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 일반판 (1disc)
이안 감독, 이르판 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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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명보트에서 파이가 벵골 호랑이 리처드파커와 함께 살아남은 스토리는 멋지다.

 

 

파이가 들려준 스토리 중 두번째 스토리가 더 현실적이지만, 우리는 첫번째 스토리를 믿고 싶어한다. 믿고 싶어하는 것과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과는 다르다. 관객을 대표하는 극중 작가는 두 번째 스토리를 믿지만, 파이에게 무엇이 진실이냐고 묻고, 파이는 대답한다. 무엇을 더 좋아하느냐고. 작가는 물론 첫번째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럼 해피앤딩이군요. 파이는 대답한다. 이제 이야기는 당신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해피엔딩이건 아니건 그것은 이제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이안 감독이 영화의 끝에 남기는 암시적 메시지는 언제나 멋지다. <브로크백 마운틴> 에서는 I swear 도 불멸의 여운을 주었건만. 자 이야기는 이제 당신 손에 넘어갔습니다. 대략 이런 말이다. 우리 모두는 내 이야기 속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다. 기억은 가감과 윤색을 거쳐 언제나 불확실하고 희미하게 남겨지지만, 그 윤색되고 불확실한 기억의 연속성상에서 우리는 자아를 빚어내고, 삶을 이루며 살고 있다.

 

 

힌두교에는 수천만의 신이 있다. 파이는 그렇게 많은 신을 믿으면서 또 카톨릭 기독교 역시 믿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신들은 항상 그와 함께 했다. 죽음이 가까와온 운명의 순간에도 그는 신을 찾는다. 나를 기꺼이 데려가라고 말한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파이 자신이라는 설명에 기울었었다. 다시 보고 나서, 메이크필름까지 보고 나니, 아무렴 어때 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뱅골 호랑이 리처다 파커가 파이의 살아남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은유이든, 실제 바다 한복판에서 함께 먹고 동고 동락한 뱅골 호랑이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믿으면 된다.  수많은 신들 중 신 하나만 선택해서 믿는 것처럼...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고 정신적 안식처로 삼는 것처럼. 한 남자 아이가 어느 대양 한복판쯤에서 땡볕과, 허기와, 목마름과, 뱅골호랑이의 위협과, 사투에서 살아남은 스토리 중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되는 거다.


이안 감독은 두 개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우리는 리처드파커와 쪽배에서 함께한 파이의 스토리를 믿으면 된다. 신화는 이렇게 창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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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2 (20주년 기념판) - 마그리트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2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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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2편에도 1편과 마찬가지로, 호프스테더의 <괴델, 에셔,바흐>에서 차용한  3성 대위법적 구조를 이어간다.  1편의 주인공 에셔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1898~1967)로 대체되었지만 에셔가 추구한 상식의 파괴, 일상의 파괴라는 관점에서 마그리트의 이율배반적 주제는 에셔와 연결점을 가지고 있기에 2편에서도 간간히 등장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는 비중이 조금 줄었다. 에셔의 패러독스는 통사론 쪽 규칙을 깨어, 애초에 문법 자체가 틀린 그림인데 비해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문법은 맞지만 의미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매 장마다 주제를 제시하며 등장하는데, 그가 추구했던 철학적 주제인 인간의 조건, 사물의 교훈, 말과 사물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된다. 1편에서 고대 미술부터 중세 암흑기와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 로코코에서 인상파까지로 연대순의 예술사조가 이어졌던 점에 비해, 이번편에서는 주로 미의 철학적 기반을 해석학을 중심으로 탐구하면서 시대 구분 없이 많은 예술 작품들을 논한다.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대는 어떻게 대답해왔는가에 집중한다.

 

현대예술은 당시 주류였던 인상주의의 성과를 안고 다시 고전주의로 회귀하려 했던 세잔(1839-1906)에서 그 모태를 찾는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회화를 구성한 세잔은 사물을 여러 시점에서 본 시각적 단편들을 모아 그 하나의 평면에 재조립하고자 했던 입체주의자들과 풍부한 색체와 빛나는 표면을 처리한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들에게 큰 영햐을 주었다. 세잔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대상에서 형태를 해방시켰고 마티스는 거기서 색체를 해방시켰다'. 이렇게 추상, 표현이라는 경향에 기성품을 예술로 변환시키는  레디메이드와 전통적 화법으로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를 그리려 했던 초현실주의가 보태어 현대 예술의 특성이 가시화된다. 레디메이드는 다다이스트들이 즐겨 사용한 기법이고 초현실주의는 살바도르 달리, 호앙 미로,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를 예로 들었다.

 

예술은 정보소통 과정이라는 주장은 이렇게 설명된다. 창작이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암호화하는 과정이라면 예술가의 작품을 보러 오는 관객은 전언에 해당되고 관객이 이해하는 과정을 해독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작품을 해독하려면 예술적 소통의 사용되는 약호인 예술 언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즉, 이 책은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언어이자 작가가 작품 속에 암호화한 정보를 해독하기 위한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약호를 다룬다.

 

베네데토 크로체(1866-1952)은 최초의 현대 미학자로, 그에 따르면 예술은 직관이라는 관조적 활동, 일종의 인식이다. 직관은 감각을 넘어선 어떤 정신적 능력, 즉 머리속에 그려지는 표현이다. 표현은 외계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자료인 질료를 이용해 많은 양의 인상들을 용광로 속에 혼합하여 무정형 인상에 형식을 주는 활동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예술 뿐만 아니라 언어도 표현이며 곧 예술이다.

 

'실제로 인류가 최초로 언어를 만들어 냈을 때 그건 시에 가까웠을 거다. P83'.

마르틴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 속에 사물의 가려지지 얺은 참모습, 진리가 있다고 했다. 그 예로 고흐의 작품 <구두>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 속에 담긴 진리는 들 일을 하는 이의 근원적 고통, 밭고랑운 걷는 강인함,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 저물녂 들길의 고독과 같은 하나의 물건이기 이전, 촌 아낙네의 삶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자의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니콜라스 하르트만(1882-1950)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구조는 예술작품의 물질적 기체인 전경과 이 전경에서 떠오르는 정신적 내용인 후경의 두 계층으로 이루어지는데, 후경은 다시 여러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 중전 구조를 이룬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드러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상업 부르주아지의 안락한 삶 대신 화가의 길을 택했고, 국가나 귀족들에 위탁해 작업을 했던 이전 화가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최초의 자본주의적 화가가 된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그가 최초의 불행한 자본주의적 화가가 되어가는 과정의 내면을 얼굴을 그린 자화상에 그대로 투영하였다.

 

 

세계 속에 살고 있으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 세계 속의 지식체계나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선입관이라고 하는 선이해는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고대인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신화적 세계관을 가져야 하나 해석학에 따르면 자기 시대의 이해의 지평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 속의 선입관을 지운다면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텅빈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선입관 체계는  이해의 지평이고 모든 시대는 저마다 이행을 지평을 갖고 있으며, 모든 사물은 이해의 지평에 올려 놓아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에게 작품은 근원적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독자에게 새롭게 열리는 은폐된 사물의 참모습이다. 예술은 은폐된 사물의 미메시스(모방)이며 재현이지만, 사물의 외관을 그대로 본뜨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은폐된 참모습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안개낀 바다 풍경을 끈질기게 묘사한 윌리암 터너는 안개가 불편하기만 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안개의 시각적 효과, 안개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감추어졌던 바다풍경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준다. 여러개의 시점에 위해 조각조각 잘려 뭘 재현하는지도 모를 입체파 화가들의 그림조차도 파편 화 된 현대 세계와 소비를 위한 생산에서 비롯된 대상의 통일성의 파괴를 재현한다는 것이다.

 

 

미국 미학자 웨이츠에 따르면 예술에는 본질이 없다. 예술의 개념 을 정의 속에 닫아 놓지 않고 열어 놓는게 전통적 예술관념을 깨는 모더니즘을 설명 가능하게 하고 예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미 분석 미학자 조지 디키는 예술가, 비평가, 화상 등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인 '예술계'가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대상을 예술 작품으로 보았다. 한 마디로 그리고, 비평하고, 사고 팔고, 삐딱한 한 마디 더 보태면 돈 벌고 하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거다. 뒤상의 변기는 예술계에서 자 이제부터 뒤상이 서명한 변기는 예술이다 라고 정의했으므로 그게 예술이라는거다. 대중이 현대예술을 외면하는 이유는 정당했다. 예술은 작품과 수용자의 관점에서 점점 멀어져서 이제 예술이란 예술계에서 자격을 부여한 대상이라는 디키의 의견은 갈 곳없는 현대 예술의 자화상이자, 서글픈 그들만의 세상 속 새롭게 정의한 때묻은 예술이다.

 

로만 야콥슨에 의하면 실어증에는 유사성 장애와 인접성 장애의 두가지 형태가 있다. 유사성 장애는 언어의 선택축이 망가져 낱말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으로, 문장에서 거의 모든 낱말이 사라지고 대명사나 접속사만 남는다. 인접성 장애는 낱말들을 연결시키는 결합축이 망가져 문장 속에서 접속사, 조사, 활용 어미와 같은 연결어들이 전부 사라진다. 유사성 장애는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그 단어가 지닌 성질로 대체시킨다. 누군가 다가올 때 발자국이 다가온다라고 대체된다. 이것은 환유이다. 반면 인접성 장애가 있는 경우 비슷한 성질을 가진 다른 사물로 대체 된다. 아름다운 그녀가 산딸기 꼭지 되는 것 ,이것은 은유이다.

 

현대의 열린 예술 작품은 일상적 전언보다 엄청나게 큰 의미의 용량을 갖는다. 결국 작품은 수용자의 머리 속에서 구성된다.

 

마그리트와 에셔의 작품, 소크라테스와 에셔의 대화, 그리고 진중권의 구어체적 매력적 글쓰기가 바하의 음악처럼, 에셔의 동판처럼 따로 또 같이 계속 조바꿈을 하며 결국 커다란 줄기에서 하나의 맥락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는 이 책. 조금씩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할 구절구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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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지 않을수록 더 적게 먹어라 - 하루 500 kcal, 나는 더 건강해졌다!
시바타 도시히코 지음, 윤혜림 옮김, 아보 도오루 감수 / 전나무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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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 이론상으로, 인간이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루에 필요한 총 칼로리는 기초 대사량과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합쳐 2000Kcal~2500Kcal 정도 된다. 동물 생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현미 채식을 지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저자 시바타 도시히코는 우연한 기회로 대사 증후군의 경계선에 있는 자신의 허리 사이즈를 줄이기 위해 자신만의 저열량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매일 매일 일어나는 몸의 변화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분석했다.

 

기록된 정보는, 매일의 아침 점심 저녁 상세한 식단과 레서피, 하루 총 칼로리 섭취량, 그리고 만보계를 사용한 운동량, 체중과 체지방률을 그래프로 기입할 뿐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변화, 피곤함을 느끼는 정도, 수면의 질과 양, 심리 상태 등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몸의 변화도 포함한다. 덧붙여 매달 병원을 방문하여 정기적으로 체력 검사와 건강검진을 실기하였으며, 건강검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다이어트는 다소 무리하고 생소한 방법으로 시작된다. 매 첫달 3일간 하루 500Kcal 정도의 극단적인 저열량으로 시작하고, 이 때 3Kg 정도의 무게를 줄인 후, 나머지 27일간은 1500Kcal 정도의 저열량 다이어트로 바꾸면서 체중의 변화와 허리 사이즈의 변화를 감시하는 것이다.  처음 3일간의 초저열량 다이어트를 마친 후 다음 날 저열량을 시작하면 바로 나타나는 요요현상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더 저열량의 다이어트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체중이 늘어난다. 그러나 한달 남짓한 저열량 다이어트에 몸이 적응을 하면 1~2%의 첫 3일의 급작스런 체중 감소를 총 합쳐 전체적으로 2~3%의 체중 감량에 성공한다. 매달 이런 식으로 약 2kg 씩 감량한 후에는 아예 최소한의 칼로리인 500kcal 정도의 열량 섭취만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식의 다이어트가 계속되면 몸에 있는 모든 영양성분이 열량을 내는 데로 빠져나가 뼈와 신체의 기본 구성 기관마저도 영양이 모두 빠져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만류하였지만, 지속적인 건강 체크 결과, 오히려 몸의 상태가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의학에서 말하는 양의 칼로리를 섭취하지 않고도 초극단적인 칼로리 섭취만으로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의사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의학 박사들과 인터뷰하면서 그 과학적인 근거들을 제시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이 다이어트 방법이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의사들도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본인의 경험과 의학 지식을 이용하여 이러한 초저열량 다이어트가 이루는 몸의 작용을 설명해 놓았다. 딱히 이 방법의 다이어트를 따라하지 않더라도, 몸을 이해하고, 다이어트에 대한 음식과 그 조리법을 접하는 데 참고할 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에 가장 과학적이고 검증된 다이어트 방법은 칼로리 소비량과 칼로리 섭취량의 차이로 이루는 것이다. 움직이기 싫은데 살을 빼고 싶다면 기초 대사량보다도 적은 칼로리를 섭취하면 당연히 숨쉬고 땀내서 체온조절하고 생각하는 데 필요한 칼로리를 얻기 위하여 몸 어딘가에 축적된 지방을 분해할 것이다. 건강하게 살을 빼고 싶다면 운동과 칼로리 섭취를 제한하는 방법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시바타 도시히코는 매일 먹는 식사의 재료를 일일히 칼로리로 환산하고, 자신의 운동량을 칼로리로 환산하여 기록함으로써, 다이어트의 기본이 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비록 초극단적인 칼로리 소비가 일반인에게는 위험한 방법이고, 또한 쉽게 따라하기도 어려운 다이어트인 것은 사실이지만,다이어트에 필요한 몸의 관찰 요소, 칼로리 계산 등의 여러가지 고려할 점에 대한 정보를 많이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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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사랑이 필요하다 - 애정 결핍과 자아도취에 빠진 현대인의 심리분석
한스 요아힘 마츠 지음, 류동수 옮김 / 애플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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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진화한 인간이 가진 기본적 속성인 모양이다.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애정결핍에서 비롯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결핍이 생겨나고, 그 결핍을 감추기 위해 생겨나는 크고 작은 상처들은 한 사람의 인생에 치명적일 수 있지만, 인류 역사에도 위협이 되기도 한다.. 


몸이 아프다. 피곤이 겹치고, 두통과 섬유근육통이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한다. 어제 고속버스 차창 밖 풍경을 느끼며 충만했다고 여겨지던 뇌속의 도파민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노르아드레날린으로 바뀌었다.  일을 멈추고 간이 침대에 몸을 눕힌다. 심호흡을 하고 어제 스님이 쓴 책에서 읽은 메타자아를 떠올리며 받아들인다. 통증과  그로 야기된 불편한 마음을 한 발 물러서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본다. 서랍 속의 두통약 펜잘이 간절하다. 먹을까 말까.  다시 심호흡을 해본다. 원인.. 이 책이 생각났다. 아픔의 원인은 어쩌면 내재된 자아 속 어린 시절 인정받으려고 했는데 충족되지 않았던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어디엔가 받지 못한 무언가의 결핍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어릴때 받아야 할 만큼의 사랑을 충부히 받지 못하면 나르시시즘적자아도취  장애가 생긴다.  그리고 그 본능적으로 느끼는 질적 사랑은 함께 있는 시간의 양이나 물질적 만족, 영혼없는 과장된 애정표현으로 충족시껴줄 수 있는 것이  못된다. 부모 는 자신의 욕망이나 결핍을 아이에게 투사함으로서 자신의 자아도취를 자식에게 되물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한스 요하임이 전하는 내용이다.   


강의 신 케피소스가 요정 레이리오페에게 겁탈하여 탄생한 나르시스는 모성애의 결핍과 환경적 영향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빠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신화다. 이 책은 코후트의 현대 나르시시즘 이론에 기반한 현대인의 장애입은 자아도취 장애를 개인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현상에서 설명한다. 장애입은 자아도취는 어릴 때 받았어야 했을 애정 결핍에 대한 보상 작용으로 이해되는 심리학적 증상으로 과도한 자기애(잘난 자아형)와 부족한 자기애(못난 자아형)의 두가지 대립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애정 결핍과 소외를 방어하고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장애입은 자아가 만들어낸 거짓 자아이다. 손상된 자아는 고통스런 결핍을 상쇄하고 감추기 위해 탁월한 성과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거칠고 사나울 수도 있고 때로, 수모를 겪은 자아는 권력을 지향할 수도 있다. 충만을 꿈꾸며 늘 불만, 긴장, 불안의 상태에 있는 장애받은 자아가 투쟁적 노력, 끊임없는 비교, 무한 성장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잘난 자기애이다. 반면 어린 시절에 체험한 평가 절하와 인정 결핍은 열등감과 자신감 장애를 가져오기도 한다. 자신감 장애는 외부의 인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남에게 최대한 맞추려 든다.  

 


권력자와 추종자, 부부나 연인 관계 잘난 자아와 못난 자아는 사회 속에서 상호 공생 관계로 만나는 경우가 많다. 한스 요하임은 광기에 사로잡힌 국가사회주의나 부채를 조장하는 극단 소비주의, 심지어 다이어트와 패션 성형등에 몰두하는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애정 결핍에서 비롯된 자아 도취의 방어 기제로 설명한다. 특히 나치 정권하의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극도의 자아도취에 빠진 잘난 자아의 지배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는 사실을 병적 극단적 집단적 자아도취로 해석한다.  

 


어릴 때 필요로 되는 부모의 애정은 함께 있는 시간이나 물질적 풍요 혹은 작위적이고 과도한 애정의 표현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애정의 질, 인정하는 눈빛 따뜻한 품 같은 것들이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로 되는 질적 애정은 공감이다. 부모의 자아 도취 장애가 자식에게 전달되어 되물림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를 입은 자아는 공감할 줄 모르며 자기 자신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나 자신도 깊은 곳 어디쯤인가엔 결핍을 느꼈을 심리적 상처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손상받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나의 행동이 결핍에서 나오는 자기 방어인지 돌이켜 보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나를 둘러싼 사회 병리적 현상들을 결핍에서 비롯되는 심리학적 원인들로 해석하고 어떤 집단적 광기에 나도 모르게 휩싸여서 자아도취적 방어에 이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인간관계 역시 뒤돌아보고 거짓 자아가 규정한 성격이 아닌 공감과 개방성 솔직함을 바탕으로 인간관계를 개선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 등의 개인적인 노력이 거대한 집단 자아도취에서 만들어내는 병폐들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스 요하임의 책과 더불어 근래 독일 작가가 쓴 책을 읽을 몇 권 읽었는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히틀러의 시대의 학살의 자책과 2차 대전의 패전을 유산으로 가진 독일 지식인의 정신과 사회상을 은근히 엿볼 수 있었다. 홀로코스터라는 전대미문의 학살과 광기의 역사는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내재된 결핍과 그로 인한 방어 기제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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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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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누구에게나. 사라지고 싶은 날. 도망가고 싶은 날. 도피하고 싶은 날. 누구나. 대개 탈출의 꿈은 냉혹한 현실적 장벽에 부딪치기도 전에 상상 속에서 장열하게 전사한다. 그러기 전에 매번 떠나는 걸 시도한다면 역마살에 막장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탈출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런어웨이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남겨질 사람에게 나의 부재를 경험시키고픈 욕망이었다. 나 없는 너. 나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을 너, 그리고 후회, 참회의 눈물, 그런 종류의 드라마적 상상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상상의 나래는 색상을 보태고 갈래를 뻗어버리고 애초의 정당성을 잃으면서 흐지브지 꿈으로 끝나고 결국 너에게 나의 부재를 안겨줘 보지 못하고 나의 존재는 아무 변화없이 갈등은 시간 속에 무디어 지면서 시시하게 끝나는게 우리의 일상이다. 런어웨이에서 칼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짜릿한 도피는 그녀의 남편 클라크에게 그녀의 부재를 경험시켰고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었다.

 

사소한 거짓말이 발목을 잡고 날로 거칠어지는 남편에 대해 회의가 들던 어느 날, 칼라는 뜻밖의 기회를 접한다. 떠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돈과 거처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순간의 그 황홀한 자유.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쾌감의 편지 한 줄. 나 떠나. 갑작스런 도피가 진행되던 그 하루동안 맛본 그녀 최고의 젊은 날. 그녀가 현실을 깨달았을 때, 런어웨이가 한가한 상상에서 흘러나온 환상이 아니라 내가 혼자서 부딪치고 살아내야 하는 척박한 현실이 되었다는 급작스런 깨달음과 함께 오는 두려움은 도피 이후의 삶과 집으로 돌아가는 삶 두 개의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것이 있었다. 결국 그녀에게 잠시의 떠남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성장 과정이었다.

 

클라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클라크는 칼라의 인생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간 길을 마치고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클라크의 자리는 무엇이 차지하게 될까? 클라크 외에 그 무엇이, 그 누가 생동감 넘치는 도전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낯선 휴게소에서 칼라를 데려온  클라크는 칼라를 나무라는 대신 칼라를 부추긴 실비아를 협박하러 찾아가지만, 그가 복수한 대상은 칼라가 마음을 준, 갑자기 집을 나가버려 칼라가 그렇게나 오래 찾아 헤매던 염소 플로러였다. 갈등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 두 사람 사이를 유령처럼 나타나서 해결해준 플로러를 클라크는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나중에 묘사되는 작은 뼈들이 플로러의 죽음를 암시하지만 플로러의 부재를 묻는 마굿간 고객에게 클라크가 무심히 던지는, 없어졌다며 로키산맥으로 튄 모양이라는 대답이 그의 행방을 클라크의 심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암시의 전부이다.

 

클라크는 칼라가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전화했을 때 기꺼이 그녀를 데려왔지만, 안개속에서 칼라가 아끼던 플로러가 나타났을 때 최소한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칼라의 탈출 한나절 동안 칼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러나 칼라는 평소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플로러의 부재를 힘겨워 했지만, 귀환한 플로러를 버린 클라크에 대해 어떤 원망도 없다.  클라크는 칼라의 탈출을 플로러의 탈출과 어떻게 연결하고 있었으며 플로러를 어떻게 한 걸까. 왜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제목 런어웨이가 뜻하는 것은 혹시 칼라의 런어웨이가 아니라 플로라의 런어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플로러는 집을 나가 헤매다가 귀환을 바랐으나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걸까. 로키산맥으로 가서 자유를 찾았든, 혹은 길에서 죽었든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런어웨이에 이른 것은 플로러이다.  우리에게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란, 탈출 이후의 단계란, 칼라의 그것처럼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플로러의 그것처럼 다시 집을 찾아 복귀해도 버림받고, 갈 곳 없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영원히 미지의 것이라는 걸까. 플로라의 귀환과 클라크의 내침. 혹 클라크는 칼라의 런어웨이를 플로라 대신 단죄한 것일까.  클라크가 플로러를 어떻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칼라의 이해할 수 없는 무심함 역시 내겐 숙제 같은 의문이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해 어디에서 어떠 단초를 찾아낼 수 있을까

 

실비아는 칼라의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몸을 사랑한다. 실비아가 뭘 어쩌려고 그녀를 도와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지나치며 이마에 살짝 입맞춤한 것에 설레고 기쁘지만, 자신이 그리스에서 사다준 값비싼 선물에도 시큰둥한 모습에서 실망하고, 그녀가 울자 그녀를 돕는다. 앨리스 먼로는 이런 동성애적 코드를 불편하지 않게 묘사한다. 그저 그녀를 보면 설렐뿐이다. 뭔가를 주고 싶고, 보고 싶고, 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가 딱히 동성애자인 것도 아닌 것 같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종종 비슷한 감정을 받는 모양이지만. 실제 우리가 알고있는 동성애자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언젠가 어디선가 인간은 누구나 양성애적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육체를 탐하지 않는 설레임과 애틋한 감정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누군가를 설레일 만큼 좋아하는데 그 대상이 동성인 경우가 종종 있다면, 그 사람도 광의의 양성애자라고 할 수 있는걸까. 실비아는 자신의 집에 일을 해주러 오는 건강미 넘치고 활달한 칼라에게 느낀 감정이 상대에게도 받아들여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작은 단편이지만, 읽는 내내 마치 스릴러같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른다.  그러나 대가의 작품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시점은 읽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른 후부터 시작되는 여운이 이리저리 생각의 얹어리를 배회할 때부터이다. 칼라를 옥죄어오던 칼라의 거짓말은 한나절동안의 떠남으로 흐지브지 되었다. 칼라의 거짓말에 현혹되어 실비아를 협박해서 돈을 받아내려던 클라크의 계획은 이 짧은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 넣었던 가장 큰 이슈였지만 마치 없었던 일처럼 이슈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소설 속 애매함과 불확실함은 혹시 노벨상 작가의 오만은 아닐까?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집에 대해 뭐라 총평하는 것도 우스워 일단 표지의 작품집 제목과 일치하는 첫번째 작품인 런어웨이에 대한 감상만 적는다.  이미 그녀의 문학에 대한 아주 유명 평론가들과 매체의 서평 핵심 문장들은 표지와 띠지 곳곳, 전자책방 홈피 구석구석, 그리고 이 책의 판매 페이지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가령 놀랍도록 아름답다던가, 일상에서 발견되는 진실이라던가. 이미 읽기 전에 그런것들을 접한 후에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겹치지 않게 그녀의 소설에 대해서 한마디 보태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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