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미래의 어떤 기술이 우리의 삶을 좀더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건 우리로 하여금 그 기술이 탄생하기 이전의 삶을 다시 한번 더 충실히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P51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자기의 삶에서 그 어떤 것도 돌이켜 추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현재를 지각할 수도 없고, 기억이란 재료를 혼합해 내일을 꿈꿀 수도 없을 것입니다. 
- P51

주체가 곧 타자가 되며 모든 타자가 주체가 되는 의미론의 구조는 삶과 죽음 속에서 순환하는차이들의 운동으로 나아간다. 
- P61

중요한 것은 서사의 선형적인 발달이 아니라 주체이자 타자인 ‘나‘가 세계의 작은 부분이자 입자로 유영하는 흐름 그 자체다. 인간과 삶, 우주가 횡단적인 물질로 구성되고 연결된다면 소설 또한 횡단적인 시공간 다양체로 드러날 것이다.
- P63

삶은 죽음으로 구성되며 죽음 또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이 반복은 실상 무수한 차이들의 나타남이며 인과론의 저편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를애도하는 일은 ‘나‘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너‘와 만나는 일이 되고, 그러한 ‘너‘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사랑하는 일로 자연히 나아가게 된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히 여겨주시되, 과히 얽매이지는 마십시오.

- P83

큰물을 두 번 건너고 살아 돌아왔으니,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접하지 않은 일이 없지요. 
- P88

전쟁을 겪고,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덕이 있는 사람도 평온치 못한 죽음을 맞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승에는 중생이 이해할 만한 저울 같은 게 없지요. 
- P89

독살인 게 들켜도 상관없다면 격한 독을을 것이고, 독살인 것을 숨기려 했다면 굳이 글씨를 남길 까닭이 없었다. 이 어긋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114

하지만 나도 잃은 과거에 잠겨버리는 쪽을 택했네. 앞서 이끌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멈춰 서면, 뒤따르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방향을 바꿔 꼬리가 될 수밖에 없지.
- P154

비틀린 이야기였다. 전쟁에서 다친 몸이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천천히 나았는데, 그 사실을 전할 수 없었던 부자 사이라니. 서로에 대한 아낌이 없던 것도 아니었고 서로를 얽매려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매초성에서 살아나온 후로 비틀려버리고 말았다.
- P160

"며칠이었을 뿐인데 몇 년을 늙어버렸다는 옛날이야기의주인공 같아졌어.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듣고 보지 말아야 할것들을 봐버려서 겉의 나이와 속의 나이가 달라져버렸달까?
껍질과 안 사이가 벌어지며 찢어질까 두렵네." - P170

가까웠던이와 가까웠던 이에 대한, 상대는 짐작하지 못할 친밀감이 자은에게 있었다.
- P171

일단 두섭 아저씨가 떠나셨어요. 장례가 끝나자마자요. 어쩐지 후련해 보이셔서 아무도 잡지 않았습니다. 
- P171

"잃은 것을 잃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괴롭지요.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쪽이 낫습니다."
- P172

수렁에 빠졌다 생각될 때야말로 차분히 손 닿는 곳을 짚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뜻밖의 단단한 것이 잡힐 수도 있고요.
- P189

어찌 보면 사려 깊다고까지 할 수 있을, 부드러운 파괴였습니다. 
- P193

"으...... 어울리지 않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나는 설자은이 데면데면해서 마음에 드는 것이네. 잘 보관한 맵쌀처럼 습기가 없는 게 좋아. 제발 다시는 그러지 말게."

- P198

자은이 기대하며 묻는 것 같아, 인곤은 바로 떠오른 답을 전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런 이가 있는 자가 부러움을 살 자인지, 없는 자가 두려움을 살 자인지 모르겠네."
- P212

그쯤 되자 차라리 한껏 파렴치한 자였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겁을 내면서 저질렀단 말인가, 허탈했다.
미처 따져 묻지도 않았는데 울기 시작했다.
- P216

마음이 약한지 강한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친우를 위해 육백년 전통의 겨루기를 방해할 만큼 강하면서도 천을 망칠 만큼 못돼먹진 않았다. 울면서 죄를 고백하면서도 친우는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다. 어느 한쪽이라면 마음이 나았을까, 착잡해진 세 사람은 바로 소판 댁으로 향했다.
- P218

자은도, 인곤도 그 말에 웃었다. 금성에 돌아와 불미스러운 일에만 엮인다 싶었는데 재미로 쳐주다니 도은의 관점이 달랐다.
- P225

아무것도 삼키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요구받고 싶지 않다는, 나쁜 신하다운 마음이었다.
- P245

자은은 왕이 보는 그림 속의 붓이 미처 닿지 않은 여백이고 싶었다.
- P246

바로 납득되지 않아도 항상 따라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두 사람은 합이 맞았다. 자은이 인곤과 함께 한 걸음 더 그림자 속으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 P272

"흰매가 죽기 전에, 다음 매를 구한다면......"
숨을 붙이게 해줄지도. 왕의 생략된 말에는 모두를 안도하게 하는 틈이 있었다. 유예된 벌로, 긴 밤이 끝났다.
- P281

"설자은."
자은의 이름을 불렀다. 자은이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게 나와 혀를 깨물었다.
"나의 흰 매가 되어라."
- P284

그렇게 자은도 매가, 매잡이가 되었다. 왕의 것이 되었다.
달이 차오르고 다시 허물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베지 않은 때도 있었고, 하나를 벤 적도 있었고, 수없이 벤 적도 있었다.
그것은 그다음의 이야기.
- P286

제가 쓴 이야기는 앞서 읽은 이야기들에서 태어났을 겁니다. 장르문학의 근사함은여러 시대의 작가들이 크고 높은 탑을 이어 쌓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작은 돌을 보태고 싶습니다.
- P2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 P9

 잃어버린 화살을 찾으려면 같은 방향으로 한번 더 활을 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것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번 더 해봐."
- P10

레인코트는 ‘이를테면‘이란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 문어체 말투에 묘한 반감이 들면서도 이 사람은 어떤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하길래 그런 단어를 쓸까, 호기심이 일었다. 
- P18

다 울어버리지 말고 울고 싶은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울고 싶은 자신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런 복잡한 설명을 들으면서 차갑고 새콤한 오미자물을 마시면 내 슬픔은 어리둥절한 눈을 한 채 나에게서 멀어졌다. 
- P31

세상은 그렇게 S자 곡선을 그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니까.
- P33

어떻게 이 땅이 보리차차가 아닐 수 있을까. 내 눈에는 흙이 된 보리차차의 귀와 나무뿌리가 된 보리차차의 다리가 보였다. 
- P38

누군가를 힘껏 끌어안아도 이 열린 창문은 닫을 수 없을 테니까. 죽은 개는 더이상 만질수 없으니까. 살아 있던 개도 날 안아준 적은 없었다. 
- P38

그날은 굵은 가을비가 내렸고 할머니는 보리차차에게 모자가 달린 우비를 입혀주었다. 
- P39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떤 이야기는 너무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이었다.
- P39

나는 내 욕구를 설계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세상에는 어떻게 그 많은 불행이 예정되어 있는 걸까.
- P40

왜 목소리에는 주름이 있을까. 내 얼굴에 닿던 할머니의 손과 그 감촉. 하도 떠올리다보니 맛도 느껴졌다. 칼칼한 고춧가루 향.
물엿처럼 달고 끈적거리는 온기, 고사리나물처럼 쓴맛이 맴도는 할머니의 당부. 보리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맑은 눈으로 살펴주시지요.
- P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병실로 퇴근합니다
고윤아 (지은이), 제작자 고간호사, 2023-07-07, 에세이, 142쪽

#독립출판 #병실로퇴근합니다 #간호사이자환자 #고간호사

🍊 표지 오른쪽 아래 3줄로 쓰여진 ‘환자 고윤아 /담당 간호사 고윤아 / 글쓴이 고윤아‘ 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표지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세줄이다. 그 옆 좌측에는 ‘난치병과 함께 사는 고간호사의 담담한 이야기‘라고 적혀있다. 그럴 것 같다. 예전 30일 미션 글쓰기에서 고간호사 고윤아 작가님의 짧은 글을 한 달 글쓰던 동료로서, 독자로서 매일매일 기다렸다. 담담한 이야기. 연약함도 강함도 같이 느껴지고, 슬픔도 따뜻함도 미묘하게 깔린 그 많은 감정들을 담담하게 풀어나간 글이었다.

🍊 책날개의 글을 보며 살짝 나올까봐 힘주던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 대신 공감을 하고 응원을 보냈다. 특히 ‘바꿀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이고, 억울함과 슬픔은 버리며 삽니다.‘ 이 문장에... 그랬는데 들어가는 글을 읽다가 더 눈에 힘을 주어야했다. 나의 표내지 못하는 감정을 들킨것만 같았다.

🍊 ‘숨기진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도 않았던 지난날‘이란 표현을 다는 몰라도 충분히 짐작한다. 내 방식대로겠지만. 아니 더욱더 복잡한 마음이다. 고윤아 작가님 책을 읽으며 나에 대해 생각한다. 차마 표내지 못했던 내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마음도. 차마.. 남기진 못하겠다.

🍊 더 남기고 싶은 구절들

🌱불안함과 좌절과 슬픔과 우울과 괴로움을 포장한 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17

🌱간호사와 환자 역할 그 사이에서 늘 양쪽의 마음을 이해해본다.
42

🌱이쯤에서 잠깐 얘기하자면 ‘아픈데 왜일을 하냐‘, ‘집에서 쉬면 되지않냐?‘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몰라 말한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돈 없이생활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도 생활은 해야 하니 돈은 있어야 했다. 
47

🌱한참을 실컷 울고 정신을 차렸다. 그날, 나는 절대적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정신차리고 살겠다고, 아프고 힘들어도 버틸 것이라고. 68

🌱슬프면 펑펑 울고, 괜찮아지면 다시 또 살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방법은 반드시 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뭐든 해보길 바란다.
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