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일 년도 안 되는 동안에 그런 일들이 다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아무리 한동안 소식이 끊겼었다 해도 여고 동창생에 대해 궁금한 게 얼마나 예뻐졌을까, 연애는 해 봤을까 따위가 아니라 죽었을까, 살았을까라는 것은 환갑이나 지나고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 P125
"웬 놈의 겨울이 이렇게 길다냐?" 김숙이 파고드는 밤바람에도 봄기운이 완연하건만 엄마는이렇게 딴전을 피웠다. - P281
그러나 이 굴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 더 이 굴욕의 시간을 견디어 내야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 P291
나는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말문을 열게 됐다. 일단 말문이 열리자 수치심이 사라졌고, 수치심이 사라지자 이 군 식의 엉터리 영어가 술술술 잘도 나왔다. 굴복했다기보다는 무너진 것 같은 자포자기였다. - P293
그럴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자애慈愛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사는 일의 악착같음 때문에 거의 잊고 지낸 자애라는 게 따뜻한 물에 언 몸을 담갔을 때처럼 쾌적하게 스미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 P309
장난 끝은 피곤하고 허망했다. 피곤도 회복될 수 있는피곤이 아니라 서서히 마모돼 가는 피곤이었다. 툭하면 시가 줄줄줄 나오는 감정 과잉도 나에겐 버거웠다. 엄마한테 맞을 정도로 지섭이한테 엎드러져 있는 동안에 오히려 나는 지섭이를 저만치 밀어내고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섭이뿐 아니라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도 곰곰이 돌이켜 볼 계기가 되었다. - P340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 P342
나는 어떤 가문에도 안 속할 테니. 당신이 나를 찢어 내듯이 그이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찢어 낼 거예요. 우린 서로 찢겨져나온 싱싱한 생살로 접붙을 거예요. 접붙어서, 양쪽 집안의 잘나고 미천한 족속들이 온통 달려들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그들과 닮은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돌연변이의 종이 될 테니 두고 보셔요. - P352
야만의 세월을 기록한 글들은 많다. 그러나 어떤 영혼의 문체가 그 세월을 기록했는가에 따라서 그것들은 큰 차이가 난다. 야만의 세월을 고발했기 때문에 훌륭한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야만의 세월 속에서도 인간적 가치를 버릴 수 없어 더욱 큰 고통을당했던 영혼이 그 야만의 세월을 기록할 때 훌륭한 글이 되는 것이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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