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위의 신 - 종교는 어떻게 인간의 성을 왜곡하는가
대럴 W. 레이 지음, 김승욱 옮김 / 어마마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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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는 은밀하고, 사적이며, 개인적인 행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종교 안에서든 종교 밖에서든, 미숙하든 성숙하든 매우 개인적이인 일이며, 어느 문화에서건 마구 드러내 놓고 하거나 떠벌이지 않는다. 섹스의 속성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것처럼 육체에 대한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욕망임과 동시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자연을 느끼는 것만큼 정신적인 충족감을 주는 행위이다.

 

   그러나, 섹스를 논하려면 욕망의 해소라든가 충동의 해결을 위한 관점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애정, 사랑, 친밀감, friend with benefit, 다 좋다. 그러나 유전자 전달이 목적이 아닌 이상 섹스의 목적은 사랑의 완성에 있고, 성적 욕망 역시 대상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토대로 하여, 성행위를 통해 이를 더 강화시킨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성을 필요 이상으로 충동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고루한가. 역사 인류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종교가 섹스를 억압해 온 건 사실이지만, 현대 사회, 특히 최근 10여년 간, 성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며, 누구나 자유롭게 성충동을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몽을 넘어 과도하게 주입되어, 지켜져야 더 가치있을지도 모를 내밀함마저 무방비하게 준비 없이 노출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섹스란 게 두 남녀 혹은 동성 커플의 친밀감과 애정의 완성과 확인을 위해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묶는 의미있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인스턴트적으로 만나서 쉽게 섹스하는 일이 합법적인 것은 물론이고,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 시대에, 종교가 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당장 컴퓨터를 켜고 바깥 세계로 연결된 인터넷에 접속해보자. 온국민의 시작화면인 네이버 홈의 뉴스 기사 하나만 클릭해도, 상품화된 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최고의 부스를 자랑한다던 스스로 지성인임을 자처하던, 보수를 대변하는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서는 주요 부분을 클로즈업 하고 유혹하는 반나의 성인들이 사이즈 확대며 성만족을 위한 각종 상품들과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한 광고를 백두대낮 어린 아기들도 클릭할 수 있는 환한 컴퓨터 모니터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광고하는 시대에, 종교가 성을 억압한다니. 조금 시대 착오적인 주장이 아닌가.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들은 개인의 은밀한 성생활에 대한 자료를 심리치료사로서의 임상 데이터에 기반으로 한다.즉, 결혼생활 혹은 다른 정신적 문제를 가진 환자와의 심리적 임상치료 과정에서 나온 데이터와 무신론적 종교 인류학을 결합해서 지나치게 해석한다. 

 

  물론, 종교를 지난 몇천년간 인류 문화를 지배해온 역사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청소년기의 자위나 혼인 전 성교, 구강섹스, 동성연애 등에 대한 죄책감이 성적 무지로부터  비롯된 종교적 억압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종교 내에서는 신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만일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삶을 지배하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성교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은밀한 행동을 할 때, 설령 그게 나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더라도 예를 들어 똥이나 오줌을 누거나  밥을 버리거나 몹시도 게을러지거나 할 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신에게 수치심 혹은 난감함을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설령 종교가 그런 행위들을 억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굳이 성적 억압을 종교적 억압이라는 틀에 맞추어 무신론을 주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성충동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남녀의 시각이 다르고 나이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기 때문에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게 맞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의 확신을 얻었을 때 서로의 몸을 허락하는 종교적 원칙이 그리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나도 교회를 한두 해 다녀 봤지만, 어느 교회에서건 목사가  강조하는 것 중 우리의 세속적 생활을 통제하는 범위 내의 것은 십일조를 내야 한다, 건축 헌금을 내야 된다는 종류의 것 뿐이지, 성적인 행위까지 통제의 범위 내에 두는 것은 별로 보지를 못했다. 아마도 미국의 청교도적인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아직까지도 종교편향의 사람들에게는 섹스에 대한 무의식적 죄책감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저자의 주장이 조금은 시대 착오적인 것이라는 나의 견해를 제외하고는 이 책은 전체적으로 종교에 대한 납득할 만한 사실을 근거로 실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다. 그 예로, 성직자의 성추문이 교회 조직 내에서 어떻게 보호되고 성 학대 사건을 은폐하는 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의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교사 등 남을 돕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고객과 성관계를 맺으면, 즉시 해고되고 심지어 형사법으로 고소, 처벌될 수도 있지만 수백년간 철통같은 성직자 보호 조직 속의 카톨릭 성직자들이나 조직 내 자금 조달 능력과 리더쉽으로 영향력이 큰 목사의 경우, 오히려 종교 조직 내에서 보호 받으며 더 나아가,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교회의 잇권을 가진 이사회에 의해 다른 명목으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섹스와 자위 행위에 대해 종교에서 전하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섹스를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은 있지만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섹스를 하는 도중 느끼는 죄책감보다는 비 종교적 이유, 즉 이성 친구가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맘대로 섹스를 하지 못해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더 크지 않을까.

 

   이 책은 무신론적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기 위해 종교 자체의 부정적 측면들을 실날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종교는 신자들을 통제하고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교회를 떠남으로써 생기는 사회적 고립을  복종의 메시지와 함께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는다. 실제로 사이비 종교나 이단으로 불리는 종교들 내의 유대 관계는 가족 이상의, 아니 가족을 파괴할 만큼의 결속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단이 아니어도 기독교는 특히 여러가지 방식으로 교회 내에서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도록 장려한다. 그들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없다. 종교 속에 감금되어서가 아니라, 고립이 두려워서이다. 종교라는 이름의 끈끈한 유대관계와 결집이 달콤해서 중독되는 것이다. 종교가 주는 아늑한 사회성, 그들이 이미 정을 붙인 그만의 세상에서 소외되는 고립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228
보편적인 종교는 혁명적인 생각을 내놨다. 종교가 문화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 보편적인 종교는 마치 침략자처럼 행세하며 부족 종교를 마구 없애버리고 부족 문화를 감염 시켰다.

 

231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종교와 질병은 항상 협조관계였다. 종교는 기도를 통해 질병의 치유를 약속하고 혹시 질병에게 패하는 경우에도 대신 천국을 약속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문화인류학 관점에서나 혹은 생물적 존재로서의 관점에서나 일부일처제가 반드시 궁극적 합의에 도달한 인류 최후의  문화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유인원과 모든 동물에게서 동성애, 난교, 자위 등의 성적 다양성이 발견되었고,  수렵 채집 문화의 부족에게서는 결혼이나 나이의 제한이라는 제도에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문화가 관찰되었다. 남녀가 비교적 평등했던 수렵 채집 문화를 깨고 나타난 농경문화의 종교는 양적 팽창을 통해 인류 전체의 성문화와 이성 간의 관계를 지배하였다. 농경 사회에서 시작된 보편적 종교는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 성적 억압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였고, 불교, 기독교, 카톨릭, 이슬람을 막론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남성의 지배 체제 밑으로 종속시켰다는 점을 저자는 새삼 주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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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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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살인. 궁금했다. 첫장을 넘기기도 전에  표지의 띠지는 이야기의 패를 다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릴러는 아닐터. 수능 5등급의  성적과, 외모도 몸매도 딱 5등급인 고3의 여자아이를 통해 바라본 사회의 부조리가 냉소적인 시선으로 구석 구석 현대인의 치부들을 조롱하면서 이야기의 반을 흘려 보냈다. 이 책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반이 되도록 스토리의 진전은 없고, 나는 궁금했다. 참을 성이 없는 나는 뭔가 단서를 잡기 위해 맨 앞으로, 혹은 맨 뒤로 표지로 왔다갔다 해본다. 뒷장 표지 뒷면에 오늘의 작가상 심사평에서 가져온 짧막한 인용문들이 눈에 띈다.

 

   펀치는 비도덕적 사회 속에서의 도덕적 인간에 대한 항변과 변호를 일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소한 도덕적이다. 도덕적 사회 속에서의 부도덕한 인간에 대한 비핀과 단죄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은근히 도덕적이다. 문학평론가인 김이현 교수의 평이다. 평론가 다운 문장이다. 도덕과 비도덕이란 말을 끌어들이기에는 조금 염치없는 것들,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부조리들, 교육제도, 성형시장, 계급적 특권의식 등을 문제삼지만 적어도 도덕의 이름으로 단죄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세 명의 소설가 심사평에 비해 가장 공감간다. 고 3 아이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부조리는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도덕적이냐 아니냐를 따질 만큼 음지의 것이 아닌 사회 전체에 만연된, 한 나라의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와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우선 교육 문제. 어느 세대 어느 문화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항상 문제라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이 교육 제도이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선거 때마다 교육 개혁이 공약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들의 인권이 보장된 선진 유럽에서는 기초 학력이 부족하여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학교와 선생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들 엄살이다. 나는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여 선거 운동을 할 때 미국에 있었는데, 미국의 참담한 공교육 현장을 지적하며 TV에서 한국의 교육제도와 교육열을 운운하며 일부 본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게 생각난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학생 인권이 보장된 몇몇 나라의 학교 교육 내 기초 교육의 부재는 교육의 목적 자체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어쨌든, 엄마들의 치마 바람과 무너진 공교육, 왕따 문화, 초라한 교사들의 위상, 대입 위주의 교육관 그 속에서 아이는 부모의 헛된 기대라는 감옥에서 아무 미래도 꿈꿀 수 없다. 특히 자신이 가진 성적과 외모로는 부모가 가진 특권 계급 이하로 내려가고, 그 이하의 계급에 걸맞는 소비와 문화 속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삶의 희망 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핵심은 그거다. 최고가 아닌 아이들에게서 미래를 빼앗아 버리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

 

 외모지상주의. 우리의 당돌한 여주인공 방인영은 세태에 순응하는, 공부를 못하면 얼굴이라도 예뻐지고 날씬해지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단순한 사춘기 소녀가 아니다. 걸그룹들의 얼굴 변천사들은 이미 식상할 뿐이고, 말라깽이 단짝 친구의 다이어트도 관심 밖이다.  너무 못생긴게 죄가 되는 건 원숭이들이 우글거리는 대한민국에서' 레알'이다. "공부하기 싫지?" 몇몇 철부지들이 대답한다. "네." "그럼 성형이라도 해." 수업 중 대화 내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런 류의 대화가 딱히 우리 사회에서 삐딱한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짧고 강렬하게 작가는 현실을 꼬집는다.

 

    작가는 가족의 단절을 구구 절절 묘사하지 않는다. 방 변호사는 소파 아니면 서재에 갇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서재에 갇혀 있을 때, 우리집은 환하다. 짧지만 강렬하게, 가족 내 불통의 단면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극히 한국적 풍경이자 한국적 정서다. 친구 하나는 휴일에 남편이 하루 종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뒹굴던 자리에 푹 파인 자국을 보면 소파를 내다 버리고 싶어 진다고 했다. 우리는 남편들 흉을 볼 때, 소파와 리모콘을  핵심 키워드로 한다. 소파와 한몸이 된 남편들이라고 깔깔거리면서 단지 소파와 리모콘과 남편만을 소재로 한 시간 이상 카톡으로 수다를 떨 수 있다.  

 

   고3의 방인영은 스물 일곱살에 자살하는 거 말고는 희망이 없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엄마를 이해해본다. 엄마는 이쁜 얼굴로 변호사와 결혼했고 아빠는 좋은 머리로 변호사가 되었지만 하필 외동딸 방인영은 엄마의 머리와 아빠의 외모를 물려받았다. 할 수 없다.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 주어진 유전자만큼만 누릴 수 밖에 없다. 외모야 성형과 다이어트의 힘으로 사회에서 선호하는 형태로 다소 극복될 수는 있겠지만 반사회적 성향의 사춘기 소녀의 눈에는 남루하기만 관심없는 해결책이다.

 

  펀치는 부모를 청부 살인했을 때 함 번 강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냉소적인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얼얼하게 사회의 부조리들을 때린다. 아이의 엄마는 죽을만큼 잘못하지 않았다. 빼어난 외모로,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에 성공했을 뿐이고, 어렵사리 진입한 특권 계급 사회에 자신의 유전자가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게 리드하고 있을 뿐. 다른 어느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찌감치 자식의 능력을 알고 포기해 버린 방 변호사도 비록 법무법인에서 비도덕적인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하며 살아갈 지언정 죽어야 할만큼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아이가 부모를 죽이는 계획을 은밀하게 지지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독자인 우리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죽음을 떠올릴 만큼 냉혹한 세계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한 때 거쳤던 대입의 기억을 ..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는 더욱 더 가차없이 혹독하게 부와 권력의 대물림 속에서 은밀하지도 않게 대 놓고 정의를 조롱하고 어딘가 더욱 더 위함한 곳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학부모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돈다. 성공적인 교육(대학입시)의 세가지 조건은 첫째, 조부모의 경제력 둘째 엄마의 정보력, 셋째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말이다. 아빠의 무관심 항목은 아이와 가족이 대입이라는 항해를 해 본 경험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아주 본질적인 항목이다. 아빠의 "바른 교육관"은 엄마의 세속적 가치관을 혼란에 빠뜨리고, 정보를 흩뜨리고, 아이를 산만하게 해서, 배를 산으로 향하게 한다.  조부모의 경제력은 사교육 시장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아빠의 월급만으로 일류 대학에 진입할 수 있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충족 여부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집은 엄마의 무능력만 있지 정보력은 빵 점이다. 5등급의 아이도 인서울 할 수 있다. 아이는 기타를 잘친다. 좋아한다. 현명한 엄마였다면, 일찌감치 실용음악 쪽으로 정보를 수집해 수시 전형으로 승부를 봤을 것이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의 성적이 성적만으로 올인할 가치가 있을 만큼 신통치 않은 때, 혹시라도 숨어 있을지도 모를 선택받은 재능이 있을지 샅샅이 뒤진다. 돈을 퍼부어서 쥐어 짜면 없는 재능도 생겨난다는 말도 한다. 예체능이 아무리 빡세다고 하지만 찾아보면 부자들만이 경제적으로 서포트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 분야가 있다.  책 속에서와는 달리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적어도 어느 정도의 레벨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맞춘다. 아니면 일찌감치 유학파로 변신시키거나. 그러니까 그 점은 아이를 키워 보지 않은, 작가의 상상력의 한계다. 아니다. 작품이 뛰어나니 그냥 방인영 엄마의 멍청함으로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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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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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역사는 시대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한다. 시대의 폭력은 개인적 삶에 우연히 조우하여,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며 기억의 구석 구석 개인의 역사에 스민다.


아주 오랜 오래전 모래 시계라는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쌀을 샀다며 우는 장면이 있었다. 그녀는 배가 고파서 쌀을 샀다고 하면서 울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자 변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광주가 총소리에 휩싸여 소외되고 있을 때, 그 때  그 자리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우연성은 그 묵직한 시대적 청춘을 관통했던 지식인들에게 씻지 못할 죄책감을 심었다. 쌀을 사는 것은 그 어두운 시대적 정의와 자유를 열망하는 청춘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행위였으며, 그 무거운 시대적 사명감을 내 어깨에서는 내려놓고, 먹고 살겠다는 변명이었으며 또한 배신이었고, 긍극적으로는 변졀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 책 속의 또다른 고현정분인 등장인물 상희와는 달리 한 칸짜리 자취방을 나와 원래 그녀가 있었던 그 자리 착취의 억압의 주체로서, 재벌의 딸로서 되돌아갔고 핍박의 칼을 휘드르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섰다.


그러나, 그들도 사랑을 했다. 80년대 90년대, 민주화를 열망하던 폭풍의 눈, 학생운동권, 총학생회에 있어서 여성성은 저속한 여성의 상품화를 대변하는 자본의 상징이었으므로  말살되었고, 남녀의 호칭은 누나, 오빠 대신 형으로 통일되었지만, 그들도 사랑을 나누었다. 청춘의 상징 같은 방황과 불확실함  대신 신념으로,  확고한 사상과 실천적 삶을 살았던 그 때의 청춘들도 사랑을 했다.


32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화자가 이끄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6 월항쟁이 있었던 1987 년부터 분신정국이 펼쳐졌던 1991 년까지 4 년에 걸쳐 그동안의 한국 사회를 완강하게 지탱해 온 무언가에 불길이 지펴지면서 그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장엄한 모습 그대로 몰락해갔던' 시간 축을 따라 시공간을 초월해, 일제강점, 러일전쟁, 러독전쟁, 홀로코스트, 독일 노동자파견 등의 크고 작은 역사적 속을 넘나들며 서로 조우한다. 


그 시대의 청춘, 그 무자비한 폭력에 항거하던 그들의 사유는 자유로왔고, 사상은 실천을 동반했다. 그들에게 낭만은 실천적 자유 뿐이었다.

 

51
조롱의 핵심은 일부일처제가 한 사람만을 위한 영구적인 매음 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68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


김연우는 그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소설임을 짐작케 하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투쟁 현장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차분하게 공개했다. 소설에서 그는 자신의 어떤 정치적 혹은 사상적 견해를 납득시키려 하거나 주입시키지 않지만,  1980 광주에 대한 견해를 드러낸다. 나는 그가 일부러 다시는, 다시는 이라고 강조해서 쓴 그 다음 말, 학살자에게 맞서지 말라 메시지가 슬프다. 그 학살자들은 역사가 진실을 밝혀낸 후에도 죄값을 치르지 않고 그를 동조하고 침묵했던 세력들도 세상 밖에서 활개를 치고 아직도 권력의 끈을 유지하고 있으니, 결국은 비통한 목소리로 저항할 수 있는 말은 다시는 학살자에게 맞서지 말라 역설 뿐.


한기복. 5월의 광주 4년 후,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안고 방한한 교황 암살을 계획했으나 시도도 못해보고 끝나자, 끝내 분신 자살. 


180
미몽속에 잠든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 온몸이 온몸이 부서져라 두들겨대는 종소리녔으며, 다시는, 다시는 맨손으로 학살자에게 맞서지 말라는 처절한 격문이었다.


헬무트 베르크, 홀로코스트가 자행될 무렵, 유대인의 피가 반 섞여 있던 그는 행복, 사랑, 기쁨 같은 엄격하게 선택된 긍정의 단어 25 개 내에서만 약혼자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 그는 장교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나중에는 동료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향하는 길에서 희망찬 곡들을 아코디언으로 연주한다. 그러다가 그는 살아남았다. 유일하게.

 
220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의 세계란? 패배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일 뿐 운명은 패배하지 않으니 꿈처럼 지나가는 비극의 삶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웃으라는, 쓸쓸한 목관과 유머러스한 현악의 전언.


227
폭설처럼 침묵은 지붕위로, 골목으로, 창틀로 내려 앉았지.


강시우, 한기수를 만나 분신 사건에 관련된 후, 타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화자를 통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책 속의 주인공. 월북.


314
그의 삶은 세차게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파도에 본의 아니게 휩쓸린 조개껍질 같은 것이었다. 이런 논리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은 1980 년대식의 죄의식일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런 유의 사랑이란 누구에게든 어떤 식으로든 연민을 배설해야만 견딜 수 있는 시대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라고.

 

다시, 강시우가 사랑한 상희. 그녀는 시대의 죄책감을 괴로워했고, 정의의 사도로 급변조한 강시우를 사랑함으로써 이를 상쇄하려 했던 것 같다. 어두운 시대에 자신이 특권 계급이었던 사실에도 괴로워했던, 그런 어두운 시대가 있었다.


315
우울증, 열등감, 죄책감 등이 압도적인 폭력의 시기를 만나게 되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랑이 감정 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를 일컬어 사랑이라고 말해야할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지만 1980 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감정들, 예를 들어 증오심이나 복수심 혹은 공명심 등을 사랑으로 오인한 것은 분명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깜빡이도 없이 갑작스레 끼어들듯,  소설 속 전개를 나몰라라 한 채  사방에서 끼어들기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소설이란 게,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라든가, 시대적 배경 등을 이해하고 친해지려면 어느 정도는 같은 톤, 같은 정서적 배경을 유지해줘야 읽기가 편한데, 불쑥 불쑥 끼어드는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새로운 인물들은 때때로 난감하다 못해 짜증이 났다. 그래도 꾹 참고 읽다보면, 소설 속 작지만 큰 그 이야기들은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어 만나는 듯, 어떤 큰 줄기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단하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지식의 종류와 양도 크지만, 서로 무관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게 꼬인듯한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때로 독자를 우롱하듯 무자비하게 불쑥 불쑥 끼워넣으면서도, 막상 자신은 담담하게 초월한 듯 끌고 나가 결국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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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 인간이 유일하게 지녀야 할 삶의 정의
피에르 라비 지음, 배영란 옮김 / 예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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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태농업의 선구자 피에르 라비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 명료하다.  스스로 인류의 빠른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시킨 현대 문명에서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발적인 소박함을 선택함으로써, 인간 고유의 가치를 되찾고, 더이상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고 가능한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피에르 라비의 메시지는 얼마전 읽은 [성장 없는 번영 :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위한 생태거시경제학의 탄생 - 팀 잭슨 저| 착한책가게] 의 연장선 상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은 성장없는 번영 에 비해, 조금 더 철학적이고 인본적 가치에 치중한 책이나, 저자 피에르 라비 자신이 평생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 실천적 삶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는, 영혼이 풍부한 책이다.

 

각종 연구자료와 다소 학술적 내용을 포함하는 성장없는 번영 중 "행복은 소득에 비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 소득이 도달하면 그 이상은 소득과 행복에 아무 관련이 없다"는 연구 결과가 기억난다. 행과 불행에 끼칠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은 OECD의 국가에서는 사회적 안전망을 통해 이미 구축이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주춤한 경제 성장이나 돈을 더 많이 못벌어서가 아니고, 행복한 이유 또한 선진국이 되어서가 아닐 것이다. 피에르 라비는 인간의 고유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생태 농업으로,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잉여 생산과 낭비를 없앰으로써, 조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전통적 생활 방식을 회복하고, 자발적 소박함이라는 삶의 태도를 지향할 것을 전하고 있다.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이 수만년동안 공유해 왔던 모든 재원들을 겨우 최근 몇백년 혹은 몇천년만에 파괴하는 것은 약탈행위이며, 후대까지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이 지속가능한 삶을 영속할 수 있도록 정직하게 일하고 그 지상의 모든 혜택을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나누는 것만이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를 밥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고, 정신활동을 도와주는 이 도시를 어떻게 떠날 수 있으며, 먹고 마시고 만나고 떠들고 누리는 이런 것들을 어찌 소비를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으면서 최근 읽고 있는 다른 책들을 통해 느꼈던 생각들이 이 책을 통해 받은 느낌과 함께 두서없이 교차했다. 피에르 라비가 주장하는 방법과 이념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으로서의 그의 생각이 디지털 문명의 다른 영역에서는 충돌하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읽고 있는 에지 프로젝트 "우리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읽으며 수많은 석학들의 생각을 읽고 느끼고 공감한 것들이, 피에르 라비가 주장하고 가슴 울리는 성찰을 전달하는 자발적 소박함의 철학과 충돌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라비는 현대 인터넷 문명 때문에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졌다고 본다. 집에 있는 것은 아이들의 빈 껍데기 뿐이고, 그들의 영혼은 인터넷의 어딘가에서 위선과 꾸밈으로 가득한 가상 자아로 치장한 채 또다른 위선과 꾸밈이 가득한 거짓 자아들과 만나면서 가상의 세계를 헤매고 다닌다는 것이다. 디지털 원주민이 아닌 우리 기성세대에게 집에서 하루 종일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확실히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 덕분에 자신과 같은 취미나 학술적 관심, 혹은 전세계적으로 통털어도 아주 드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관심 분야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자본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대중의 의견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호 작용으로서의 매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네트워크 세대는 진정한 민주화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지식은 특정 계급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오늘날 키보드 몇 번이면 액세스가 가능한 학술지의 열람은 선택된 지식계급들이 위치한 그 물리적 환경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고민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인간은 브랜드 상품과 물질적인 것보다는 더 고유한 가치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지만, 이미 소비와 물적 충족이 하나의 조건이 된 사회 내에서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적용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라비는 책을 통해 자신이 무조건적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문장 하나 하나 100% 공감하면서도, 100% 인정할  수 없는 갈등을 책을 덮을 때까지 겪는 이유는(그것은 고통스럽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실천적 방안이, [성장없는 번영]에서 지적한 것처럼, 어차피 이제는 너무나 늦었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파괴했고, 그래서 그나마 우리의 아들 딸과 그들의 아들 딸이 지속적으로 이 지구에 발붙이고 살게 하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난제를 포함하고 있고, 이미 물욕에 어두워 그것 없이는 삶이 어찌 지속될 지조차 불안해진, 자본의 속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실천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의 삶이 책을 통해 전달하는 가치에 동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저 막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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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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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먼 곳. 긴 한반도의 맨 끝쪽에 위치한, 서울에서 천리 길 강진.  낯설고 물선 그곳 천주학쟁이 사학 죄인을 경계하여 꼭꼭 잠근 문을 닫아 걸은 유배지 절망적 풍경 속에 홀로 참담하게 내던져졌을 때,  추운 겨울 주리고 지친 몸을 누인 곳이라곤 어두운 들판 홀로 서 있던 주막집 뿐이었던 그곳에서, 다산은 겨울을 나고 열다섯 황상을 처음 만난다.  아전들의 경계가 풀어졌을 때쯔음 적적함을 견디고 밥벌이라도 할 생각으로 문을 연 서당에서 황상은 질박하고 꾸밈없는 더벅머리 소년이었다.  유배지에서 찾은 조개 속 진주가 될 제자 황상이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일생을 통한 긴 만남 속에서 주고 받은 시와 시 속의 삶, 삶 속의 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가까이 있던 17년이라는 다산의 유배 기간, 해배 이후 다산이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아슬아슬하게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까지의 18년 이라는 시간,  그리고 홀로 남은 제자가 스승의 시 속 같은 삶을 가꾸어 살아간 나머지 35년간에 걸친 긴 세월동안 두 개인에게 흐르던 애틋한 정은 촉촉히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일생을 흐르는 숱한 세월동안 한결같이 스승을 사모하고 스승을 그리고, 스승의 뜻을 따라 살아간, 그 질박한 시간을 따라가며 책을 읽은 일주일은 참으로 따스한 시간이었다.

 

칠월 칠석 일년에 한 번 만난는 연인이라면 이토록 애절할까. 황상의 스승에 대한 사랑은 그가 남긴 수많은 시 속에 고스란히 스며있고, 만년으로 갈 수록 더욱 더 스승과의 기억속으로 빠져들며 애닯아진다. 그는 한결같은 인생을 살았다. 강진과 서울 사이. KTX가 빠른 속도로 산천을 누비는 시대임에도 녹녹지 않은 거리다. 전화도, 우편시스템도, 인터넷도 없었다. 천리 길 먼 곳에 계신 그리운 님은 다른 이 아닌 스승과 제자다. 제자 못지 않게 다산은 황상을 몹시도 그리며, 편지를 쓰고, 오지 않은 답장을 원망했으며, 죽을 때가 되었으니 보러 오기를 희망하였다.

 

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과거 시험에 대한 영향력에 실망한 다른 제자들이 하나 둘 씩 그의 곁을 떠나고 경제적인 이해 관계로 인해 서로 뿔뿔히 흩어진 이후에도 다산이 끝까지 아낀 마지막 제자, 욕심 없이 한 세상 살았던 제자 황상은 오직 한 스승 다산만을 섬기며, 그에게서 처음 학문을 배울 때 받은 삼근계를 마지막까지 간직했고, 스승을 그리며 초월된 삶을 살았다. 스승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그의 삶은 다산의 그림자처럼 스승의 뒤를 쫓았다. 다산과의 인연을 통해 만난 추사 김정희와 그의 형제,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과 정학유, 초의선사와 같은 시대를 대표했던 문인들과 시와 편지로 먼 거리의 벽을 허물고 교류하며 살아갔다. 

 

황상은 아전이었다. 그렇다. 그 아전. 수탈과 협잡의 대명사, 민초들을 억압하고 피땀흘려 지은 농사를 간난아기와 죽은 자의 몫까지 세금이란 명목으로 악착같이 빼앗아 가던 그 아전. 먹고 살기 위해 아전 생활을 하는 젊은 시절의 기록은 기억상실증처럼 이 책과, 모든 기록에서 없다. 그는 세습직이었던 그 아전 생활을 결국 스스로 끝내 버렸고, 산골 깊은 곳에 돌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점차 자신과 가족만의 소박한 낙원을 만들며 살아갔다. 노년에는 그 마저도 마다하고 집을 떠나 더 골짜기로 올라가 단칸방 일속산방을 지어 혼자 기거했다. 그러나 애써 가꾼 집과 밭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렸고, 이 욕심없고 순수하기만 한 다산의 제자를 평생을 괴롭혀 말년에는 결국 큰 고초를 당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 결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안다. 적막한 숲 속 한적하고 그윽한 세계에서 살고자 했던 황상의 삶이 탐욕스런 인간의 본성을 가진 집단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침탈당했을지.. 허구가 아니기에, 기록이 남긴 단서들로 추적한 실제 존재한 영혼이었기에, 해피엔딩이 아닌 말년의 비참한 결말에 이르게 된 역사적 현실 인식에 순순히 굴복해야 한다.

 

한편, 다산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꼼꼼하고 집요하고 고집도 세다. 이 책은 그의 치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황상과 맺은 인연,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지인과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시를 통해서들이다 보는 그의 일상적 성격은 꼼꼼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유배온 후 장성한 자식들의 공부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리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편지들에는 세세하게 조목조목 공부 방법에 대한 꼼꼼한 지적과 잔소리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착한 아들들은 아버지를 뵈러 와서 꼼짝없이 붙들어 앉아 공부만을 해야 했다. 주막집과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거쳐 다산초당에서 자리를 잡아 기거하기까지, 제자들을 세심하고 엄하게 가르쳐 다산 초당에서 키운 윤씨 자제들을 당시 조선의 가장 뛰어난 지성인 집단으로 만들고 셀수도 없는 수많은 저서들을 출간하는 팀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언제나 아전의 자식 황상이 있었다. 그 자리에 배신 않고 서 있을 그의 사람 황상. 해배된 후 연락이 끊기자 몇 번이고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내, 무리일 것을 알면서도, 먼길 자신을 보러 올 것을 바란 스승. 두 사람의 지극한 마음은 결국 제자에게 아득히 먼길을 걸어 방문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스승의 사후에도 스승과 맺어진 연을 계속 잇고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제자가 절절히 그립고 애틋하여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던 스승은, 강진에서 서울까지 진흙길을 헤쳐 마침내 제자가 방문하자, 그제서야 눈을 감는다.   

 

작가 정민선생은 황상의 작품집 <치원유고>와, 황상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모아, 퍼즐조각 맞추듯 이어 붙였다.  시와 편지를 분류하여 한자어로 된 원본과 해석본 그리고 해설과 함께 싣는 방식으로 황상과 다산의 삶을 독자에게 전했다. 말과 글이 다른 시대에 한자로 시를 쓴다는 것은 한자어로 된 글을 말처럼 체화시켜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 때에도 글은 지성인들의 향유물이었지만, 21세기에도 그 때 쓰여진 글들은 일반인이 다가가기 어렵고 겁난다. 다른 나라의 고전들이 우리 글로 번역된 것만큼,  쉽고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없다. 한자어가 아니었다면 너무나도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서 대중적으로도 많이 사랑받았을 그시대의 시와 문학이 매니아층에서만 향유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세계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어릴 때부터 수많은 해외 고전들을 읽고 자라는 것처럼, 이렇게 절절하고 아름다운 우리 선인들의 문화의 체취를 느낄 기회가 많이 없었다. 그래서, 감수성 진한 문장과 해박한 지식을 동반한 정교한 해설, 그러나 원본을 왜곡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편집된 원본을 함께 싣는 정민 선생의 책은 언제나 고맙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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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7-3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제사이를 넘어서 인간이 인간을 알아 볼 수 있는 마음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걸 잘 전해주신 정민 선생님의 눈길 또한 좋았고요. 이것을 고스란히 다 담아내셨군요,

CREBBP 2014-07-31 15:25   좋아요 0 | URL
꾸며내지 않은 감동이라 깊이가 달랐어요.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오게 한자로 된 시를 잘 번역해주신 정민 작가님께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