
183p
공빈 김씨가 죽었을 때 광해군은 겨우 두 돌을 넘긴 상태였다. 선조는 매우 슬퍼하며 한동안 후궁들을 일절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보다 33세나 어린 인목왕후 김씨를 총애하고 공빈 김씨에 대한 애착을 접으면서 광해군의 처지는 천애 고아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 후 광해군은 장성해 한성판윤 유자신의 딸과 혼인했다.
->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총애를 받은 이는 인빈 김씨이고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세자 책봉을 받고 자식까지 낳은 후에 간택이 됐다.
195p
정원군은 11세이던 1590년에 두 살 많은 인헌왕후 구씨와 결혼해 16세 때 인종을 얻었다.
-> 인종이 아니라 인조를 얻었다.
220p
조선 왕 중에서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은 현종, 단종, 경종, 순종 4명뿐이었다. 단종은 너무 어려서~
-> 단종은 왕비 정순왕후를 간택할 때 삼간택에 들었던 두 명의 여인도 후궁으로 같이 들였다.
250p
딸 7명 중에서도 영조보다 오래 산 딸은 3명이었다.
-> 영조의 딸은 살아서 봉작을 받은 이만 해도 8명이다.
260p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제거한 세력은 자신의 외가인 남양 홍씨 홍인한과
-> 남양 홍씨가 아니라 풍산 홍씨이다.
271p
순조는 왕실의 큰 어른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5년 동안 꼭두각시 왕 노릇을 하다가
-> 순조는 11세 때 즉위하여 4년 간 수렴 청정을 받았고 15세 때부터 친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