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P7

고마코가 아들의 약혼자,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
- P55

그러나 고마코가 역시 요코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또 요코만 하더라도, 기차 안에서까지 마치 어린 어머니처럼 그토록 정성껏 돌보면서 데려온 남자와 관계가 있는 고마코한테 아침에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다는 건 도대체 무슨 심사일까?
- P61

힘들다는 건 여행자에게 깊이 빠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때문일까? 아니면 이럴 때 꾹 참고 견뎌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여자의 마음이 여기까지 깊어졌나 보다 하고 시마무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P70

"싫어요.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건"
이 말이 차가운 박정함으로도, 너무나 뜨거운 애정으로도 들리기에 시마무라는 망설였다.
- P75

"그럼 인연이 있으면 다시 봄세." 처녀에게 말을 남기고 기차에서 내렸다.
시마무라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자신도 깜짝 놀랐다. 그래서 더욱 여자와 헤어지고 가는 길임을 실감했다.
- P78

눈부신 빛깔이긴 해도 마치 가을 하늘을 떠도는 투명한 허무처럼 보였다.
"저기로 가 볼까? 당신 약혼자의 무덤이 보이네."
고마코는 대뜸 몸을 일으켜 시마무라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손에 쥔 밤을 다짜고짜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

- P100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 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닿았다.
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 P110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 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 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들의 조촐한 죽음의 장소로서 다다미 여덟장 크기의 방은 지나치게 넓었다.
- P113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없어 보였다. 
- P134

뺨이 달아오르는데 눈만은 차갑다. 시마무라도 눈꺼풀이 젖었다. 깜박거리자 은하수가 눈에 가득 찼다. 시마무라는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참으며,
"매일 밤 이런 은하수인가?"
"은하수? 예뻐요. 매일 밤은 아니겠죠. 아주 맑네요."
은하수는 두 사람이 달려온 뒤에서 앞으로 흘러내려, 고마코의 얼굴이 은하수에 비추어지는 듯했다. - P145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당신이 가고 나면 전 성실하게 살 거예요."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긴 고마코는 흐트러진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 P146

떨어진 여자가 요코라고 시마무라가 안 것은 언제였을까?
- P150

고마코는 자신의 희생인지 형벌인지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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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후, 우리는 필라델피아에 사는 어머니의 네 형제자매를 찾아갔다.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을 땅에 묻은 후에 자신의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혹은 되지 않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 P64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슬프고 밝은 그림을 찾기 위해 아무 말없이 갈라졌다. 
- P65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 P69

요점이야말로 예술이 절대 내놓지 않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말로 단번에 요약하기에 너무 거대한 동시에 아주 내밀한 것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 P87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그림은 점차 풍성해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다.
- P116

그들은 어머니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시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나는 눈을 관찰 도구로 삼기위해 부릅뜬다. 눈이 연필이고 마음은 공책이다. 이런 일에 그다지 능숙하지 않다는 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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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
- P32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친 총합은 그보다 훨씬 큰 것, 바로 톰에 관한 기억을만들어내서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그기억은 티션의 초상화와 매우 비슷하다.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이미지 말이다. - P47

그의 그림은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그림을 본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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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달콤한 위로와 약속으로 현실의 균열을 봉합하지 않는 이야기, 읽고 나면 마음을 무겁게 만들지만 그만큼 단단하게도 해주는 이야기, 희망이 그러하듯 절망 또한 함부로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일깨워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 P5

전나무는 사탕과 양초로 장식되었던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억도 들려주었다.
"와, 운이 참 좋았군요, 늙은 전나무 아저씨."
생쥐들이 감탄했다.
"난 늙지 않았어." 전나무가 고개를 저었다.
- P20

그리고 이 이야기도 여기서 끝난다.
모든 이야기는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다.
- P25

상심한 사람의 마음에는 집을 향한 귀소본능이 꿈틀거리는 법이다. 비록 그 집이 공원벤치에 불과할지라도.
- P37

"위험이란 무엇일까요? 어디에 위험이 있는거죠? 철로 위 어딘가에는 위험이 도사리고있습니다. 끔찍한 재난이 닥칠 겁니다. 유령이나타난 뒤에는 반드시 사고가 일어났어요. 두 번이나그랬으니, 세 번째도 예외일 리 없습니다. 이건 너무잔인합니다. 제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P59

요셉이 끄는 당나귀가 마리아를 태우고 베들레헴으로가고 있었다. 마리아는 가벼웠다. 뱃속에서 자라고있는 미래 말고는 짊어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P67

"우리 몫의 후광은 없나 보네." 소가 말했다.
"천사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나나 당나귀나 너무 보잘것 없는 존재니까. 게다가 우리가 무슨 공을 세웠다고 저런 후광을 받겠어?"
- P72

"그건 나도 몰라. 그저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보는 것으로 충분해. 그것만 해도 큰 일이거든."
- P80

삶이란 끔찍하게 슬프고, 굴욕적일 만큼 무의미한 불모의 세계였다. 기적이란 일절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때였다. ‘딱‘하고 가느다란 파열음이 들렸다.
- P110

설령 앞날이 보잘것 없다 해도 삶은 여전히 아름답다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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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아스팔트 위로 샛노란 은행잎들이촘촘히 깔려 눈이 부셨다. 눈이 너무부셔서, 어두운 날인데도 그토록 환한 것이얼떨떨해서, 거기서 어떤 빛이라도 쏟아져나오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장면이 너무뜻밖이고 실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어떻게해도 이해가 안 가서, 이렇게 눈이 부실 수있다는 것에 마음을 다 빼앗겨서 홍미는 그장면을 너무 사랑하고 말았다.
- P85

나는 왜 서둘러 늙어버렸을까. 아직도 미처 써보지도 못한 새날들이 너무 많은데.
- P86

일을 그르쳐도된다고,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지는몰랐다. 혼자 죽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까지생각했다. 매일매일의 삶을 살다가 혼자죽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겨우그 정도로 삶 전체를 쓸쓸하게 여기지 않을것이다.
- P94

그러니까 이 소설은 계속 더 오래 연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 것 같다. 실패로끝난다 해도 그게 완전한 절망은 아닐 거라는 마음에서 그토록 속아놓고도 다시 또 기대에 차 ‘해피 뉴 이어‘라고 말하는 입 모양을떠올리면서.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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