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심하지만 뇌는 비웃는다
데이비드 디살보 지음, 이은진 옮김 / 모멘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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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하고 근거도 빈약한 긍정 산업은 서점계를 통과하면서 자기계발 서적들로 베스트셀러계를 완전 정복한 듯 하다. 과학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디살보의 첫번째 단행본인 [나는 결심하지만 뇌는 비웃는다]는 제목과는 좀 달리 긍정심리학을 부정하고 신경 과학에 기초한 자기계발류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뇌에 관련한 과학 서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싶었는데 표지를 보니 "진창에 빠진 당신의 인생을 구출해 줄 단 한권"의 책이라고 프롤로그에 밝히고 있다. 심리학이나 인지 과학의 연구 실험 결과와 이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행복한 뇌"가 추구하는 본질을 알고 행동하자는 취지의 책인데, 문장은 한국 원서처럼 매끄럽고 꼬인 데가 없고 깔끔하고 단순하고 어려운 단어도 쓰지 않는데 몇번을 읽어도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게 많았다.  특히 실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짧은 묘사가 그랬다.


고독은 우리 주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인간 관계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경우와 관련이 있다. 허구의 인물과 강한 유대감을 느낄수록 뇌는 그들이 우리 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다. 다소 뻔 해 보이는 이야기를 굳이 요약된 실험 과정(그래서, 실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음)과 설명을 통해 전달하니, 그리 새로운 것은 없다. 단편적 실험의 결과들을 목적에 맞게 끌어다 적재 적소에 잘 배치했지만 감동은 없다. 저널리스트 답게 그리고 책의 목적에 맞게 잘 정리된 영혼없는 자기계발서이다. 뇌와 관런된 책 몇개만 읽었다면 차고 넘치는 상식선의 이야기들도 많지만 기존의 시크릿이나 꿈꾸는 다락방 류의 자기계발류에 편향된 독서 습관을 가진 독자라면 분명 새롭고 구원적일 수 있겠다. 지금은 거의 고전처럼 읽히는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1,2에서 그 오래전부터 소개되기 시작해서 이책 저책 수많은 곳에서 인용된 많은 부분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내게 도움이 되는 부분을 고르자면, 역시 뻔한 내용이긴 하지만, 게으름에서 당장 벗어나는 방법은 일단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뇌는 미완성을 불안정한 상태로 받아들인다. 부담감에 짓눌려 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질질 끌게 될 때는 어디서부터든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시작하면 시작한 일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이가닉 효과이다. 여기에 강하게 동의한다. 하기 싫어도 일단 시작하자.

 

또 긍정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조건 할 수 있어 될 수 있어라고 주문을 거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뭔가를 원할 때 느끼는 희열이 그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은 극도로 물질화된 자본주의적 쇼핑광들의 행동에 사기 전 한 번쯤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다. 영화 girlfriend experience에서는 여자친구가 되어 주는 아름다운 여자친구를 갖고 싶은 환상에 여자친구를 대행해주는 콜걸을 실제 여자친구로 만들었지만 실제 그 콜걸이 여자친구가 되눈 순간 환상은 사라지고 후회와 함께 상실감이 몰려온다. 초혼보다 재혼이 이혼율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상을 기대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 다시 경험하려는 시도가 습관화와 후회라는 새로운 사이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첫인상의 편견에는 나에게 어떤 이익의 되나 하는 판단도 포함된다고 한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고 진리라면 인간은 희망이 없다. 또다른 연구에서는 평균 7년마다 친구들이 절반 가량과 관계가 끊어지고 대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내 집단 사람들이 더 친절하고 도움이 되고 너그럽고 신뢰할 수 있고 공정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자신의 배타성은 인정하고 더 신중하게 행동하자는 말이지 싶다. 또한 우리는 자기가 남기고싶은 인상을 잣대로 다른 사람의 첫 인상을 판단한다. 그래서 본인이 사교적이고 왜 양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그 기준으로 평가한다.

 

지난 수십년동안의 심리학 연구와 신경과학 연구에서는 독립적 사고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어쩌면 우리의 자아가 꾸며낸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제시해 왔다. 메시지를 반복하면 할수록 우리가 그 메시지를 믿을 가능성도 커진다. 동일한 메시지를 얼핏 여러번 듣다 보면 그 메시지가 진실이라는 환상의 빠지고 만다.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신경 세포 사이의 활동이 많아질수록 그 기억이 더 생생해지고 구체화 된다. 감정이 고조된 기억들이 생생하고 자세하게 의식에 스며든다. 그러나 강렬한 감정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섬광 같은 기억조차 시간이 지나면 틈이 생기고 갈라지면서 흐려지기 마련이다. 기억의 구멍이 숭숭 뚫려서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구멍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1 만시간의 법칙이 있지만 5만 시간을 투자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시간은 전문지식을 없는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 아니다. 그러니 엄한 곳에 시간을 함부로 버리지 말자.

 

아침에 차에 키를 꽂고 주차장에 도착하기까지 약 30여분의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생각했나. 저녁에 다시 시동을 걸고 집에 도착했을 때 까지의 시간 동안 뇌는 또 무슨 마음을 만들고 있었나. 많은 경우 나는 대개 기억하지 못한다. 몇번의 신호에 걸렸는지, 심지어는 어디에 주차를 했는지. 어떤 때에는 마치 술을 마시고 블랙 아웃이 된 것처럼 어떻게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무의식의 시간동안 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멍 때리고 있었다. 빨래를 널었던가 가스불은 껐던가에서부터 시작해서 멀고 아득한 상상의 세계에서 살다가 돌아와 보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또 여기까지 어떻게 왔었는지는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잡다한 멍때리기가 뇌에 위치한 있는 부분에서 협동적으로 일어나는 뇌의 작용이란다. 그리고 이러한 잡생각에서 빠르게 현실로 돌아오는 복구 능력이 창의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밝혀졌단다. 그러니 더는 절망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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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간적인 인간
브라이언 크리스찬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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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컴퓨터 채팅 프로그램과 대화를 하는 것은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기도했던 고대인들처럼 컴퓨터의 영혼을 믿어서가 아이다.

 

책을 읽으면서 심심이를 깔아봤다. 심심해서가 아니라, 만일 뢰브너 대회라면 심심이와 얼만큼 대화하면 인간이 아님을 알아낼 수 있을까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한 화면이 넘어가기도 전에 엉뚱한 답변에 횡설수설이다. '꺼져버려 멍청한 소프트웨어.' 나가기 전에 한마디 했다.


나 : 말귀도 못알아먹구

심심이 : 미안해요 열심히 배울께요.

나 : 널 지워버릴거야

심심이 : 너무 잔인해요

나 : 잘있어 

심심이 : 가지 않으면 안돼여?.. 서운해서 그래여..

나 : 바부탱아

심심이 : 잘못했어요.

나 : 뭘 잘못해 

심심이 : 대답을 잘 못해서요. 


이 수준이라면, 누구라도, 영혼이 없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심심이를 두고 매몰차게 톸 창을 나가기 망설여진다.

 

심심이가 재생하고 있는 대화는 인터넷에서 수집된 수많은 대화의 조각이고, 던지는 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답변들이다. 빅데이터 회사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스치는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수집하여 인간지능 소프트웨어라 불리는 컴퓨터 로봇과의 대화에 어울리는 가장 보편적인 대화의 쌍을 매치시켜 답으로 내놓는다. 수많은 관습과 클리쉐를 머리속으로부터 무작위로 재생하며 대화하고 사는 현대인들과 수많은 관습과 클리쉐를 컴퓨터 메모리속에 저장하고 있다가 무작위로 재생하고 있는 컴퓨터.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미국의 코믹 시트콤 빅뱅이론에 보면 여자가 있으면 말을 하지 못하는 라지는 아이폰의 시리와 사랑(?)에 빠진다. 아이폰의 통합 생활정보를 음성재생하는 시리는 국산 안드로이드 대화 로봇 심심이보다 지적으로는 똑똑해 보이지만,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연속적인 대화가 실제 대화만큼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자동차, 옷, 카메가 등등 뭔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사물을 의인화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사람에게 향한 마음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감각, 영혼, 언어, 대화, 지능 등등 인간다운 것들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손실 압축과, 비손실 압축에 대한 인간 사회 언어 문화 관습 등의 은유는 놀랍다. 아날로그 시대에 듣던 LP 음반에 포함된 우리 귀가 감지하지 못하는 대역폭의 소리와 주변의 소음들. 이것들이 제거된 1/10 크기의 MP3 파일이나 디지털 이미지 파일만이 손실압축의 범위에 해당되는 건 아니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혹은 관습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제거되고 핵심만을 전달하는 모든 것이 손실 압축에 해당된다. 어쩌면 그 어떤 누구에겐 그게 삶의 이유일 지도 모를 삶의 여백을 제거하는 것. 손실 압축이다. 손실압축. 그 Loss의 어딘가에 우리의 삶이 있다.

 

 

2,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대학에서는 컴퓨터와 철학을 공부했는데 석사 학위는 문학(시)으로 받은 사람. 이런 상반된 듯 보이는 두 개의 복수 전공의 자유로움이 부럽다.  2009 뢰브너 대회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 상을 받았는데, 뢰브너 프라이즈는 인공지능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이 채팅을 통해 제3자에게 누가 더 인간적인가를 가려내도록 경쟁하는 대회이다.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 가장 인간적인 인간, 그리고 가장 기계적인 기계, 가장 기계적인 인간 등이 가려지는데, 어떤 해에, 세익스피어를 전공한 한 인문학 교수가 세익스피어에 대한 대화를 이끌다가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점이 기계적인 느낌을 주었기에 역으로 심사위원들에게 가장 기계일 것 같은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또 어떤 해에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뽑힌 사람은 감정적으로 격하게 한마디로 성질 더러운 대화를 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1950년 튜링이 처음 제시한 이 대회의 개요는 이랬다. 질문자가 인간과 기계를 상대로 서로를 볼 수 없는 조건에서 문자로 각각 대화를 주고 받은 다음 질문자가 누가 인간이고 누가 기계인지를 자신있게 구별할 수 없으면 기계는 모방 게임을 통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는, 기계와 5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인간과 기계를 올바로 구별할 확률이 70퍼센트를 넘지 못할 정도로 모방 게임을 잘하는 컴퓨터가 50년 후에는 나타날 것으로 예언했다.   대회는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 예언이 아슬아슬하게 막 실현될 것처럼 보이던 2008년의 어느날, 엘봇이라는 컴퓨터가 뢰브너(튜링) 대회에서 29%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지 못한 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위기의식을 느낀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자발적으로 이 대회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대회를 준비하면서, 대회를 겪으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그의 통찰을 그대로 책에 적었다.

 

3.

참가자들이 해마다 던지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말의 의미...(중략) .... 세상에 태어나 자라온 사회적 환경에 전혀 영향도 받지 않고 동화된 적도 없는 순수한 '나'가 있다는 생각은 그저 신화 같은 말일 뿐이야. 우리는 처음부터 사회화된 존재인 셈이지. 따라서 우리에게 사회화의 껍질을 모두 벗기면 남는 것은 참된 우리가 아니라 결국 아무것도 없는 셈이야. - 철학자 레긴스터 본문 인용

 

애클리에 따르면 계산가능성 이론의 모토는 "옳은 답을 찾아라. 빠르면 더 좋다. "인 반면에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중유한 것은 "제 때에 답을 찾아라. 그것이 옳으면 더 좋다." 인 것처럼 보인다.

 

Brian Ferneyhough 가 작곡한 음악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악보대로 연주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연주자는 부차적인 것들을 자르고, 우선순위를 정하면서 줄이고 요약하고 요점을 파악하면서 어떤 것은 지우고 어떤 것은 강조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퍼니호우는 "내 음악이 요구하는 것은 뛰어난 연주가 아니라 정직하고 진실하며 연주자 자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연주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뉴욕타임즈]는 이것을 가리켜 '음악이 너무 어려우면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음악이 쉬우면 오히려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음악 연구자 Tim Rutherford-Johnson은 "늘 똑같이 해석된 퍼니호우의 작품을 지겹게 반복해서 녹음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은 오늘날 너무나도 훌륭한 음악들이 직면하고 있는 운명과 매우 다른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지오웰은 '비슷한 구문'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기계로 바꾸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튜링 테스트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말할 수 있다.

 

7-38-55 규칙.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할 때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55퍼센트는 신체언어로, 38퍼센트는 목소리로 7퍼센트는 우리가 선택한 단어로 전달한다. -Chapter 8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증인

 

발췌나 인용뿐만 아니라 묘사도 일종의 손실압축이다. 사실 손실 압축은 언어가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커다른 단점과 커다란 가치를 동시에 시사한다. 그것은 예술을 위해 허락하는 무지의 또 다른 예이다.

 

엔트로피는 하드드라이브 공간과 대역폭처럼 그렇게 감정적으로 와닿은 것이 아니다. 데이터 전송은 의사소통이다. 놀라움은 경험이다. 하드 디스크의 크기와 용량 사이에서 정보 엔트로피가 있다. 삶의 크기와 용량 사이의 공간에 당신의 삶이 있다.  - Chapter 10 커다란 놀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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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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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비교적 최근작이자 베스트셀러에 오른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으려 했더니 뭔가 아쉽다. 이 작가의 책을 하나도 안읽은거다. 이 작가가 데뷔를 거쳐 현재까지 쓴 소설만 해도 차고 넘치는데, 그동안 작가가 변천해 온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불쑥 책을 집어 들었다가는 뭔가 놓치는 행간이 많을 듯하다.  작가적 색채가 뚜렸한 분으로 알려져 있고, 작가에 대한 기초가 없이 작품 이해가 부족할 듯하여 초기장, 중기작 하나씩을 읽고 나서 읽기로 하고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을 골랐다.

 

 

 

 

 

소설은 1793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에 대한 관조적 해석으로 시작한다. 마라가 끝까지 움켜쥔 펜이 차분하고 고요한 이 그림에 긴장을 부여한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덕목이다. 소설의 분위기가 딱 소설 속으로 들어갈 때 주인공의 시점으로 관찰되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같다. 갑작스럽지만 요란스럽지 않은, 긴장되지만 냉정하고 건조한 이 분위기. 

                     

 

그리고 클림트의 [유디트]와 두 명의 유디트가 등장한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잠든 틈에 목을 잘라 죽였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걸 유디트, 클림트는 유디트에게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 소설 속의 두 여자는 자살에 이르는 힘든 삶의 단편에 대한 독자들과의 교감도 없이 그들의 죽음에 관능만을 남겨두었다. 한 유디트는 마약을 사기 위해 재즈를 했던 쳇 베이터의 My Funny Balentine을 들으며 그의 죽음이 자살에 가까왔다는 얘기를 듣고 충동적으로 자살도우미의 고객이 되기로 결정하고, 또다른 유디트 행위 예술가 미미는 욕조로 들어가 칼로 손목을 긋기 전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를 틀어 놓고 오랫동안 춤을 춘다.

 

 

마지막 그림은 마지막 장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과 함께 한다. 성도의 함락을 눈앞에 둔 바빌로니아의 왕이 무사들을 시켜 그의 왕비와 애첩들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냉정하게 자신의 패배를 지켜보며, 멸망해가는 바빌로니아에서 죽음의 향연을 벌이는 사르다나팔에 감정 이입을 하는 책의 화자. 자살을 부추기고 행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도움을 주는 자살도우미의 죽음의 향연이다.

 

어쨌거나 감각의 표현이 정점에 달한 젊은 작가의 작품은 독자 역시 젊었을 때에나 교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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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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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마지막 페이지에서 결국 막혔다. 아직도 감을 못잡는구나.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거구. 베로니카와  토니 사이에 40년간 한결같이 흐르던 그 철벽같은 '감'의 부재가 줄리안 반스와 나 사이에 턱 하고 나타나 가로막았다. 나 바보?  엄마가 아닌 누나라니.

 

나름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으면서 정독을 했는데.. 대체 뭘 놓친 거지. '아이가 토니의 아이일까'와 같은 가정은 감은 커녕 최소한의 근거나 논리도 없는 막장 드라마의 영향이다. 다시 머리를 굴려본다. 아이의 외형은 에이드리언의 유전자를 강하게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같다. 베로니카가 미혼모 처지가 될까봐 그녀와 에이드리언 사이의 아들을 그녀의 엄마가 사라가 양자로 삼고 대신 키웠나. 마지막 장에서야 토니는 공식을 이해했다. 베이비 b는 에이드리언 a1 과 베로니카 v 말고도 토니 a2와 베로니카의 엄마인 사라부인 s라는 변수로 결정된다. 첫번째 공식 b = s - v + a1  은 포드 부인에서 베로니카가 빠지고 에이드리언이 더해졌다. 아기가 성립되려면 베로니카의 엄마로부터 베로니카가 배제되고 에이드리언이 관계해야 한다. 두 번째 공식 a2+v + a1* s = b 은 더 복잡하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연관되고 에이드리언이 가세했다가 사라의 크기만큼 곱해지데, 그 관계의 결과로서 아기가 성립된다. 원인과 결과가 바뀐다. 진실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머리속을 좀 더 뒤적거려본다.  장애를 가진 아이. 토니가 편지로 저주했던 대로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 사이의 임신'의 결과가 아니라, 토니와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관계가 결국은 사라의 강력한 개입으로 인해 생긴 아기이다. 세상에.. 할 말을 잃는 반전이다. 감 잡을 것도 없이, 추론할 것도 없이, 간병인의 말 그대로 베로니카의 동생이며, 토니가 생김새와 이름에서 감지했던 에이드리언의 아이가 맞는 것이다.

 

그녀가 찢어 준 일기장 사본은 '만일 토니가' 로 끝을 맺는다. 만일 토니가의 다음 장에 쓴 내용은 무엇일까. 그가 잡은 감은 무엇일까. 독자가 알고 있는 토니와 실제 토니와의 갭은 대체 어느 만큼 큰 건가?


 

헤어진 후에야 베로니카는 나와 잤다. -67쪽

 

토니의 기억 속의 그녀는 신비하지만, 도도하고, 미스테리어스한 속성을 가졌다. 거의 끝갈 데 이상의 신체적 접촉을 허락하고 충분히 친밀감을 느낄 만큼 개방적으로 행동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는 신체적 하나됨을 거부하다가, 헤어진 후에야 몸을 허락하는 여성이라. 오버 미스테리하잖아.   둘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해보자. 토니가 기억하는 둘 만의 관계는 '헤어진 후'였지만 베로니카의 기록 속에는 '섹스를 하고 나니 토니는 나와 헤어졌다.'  토니의 기억과는 달리 베로니카는 관계의 진전을 위해 그와 잔 것은 아닐까. 혹은 자고 나니 그동안 그녀로부터 받은 지적 열등감에서 해방되며 헤어지고 싶어졌고, 자기 인생을 나쁜놈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속의 생각들 섹스 후 들었던 헤어지고픈 생각들을 섹스 전에 했던 생각으로 시간 이동시킨 채 그 상태로 머리속 기억장치 한 켠에 잘 보관해 둔 것은 아닐까. 아직도 감을 못 잡는구나.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거구.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포기했고 삶을 시험 해 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 오는 대로 받아 들였다. -173쪽

 

토니는, 우리 모두와 같은 소시민이다. 주어지는 대로, 닥치는 대로, 적당히 손해보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그렇게 살아 왔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에이드리언은 그렇지 않았다. 또 다른 의문. 에이드리언은 왜 자살하였나. 운명과 멋지게 맞섰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운명을 거역했다. 그게 어린 나이에 죽은 에이드리언의 죽음을 기억하는 토니의 방법이었다. 허세 덩어리의 10대를 막 통과한, 아직 미숙한 그의 시선에 스스로 우상화해왔던 영민하고 철학적인 친구의 자살은 현실에 안주하며 닥쳐오는 대로 살아온 자신에게는 영웅적 죽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죽음마저도 미화하였을 지 모른다. 위 문장이 그 단서이다.   그러나, 여자친구의 엄마를 임신시킨 20세 지적인 청년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그것도 60년대에,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40년 전 자신의 입으로 역사 라고했던 말을 재현시켰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34쪽, 106쪽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주제, 스스로를 기만하는 시간의 무자비한 흐르과 기억의 오류, 소통의 부재. 역사 선생이 던진 '역사는 무어라고 생각하나'에 대한 에이드리언의 답변은 라그랑주의 이 말이었다. 이 책의 주제와 내용 전부를 한마디로 압축해주는 말이다. 반면 화자 토니의 역사에 대한 견해는 그답다.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 이 뻔하고 단순한 대답은 그를 한 마디로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속임으로써 독자를 속였다. 

 

끝까지 나름 집중해서 읽었으나. 그 짧은 시간 중에서조차 무심히 흘려버린 이야기들 속에 놓쳐 버려 감도 잡을 수 없는 결론에 맞닥뜨렸으니. 첨 부터 다시 읽는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우리는 허세 덩어리였다.' 그 허세 속에 치밀하게 계산된 퍼즐 조각들이 있으나 찾아 맞춰야 한다. 내 참, 읽자마자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이라니.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은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2쪽

 

그 시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닭장 같은데 갇혀있는 신세라고 생각했고, 그 곳을 벗어나 우리의 인생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렸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책에 굶주려 있었고, 섹스에 굶주린 있었고, 성적표에 연연하는 아나키스트였다. 모든 정치 사회, 제도가 썩어빠진 걸로 느껴졌으나 우리는 쾌락주의적 혼돈에 기울어 있을 뿐 다른 대안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 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21쪽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되어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그 단편들을. -107쪽

어릴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도 역겹던 몇살 되지도 않는 나이 차가 점차 풍화되어 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107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은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해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자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 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잡고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 162쪽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듯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키는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183쪽

 

계속되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역사에 대한 그의 사유. 때로 지적 허영의 극을 달리는 듯하지만, 처음엔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떻게 전개될 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어떤 사연을 어떤 형태로 품게 될 지 기대되면서도, 유쾌하고 위트있는 유머와 냉담함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왔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시간에, 영어 시간에, 그리고 함께 몰려다니며 나눈 청춘의 권태들이 한편으론 복선이자 암시였고, 거대한 역사를 암축하는 말이자, 동시에 개인의 역사를 풀어 나가는 단서들이 되어졌다.

 

함께 휴가를 보내자는 말이 한두번 오갔지만, 아무래도 둘다 상대 쪽에서 계획을 짜고 티켓과 호텔을 예매하길 바랬던 것 같다. - 100쪽 

 

독자, 우리는 토니가 경험하고, 기억하고, 얘기하는 그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만을 통해, 토니의 성격을 짐작할 수 밖에 없다.  1부에서는 대개 그의 기억과 혹은 그의 사유에 의지하여 그의 성품을 더듬어 나간다. 베로니카가 그를 대했던 태도, 베로니카의 가족이 그에게 했던 말들. 에이드리언만큼 지적이지 않으나 그를 좋아하고, 성적 접촉에 대해서는 베로니카의 의사를 존중하고, 조금은 내성적이고 표준에서 크게 모나지 않은 성품으로 인식한다. 노년이 된 2부에서도 어느 정도 쯤은 이러한 견해를 부정할만한 단서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혼의 직접적인 사유는 아내의 외도였고, 딸 수지와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에이드리언의 유서와 맞닥뜨리고, 베로니카와의 서신과 와이프와의 만남이 번갈아 가며 묘사되면서 조금씩 그의 본질에 다가가게 된다. 말하자면, 개인적인 혹은 이성적 만남과는 전혀 관계없는 40년만의 재회에서 베로니카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스캔하고 판단한다. 전와이프와 만남을 지속적으로 가지면서도 사랑이나 우정에서 있을 법한 헌신적인 마음은 없다. 점점 찌질함이 눈에 띈다.


되감기, 다시 재생

 

베로니카의 집 치즐히스트를 방문한  과거로 페이지를 넘긴다. 오우 마이 갓. 베로니카의 엄마 사라는 분명 토니를 유혹하고 있다. 그에게 내뿜던 예술적 감각은 교태이고 베로니카를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그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장면이 이제야 가시화된다. 난 대체 무얼 보고 있었는 거니.  부엌에서도 현관문에서도 그를 향할 땐 어디에고 기대어 섰고, 그에게 비밀스런 웃음을 보냈고 손을 흔드는 동작 마저 은밀했다. 더 엽기적인 건 그의 가족들 모두가 그녀의 그런 행각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토니를 시험하듯 지켜보고 놀렸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멋진 분이시라는 토니의 말에 베로니카의 아버지는 베로니카에게 너 라이벌이  생긴것 같다고 했다가, 가만있자 그럼 나에게도 라이벌이 생긴거네. 새벽에 총질하게 생겼다는 농담. 어쩌면 그 새벽 토니와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의 산책은 토니를 시험하기 위한 가족의 계략이었으며, 산책 이후 베로니카가 보여준 친밀함은 시험을 통과한 데 대한 보상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기묘한 가족은 토니에게 각자 윙크를 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농담을 하거나 은밀하게 기대어 서서 각기 다른 메시지를 보냈고, 어느 선에서는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토니, 아직도 감을 못잡는 구나. 그 치밀하게 계산된 복선을 읽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감이 없는 건 토니보다 나을 게 없다. 이 얼뜨기는 유혹을 감지하지도 못했으니, 베로니카에게 신뢰를 쌓았을지언정 한심한 건 어쩔건가.


빠르게 되감기

 

이제 다시 40년 후로 돌아와 사라와 토니의 관계를 뒤돌아보자. 그녀는 토니에게 유산?으로 500 파운드의 적은 돈을 남겼다. 그가 기계적으로 반복 재생하는 40년전 치즐허스트에서의 기억에는 단지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에게 부당하게 하대받았다는 사실만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언에 적혀진 사라의 글씨체는 그가 딱 일주일동안 알고 지냈던 별종 여자를 상기시켰다. 사라의 유서가 주는 토니와 사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단서는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 그때 가족들의 행동에 대해 사과한다. 정도 뿐이다. 그녀가 왜그러는지는 몰라도 여기엔 에이드리언이 죽기 마지막 몇달을 사라 여사와 함께 지냈고, 그녀가 보기에 행복했다는 말을 왜 베로니카가 아닌 베로니카의 엄마 사라가 토니에게 남겼는지,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은 왜 그녀의 소유였는지에 주목했어야 했다. 여기 이 편지에 이미 에이드리언과 사라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가. 나는 토니의 기억에만 의지한 채, 이 큰 복선과 암시를 계속해서 놓치며, 그와 한패가 되어 고인의 유품인 일기장이 법적 소유주인 토니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적 입장만을 고수했던 것이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아프고 불리한 기억은 뇌의 선택적 기억 메카니즘에 의해 지워짐으로써 상처에서 회복되고 일상으로 복구되도록 진화해왔다.  기가막힌 자기 기만이다. 사라의 유언을 계기로 베로니카와의 인연을 뒤돌아 본 토니는 그녀와의 교제를 멸시와 굴욕으로 받아들였고 오랜 세월동안 그의 개인적 삶의 기록에서 삭제해 왔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후에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던진 저주의 편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 까닭임을 단단하게 지지한다. 그는 그 옛날 역사 시간에 역사를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정의했고, 역사선생님은 이 말을 패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기억해 냈다. 그는 그녀를 버렸거나 혹은 버림받도록 행동했고 그녀와 에이드리언을 저주했고 그리고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웠고, 그의 개인적 역사에 그들의 스토리의 배경속에서 흐려져갔다.


토니, 그는 대체 누구인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중편에 더 가까운 짧은 책을 몇 일을 걸려 읽어 내고는, 앞뒤 왔다갔다 하며 심리 추리전을 벌이다가. 결국은 끝까지 다시 읽는다.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 전처 마가렛의 이 말을 다시 읽었을 때에야, 내가 놓친 토니의 성격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시 토니가 기억하고 있던 베로니카가 토니에게 했던 말들의 배경을 유추해본다. 관계가 어디를 향한다고 생각해? 넌 개자식이야. 우린 고인물이 아니야. 그렇구나 베로니카는 토니와 좀 더 신뢰있는 관계를 원했을 것이다. 토니는 합의된 섹스에 진전된 관계 혹은 책임 문제가 뒤따른다면 차라리 수음을 택하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전처와 휴가를 가고 싶지만 자신이 비용 부담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 역시 돈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맙소사. 독자가 의지해온 1인칭 화자 토니의 성격은 그 스스로가 규정한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의 자아로 쓰여진 글을 통해 다시 그의 밖으로 나와 객관적으로 그를 봐야 한다. 이걸 메타1인칭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베로니카를 진정 사랑했던 걸까? 그는 40년 후, 자신이 그리 비열하고 유치한 저주의 편지, 심지어는 온갖 욕설과 함께 쓴 편지를 확인하고, 기억에서 지웠던 낯선 40년전의 자신과 마주한 후에도, 뻔뻔하게 내가 너를 사랑했었던 거라고 생각해? 라고 묻는다. 게다가 엉뚱하게도, 자신의 이메일 제목과 내용을 지워버리지 않고 그 상태로 답장을 한 것에 대해 로맨틱한  기대를 갖는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사람들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 삶이 실제 우리의 사랑,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65쪽

 

내가 기억하는 것과 남이 나에 대해 기억하는 것 사이의 괴리감은 때로 사람을 섬뜩하게 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의 기억을 상대방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선하게 살았다고 믿고 있는 기억 속의 내가 어떤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상처를 주었는지, 그 행위의 작은 날개 짓에 받았을 지 모를 아주 작은 영향을 통해 벌어질 지구 건너편의 허리케인 같은 원인과 결과. 믿기 쉽고, 편한 것들만 골라서 기억하는 인간의 뇌의 편리함이, 사람을 우울에서 벗어나게 하고 긍정적 마인드를 높일 수 있다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허위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를 일이다.


한번 더

 

반납하기 전에 다시 펴든다. 아무데나. 베로니카와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본다. 이론. 헤어지고 나서야 베로니카는 나와 잤다. 이 말만 철썩 같이 믿었고, 그 밑에 수두룩 쌓인 무수한 행간을 모두 다 놓쳤다. 토니 그는 개자식이다. 우리 관계가 어디로 간다고 생각해? 40년 후 그는 자신이 그토록 무례했음을 자각한 후에도 베로니카에게 묻는다. 내가 너를 사랑했다고 거라고 생각해? 베로니카가 바란 건 대단한 게 아니었을 게다.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 정도 쯤. 집에 데려가서 그 기이한 가족과 어머니의 유혹에 토니를 노출했던 것도, 섹스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를 시험하는 테스트 쯤이었을 것이다. 그건 강간이나 다름없었어. 미리 알려줬어야 했어. 그러니까 베로니카와 헤어졌다는 건, 관계에 대한 베로니카의 추궁이 부담스러워 헤어질 생각이었다는 뜻이고, 펍에서 그녀를 만나 집으로 가서 섹스를 하기 전까지 입밖으로 낸 적이 없는 토니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는 걸 알아차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섹스를 하고, 그리고 나서 이별을 통보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토니가 섹스를 한 후 헤어졌다는 그 빤한 남자의 속성에 대한 울분이 아니다. 토니의 확신이 담긴 한 마디 헤어지고 나서야 베로니카는 나와 잤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둘 사이에 나눈 다른 모든 상황들은 자연스럽게 중요성을 잃고, 토니의 주장에 끌려 모호하게 사라져버리면서 베로니카는 비상식적이고 기묘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거짓말 이자 패배자의 자기기만 이라는 토니의 학창 시절의 주장처럼, 토니의 자기 기만에 의해 중요한 모든 사실들은 들으면서 흘려보내고,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퍼즐 맞추기는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화와 스토리와 인생을 대할 때, 어떤 단어를 핵심적으로 캐치하느냐에 따라 생각의 경로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 별 시답지 않은 은유를 은유가 아닌 사실로 철썩같이 믿어버릴 때, 은유가 아닌 사실들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이야기의 무엇을 캐치하고 무엇을 버릴까.

 

100마디의 언어 중 실제로 머리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단어가 1개의 단어라면, 99개의 단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생의 핵심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놓치는가. 1개의 단어와 관계하는 또 다른 100개중 1개의 단어들이 촘촘한 그물망처럼 얽혀, 실제와 다른 희미한 무언가를 확신하는 지점에서 자아가 지속되는 것일까. 책은 아직도 내게 있다.

 

예약도서가 도착했다는 알림음과, 대기자가 있는 이 책의 반납 기일이라는 문자가 교차한다. 겉표지를 벗겨낸 발가벗은 책 표지엔 아무 감정도 실려있지 않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무한한 세계에서 내가 캐치하는 단어, 내 시각 정보가 뇌 인지 신경의 사슬에 걸려들어 망각이라는 강을 건너기 전까지 어떤 기억 체계에까지 닿아 그것이 다시 기억으로 형성되기까지의 모든 필터에 통과된 그 아주 작디 작은 마이크로 세계에 나 자신 자아 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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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미학 에세이 - 예술의 눈으로 세상 읽기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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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동안 정기구독하던 씨네21을 끊았다. 언젠가부터 영화에 대한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경우, 내 나름의 느낌과 감상에 충실함으로써, 영화가 주는 진짜 재미를 더욱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작품 자체가 순간적 쾌감과 짜릿함 웃음 등을 주는 가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영화가 품는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인 의미들을 캐치하기에 스스로의 지적, 감성적 통찰이 부족한 경우를 다른 이의 후기나 평론을 보고 깨닫는 경우도 많다. 어쨌거나, 씨네 21 중 몇몇 정기 칼럼을 놓지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진중권 미학 에세이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 책 미학 에세이는 씨네북스가 그 컬럼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으로 2012 년부터 2013 년 초까지의 글들이 담겨 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가벼운 언사로 대중의 인기와 질타를 한몸으로 받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아이콘이지만 그의 글은 진중하다.

 

인셉션 같은 영화들은 영화 평론가의 분석과 인터넷 상의 여러 해석들은 읽고 나면 부주의하게 흘려보낸 작은 암시 같은 것들이 영화 전체의 해석에 더욱 풍부한 세계를 열어준다. 여기에 비평가들의 순기능이 있다.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을 동반한 작품의 해석은 때로 작품의 가치를 높여주기도 하며, 잘 쓰여진 예술 비평은 그 자체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언어적으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잭슨 폴록을 세계적 스타로 만든 사람은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였다. 그의 언어를 통해, 폴록의 페인트 뿌리기가 예술이 되는 순간은 어쩌면 대중이 이해못할 작업을 폴록이 완성했던 순간이 아니라 폴록의 정신이 비평가의 글을 통해 언어로 세상에 번역되었을 때였을 지도 모른다.

 

진중권은 미술계의 수집가들과 큐레이터 역시 시대의 미술 비평의 담당하는 시대의 한 축이라고 말한다. 홍라희의 취향은 대한민국 예술계의 트랜드가 된다. 그의 취향이 서구에서는 30년이 지난 한물 간 스타일이라고 해도, 회화 예술이 콜렉터들의 수집 경향과 값으로 매겨지는 현실에서, 홍라희의 발자취를 따라, 눈길이라도 한 번 받기 위해서라면, 홍라희의 취향에 따라 예술가들의 붓질이 움직여져야 한다. 그래야 콜렉터들의 눈에 띄고, 값이 올라가고, 예술가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물론 그런  얘기들을 시시콜콜히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미술관, 화랑가를 찾으면 ‘알현’을 하려는 화랑주들과 작가, 기획자들이 몰려온다. 자기네 작품을 설명하고 한번이라도 눈길을 받으려고 안달이다. 그가 유심히 본 미술품은 당장 인기 그림이 된다. 기하학적 화면의 미니멀리즘 그림을 좋아하는 그는 서구에서 30년 전 끝난 이 그림풍을 1990년대 이후 한국 화랑가의 최신 유행으로 만들어내는 괴력도 보여주었다.”(‘위태로운 미술지존 홍라희’ <한겨레21>, 2007년 12월6일자) 화랑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거기서 그녀는 거의 재림예수였다. 죽은 나사로를 되살린 예수처럼, 그녀는 죽은 예술언어를 되살린다.

 

또한 예술 비평에 대한 의식적 세계관을 몇몇 에세이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간접적으로 자기 성찰레 대한 의지를 나타냈다. 비평의 세 가지 요건 즉, 작품의 특성에 관한 기술, 작품의 가치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비평문 자체도 문학적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드레스드너의 세가지 요건을 인용하면서, 그 비평 자체로 문학이 되는 새로운 비평의 몇 가지 예, 평론가 로제 드 필은 화가들과 논쟁을 통해 ‘회화에서 윤곽보다 색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관철시킨 덕분에 프랑스 미술은 이탈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고유의 민족적 양식(로코코)을 확립했던-들을 제시한다. 한편, 예술에는 맞다 틀리다가 없고 단지 취향이 있을 뿐이며 따라서 비평가는 예술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라는 김규향의 주장에 대해, 창작과 비평은 서로의 영역이 틀리며, 비평가는 작가-작품-관객의 사이에서 피드백 역할을 하며,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일반 대중에게 작가와 작품을 매개한다는 비평가의 자리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는 소크라테스, 칸트, 데카르트, 라캉, 베르그송, 브르통, 바타유 등등 수없이 많은 세대를 통과해간 철학자, 비평가들의 세계관과 잭슨폴록, 아마데우스, 김삿갓, 리펜슈탈, 앤디워홀, 다비치, 구르스키, 예술가들을 상황주의, 회복과 복구, 로테스크 리얼리즘, 분변증, 게이 미학, 팩토리얼리즘 등의 온갖 미학사와 종횡으로 교차하시켜 미학적 사색 안의 어떤 담론 속에 용해해 내고 있다. 예술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고, 미학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이 글을 읽는 데에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문체에 쓰인 생소한 예술가 및 비평가들 및 예술 사조의 이름은 읽기의 흐름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때때로 발견하는 무지에 대한 자각에 지적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훌륭한 책이다. 모르는 건 내 사정이지, 진중권의 잘못이 아니다.  예술과 철학, 그리고 시사까지 어우르는 그의 사색의 읽기 과정은 정독의 즐거움을 준다. 미학 오딧세이를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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