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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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꾸로 돌려 물리적인 나 자신과 만나야 한다는 조건을 뺀다면, 누구나 과거와 만날 수 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둘은 닮은 듯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나는 어느날 수십년 전에 함께 기숙사에서 반년을 지냈던 대학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애가 기억하는 나, 그 애가 묘사하는 어떤 순간 그애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긴 시간동안 친구의 기억 속에 저장되며 변형된 이미지와 묘사를 통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낯설었다. 오랜 시간동안 변해온 지금의 나와 연결되고 결국은 어떤 본질이 그 안에도 지금의 내 안에도 있을 것이다. 


엠마누웰 카레르의 이 소설, 한달 내내 읽게되는 <왕국>의 초반 ⅓ 분량을 읽을 당시의 마음이 그랬다.  바오로와 루카가 등장한 이후 수도 없이 밑줄을 그었지만, 결국 내 얘기로 돌아와서 서두를 시작했다. 카레르처럼 나도 그러고 있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어떨까. SF 작가 필립 K 딕의 뒷담화를 나누다가 한 말이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지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처럼 말도 안되는 것을, 그리스 신화나 도깨비들이 나오는 동화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때, 그러니까 기독교 탄생 초기에는 과학도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오늘날에 만일 어떤 신들이 백조로 변신한다던가 두꺼비에 키스하면 백마탄 왕자로 변신하는 스토리를 믿는다면 미친놈이라고 할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믿고 있어도, 미친놈으로 여겨지지 않고, 설사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대해주는 일들이 참으로 희한한 일들이라고 썼다. 


그는 이 책을 기획했고, 그러기 위해 그 희한한 기독교 세계의 믿음에 관해 취재하기 위해, 기독교 커뮤니티들과 함께 하는 크루즈 여행에 신청했다가 취소한다. 여기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시전하시는데,  알고보니 작가 자신이 20여년 전에 열혈 기독교 신자였던 것. 그는 믿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대신 20년 전의 자기 자신을 찾는다. 자신이 수년간 매일 읽고 공부하고 암기하고 메모했던 수십권에 걸치는 자신의 노트와 대면한다. 믿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 믿지 않는 현재의 자기 자신이 충돌한다. 그가 만나는 과거의 노트에는 훗날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그 날과 같이 종교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현재 그는 그때 바랐던 그 상태가 아니다. 그 점에 안도한다. 


나는 카레르가 글을 쓰는 방식이 첫번째는 솔직해서 좋다. 이 솔직함은 자기 자신을 후벼 파고 구멍을 뚫어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오랜 시간 단어를 조합해야 표현 가능한 지적인 솔직함이다.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 자아에 대한 자부심과 환멸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슬퍼 허무해 쓸쓸해 기분나뻐 이런 식의 빈약한 몇 개의 미리 만들어놓은 진부한 형용사 조합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발가 벗어 헤쳐보고 들이다 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리하여 그가 기획한 바오로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은 과거의 종교적 체험과 현재 그것을 반추하는 시간들을 인내심있게 읽어내야 하는 130쪽이 이후에야 시작하는데,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관련된 생각, 그리고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결국은 이것이 역사책이냐, 유사 역사책이냐, 혹은 개인적 체험을 담은 에세이냐, 혹은 바오로와 루카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냐 라고 그보다 더 많은 쟝르의 특징들을 말해도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카레르식의 저작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범주화하기를 좋아하고, 제목을 붙이기 좋아하고, 뭔가 정의하기를 좋아하니, 내식대로 이 책을 다시 정리해본다면 역사의 재구성 혹은 역사 소설을 위한 자료 조사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 역시 틀렸다. 핵심은 이 책 속에 종교의 기원을 찾는 역사적 탐구 이외에도 기록의 빈틈을 빼곡히 메운 무한 상상력이 레고 블럭처럼 촘촘히 기록의 틈새와,논리의 헛점을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오로의 자취와 루카의 자취를 따라간다. 고대 로마의 역사, 유대의 역사 속에서 네 개의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쓰여지고, 유대교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어떻게 유대인만 제외하고 전세계인의 종교가 되었는지에 대해 유추한다. 상상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상상인지 유추인지 이런 것은 내가 논할 문제가 못된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종교에 대해,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를 대해 늘 의문을 품었던 여러가지 주워들은 사실의 기원에 대해 풍부한 단서를 제공한다. 성경과 성경이 쓰여진 당대 역사와 언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거기에 충만한 종교적 체험까지 갖춘 저자가 분석한 텍스트를 통해 궁금했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주는 것은 물론, 종교의 탄생이라는 근본적인 과정까지 흥미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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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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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집에 있는 단편 모두가 짜릿하고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자극적이고도 믿을 수 없는 단편이 <어둠 속의 두 사람>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들을 엮은 책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몇년도 개별 작품이 각각 몇 년도에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었고, 작품집의 copyright이 1990, 1994로 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그 이전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것은 알겠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수도 없이 많은 작품을 쓰고 번역되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어 엄청난 수의 작품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신 장편을 몇몇 개 읽다보면 다작을 하는 작가들 특유의 안이함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작품집의 단편들은 머리 속에서 펼쳐지는 그 많은 이야기의 향연들을 아낌없이 짧은 소설에 압축하여 넣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 그의 장편에서는 쓸데없이 장황하고 복잡한 서사로 논점을 흐리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서사에 사회적 메시지를 부각시키로 허술함을 메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그야말로 아 이 짧은 소설에도 이토록 강력한 미스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거란 걸 실력으로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중학교 교사가 학생의 전화를 받는다. 3개월된 자기 동생이 살해되어 학교에 결석한다는 소식이다. 일본에선 1990년대 쯤이면 학생이 결석하면 교사가 방문도 하고 그랬던 모양이다. 교사는 이 일로 결석하는 아이를 세 번 이나 방문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아이의 가정 환경과 심리를 더욱 친밀하게 관찰하는 화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로서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사회와 문화적 코드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추행의 일상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일본 문화에서 느껴지는 추행의 일상화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었을 때에서도 드러난다. 잘 모르는 아저씨가 밤에 젊은 여성의 가슴을 주물럭 거리고 그것 때문에 몸싸움이 한동안 벌어지는 데도 이 재치 발랄한 아가씨는 별 문제 삼지 않으며, 후에 그 런 성추행범과 오히려 친구가 되고 감싼다. 여기서도 그런 장면이 비슷하다. 아이의 집에 방문 중, 아이는 난데없이 <야간비행>이라는 향수를 한 번 발라보라고 부탁한다. 여선생이 마지못해 바르고 나니, 또 냄새 맡아봐도 되냐고 묻고, 그러고 나서는 덮친다. 이게 그냥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그러니까 강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성폭력의 시작 단계에서 가까스로 헤어나온 것인데, 선생은 이 일을 문제삼지 않을 뿐더러, 아이에 대한 교사로서의 관심, 보살핌 이런 심정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동범죄법 같은 게 있기는 하지만, 중학생도 이미 체력적으로는 성인과 맞먹을 정도의 체력을 가진 아이들도 많고, 그런 상태에서 (힘이 약한) 어른을 성폭력했다면, 법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는 어떤 책임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그런 것도 궁금하다. 어쨌든, 사건 초반에 드러나는 것은 학생의 엄마가 계모라는 사실이고, 그 계모를 학생은 엄마로서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으로 칭하며 내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인데, 이후 그 계모에게는 친부가 출장 중일 때마다 방문하는 아버지 회사의 부하 직원인 정부가 있었고, 그날 3개월된 아기가 목졸려 살해되던 밤에도 그 사람이 방문했던 것이 밝혀진다. 게다가 부하직원이 계모를 방문하는 통로는 아기가 있는 방의 유리창을 통해서인데, 그 날 유리창이 잠겨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출장가기로 했던 아버지가 마침 출장이 취소되어 집에 있었던 사실까지 밝혀진다.


이쯤되면, 답은 거의 나온 듯하다. 계모와 불륜 관계에 있던 부하직원이 아기방 유리창을 통해 들어왔다가, 남편이 있는 사실을 알게 되고, 때마침 아기가 울어 남편을 깨우게 될까봐 죽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렇게 예상대로 흘러가면 미스터리가 아니지. 불륜 사실이 밝혀지고 자취를 감추었던 계모는 당시 상황을 곰곰히 생각하다 어떤 충격적인 결론을 도출하고는 그 불륜남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주러 돌아온다. 이 단계에서 계모는 사건의 전모를 확신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계모는 다시 아이를 방문한 선생에게 '오늘은 할 일 이 있다'며 내보낸다. 이 때 소름끼치는 느낌으로 선생은 휘청하고, 잠복 혹은 뒤따라 방문하던 형사들은 다같이 뛰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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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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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국으로서의 일본의 면모를 이토록 점잖고 우아한 미스터리로 승화시킨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하면 야동, 야동 하면 일본이 생각나지만 그것은 서버 컬쳐일 뿐이고, 내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본의 문화는 얌전하고 드러내지 않고, 내성적인 느낌이 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점잖은 작가의 작품에서 야동의 하나의 쟝르일 수도 있는 패륜적 성행위는 그 자체로서 대단한 충격이고 자극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성행위에 대한 묘사는 단 한줄도 없다. 하지만, 성행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욕망에서 비롯되고, 욕망은 가지지 못함 혹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에서 더욱 커져간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가장 비윤리적이고 가장 파렴치한 사람은 계모다. 하지만 계모의 불륜은, 형사들마저도, 그 왕성한 나이에 한 사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을 테지 하며 이해하는 분위기다. 이것도 일본적 정서로 이해할 만하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그렇다고 나오지는 않지만 그럴 듯)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전처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매사에 반항적이고, 한 가정에서 엄마로서의 자기의 지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아이야 말로 생리적으로는 가장 왕성하고 가장 호기심 강한 성적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성적 매력으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계모가 그 매력을 이용하여 단 한번의 유혹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천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천재성은 거기까지였다. 처음 발견한 아이의 성적 세계에서 생성된 욕망의 방정식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인류가 섹스의 즐거움에 빠져서 종종 까먹곤 하는 원초적 목적, 새생명과 DNA의 전달이라는 그 엄청난 재앙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성적 판단은 욕망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으며, 생명의 무작위성은 가장 불필요한 인연을 야기하기에, 비극이 탄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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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걸작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최종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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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속에서,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이 희생과 인내 잘해줘봐야 그 인내 속의 강인함 모성 같은 걸로 다루어지는 게 가끔 못마땅하다. 그런 게 요구되는 사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고 선하지 못한 인간이 되어 버리는 사회에서 그거 말고 다른 이상적인 여성상을 원하느냐 라고 하면서, 그것이야 말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똑같이 비슷비슷한 좋게 말해 헌신적인 삶, 실제로는 착취되는 삶만이 퍼져있다면, 왜 그 똑같은 삶이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것이 왜 어떻게 소설이 되고, 좋은 소설이 되고, 상 받는 소설이 되고, 널리 읽히는 소설이 되는가.


안나 카레리나가, 마담 보봐리가 그토록 윤리적 지탄을 받는 여성이 주인공임에도 수백년동안 읽히는 이유는, 그녀들의 삶이 용감무쌍하고 본받을만 하고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이, 비록 독자들에게조차도 지탄받을 인격을 드러내는 일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 여성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다뤄지고, 그 불륜의 ‘악마적’ 욕망의 이면에 남녀 보편적인 그러니까 인간적인 진신들을 비추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배경이 되는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체제 내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생각하였는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다. 북한을 여행하는 이유와 같다. 뭐 대단한 오락거리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체제 속의 사람들, 무늬만 공산주의의고 사유재산과 자유가 보장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인권유린과 핵미사일과 같은 어두운 베일 속에 숨겨진 그 곳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어서 서구 사람들이 북한에 여행을 가듯. 소비에트 연맹 시절의 러시아 소설을 읽었다.


스테레오 타입의 주체성 없는 여성의 대표는 미인이다. 미인에 대한 찬사가 빠진 자리에 추녀의 이미지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큰 키에 책만 읽는 소네치카는 도서관에서 만난 남편과의 삶 속에서, 자신이 그 남자에게 너무 너무, 그러니까 남자에게 부당하리만큼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세대만큼의 차이가 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인 남편이 당하는 체제적 억압과 그로 인한 가난마저도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 행복은 하늘같은 남편과 함께하는 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딸의 친구와의 관계를 확인한 후에도, 올 것이 왔다, 이 남자를 나혼자 오래 차지하는 것은 부당했다라고 생각할 정도다. 보통 막장 코드라 하면 부적절한 관계가 겹치기로 일어나거나 자극적이고도 부적절한 관계가 형성될 때 그렇다. 뭐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 같은 고전적 막장 말고 막장의 창의력은 무궁무진하다.


(늙은) 남편이 너무 멋있고 대단한 예술가여서 젊은 여자를 사랑해도 되고, 아니 그러는 게 당연하고, 자신은 그 젊은 여자애 마저도 품을 수 있다면, 막장 맞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진짜 막장이 아니다. 이 여자애가 딸의 친구인데, 딸이 사랑한다. 그러니까 이 고아애를 한 가족 세 사람이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 소재도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게 쓰느냐에 따라 막장 코드를 벗어나 ‘박경리 문학상’을 받는 대단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문학상은 재미없어야 되는 거냐고!!!! 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 자극적 막장 소재를 얼마나 잔잔하고도 평이하게 그리고 있는지, 하마터면 눈치채지 못하고, 타샤를, 야사를, 소네치카를, 그리고 작품 속 늙고 잘난 그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공감하며 이해할 뻔 했다는 것이다.


책소개를 하자면, 세 편의 중편이 들어있고, 그 중의 하나인데, 주로 가족 드라마인 것 같고. 작품 설명과 리뷰들을 읽어보면 세 편에 들어있는 소설들의 주제는 일관되게 가족과 여성의 인내로 다루어지는 듯하다. 소설 속 여성은 원작에 반말 존대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번역되면서 둘이 대화할 때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에서 고양이 인간들이 우주어를 쓰면서 한국적 존대-하대 문화를 흡수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남성 중심의 어머니들에게서 태어났다고 해도, 21세기에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셔서 번역자들은 이 점을 신경써서 번역해주었으면 좋겠다. 부졸드 소설 속 여성들은 비록 그 미래의 세계에서조차  고립된 채로 700년을 지내니 다시 원시적 남녀차등의 문화로 돌아가는 행성이 배경이지만, 그 속에서 여성의 활약은 눈부시다. 여성은 존중받고, 대상화되지 않음에도 여전히 우주 전체를 달굴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뜨거운 로맨스를 갖는다. 


여러 소설들을 배회하다가 소네치카 같은 여성들을 만나니, 이런 의문이 든다. 공산주의는 실패했다고 쳐도, 애초에 여성과 남성의 그 엄청난 간극을 메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면서 ‘공평’하다는 ‘공산’주의는 대체 왜 시작한거니. 이건 진보 인사들이 유독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는 시점에서도 돌이켜볼 만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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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알면 옛 그림이 재밌다 - 쉽게 재밌게 읽는 옛 그림 길라잡이
윤철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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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그림들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더듬어 추측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인물화는 역사에 남겨진 유명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산수화는 당대인들의 이상향과 우리 강산의 모습을 그리고 민속화는 정말 얼마 없는 민중들의 실제 일상의 보습을 보여준다. 그밖에도 책과 문구를 그린 그림 개 고양이 같은 애완 동물이나 식물과 정물화는 선조들이 자연과 어울리던 모습의 일부로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이런 민속사적 가치를 떠나서도 나는 우리 옛 그림들이 참 좋다.


흔하고 화려하고 또 사실적으로 묘사된 서양화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잔잔하고 정적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그건 아마도 신비감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있었지만 갑자기 없어져 사라진 우리 것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의 정서는 잔잔하게 퍼져가는 먹물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동양의 그림은 ‘사의(뜻을 그리다)’ 라고 해서 복잡한 현실의 사실적 재현보다는 단순하고 생략된 묘사를 이용하여 사람의 심정, 생각 사상을 주로 그림에 표현하였기에, 알쏭달쏭한 그 뜻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무한의 세계가 탐구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채색화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옛 그림에서 단출한 붓과 먹 몇가지 화구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재료로 다채로운 그림을 표현하기 위해 붓의 터치감과 먹의 농담 등을 자유자재로 조합하여 사용한다. 서양화가 밀려들기 전까지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러니까 중국 대륙에서 수천년동안 사용하면서 발전해온 기술을 받아들이고 수정하여 전수한 기술이므로, 잘 알지 못했던 미술적 기교가 엄청 많다.


이 책의 구성은 이것만 알면 미술이 재밌다. 라고 하는 제목과는 달리, 백과사전적인 구성을 띠고 있으므로 재미와는 조금 거리가 멀다. 뭘 잘 모르면, 그림이 좋아서 월페이퍼로 화면 가득 채워놓고 들여다 본다고 한들, 그 그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굉장히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그림이라는 거, 그리고 예술이라는 게 뭘 알아듣고 말해야 감상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지식이, 동양화에 관련된 모든 용어들을 나열 설명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 그것이 진짜로 뭘 뜻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또한 해당 용어들을 대표하는 그림이 옆에 나와 있는데, 그 그림과의 연관성도 적다.



그림을 깃들인 용어 설명집에 가까운 책이라,  읽은 후, 대부분은 잊었지만, 읽으면서 들은 느낌은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특히 그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림의 모든 기법들과 용어들이 송이니 당이니 하는 중국 나라들에서 기원을 찾고 있으며, 유명 화가의 영향권 내에 있다.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는 화본집이 유행했다는 거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굉장히 유명한 국내 작품들도 중국에서 건너온 <고씨화보>, <당시화보>, <개자원화전> 같은 유행처럼 휩쓸었던 화본집의 내용과 핵심 부분이 일치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건 옛그림의 정취를 좋아하던 내게 약간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배신감인데, (특히 그 이름도 유명한 정선의 그림까지 그럴 줄이야)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중국에서 간행된 어느 화보보다 인기가 높았던 베스트셀러 화보입니다. 이 화보는 우선 전체가 다색판화로 돼 있습니다. 그 위에 해당 장르에 대한 화론의 소개는 물론 유명 화가의 기법을 부분으로 분해해 실어놓아 초심자라도 쉽게 따라 그릴 수 있게 했습니다.”


“《고씨화보(顧氏畵譜)》는 17세기 말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화보 가운데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명나라 때의 전당(錢塘) 사람 고병(顧炳, 미상)이 역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목판으로 찍어 1603년에 펴낸 것으로..그림에 대한 교양서 역할은 물론 그림 그리는 화가들에게도 좋은 화본(畵本)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에서 이 책을 가장 먼저 활용한 화가는 윤두서로, 그의 그림 가운데 몇몇은 《고씨화보》에 실린 그림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그 외에 정선, 심사정, 최북, 김득신 등이 이 화보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분명한 그림을 남겼습니다.”



여러가지 기법들이 많이 설명되어 있지만, 메모할만한 수묵화의 붓사용법 몇가지 메모.

피마준(披麻皴)은 옅은 먹을 묻혀 얇고 가는 선을 평행하게 여러 번 중복해 긋는 기법, 부벽준은 약간 마른 먹을 묻힌 붓을 옆으로 뉘어 빠르게 내려 그으면 도끼로 내리친 것과 같은 느낌이 나는 거친 바위가 표현, 하협준은 연잎을 들고 아래로 내려뜨리면 잎맥 선이 아래를 향하면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표현한다.


또한 예황식(倪黃式) 산수는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유행한 산수화의 한 경향으로 예찬과 황공망의 기법을 합친 것이다.  앞쪽에 얕은 언덕이 있고, 그 뒤로 넓은 수면이 펼쳐져 있으며, 물가 끝에 다시 낮은 산이 이어진 구도를 말한다. 황공망의 필법은 그가 자주 구사한 피마준 기법을 말한다.



중국 그림 소개가 많아서 내겐 신선했다. 밑에 있는 마원의 그림  참 좋다 싶었더니, 유럽에서는 표준적인 중국 화풍으로 생각할 정도로 영향력이 높은 마하파의 화풍으로 산수화로 이름을 떨친 남송의 화원화가 마원과 하규의 화풍이라고 한다.  간결한 필치로 광활한 느낌을 주는 산수 묘사가 특징으로 그림 중심을 한쪽 아래에 두고 반대편의 넓고 빈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히 마원은 빈 공간에 정교하게 묘사된 나무를 자주 그렸고, 하규는 일부만 그려진 산세를 강조하기 위해 먹색이 강한 부벽준을 잘 구사했다고. 서양에까지 그렇게 알려질 정도이니.. 당연히 한국, 일본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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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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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아이는 여자 아이다. 떠나온 곳은 떠나간 곳이다. 죽음은 시작이다. 살해자는 살해당한 자이다. 나는 너지만 너와 나는 다른 삶이 있다. 키큰아이는 키작은 아이이다.  교사는 학생이고, 할머니는 어린 손녀고 어머니는 아버지이고. 남동생은 여동생이다. 반역자는 반역당한 자다. 욕망하는 자가 대상화되는 자다.



꿈속에서 종종 나와 타인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어떤 타인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나’더라는 식의 기이한 경험은 꿈속에서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득한 무의식 속에서 타자는 나의 자아 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타자 속으로 들어간다. 타인과 나의 이 이상한 오버래핑이 그쪽 세상에서는 분명 어떤 맥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잠이 깨어 이쪽 세상으로 돌아오고 나면 혼몽한 기억들은 흩어져 눈깜임이 된다. 찰라적 시간으로 얇게 압축되며 결국은 사라진다. 붙들고 남는 것은 책에 등장한 터너의 ⟪Cave of despire⟫처럼 경계와 윤곽이 사라져 희미하게 번져가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유체의 이미지 뿐이다. 



꿈은 시와 비슷하다. 아득하고 푸근한 기억일 때도, 끔찍한 공포의 습격일 때도. 그 어떤 상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때도, 그 꿈의 형체, 시각적 기억과 스토리와, 맥락은 마치 한 방울의 잉크가 물 속에서 스미듯 사라진다. 배경도, 소리도, 맥락도 모두 빠르게 물러설 때, 그것을 잡으려 애타게 허우적 거리는 동안 잠시 아주 잠시 더 머무는 어떤 느낌과  감각이 있다. 이 느낌과 감각은 하나의 몸이 꿈과 현실이라는 이질적 두 상태를 공유할 때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되고 경계가 된다. 눈을 뜨는 순간 다리는 붕괴한다. 



붕괴된 다리의 파편이 물잔 속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푸른색 잉크처럼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면서 점점이 흐려지다가 의식에 스민다. 아주 조금. 마음의 톤을 변화시킨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리고 시가 된다.글자를 모르는 눈아이와 얼이와 그림자같은 아이들의 몹시도 긴 시처럼, 그게 무엇인지 명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글자시스템을 갖지 못했기에 문자가 되지 못한 시, 마음 속의 시가 된다. 서사는 사라지고 한 방울 잉크로 붙잡아 전체에 스며든 느낌은 잊힌 꿈 속의 폐허가 된 림보의 섬 속에서, 아득하고 그립고 섬뜩하고 또 슬플 때를 알고 스민 물감의 흐릿한 흔적으로 현실 세계의 시를 쓴다. 놀랍고도 긴 시를.  상상력이 쌓은 시를 쓴다. 서사가 완성되는 동안 새로운 세계는 재건되고 폐허 속의 기억은 파괴된다.



각 작품이 따로 발표되어, 단편집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 읽다보니 연작인 것 같았고, 세계관을 공유하며 느슨하게 연결된 단편들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더 읽어 보니,  (작가가 이 말에 동의할지는 의문이지만) 이 개개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고 결론내렸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어서, 나는 그렇게 읽기로 했다.  나에게는 이 책의 개별 작품들을 하나씩 떼어놓으려야 떼어지지가 않았다. 조금씩 느슨하게 연결되다가 흐릿해지면서 서로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어떤 응집력이 자꾸 서로 불규칙하게 붙여 경계가 사라진다. 결국 야박하게 쥐어주던 ‘이야기’ 귀퉁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맥락이 사라지고, 거대하고 자유롭게, 끝없이 넘실거리는 은유와 알레고리가 풍부한 이미지로 흡수된다. 아무렴 어때. 이야기만이 삶의 목적인 건 아니잖아 ?



어떤 유명한 소설가가 그랬다는데, 하나의 소설이 천명에게 읽히면 천 개의 소설이 된다고 했다고 한다. 제대로 기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 사람에게도 하나인 소설은 몇 번 읽느냐 혹은 어떻게 읽느냐 에 따라 무한대로 증식한다. 그러니 작가여 팔리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마시라. 하나의 낯선 소설은, 하나의 지독히도 낯선 소설은 한 명의 독자만 가져도 밀리언셀러도 될 수도 있다. 몇 번을 읽었고, 여러 방식으로. 때로 띄엄띄엄. 때로 같은 페이지를 반복적으로. 읽을 때마다 달랐다. 다만 한 가지, 최종적인 느낌, 느낌의 순간만이 기록으로 박제가능하다는 점이 아쉽다. 



6살때까지 남자아이였다가 7살 이후 여자아이가 되는 아이들은 여왕, 마법사, 혹은 흉노에게 해를 당할까봐 남자로 살지만 7살 이후 여성이 되고, 죽거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거나, 어머니의 부재에 익숙하다. 이 기본적인 설정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배역과 파트를 서로 바꾸어가면서 되풀이하는 연극같다. 같은 시대의 비슷한 인생 무대에서 조금씩 다른 배역으로 살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키가 훌쩍 커 버린 여자 아이는 어떤 인생에서는 교사에게, 동네 건달들에게, 갖가지로 배경을 달리하며 탐욕의 대상이되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소외를 안고 사는 아이는 희미한 존재감 속에서 물성을 잃어버린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에서 트럭을 타고 스키타이의 묘지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눈아이는  ⟪얼이에 대해서⟫ 에서 밤기차를 타고 반두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1979⟫ 에서 키큰 여자아이를 욕망하는 과수원집 교사에게 아이의 여행은 거짓말이다. ⟪노인 울라Noin Ula에서⟫ 에서 만난 눈이 먼 눈아이는  ⟪눈 속에서..⟫에서 본 아이와 이름도 묘사도 같다.  경찰서 창 밖으로 화자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던 눈먼 아이. 이 눈먼 눈아이는 마법사를 어머니로 둔 ⟪눈 속에서..⟫의 화자와도 ⟪눈 속에서..⟫에서 화자가 목격한 눈먼 아이와도 동일 인물로 보인다. 아버지의 부재, 마법사 어머니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다. 흉노의 어머니가 아네모네 즙을 눈에 넣어 눈을 멀게 한 아이와 화자가 단순하게 단일 인물로 보일 수는 없다.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마법사의 묘기이기도 하다. ⟪노인울라에서⟫는 작품 내에서 두 인물이 분열된 한 사람 같기도 하다. 눈아이를 실명시킨 흉노의 여왕은, 미친 여자인 얼이의 어머니이고 얼이의 유일한 친구이의 분신이자(얼이에 대하여), 아기를 낳아 도랑에 버린 냄새나는 유방암 환자(도둑자매), 사라지는 마법을 펼치며 먹고 사는 눈아이의 부재의 어머니(눈속에서..), 30년 전 양철 가방을 들고 여행을 떠난 후 반두 공원에서 홀로 살아온 할머니(기차가..)이자 그 할머니의 손녀, 혹은 그 일부들이다.



성 정체성도 없어진다.  ⟪얼이에 대해서⟫ 에서 화자인 ‘나’는 얼이가 반두로 떠난 후 오랫동안 아팠고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남자로 묘사되는데, 알고보니 여자였고, 얼이와 얼이의 미친 어머니를 생각하며 읽을 수 없는 편지를 쓰는 화자는 ⟪1979⟫에서 교사의 관념과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다시 남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교사의 남동생은 동일 소설의 리우진과 다시 경계를 공유하며 겹쳐간다. 남자아이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자아이였던 리우진. 남동생처럼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 자기 인생 전체를 보내지 않는 편지를 쓰느라 결석하는 남동생과 가상의 여행으로 수업에 빠지는 리우진은 눈아이=얼=남동생=리우진의 순환이 세대와 성 나이를 찌그러뜨리고 무너뜨리다가 서서히 나를 지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여러 인물이 하나의 인물로 모아지는 듯하지만 이야기가 불은 만큼 다시 또 여러 인물로 분신하면서 서로 를 뚫고 섞여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만든다. 겹쳐지고 오그라들다가 불쑥 새 살이 튀어나와 자라면서 겹치고 꼬이고 살점을 파고 들어 분리도 합체도 불가능한 어떤 흐리멍덩한 덩어리의 생명체는 ⟪도둑 자매⟫ ,  ⟪뱀과 물⟫,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수렁 속으로 소용돌이쳐 들어간다. 


인물들이 겪는 결핍과 상실, 학대, 욕망, 기억과 망각이 서로를 소환하는 방식은 알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그것은 죄책감이다. 얼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여동생의 탄생에 원죄를 씌우고, 여동생의 탄생에 대한 거부감은 다시 죽음으로 귀결된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은 얼이의 것에 비해 간결하고 명료하다. 거봐 네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으니 죽었잖아. 확인되지 않은 죽음과 확인된 죽음 이후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소멸하기를 원했으되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못한 인간의 원죄는 오래도록 반두의 고원 반역의 땅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압제의 시대에 시인은 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는지 우리가 가진 원초적 죄첵감의 근원에 대해 숙연해진다.


죽은 모든 아기들은 얼이, 눈아이, 화자와, 마법사 혹은 여왕인 어머니들이다. 30년간 반두의 고원에서 홀로 살다간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할머니는 이 모든 이야기의 총합으로 보여진다. 크고 무거운 푸른 양철 가방을 들고 밤 기차를 타고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의 지프를 타고 온 훤칠한 남자에게 유혹당하고 돼지 장수에게 살해당해 숲 속에 버려진 아이이자, 갓 태어난 아기를 도랑에 버리고, 자신의 아이에게 아네모네 즙을 짜 눈멀게 한 흉노의 어머니이자, 어린 아이를 욕망하고 마조히즘의 백일몽을 꾸며 사직서를 쓰는 교사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결국 나 인가? 나는 세상에 이토록 홀로 내버려지고, 아버지를 찾아 떠나고 , 욕망하고, 죄를 짓고, 유폐되지 않았던가. 길고 긴 나의 이야기, 나의 꿈 이야기이자, 나의 현실의 이야기가 아주 작은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었다가 마구 섞여 다시 패치웍된 거가 아닌가. 이것은 내가 꾼 한 편의 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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