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라인 판타지 로버트 A. 하인라인 걸작선 2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조호근 옮김 / 시공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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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편 : 너희 모든 좀비들은(All you zombies) 

영화 : 타임 패러독스


언젠가 매우 오래전에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영화 리뷰를 썼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 영화 보고 나서, 누군가 영어로 된 텍스트를 알려줘서 찾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얼마 전에 그 영화를 다시 봤다. IPTV에 한달에 1만원 정도 내고 프리미엄 영화 채널에 가입되어 있는데, 어느날 그 영화가 앞에 뜨더라. 오래 전에 봐서 상세한 내용은 기억 못하고, 엄청나게 아주 엄청나게 충격적인 반전이 시작되면 더더욱 충격적인 결말로, 그래서 결국은 이거 뭐 막장이야 뭐야 하고 끝나는 내용임에도, 그 상세한 스토리를 기억력 못하는 나는 뭥미 하면서 다시 보았다. 다시 보아도 처음 봤을 때랑 마찬가지로 또 충격적이고 (솔직히 보면서 내용이 생각나기 때문에 충격은 덜하지만), 그래도 두번째 볼때는 문맥을 더 많이 이해하는 관계로 더욱 심도있게 관람할 수 있다. 그걸 보고 나서 다시 또 텍스트를 찾아본다. 이거 보니 그 영화를 첫번째 봤을 때랑 똑같은 프로세스를 반복한다. 영화 보고, 충격 먹고, 인터넷 서핑하고, 텍스트 찾아 읽고, 리뷰 쓰고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는 한국말 텍스트를 못구해서 읽을 수 없었고, 지금은 인터넷에 떠다닌다는 거다. 어떤 잡지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누가 베껴서 인터넷에 올려놨다. 구글에서 타임패러독스 원작 이렇게 대충 치면 많이 나온다. 그것보다 더욱 희소식은 시공사에서 해당 단편을 담은 단편집이 나왔다는 소식이다. 바로 이 책 <하인라인 판타지>가 그것이다. 텍스트를 떠다니는 인터넷으로 읽고, 리뷰를 쓰려니 제대로 번역된 책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품을 팔아 인터넷 책방 상품을 뒤져서 발견해냈다. 2017년 5월 발간인데 이렇게 묻혀있다니. 하인라인이 쓴 소설이라면 전에 어떤 애가 달이랑 화성에 가서 벌이는 모험을 담은 장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하나만 읽었는데, 뭐 그닥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던지라, 저자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지만, 시공사의 하인라인 걸작선 세트(혹은 시리즈) 도서는 탐난다. 그 중에서 단편집은 오직 이 책 하나인 듯하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하인라인의 단편집은 없는 듯하다. 


지난 번에 영어로 읽었을 때는, 영화에 대한 느낌이 워낙에 강했던 데 반해 제공된 단편 텍스트가 워낙 짧아 이게 뭐야 했던 기억만 있는데, 이번에는 짧다는 걸 알고 읽어서 그런지, 영화 안보고 텍스트만 보는 읽는 것도 상당히 신선한 경험일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아직 안보신 분은 인터넷으로 텍스트를 먼저 읽고 그 감상을 말해주시길.   


책 얘기만 하고 내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내용을 조금만 말하면 스포가 되고, 스포가 되는 순간 읽는 즐거움은 폭망한다. 그러므로 아직 안읽으신 분은 아래 내용은 스킵하시길. 조금만 힌트를 주자면, 시간 여행물인데, 제목이 너희 모두는 좀비라는 좀 판타지나 괴기 스러운 제목이다. 얼른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왜 좀비라는 말을 썼는지 오싹한 느낌과 함께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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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될 수도 있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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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물들을 보면, 시간을 되돌아가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온다. 시간 여행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이 가능할까 라고 묻는 것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불가능한 걸 주제로 했기에,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더욱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함의 세계를 조롱하며 즐기는 방법이다. 시간 여행을 해서, 너 자신과 만난다면? 이라는 이 불가능한 상상속에서 평범한 인간이 가능한 상상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가끔 스무살의 내 자신과 만나면, 너는 잘 살아갈꺼야.  하지만 키 큰 남자 뭔가 우수에 차 있고, 뭔가 알 수 없는 생각이 있어 보이는 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다시 생각해보렴 하고 조심스럽게 조언해줄 것 같다(진담은 농담을 이용해서 해야 뼈가 있어 보이면서도 덜 심각해보임).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가 스무살의 온전한 나 자신과 만난다면, 나는 그녀를 눈물겹도록 사랑할 것 같다. 어쩌면 남자로 태어나 그녀를 사랑할 것 같다. 이런 자뻑은 만일 돌아간 내가 (혹시 남자 행세를 하고)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실제로 가능할 지도 모른다. 반대의 성이 된 자신이 과거의 나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는 것일까? 혹은 그 반대일까? 음하하하 여기까지. 


다시 정리. 텍스트로 찾아서 읽으시오(여기를 누르면 링크로 이동. 참고로 루리웹임). 10분이면 읽음. 그리고 나서 영화를 보시오. 나는 거꾸로 해서 이 텍스트의 참맛을 잘 모르겠으며, 이런 막장스런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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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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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라는 용어가 책의 표지와 제목에 자주 사용되는데 적어도 학이라는 글자를 붙일 때에는 학에 걸맞는 내용을 써야 한다. 인문학과 수필 혹은 에세이 산문 등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생각이지만 수필에는 근거가 필요없다. 잘 표현된 말끔한 생각의 매끄러운 흐름이 필요할 뿐이다. 독자는 이해하거나 습득할 필요없이 공감하고 느끼고 감동하면 된다. 인문학이라면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뭔가 배울 게 있어야 된다. 산문에서도 다른 이의 생각을 통해 드러나는 관점을 배울 수 있지만 애초 인문학 서적이라면 생각의 탄생 과정이 공상이 아니라야 한다. 뚜렷한 증거와 논리로 생각의 발생 과정을 납득 가능한 텍스트로 나열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스맛폰은 몸에 해로워. 자본주의 꺼져.성형은 개객끼야. 이런 류의 호소는 대개 어떤 식으로 말해도 먹힌다. 하지만 이건 북한을 신뢰할 수 없으니 관계개선 마저도 부정하는 정치집단과 아베 세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스마트폰의 여러가지 폐해에 대해 한번쯤 환기해 가며 사는 것도 좋다. 자본주의도 그렇고 싱형도 그렇고.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르나. 오죽하면 몇년전 떠돌던 사진에 모임에서 스맛폰을 다 걷어 중앙에 쌓아놓은 모습이나 제일먼저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는 인간이 밥사는 내기같은 것이 생겼을까. 자본주의는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는 현대 국가의 선택이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한 이후 화폐가 등장하면서 언제 자본주의가 아닌 적 아닌 곳이 있었나. 고대 중세의 중국이나 페르시아 같은 곳에서도 상인들이 늘 등장하고 화폐가 없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소금이니 조개껍질이니 하는 것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바꾸고 물물교환을 했는데 말이다. 단지 국가의 제재가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체제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 뿐. 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때문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폭력과 전체주의 때문에 이미 가치는 훼손되었고 나란히 경쟁하던 자본주의와의 격차 때문에라도 후진제도로 낙인 찍혔다. 그러니 무슨 대안이 있나


대안은 사회제도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문제점을 끊임없이 교정해 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다 문제점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문제를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마다 처한 환경과 역사와 사회 구성원과 집단적 종교적 믿음이 다르기에 성공한 나라의 제도가 다른 나라에 똑같이 성공할 수도 똑같이 적용가능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말하려면 정치관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 보수는 자유와 욕망을 헷갈려하는 듯 하지만 청년 실업 문제를 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진보는 국가가 나서서 도와줘야한다고 믿는데 그 믿음의 기저에 있는 지식과 철학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말하려면 정치와 경제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공허한 외침과 다를 게 없다. 이 책은 그 책과는 달리 문장이 힘차고 세련되었고 호탕하게 단정짓는 결기에서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음양오행 이론이니 역학이니 하는 고전을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그리고 저자의 주장 대로 몸은 하나의 우주라는 관점도 지지하지만 그 음과 양의 개념은 단지 사물을 보는 하나의 방법이지 그것을 책으로 논할 때는 납득가능한 증거나 논리를 제시해야 과학이 아닌가.  특히 남자는 양기 여자는 음기 이런 관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구 문화의 많은 언어권에서 사물에 여성과 남성 중성을 부여하는데 예를 들어 배는 여성이면 언어가 이미 고착된 상태에서 나타난 명사들 차 스마트폰 에어컨 이런건 여성인건가 남성인건가. 음기 양기를 따질 때도 오랜 맹신을 체계적 맹신으로 교묘히 바꾼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읽을 땐 나름 재미있었는데 이게 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재활용한거라 호흡이 짧다. 주장이 먼저 있으면 그다음 근거를 기대하게 되는데 대략적인 맥락만 있고, 주제로 넘어간다. 개별 주제가 짧다보니 공백많고 텍스트는 상대적으로 적은데 텍스트의 양에 비해 두꺼워지는 비효율적 선택. 과학은 우리시대의 주술이라며 무당들의 주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온통 수치로 이루어졌다고, 오진률, 근거가 희박한 정황들, 맹목적 의존성 등의 측면을 예로 들었는데 과학을 이렇게 일반화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타 쪼가리 하나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맹신과 이 맹신은 어떻게 다른가. 차라리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에서 지우고 편히 자기계발서나 뭐 수필 같은 걸로 포장하는 게 정직할 듯하다. 


글이 더 세련되고 글의 틈새에 저자의 유식함을 드러내는 지식 조각들이 많을 끼어 있는 게 다를 뿐 근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 얘기를 자꾸하는 이유는 저자가 책에서 그 측을 까는 부분이 있어서다. 앞서도 말했지만 문장이 힘차고 찰져서 읽는 재미는 있고 공감가는 부분도 많다. 공감 안되는 부분이 그만큼 많은데 설명이 없으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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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탕 2018-09-30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들고 안들고가 어딨어요. 그게 삼라만상의 이치이고 순리인 것을요. 물론 귀하처럼 여성이지만 양(+)적인 분들이 있고 반대로 남자지만 음(-)적인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양과 음의 이치는 상대적인 가치이기도 합니다. 여성이 음인 것이 기분 나쁠 것도 없습니다. 양은 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양은 항상 드러나기 때문에 속을 알수 없는 음을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연애에 있어서도 양의 존재인 남자 보다 음의 존재인 여자가 원하는 이성을 내 것으로 빨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이것은 음의 존재 블랙홀을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핵심은 그 존재는 그 존재로서 온전히 빛날 때 가장 귀하고 빛이 납니다. 이를테면 음이 양의 기운을 다른 음보다 조금 더 지녔다 해도 그 양적인 기운이 남자 보단 못할 것이고 자신의 본질인 음의 기운마저 같은 여성들 보다 못하니 그보다 매력 없고 불리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가을이라 독서하기 참 좋은 시기네요. 행복하세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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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 교수의 공간에 대한 철학, 건축과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동안 내가 여행을 하거나 거리를 걷거나 낯선 공간을 체험하면서 느낀 막연한 생각들을 제대로 설명해주었다. 그만큼 공감되는 게 많았다. 예를 들어 중소 규모의 도시에 가면 나는 늘 허름하고 좁은 골목길에 매료되곤 하는데 점점 그러한 공간들이 없어져간다. 남아 있다 하더라도 새로 지은 원룸촌이 지나다니기도 어려울만큼 빽빽하게 주차된 차들과 함께 원형을 잃은 낯선 공간으로 변한 모습에 안타까워하곤 한다. 

왜 골목길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었는데 나는 그것이 일종의 향수일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크다.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아이들이 골목길의 정겨움을 알 턱이 있을까. 저자의 설명은 다르다. 공간에 속도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이론은 저자가 직접 연구한 이론이라 여겨지는데 어렵지않은 단순한 계산 방법이지만 도시 공간의 걷고싶은 길에 대한 많은 단서를 준다.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공간을 체험하는 거다. 우선 이걸 먼저 생각해보자. 뭘하든 수동적인 행동보다 능동적인 활동이 훨씬 재미있다.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 역시 수동적인 행위가 될 수도 보다 능동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공간의 구성에 따라 결정된다. 만일 어떤 공간이 보행자에게 다른 길로 갈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똑같이 생긴 변함없는 담벼락으로만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면 스스로 걷고 있다 해도 걷는 행위 자체에 선택귄도 없고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도 변화가 없어서 내가 걷는다기 보다는 길이 나를 태우고 가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반면 골목이 많고 단위당 출입구 수가 많으면 계속해서 보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이벤트의 수가 풍부해지면서 보행 자체는 걸으면서 흘끔거리거나 들러서 뭔가를 산다거나 혹은 코너에서 턴을 한다거나 하는 수많은 이벤트를 만들수 있고 그러한 작은 공간의 조밀한 연결이 비행자의 다채로운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형건물들이 밀집한 곳에 사람들이 걷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의도의 마포대교 오른쪽 편 산업은행이 있는 주변엔 대규모 건물이 엄청난 수의 사무원들을 아침마다 깔대기로 흡입하듯 거리의 출근자들을 빨아들였다가 저녁이면 뱉어낸다. 점심 시간에는 사무원들로 활기찬 이 곳이 퇴근 시간이 지나면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싶을만큼 인적이 드물다. 그러나 다리 하나만 더 건너가면 자연스레 형성된 구도심 상가 지역에, 지저분한 간판을 달고, 작은 술집과 밥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은 달라진다. 사람들로 붐벼나는 것이다. 


유현준 교수는 공간의 효율성을 위해 어쩔수 없이 선택한 큰 덩치의 고층 대형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걷고 싶은 거리 더 나아가 살고 싶은 도시 보러 오고 싶은 거리를 만들려면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잘 디자인된 국내외 건물들의 예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여행이나 책을 통해 익숙한 건축가, 익숙한 건물들이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컨셉에 잘 조화롭게 어울려,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피터 춤토르, 안도 다다오, 프랭크 로이드 등등 건축물을 계획할 때에는 단지 외형적인 디자인 뿐만 아니라 그 건축 공간 내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도 고려되어야 하는데 때로 외형적으로만 예쁘게 만들려고 하는 크리에이티브 아트 디렉터 얘기도 나온다.

저자는 또한 19세기 이전 건축이 왜 오늘날의 건축에 비해 아름답다고 느끼는가에 대해 이런 견해를 가진다. 산업화 이전의 건축은 당연하게도 건축 재료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하다보니 주변경관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비슷한 재료로 만들어진 주변에 통일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스나 발칸반도의 해변 경사진 마을의 새하얀 집들이 대단한 건축물이 아님에도 유명 관광지가 된건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집들이 통일성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서울의 언덕위에 지어진 달동네 주택들은 비록 예쁘자는 않지만 작은 집들과 골목들로 충분히 사람과 사람간의 거리를 좁혀준다.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그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엄마들이 함께 하던 사회적 기능을 하던 골목이라는 공간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공원이 대신하게 되는데 이런 개념은 르 코르뷔지에의 머리속에서 나온 개념을 흉내낸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이 도심속 공원을 제공한다고 광고의 판타지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게 잃는 것이 바로 집을 찾을 때 걷던 길과 골목으로 이제는 엘리베이터와 숫자와 복도가 이를 대신한다. 저자의 이런 생각에 너무 공감이 되어 울컥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오래전 새벽마다 커다란 스피커로 새마을 운동 노래를 틀어놓고 마을 사람들을 깨우며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그렇게 정겨운 우리것들을 다 때려없애자던 박정희 정권이 끝난 후에도 옛 것 특히 건물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이를 갈고 없애는데 혈안이 되어왔다. 일이십년만 지나면 때려 부수고 더 효율적인 공간의 활용을 위해 새로 짓고 부수고 또 새로지어 주택가로 온전히 남아있는 골목길이 멸종 위귀의 희귀종이 되고 난 후에 남겨진 골목은 이제 수십년간 그곳에서 그곳을 만들고 살아온 예술인들과 원주민, 상인들을 더이상 임대료도 지불할 수 없게 임대료를 올려 쫓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 잔치를 벌이는 중이다. 


할렘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보는 입장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곳에서 수십년간 터잡고 살던 가난한 흑인들을 뉴욕 외곽으로 내쫓는 자본주의적 개발논리에 의해 소외되는 원주민 문제이고 또 하나는 더이상 손써볼 수도 없이 우범화되어 범죄의 온상이 되는 곳을 살리고자 하는 시당국의 노력이다. 빈잡이 속출하고 건물 곳곳은 손상되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 지역을 살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그런 선택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거란 생각을 해보니 할렘의 경우, 너무나도 고질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젠트리피케이션 그 자체만을 문제삼을 게 아니라 양면성을  모두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때,  이미 너무 우범지역이 된 곳이라 집 하나 새로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개발업자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블럭 하나를 통채로 손본 것이다. 브라운스톤의 아주 오래된 건물은 헐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도록 복구 되었으며 주변에는 스타벅스와 반스앤노블 조합의 체인점을 유치했는데 그 두개가 뭔 성장성 같은게 있는지 그 가게가 같이 있으면 동네가 급이 달라 진단다. 그렇게 개발된 곳은 흑인 변호사나 전문작들에게 임대해 주어 조금씩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고. 결국 있는 사람이 이사오게 하여 그 블록 자체에서 못사는 흑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고, 그 젠트리피케이션은 조심스럽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데, 이제는 낮에도 관광객들이 기 지역을 활보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흑과 백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개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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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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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드릭 배크먼의 소설을 꽤 많이 읽었다. 읽은 책의 개수 만큼 광팬이라 할 수는 없는데, 알고 보니 국내 출간된 저자의 책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거의 전 작에 걸쳐서 배크맨의 고유한 문체가 약간 닭살돋는다고나 할까, 취향에는 조금 안맞는 다고도 할 수 있는 문체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러한 특징은 결국 읽을 때나 또 읽고 나서 인간에 대한 따스함과 연결되기에 대체로 만족감을 느낀 것 같다.


이번 책은 다른 책과는 조금 달리 주제 자체가 무겁고 어두운 내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닭살스러운 문체의 유지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조금은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던 전작들에 비해 몇가지 큰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사회적 민감성과 범위가 전례없이 넓고 크고 진지해졌다. 크게 보면 작은 마을의 폐쇄적인 스포츠 문화와 십대의 강간이라는 큰 주제로 요약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너무 많은 생략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베어타운이라는 문화의 폐쇄성은 눈으로 뒤덮힌 그림처럼 아름다운 꽝꽝 얼어붙은 북구의 시골마을이라는 우리의 편견적 환상을 가차없이 무너뜨린다. 북구의 작은 마을에서 연상되는 웰빙 라이프 역시 상상속의 판타지였음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토록 잘 사회안전망이 잘 구축되고 정비된(되었다고 하는) 그곳의 사회 곳곳에서 자본의 규칙이 배제될 리가 없다.


마을 사람들은 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마을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하키팀을 응원한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 스케이트를 함께 배우는 아이들은 하키에 모든 걸 건다. 이 마을에서 하키는 가난하고 고립된 작은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위안이자, 자존심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볼 때 이 마을에서 하키는 폭력이기도 하다. 하키를 하던 여자 아이들은 십대가 지나면 플레이를 하는 대신 응원을 하고, 하키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괴짜로 취급받기도 한다. 마을의 권력은 하키팀을 후원하는 사람들에 집중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은 하키팀의 관점에서 해결된다.


마을 사람들이 거의 모두 무대에 등장할 정도로 많은 등장 인물이 자신만의 고유의 번민과 사연을 가지고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인물들이 헷갈려 가독성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의 크고 작은 사연들은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주요 동력이 된다. 분명 커다란 주제와 몇몇 두드러진 등장 인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개별 인물들의 사연들은 그저 주변의 백그라운드 형성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하키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얽혀 있으며, 한결같이 마을의 하키팀의 흥망성쇠에 운명이 걸쳐져 있다.


탕탕탕 이 반복적인 구절이 자주 거슬렸고, 너무 많은 인물의 등장과 사소한 사건들의 나열로 인해 중간에 좀 흥미를 잃었었으나, 만족스런 결말이 전체적인 독서를 대만족 상태로 결론내도록 이끌었다. 강간을 당하고도, 그 대상이 마을의 가장 유망하고 가장 인기있고 가장 부유한 집안의 하키 선수라는 점 때문에, 무차별한 폭격인 2차 피해를 당하는 소녀가 안타깝지만, 끝내 마을을 떠나지 않고 복수를 결심한 소녀의 행동을 아슬아슬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마음이 통쾌한 복수와 한 두 사람에서 시작한 진실 밝히기가 이후 마을 사람들의 작은 변화로 이어지던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고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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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의학 콘서트
이문필.강선주 외 지음, 박민철 감수 / 빅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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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약 70~80년간의 평균 수명이 보장된 건 불과 200년 사이의 일이다. 평균수명은 19세기 중반까지 30년대였다고 한다. 평균 수명의 연장은 한 세대 한세대 거쳐 서서히 진행되었기에 예수탄생이나, 철, 종이 화약 인쇄술 같은 것의 발명과 같이 인류사의 대박 사건으로 손에 꼽힐 수는 없었으나, 전체 인류 문화사를 통틀어볼 때, 이처럼 의료가 개인이 생명을 노후까지 보장하는 때가 없었으니, 이렇게 되기까지 인류사에 있어서 의학은 어떻게 발전 혹은 변화하여 왔는지 여러가지 궁금할 때가 많다.  


요즘은 어린 영아 시기부터 생명과학과 관련된 지식들을 접하기에, 19세기까지 의사들도 몰랐던 기본적인 위생 개념과 의학지식을 언어를 습득하듯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하지만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알고 태어난 듯 당연히 알고 있는 의학적 지식; 심장박동, 혈액 순환, 위연동운동과 위액,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 이런 것의 작동원리와 존재를 알기 시작한 것은 수천년의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단 200년 전부터의 일이다. 그 전까지 몸의 동작은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였다. 과학 혁명의 시대에 수많은 의료인이 혁명적 아이디어를 보태던 18세기, 19세기까지도, 일반인에게 의사는 마차나 기차를 타고, 자신이 가진 의료백에 있는 보잘것 없는 기구와 진통제를 비롯한 몇몇 약 중 하나로 처방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지식이 공유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 책을 통해 긴 인류 인류 문명의 의료 행위의 세계사를 살펴보니, 최근 100~200년 이전의 의료는 그저 스스로 '의사'라고 칭한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이후 혈액순환원리발견, 신경기능의 발견, 뢴트겐의 X 선 발명, 종균법과 면역학, 현미경의 발명과 세포의학, 파스퇴르의 백신 개발 등 연이어 발생한 의학계의 사건들은 혁명적이다. 그 중에서도, 통계를 의학에 접목하여 의학통계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피에르 루이스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의학적 실험은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하므로, 과학실험과는 달리 마구 실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록과 분석을 통해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수치적 통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이 피에르 루이스이다.  질병 표본을 일정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꾸준히 조사해야 하며 효과는 수치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이런 주장으로 이전까지 의사 맘대로 아무 제약 없이 독약도 사용가능했던 치료 방법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그전까지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던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사혈요법의 무익성을 알린 것도 그가 통계를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문명이 발생한 곳에 전쟁과 질병이 있었고, 삶을 구하는 행위가 의료행위였으므로, 생물학 구조와 지식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몸은 블랙박스였을 터다. 기독교 전파 이전, 고대 이집트, 히브리, 인도 메소포타미아, 중국 그리스 로마에이르기까지 의학은 신앙적 성격이 융합되긴 했으나, 나름대로 과학적 가설하에 인체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긴 시간동안 축적된 경험으로 약초와 침술 사혈 등이 임상적 효과를 보고 있었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의학의 맥이 끊긴건, 기독교가 인간의 정신 뿐만 아니라 지식, 사회, 제도 등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과학과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세의 암흑기에 마녀사냥과 주문 등으로 병을 대할 때 고대 의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건 아랍과 페르시아 쪽이다. 알다시피, 성경은 정신병의 원인을 마귀로 설명한다. 그래서 의료 행위는 마귀를 쫒는 의식이었고, 여기에는 온갖 고문, 화형과 교수형도 포함되었다. 20세기까지도 성경에 여성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고통받아야 하기 때문에 출산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취제를 사용하는 것을 종교계가 반대했다고. 종교가 어디 도움이 되었다는 소리를 어느 역사서에서건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제목이 '한권으로 읽는 의학콘서트'로 되어 있는데, 독자로서 부제를 붙여보면 '세계사 속의 의료인' 혹은 '의료위인전의 세계사' 쯤으로 붙여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이 책은 세계사 전체를 훑으며 방대한 양의 의료계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한다. 너무 많은 의료인이 등장해서 의료인 사전 비슷한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사전식으로 주요 정보만 압축해서 보여주는 건 아니고,  마치 어린이 위인전처럼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고, 저서가 무엇무엇이 있고, 누구의 제자였고 이런 깨알같은 정보가 촘촘히 박혀져 있다. 


따라서, 잘 정리된 의료과학적의 역사를 기대했던 전문인들에게는 두서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을텐데, 일반인에게는 따라가기 힘든 전문적 내용만 나오는 것 보다는 이런 의료인들의 삶에 있어 크게 의료부분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는 부수적인 이야기가 읽기를 용이하게 해줄 수도 있다 하겠다. 맥락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여러 인물들을 짧게 정리한 위인전처럼 시대별로 엮은 듯한 느낌이 아쉬웠다. 


편집 면에서는 20명 저자들의 소개가 전혀 없어, 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줄 소지가 있다는 점과, 레퍼런스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무슨 논문도 아닌데 문단 마다 레퍼런스를 미주에 표시해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읽으면서 의심이 가거나 흥미로운 부분이 생기면 어디서 더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도록,  또한 내가 알고 있던 부분과 다른 거나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라도 생기면 그 출처가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과학서적이니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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