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좋았던 책을 꼽으시는 서친님들 페이퍼를 보고 있노라니, 나의 상반기 원픽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많이 읽지도 않았는데 기억이 가물해서 어플을 들여다보니, 문학/비문학 원픽을 어렵잖게 하나씩 꼽을 수 있었다. 문학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다시, 올리브> 세트이고, 비문학은 바로 이 책,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이다.
100자평만 써두고, 리뷰를 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옮겨야 할 밑줄이 상당히 많았고, 소개된 10명의 작가들의 그림책들을 한 권씩이라도 읽고 페이퍼를 쓰자는 장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금야금 책을 사다가 현재, 두 분의 작가님 책은 못 본 상태로 일단 페이퍼를 쓰려고 한다. 이러다 언제 정리할지 알 수 없어서...
이 책은 10명의 그림책 작가를 인터뷰한 인터뷰 모음집이다.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들을 성실히 파악하고, 적절한 질문을 던져 가며 답을 이끌어나갈 때 얼마나 좋은 내용이 담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터뷰어 최혜진 작가 자신의 글도 좋다. 그림책 작가들의 인터뷰지만,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들이 많아 모두에게 추천할 만한 책.
1. 권윤덕 - 과정으로만 존재하기
<나의 작은 화판>에서 이렇게 쓰셨어요. "아이들은 자란다. 몸도 자라고 마음도 자라고 생각도 자란다. 한 시간도 머무르지 않고 쑥쑥 자란다. 그래서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아이들에게는 과정으로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과정으로만 존재하기.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피카이아는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살았던 버제스 생물군 중 하나예요. 5cm 정도 되는 작은 생물로 척추의 전단계인 척색을 갖고 있었죠. 피카이아가 진화해 척추동물이 생겨났고 인류도 나타났는데요. 중요한 건 피카이아가 우월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란 점이예요. 더 우월한 생물들도 많았는데 피카이아가 우연히 살아남았고, 이후로 무한히 펼쳐질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요. 사람도 그래요. 살아 있음 자체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고, 태어나고 잘 살아내고 명을 다하면 다른 물질로 환원되는 것이 기본이지요. 성인이 되면 키가 자라지 않아서 성장이 멈추고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명 활동의 과정 안에 있어요. 상처가 나면 저절로 딱지가 앉고 치유되는 몸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한번 낯설게 바라보세요. 아무리 슬퍼도 때 되면 배고프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푹 자고 일어나면 걱정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도요. 신기하고 대단하지 않나요? 나를 지키고 키워가는 힘은 이미 내 몸이 지니고 있어요. 그 믿음을 잃지 말았으면 해요. 생명은 과정이지만, 미래의 어떤 것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매 순간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합니다. - 43-45쪽
이 작가님 책은 두 권 읽었다.
아래 사진을 보면 느낌이 오겠지만, 민화 같달까, 전통적인 느낌의 화풍이다.
<고양이는 나만 따라해>는 고양이가 나를 따라한다고 하던 아이가, 이제 내가 고양이를 따라하겠다며 고양이처럼 행동하다가, 마지막에는 용기를 내는 내용이다. 고양이 때문에 샀고, 고양이가 귀엽다.
<만희네 집>은 1995년 작이어서 꽤 연식이 있는데, 오래된 주택에 사는 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며, 그 시절 쓰던 여러 소품이 자세히 묘사되어 그걸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슬픈 것은.. 아이들이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ㅠㅠ



더 읽어 보고 싶은 권윤덕 작가님의 책
2. 소윤경- 의문문의 쓸모
<펑 하고 산산조각난 꼬마들> <줄어든 아이 트리혼> 등 어두운 고딕풍의 그림책으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고리를 각별히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이나 작가님 작품에는 서늘하고 기묘한 정서가 흘러요.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아동 도서 이미지와 거리가 멉니다. 작가님은 '어린이=순수하다', '뱀=징그럽다' 같은 관습적 도식을 유독 못 견뎌하는 것 같아요.
자라는 내내 사회의 평균치에 맞게 살라는 강요를 많이 당했어요. 딸이니까, 여자니까, 학생이니까 같은 말들로요. (...)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요즘도 많은 어린이책이 세계를 도식적으로 그려내요. 그림책에 등장하는 동물도 개, 고양이, 곰, 토끼 등 몇 종에 쏠려 있고, 모두 호감 가는 외양으로 도식화되어 있지요. 도식을 취한다는 건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에너지를 들여가며 대상을 바라보고 새로이 인식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캐릭터화한 표현, 대상화된 표현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현실 인식도 왜곡될 수 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은 도식을 배반하는 그림이에요. 작가가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본 결과를 그려내는 그림, 고유한 시선이 전해지는 그림을 아이들이 더 많이 보았으면 해요. - 64쪽
산문집 <호두나무 작업실>에서 이렇게 쓰셨어요. "삶이 힘겨워질수록 사람들은 익숙하고 달달한 콘텐츠를 찾는다. 마치 고된 일을 마치고 난 후엔 당이 필요한 것처럼." 작가님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다수가 선호하기 어려운 낯선 그림책을 만들어요. 회의감이 찾아올 때는 없으신가요?
제 책이 정말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켰나 자문하면 무력감이 밀려오기도 해요. 차라리 밝고 행복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많이 그려서 아이들이 책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럴 땐 다수가 호응해야 한다는 기대에서 잠시 물러나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봐요. 무엇을 좌절로 여길지는 무엇을 원하는지에 달려 있을 때가 많거든요. 찬찬히 생각해보면 작가 활동을 하기 위해 꼭 많은 사람의 지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요. (...) 다수의 지지를 받기 위해 저라는 사람의 고유한 관점과 신념을 버릴 이유가 없어요. 내 편의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배우면 돼요. - 71쪽
거절을 당하는 상황은 통제할 수 없지만, 거절당한 이후에 내 반응은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먼저 거절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습관을 버리세요.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두면 내가 부족했고, 내가 비호감이고, 내가 좋지 않은 그림을 그려서 거절당했다는 식의 자기비판으로 귀결되거든요. 그런데 성공은 100% 운이에요. (...) 그러니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연구하지 마세요. 연구한다고 그 사람 삶이 내 것이 되지 않아요. 그냥 열심히 자기 자신으로 사세요. - 78, 79쪽
삶은 반응을 요구하는 질문 그 자체다. 날씨, 교통상황, 광고에서 본 반짝이는 물건, 가족과 동료의 말과 행동, 타인의 요구와 기대, 예측하지 못한 사건 등 외부 자극은 이어지고, 우리는 그 앞에서 특정한 반응을 보이고 상호작용한다. 삶을 배운다는 건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중심이 단단한 사람은 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반응의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내가 이랬어" 라고 말하는 대신 "그런 일이 있었고, 나는 이렇게 반응하기로 했어"라고 말한다. 원인(사건)과 결과(반응) 사이에 투명한 공백을 마련하고 찬찬히 주어의 자리를 회복한다.
사건이 곧장 상처가 되지 않도록 사건과 나 사이에 검증 공간을 마련하는 일. 익숙한 서사, 반복되는 패턴, 당연시되는 생각, 규율과 의무감, 금기까지도 일단 무엇이든 그 안에 넣고 참과 거짓을 따져보는 일. 소윤경 작가는 자기 안에서 피어오른 여러 의문형 문장들을 사소히 여기지 않고 물음표를 모아 맞설 수 있는 용기로 빚어낸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킨다. - 81쪽
소윤경 작가 꼭지가 참 좋아서, 이 분 그림책들도 많이 궁금했다. 벼르다 골라 산 것이 <콤비>.
매우 독특한 책이다. '화첩'이라는 말이 책에 붙어 있듯이, 그림책이라기보다는 화첩에 산문시가 덧붙여진 느낌이다.
대부분의 포유류가 멸종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다른 종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계. 그 속에서 만나 함께 지내는 '콤비'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넌 먼 곳을 응시하고 있어>에서 갓 태어난 아기를 분양받아 온 쪽은 누구일까?



더 읽어보고 싶은 소윤경 작가님의 책
3. 이수지 - 놀이가 태도가 될 때
가수 루시드 폴과 함께 만든 <물이 되는 꿈>에서 수중재활운동을 하는 아이의 몽상을 5m가 넘는 기다란 병풍 책으로 펼쳐놓았고, <검은 새>에서는 화가 난 아이가 감정을 식히는 시간을 장대한 여행기로 펼쳐놓으셨어요. <동물원>에서는 인파에 밀려 부모님과 잠깐 떨어진 아이의 시간을 오색찬란한 사교의 시간으로 묘사하셨죠. 무언가에 열중한 아이 입장에서 나머지 세계가 일시정지한 것처럼, 순간과 아이와 감정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진 작품이 많아요.
(...) 저는 늘 현재에 관심이 많고,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요. 어차피 미래를 걱정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결국 오늘의 내가 뭔가를 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오늘 마주한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는 게 낫죠. 저에겐 원대한 계획 대신 순간의 절실함이 있어요. 순간에 온 마음으로 머물다 보면 하루살이처럼 살아도 방향성이 생겨 잇을 거라 기대해요. '받을 수 있는 공만 받고, 칠 수 있는 공만 친다'는 생각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요. - 104쪽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캇이 <놀이와 현실>에서 이렇게 썼어요. "아이는 이제 그를 사랑하고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이 옆에 있어줄 것이며 잊었다가 다시 생각이 날 때에 계속해서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 놀이한다." 위의 문장을 읽고 <파도야 놀자> <이렇게 멋진 날> <물이 되는 꿈> <동물원> <아빠 나한테 물어봐>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달리 보였어요. 아이가 환상으로 떠날 수 있도록 단단한 닻의 역할을 한다고 느꼈어요.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부모와 아이 사이에 신뢰는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아이에게 세계에 대한 신뢰를 심어줄 수 있을까요?
(...) 예전에 읽은 잡지 기사가 있어요. 육아 고민을 상담해주는 코너였는데, '아이들과 놀 때 도대체 얼마나 쿵짝을 맞춰줘야 하나'라는 고민에 상담가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부모는 아이 옆에 그냥 누워만 있어도 됩니다." 그때 제가 한창 육아로 힘들 때라서 '누워 있어도 된다'에 방점을 찍었지요.(웃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커다란 산처럼 아이 뒤를 둘러싼 부모의 신체가 정서 안정에 꽤 도움이 되겠더라고요. 아이가 마음껏 환상을 펼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을 설정해 주는 신체인 것이죠. 제 책에 등장하는 어른의 역할은 거기에 있어주는 거예요. 아이 입장에서 든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로서 그냥 있는 거지요. 그렇게 아이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 선을 지키면서 더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각자의 숙제를 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 111, 112쪽
최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으로, 이 책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아래 사진들은 <파도야 놀자>와 <이렇게 멋진 날>
굉장히 색감이 좋고, 색을 많이 안 쓰는데도 화려하고 생기가 넘치는 느낌을 준다. 아주 마음에 든다. 이 책들은 추천.
<토끼들의 밤>은 그다지 추천하지 않음^^;



더 읽어보고 싶은 이수지 작가님의 책
4. 유설화 - 인정욕구에게 질문하기
인정이 목마른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남을 신경 써? 자기만족이 중요하지"라는 말은 도덕 교과서처럼 들린다. 올바르지만 죽어 있는 말이다. 타인의 관심에 완벽히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인정 갈망과 자기 수용의 적정 비율도 없다. 균형점은 결국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인정욕구는 질문하게 한다. '왜 사람들이 나를 안 알아주지?' 노력하면 알아줄 거라는 기대로 최선을 다해본다. 그래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질문과 대면하게 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나에게도 의미가 없나?' 유설화 작가는 이 질문에 차곡차곡 답하듯 그림책을 지었다. 기대감과 실망감이 밀물썰물처럼 들고 나는 풍경을 모두 지켜보며, 묵묵히.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밖에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가 한계이고, 너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이 설득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 143쪽
이 작가님 책은 세 권이나 읽었는데, 모두 도서관에서 읽어서 산 책이 없다. 죄송;;;
<슈퍼 거북>, <슈퍼 토끼>는 토끼와 거북이 옛이야기를 변형시킨 내용인데, 자기 자신으로 사는 방법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용기를 내 비닐장갑>은 겁많은 비닐장갑이 용기를 내어 친구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비닐장갑 보다는 <슈퍼 거북>, <슈퍼 토끼>가 좋았고, 희미한 기억 속에 <슈퍼 토끼>가 가장 재미있었던 듯.
이제껏 언급한 책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책들^^;;
더 읽어보고 싶은 유설화 작가님의 책
너무 길어져서 끊어 써야겠다..
10명이니 5명씩 쓰고 싶은데,
다섯번째인 고정순 작가님 인터뷰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라 좀 더 곱씹으며 옮겨 적고 싶어서 넘긴다.
투비 컨티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