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사자마자 바로 읽어 치우는 것보다 좀 묵혀뒀다 읽어야 깊은 맛이 난다.

집에서 묵혀두는 것도 좋지만, 이미 책방에서 묵은 걸 주문하면 할인이 크다.

도서정가제를 언제 시행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자주 조바심이 나서.. 요몇달 특가 도서들을 사들인다.

 

오늘은 이런 책... 사고 나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10% 밖에 할인이 아니고, <불안>도 20% 일반 서적과 다름이 없다. 덜렁대기는.. 사실 보통의 책 중 가장 갖고 싶은 것은 <영혼의 박물관>인데 말이다. 왜그랬어.. 

 

밀란 쿤데라의 책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몇년 전부터 다시 읽고 싶어 주문. 개정판 이전 책이라 그런지 50% 할인이다. <생각의 탄생>은 30%.  줄리안 반스가 좀 더 젊은 시절 쓴 책을 읽고 싶어 <10 1/2>을 선택했는데 30% 할인이다.

 

생각해 보니 원래는 장하준 교수의 새 책 소식에, <그들이 말해주지 않는 23가지>를 사려고 카트를 들락거렸는데 엉뚱한 책을 주문했네. <나쁜 사마리아인> 까지 세 권 세트로 살까. 하나만 살까 고민하다가 옆으로 밀어두고 원래 카트에 있던 것 중 고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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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는 예술가, 음악가, 유명인 들의 인명과 작품 일람 등 숱한 고유명사를 나열하며 예술을 대상화하기를 피한다. 다만 역사 속에서 음악과 예술의 시원을 탐측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가운데 서 가장 음악적이고 예술적인 순간들을 날카롭게 포착해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음악과 예술을 이미 체화한 시인만이 서술할 수 있는 이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 같은 세계사 속에서 선후관계나 권력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와 순간의 개별성과 단독성이다. 
이 책에서 역사를 분절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서술의 가치를 가진 역사의 다양한 장면들이다. 그 장면은 하나의 문명일 수도 있고 한 인물일 수도 있다. 물론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한 편의 오페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조각조각의 존재들이 모여 거대한 모자이크와도 같은 역사를 이루어간다. 또한 이 책의 마디마디를 이루는 장면들은 서로 엇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은 ‘잉카 문명’의 역사와 맞먹는 존재이며, 단테의 『신곡』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필적하는 사건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해석과 서술이야말로 이 책이 다른 역사서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책에서 역사는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전쟁터가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예술의 풍경화이다. 책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왜 하필 ‘음악의’ 세계사인가? 음악은 물처럼 흐르고 역사는 음악처럼 흐른다. 그러므로 ‘음악의’ 세계사는 말 그대로 ‘음악의’ 세계사이기도 하지만 ‘음악 같은’ ‘음악처럼 흐르는’ 세계사이기도 하다. 즉 음악은 예술을 달리 부르는 상징적인 이름이며,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스스로가 곧 예술인 역사, 인간의 가장 위대한 예술품으로서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출판사 소개글)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 2011년 1월 3일부터 11월 21일까지 ‘우리 시대의 명강의’ 코너에서 ‘삶을 바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연재되었던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의 글이 동명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정민 교수는 2004년 대한민국 인문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던 『미쳐야 미친다』를 통해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운명적인 만남을 소개한 이래, 10여 년 동안 정약용과 황상에 대한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만난 소장자들을 어렵게 설득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고 그 노력의 결실로,『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어록청상』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다산의 재발견』 등을 발표하면서 다산 정약용의 삶과 학문적 업적 그리고 그 문화사적 의미를 다각도로 밝혀왔다.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은 저자의 이런 오랜 노력의 정점을 찍는 결과물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기간은 1801년에서 1818년까지 18년 동안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조선 후기 최고의 지적 성취에 속하는 수많은 저작들을 쏟아냈다. 또한 조선시대 권력의 변방이었던 그곳 강진에서 아암 혜장과 초의 의순 등의 승려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지적 흐름을 주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독창적인 교육법을 통해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 제자 가운데 황상이 있다.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인문학이 귀결할 지점은 추상화된 인류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간이어야 할지 모른다. 지워진 흔적들과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꼭꼭 숨어 있는 먼지 낀 자료들을 찾아내야 하는 한문학의 길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그가 맺었던 관계들의 망을 통해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그 삶의 잊힌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은, 어렵기에 더욱 빛난다. 정민 교수는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삶을 바꾼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인간 정약용의 속살 같은 마음을 만나게 하는 동시에 끊겨 있던 흔적들을 추적하여 황상이라는 한 사람의 빛나는 삶을 복원시켜낸다. 
이제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은, 독자들의 머리를 깨우고 가슴을 울릴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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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신간이 나왔다. 단편집인가보다.



표제작 「신중한 사람」은 ‘신중함’ 때문에 계속 곤경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 Y의 이야기다. 그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로 들끓는 도시를 떠나 은퇴 후의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교외에 집을 완성했으나 아내와 딸의 압력에 못 이겨 해외 파견 근무를 거절하지 못해 이웃에게 집 관리를 맡기고 떠나게 된다. 3년간의 타국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가꾼 정원이 엉망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세입자라고 주장하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에게 자신이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Y. 하지만 사내는 집을 관리해주겠다던 이웃(장팔식)이 임의로 작성해준 임대 계약서를 내밀며 ‘장팔식에게 따지라’고 막무가내로 버틴다. 이러한 순간 Y는, ‘신중한 사람’이므로, 그렇게 하기로 한다. 심지어 하루에 만 원씩 쳐서 월세를 내고 퀴퀴한 다락방에 기거하며 하루하루 집의 정원을 가꾸고 연못을 고치기에 열심이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뒤로한 채 이전의 외형만을 복원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 스스로 편하기 때문이다.(출판사 해설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작가 컴백.


1961년,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 만들어진 흑인 빈민촌 <소웨토>의 콩알만 한 판잣집에서 놈베코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그녀가 수정되자마자(!) 사라졌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법의 하얀 가루로 잊어 보려던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떴다. 다섯 살 때부터 공동변소에서 똥을 치우며 생계를 이어야 했던 놈베코. 그녀는 빈민촌의 여느 주민들처럼 까막눈이었지만 <셈을 할 줄 아는 능력>, 즉 수(數)에 대한 감각과 세상만사를 영리하게 따져 보는 능력만은 타고났다. 문학애호가인 옆집 호색한과 라디오를 통해 글과 말을 깨우친 놈베코는 바깥세상이 너무도 궁금하다. 어느 날 강도에게 습격당해 죽은 호색한의 집에서 수백만 달러 어치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놈베코는 그 길로 빈민촌을 탈출한다. 요하네스버그쯤 이르러 <백인의 차에 치인 죄>를 범하고 만 놈베코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중 철책으로 둘러싸인 비밀 핵무기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그녀가 세계의 왕들과, 대통령들과 사귀고 열국(列國)을 벌벌 떨게 하고 또 세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고 상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비천한 태생이지만 두뇌만은 비범했던 한 여인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여정이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필체로 그려졌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바보들에 대한 요나스 요나손의 풍자가 오달지다! (출판사 제공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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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1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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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하고 여전히 추운 겨울의 끝자락, 기다려도 기다려도 봄은 오지 않고 앙칼지고 매서운 추위가 물러서지 않을 무렵, 우리에게 명명된, '꽃샘추위'라는 예쁜 언어는 기다림의 소망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저자는 '문학은 존재의 저 끝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생각, 어떤 느낌, 어떤 현상들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공기의 습기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애쓰 스스로 생명을 키워나가는 들꽃이 되고, 아끼고 가꾸어 피울 수 있는 장미가 되고, 풍성한 식탁을 차릴 수 있는 열매가 된다.  그것을 문학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을 글쓰기라는 영역으로 확장해서 이해한다. 


저자는 문학의 본질을 소통으로 보았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을 기대하고, 또 많이 읽어주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작가들은 간혹 베스트셀러를 숭배하고 많이 팔리는 길을 섬기게 되므로 이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하는 작가라면 문학적 도전을 중단하면 안된다는 취지의 말이었으나, 나는 소통이라는 단어가 눈이 띄었다. 문학의 본질이 소통에 있는 것처럼, 리뷰와 같은 글쓰기의 본질도 소통에 있는 것일까. 작가가 아니니, 문학사적 지평을 넓힐 필요가 없으니 소통에만 치중하면 될까. 소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만일 누군가가 와서 읽어주지 않는다면 오탈자와 비문이 가득하고 뒤엉킨 생각들이 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인터넷 어느 한 공간에 남겨진 나의 글을 그야 말로 산 속의 잡초처럼 여름 한 철 지고 갈 어지러이 마음 타래에 불과하다. 그래도 안쓰는 것보다는 낫다. 글은 남고, 글 속의 생각도 남겨진다. 비록 정리되지 않을지라도... 


최근 들어 글쓰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뭘 대단하게 쓰는 것도 이걸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생각을 옮기는 일이 두려워졌다. 생각이 없어진 거 같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생각했다. 글쓰기를 생각의 기록으로 여겼을 때에는 두서없는 생각의 타래들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을 때, 그 엉킨 실타래들은 이제 기억 속에서 휘발해 버리는 대신 자기들끼리 얽힌 채로 생명을 잃는다. 식물에 물을 주면 꽃을 피우듯 생각이 정리되는 순간은 외부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생각 밖으로 나온 타래들이 소통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반대로 소통을 생각하니 생각이 정지되는 듯하다. 시인과 소설가를 치열한 고독과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돌고 돈다. 생각이 있어야 글이 되고, 글이 있어야, 소통이 되는데, 소통이 생기면 새 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으니 쓸 글이 당연히 없지 않은가. 새삼 작가들이 대단하다.  


제가 이곳에서 제 마음을 정성껏 글자에 담아서 전달을 하면 그것이 나의 상상력이 미칠 수 없는 머나먼 어떤 곳에 가서 내가 원하는 무슨 일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처음 확인했을 때 그 위대한 문학적 기적이 얼마나 전율스러웠는지요. 그 후 저는 속수무책일 때마다 글이라는 무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서정'이란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주관적인 감정'이라 한다. 늘 보는 풍경 속에 익숙해져 있다 보면 꽃이 피고 계절이 변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객관 세계가 마음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작가는 이것을 권태라고 했다. 똑같은 인간들끼리 매일 밥을 먹으며 가족과 부부와 동료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 관계에서 권태는 위험하다. 그렇다고 화려한 연예게를 살아가는 사람도 아닌데 감정이 요동치는 환경에 무작정 몸을 맡길 수도 없다. 문학은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객관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중요한 답변이다. 책은 왜 읽을까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다. 문학은 나에게 삶과 관계의 권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수단일까? 생각을 풍성하게 하는 문학적 텍스트가, 현실적 삶과 관계맺기에서 권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흠 더 생각해보자.


작가 김형수는 실천 문학을 하게 되었던 자기 고백을 풍부한 감성적 언어로 시작하여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를 했고, 책은 강의 내용 그대로 인쇄되었다. 예비 작가들을 위한 책이지만, 그 예비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작가적 가치관과 언어와 문학의 본질에 대해, 진솔하게 안내한다. <고종석의 문장>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았지만, 자의식과 언어의 아름다움과 같은 서정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암울한 시대를 만났을 때의 지식인의 양심적 선택은 불가피하다. 그가 '1980년대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대표 시인이자 논객'이라는 점을 믿을 수 없을만큼 작가의 언어는 잔잔하고 맑다. 


문학을 공부할 목적이 아니라, 문학을 이해할 목적으로 읽었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라는 제목이 끌렸다. 문학이 예술을 전하고자 했다면 문학적 코드를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문학에서 사용하는 전문 코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알려주었다. 문학적 코드라는 것은 읽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이해한 그 마음은 다시 또 '명명'되었을 때 또다시 예술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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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5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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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나는 생뚱맞게도 애니미즘 사상에 기우는 것 같다. 생명이란 것을 단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 발견한 가장 작은 원소에서부터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유기체조차 하나의 영혼이 있는 생명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방식의 사고 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우주의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체계를 이루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발견된 사실들이, 무지의 틈을 메우면서 생명과 우주를 이루는 진실에 다가가는 거대한 스토리의 일부일 때, 우리의 감동은 벅차다. 그  알 수 없는 것들을 상상에 맡기고 거기서 허구를 만들어내는 일 못지 않게 말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타고난 이야기꾼 샘 킨,

로사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를 소개하는 자신의 짧막한 블로그에, 전작으로 <사라진 스푼> 한 권밖에 번역된 책이 없는 저자를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소개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전작이 한 권밖에 번역되지 않은 것은 전작이 한 권밖에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고(최근 6월에 The Tale of the Dueling Neurosurgeons가 출판되긴 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 꾼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그의 많은 책을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짧은 질적 경험이 준 임팩트 만으로도 샘 킨에게 붙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는 정당해 보인다. 한 권이 아니라 한 챕터만 읽어도 된다. '타고난 이야기꾼'은 성석제처럼 상상에서 출발한 허구적 이야기를 전문으로 만들어내는 소설가에게 부여했을 때보다, 과학을 전하는 책을 지은 작가에게 더 의미있는 찬사다.


샘 킨은 냉정한 과학적 사실을 전하면서 그 속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를 한쪽 구석으로 제껴놓지 않았다. 과학적 성취를 이루어낸 개인 개인의 시대적 환경, 집념, 그리고 샘 킨이 발견하고 각색한 독특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는 인류 역사 속 획을 그어온 커다란 과학적 성취 속에 점점이 스며있다.  한명 한명의 획기적 발견이 인류를 한걸음씩 앞으로 내딪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때 그 동력을 인간의 욕망과 탐구심이라는 구심점 속에서 융해시키는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우리는 스토리에 끌린다. 스토리는 자석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DNA 분자 구조와 단백질 생성 암호화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도식들과 씨름하는 것은 DNA를 처음 발견한  미셔나 유전의 법칙을 알아낸 멘델의 생애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들이 과학을 발견해 나가는 드라마를 접하는 것과 비교하면 흥미와 감동면에서 게임이 안된다. 책장을 넘기는 많은 순간, 우리가 수업시간에 따분해 했던 과학 이론의 매 탄생 과정과 그 속에 담긴 드라마들에게서 감동받는다.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과학적 발견에 감동하고 감정을 움직이면 뇌 속의 기억 회로가 그것과 연결된 팩트들을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다. 지루하던 유전학의 상세 동작 구조를 이토록 글자를 패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이야기의 힘이다.


샘 킨은, 초파리를 연구했던 모건이 당시 학자들이 유전자에 괴상하고 생소한 이름을 붙이던 관습을 깨고 의미있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책을 통과하는 모든 과학적 사실들의 이면에 있는 작은 화학물질들과 그 작용들을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처럼 기술하고 스토리텔링을 불어 넣어 그것들의 의미릉 생생하게 포착하였다. 그의 글 속에서 유전자가 동작하는 방식은 마치 유전자들이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나름의 사고 체계를 갖춘 개체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단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뿐이다.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그렇게 유전자가 지시하는 명령들의 조합이 아닌가. 그것들은 인간의 형상으로 조합을 이루기 전 태고적 바이러스 시대 때부터 독립된 인격처럼 자신을 복제하는 화학적 메카니즘과 암호 체계를 갖추고 나름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책이나 그림책에서는 사물이나 동물을 곧잘 의인화한다.  그게 아기들의 교육적인 면에서는 좋지 않다는 헛소리도 들은 적이 있지만,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에, 개가 멍멍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을때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그 뜻을 해석하고 스토리텔링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개와 교감하는 인간의 감정을 묘사할 길이 없다. 개에게는 인간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데서 자연선택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긴 시간을 지나면서 나름대로의 의사 소통 방법을 발전시키는 유전자가 발전했을테니,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유전자 역시 개를 이용함에서 오는 잇점을 발전시켜나간 것 아닐까. 다른 언어가 없는 그들은 짖고 꼬리 흔들고 와서 부비고 하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스토리 속에서 그 행위는 왜 이제 왔니 얼마나 기다렸는데 등과 같은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게 맞든 틀리든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DNA 속의 화학 구조가 이루는 유전자들의 조합이 우리의 인생과 교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이면서 또한 우리가 아니다.

 

진보를 이루게 하는 힘, 학문과 학문의 접점

DNA와 유전자는 다르다. 학문적 발견 과정도 다른 루트를 통해 발전되어 왔다. DNA는 물질이고, 유전자는 긴 DNA 가닥으로 이루어져있고, 세포액 속에 있는 염색체는 DNA로 가득한 책이다. 처음 DNA를 발견하게 된 건, 요한네스 프리드리히 미셔의 청력상실 덕이었다. 청력 손실로 청진기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호페 자일러의 실험실에서 혈액 세포에 있는 화학 물질의 종류를 연구하던 끝에 단백질에는 없는 인이 3% 나오는 물질을 분리해 냈고 이를 뉴클레온으로 이름붙였다. DNA가 발견되어 미셔는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DNA는 뭘 하는 지 모르는 그냥 혈액속의 물질일 뿐이었을 것이다. 겨우 150년이 채 못된 1869년의 일이다.


1900년대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불꽃튀는 내전을 겪었다. 모건이 이끄는 팀은 이 둘을 합쳐 현대 유전학이라는 거대한 테피스트리의 토대를 마련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유전의 매개물질이 DNA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유전학자들은 DNA 대신 단백질 우물만 끝도 없이 파대고 있었는데, 왓슨과 크릭이 결정적으로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허쉬와 체이스라는 바이러스학자의 아이디어가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바이러스가 세포속에 유전물질을 집어넣어 세포를 탈취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바이러스의 구성 정보가 DNA와 단백질로만 되어 있는데 그 중 DNA만이 세포에 침투했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 우리는 전혀 근거 없는 낭설만을 가지고 유전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DNA와 RNA 암호가 풀리자 드디어 미셔의 DNA와 멘델의 이론이 합쳐져 조화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조차 틀린 것이라 무시했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획득형질 이론은 최근에서야 동안 발전한 후성유전학이라는 이론과 만났다. 학문과 학문의 접점. 그것이 진보를 이루게 하는 힘이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 

과학의 위대함은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에 근거한 종교가 전체적 이해(라고 믿는 믿음) 속에 부분을 꿰어맞춘다면, 과학은 탐구 속에서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계의 이단아 벤터를 주측으로 하는 민간기업 셀러라와 미국국립보건원 컨소시엄이 1980년대부터 2003년까지 삼십년간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연관되어 수십억달러의 연구비를 들여 완성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유전체를 판독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주요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주요 유전자들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모든 DNA의 모든 염기 서열이 종교가 아니듯,  DNA는 우리를 이루는 화학 물질의 본질일 수 없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건 전체 중 일부,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다는 희망일 뿐이다.  중요한 통찰을 쏟아내었지만 해석은 여전히 남은 과학의 몫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겸허함을 배운 그들은 그저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를 처다보는 것만으로 통찰력이 펑 하고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440


사유가 어떤 과학적 팩트에서 출발하고 그 팩트가 이해가능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면 순수하게 무에서 출팔한 사유보다 공감이 크다. 연역적 사고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스토리 기반의 경험적 사유는 흥미에서 이해를 그리고 이해에서 철학을 끌어낸다. 고대로부터 과학과 철학과 음악과 미술과 언어와 문학은 원래 하나였다. 오랜 세기에 걸쳐 종교가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자리에 어렵게 부활한 개별 학문과 예술이 전문화라는 갈래길에서 찢어졌지만 가만히 잘 들이다 보면 책을 통해 만나는 개별 영역들 상호간에는 무수히 많은 교차 지점이 있고 그들은 자주 만난다. 그 큰 테피스트리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닥가닥의 실들을 통래 만나는 교차점. 그 짧은 진실과의 조우는 실로 감동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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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7-0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를 알게되면, 두개의 모르는것이 따라오는 법이어서, 알면 알 수록 더 모른는게 많아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과학이 발전할 수록 더 많이 모르게되고,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르는 사람이지요. 아는게 없으면 모르는 것도 없지요. 그래서 하룻 강아지는 범무서운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DNA에 대하여 알았다고해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늘어났을 뿐이지요.. 좀 더 현명해지기는 했겠지요..

CREBBP 2014-07-03 16:50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조금 알면 알수록 더욱 알고 싶어지는 게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