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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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쓴다는 건 내밀한 속내를 쓴다는 것.

하지만 과연 일기는,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발견될 가능성을 두려워하면서 쓴 일기에,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밑바닥이란 어디까지 일까?


때때로 일기를 쓰곤 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솔직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누군가에 대해서나 시시콜콜한 잡담도 있었지만 부당해 보이는 사건과 대상(부모님을 포함해서)에 대한 불만 토로와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조금은 있었다. 부모님이 내 일기를 발견할까봐 두려웠던 기억은 별로 없다. 직접 말하기 힘든 불만을 간접적으로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일까. 부모보다 또래관계가 더 중요할 때라 그랬던가. 친구가 일기를 보는 쪽이 더 곤란했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 쓰는 일기는 어딘가 공식적인 데가 있다. 일기가 어떻게 공식적일 수 있는가? 하지만 남편이나 아이들이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강하게 가진 상태에서 진짜 내밀한 일기라는 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사회적 평판이 중요하다면, 일기장을 폐기하기 전 갑작스럽게 사망할 일이 걱정될 수도 있다. 온라인 일기도 마찬가지다. 

왜 가족이 일기를 보면 곤란한가? 가족 험담이라도 썼나, 아니면 바람이라도 폈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독립적인 여러 인격체가 함께 살아가며 겉으로나마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 욕구를 다 드러내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을 박박 파고 들어간 일기는, 그 평온함을 순식간에 깨뜨릴 수 있다. 더구나 가족 중에 가장 많은 것을 참고 숨겨온 존재(아내,어머니)의 일기가 공개된다면? 그 결과는 파국이 아닐까?


여기, 1950년 이탈리아에 발레리아라는 여성이 있다. 

귀족 가문의 어머니와 변호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발레리아는 일찌감치 변호사 남편 미켈레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아 키웠다. 첫째 리카르도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고 둘째 미렐라도 대학에 들어가 이제 곧 성인이 될 것이다. 전후의 이탈리아, 경제적 어려움으로 8년 전부터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현재 43살. 아직 젊은 나이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할머니처럼 여기고 있다.


그런 발레리아가 어느 날, 이상한 충동에 이끌려 담배를 사러 간 가게에서 일기장을 사들고 온다. 가게 주인은 "금지된 일"이라며 일기장을 건네는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주말에는 담배 가게에서는 담배 외의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발레리아에게 일기를 쓰는 일은 그야말로 '금지된 일'처럼 여겨져서, 그날부터 그녀는 누군가 일기장을 발견할까 전전긍긍 하며 여기저기 숨겨 놓고 혼자 있을 시간만 기다리다 다급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 책 자체가 발레리아의 일기장이다.


나는 그녀가 그토록 불안해 하며 쓴 일기에는 스스로 가한 검열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이런 부분을 보라. 자신이 상처받았던 일화를 적으면서 쓴 글인데도 '신경이 예민했던 나는', '나를 다정하게 껴안으며 위로해주었다'라면서 남편을 변호하고 있지 않은가.


미켈레는 언제나 거실에서 혼자 신문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재우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느라 거실로 나왔을 때는 어두워진 후였고, 나는 지치고 졸린 상태에서 미켈레에게 비난을 듣자 상처를 받았다. 당시 신경이 예민했던 나는, 그의 자식을 돌보는 것도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면서 격하게 화를 냈다. 미켈레는 내가 틀렸다고,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인생의 동반자와 결혼했지 베이비시터랑 결혼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에 마음이 상해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미켈레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다정하게 껴안으며 위로해주었다.  - 283쪽 



들킬 것을 두려워하면서 가족들에게 신경질적으로 굴면서, 그러면서도 그녀는 일기 쓰기를 놓지 못한다. 그녀는 일기 쓰기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음을 인정한다("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51쪽). 망각 속에 모든 걸 흘려보내면 더 평온했을 텐데, 모든 일을 곱씹어 깊이 생각하여 일기장에 적다 보면 보이지 않았거나 보아도 모른 체 했던 것들이 보이게 마련.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그녀를 '엄마'라고 장난스레 부르던 것이 거슬리고, 안쓰럽게만 여겼던 리카르도의 못난 점이나 보수적인 과거의 성역할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렐라의 모습이 분명히 보이며, 할머니라 여겼던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다. 


발레리아는 자신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머니 세대와 딸 세대 사이 교두보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녀는 직장을 다니며 인정받는 자기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은 여자가 일하지 않는다'는 전통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한다. 일하고 퇴근하여 가사일을 모두 도맡는 일상에 피로와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렇게 부담을 짊어지는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가족들로 하여금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 포기하지 못한다("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거나 기분 전환할 만한 일을 하면 1분 1초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바친다는 나의 명성에 누가 될 것만 같았다.", 36쪽). 그렇게 과거의 관습과 관념이 격변하는 세상에서 발레리아가 느끼는 혼란과 모순이 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50년 이탈리아, 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이 쓴 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때나 지금이나, 가부장제 하의 여성에게는 내면의 진입 장벽이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아무도 보지 않을 일기를 쓰면서도 자기 검열을 거치고, 관습에서 벗어나는 행동에 큰 혼란을 느낀다.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하기 어렵고, 드러낼 경우 비웃음이 두려우며("내가 일기를 쓸 수도 있잖아"라는 말을 했던 발레리아에게 남편과 아들딸 모두가 웃으면서 "대체 뭘 쓸 거냐"고 묻는다), 욕구를 인정하는 순간 더이상 참을 수 없는 현실의 부당함에 괴로워질 것이다. "넘칠 것 같은 내면의 강물을 마음껏 흐르게 하려고"(419쪽) 일기를 쓰기 시작한 발레리아가, 이 벽에 부딪히는 과정이 실감나고 마음 아프게 그려진다. 


이탈리아에서 거의 잊혀졌던 이 작품이 다시 읽히게 된 게 엘레나 페란테 덕분이라고 한다. <나의 눈부신 친구> 로 유명한 페란테가 이 작품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는 것. 금지된 일기장 한권쯤 마음에(또는 현실에)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흠뻑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돌아와 중절모와 변호사 가방을 내려놓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성공하지 못해서 우리가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돈보다 훨씬 가치 있는 자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부모님이 몸소 보여주었던 삶의 모델, 우리에게 자연스런 영감을 주고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삶의 모델이 항상 명확하고 흔들림 없이 확고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 그럼에도 나는 과거의 신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 언제부턴가 미렐라와 리카르도가 우리를 못 미더워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P34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거나 기분 전환할 만한 일을 하면 1분 1초도 빠짐없이 가족을 위해 바친다는 나의 명성에 누가 될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가족들은 직장에서 일하고, 부엌에서 요리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에서 옷을 수선하면서 보낸 수많은 시간은 다 잊고, 독서나 산책을 하면서 보낸 얼마 안 되는 순간만을 기억할 것이다.
미켈레는 내개 언제나 잠시라도 좋으니 좀 쉬라고 하고 리카르도는 직장을 구하면 제일 먼저 나를 카프리나 리비에라 같은 휴양지로 보내줄 것이라고 한다. 내 노고를 인정하는 순간 자기들은 모든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은 허구한 날 심각한 표정으로 그만 일하고 좀 쉬라고 한다. 마치 내가 변덕스러워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작 어쩌다 한번 신문이라도 읽을 마음으로 가족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엄마, 할 일 없으면 재킷 안감이나 좀 수선해주세요."라거나 "제 바지 좀 다려주세요"라고 부탁하곤 했다 - P36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 어쩌면 휴식을 거부하는 나의 굳은 의지는 피곤이라는 행복의 원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P38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 P51

그날 밤 우리는 오랜 대화 끝에 모녀가 아니라 원수처럼 헤어졌다. 굳이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대화 내용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에 한 말이나 한 일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을 지켜야 하는 끔찍한 의무감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과 실제로 한 일, 되고 싶었던 존재와 현실과 타협한 실제 모습과의 간극이 큰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 P71

그날 저녁 일기장을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숨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일기장을 침대 시트와 수건을 보관하는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일기장을 숨기면 20년 동안이나 내 딸에게 밥을 해먹이고, 가르치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 아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신중히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P71

가족들은 이 시간에 모두 잠을 잔다. 수면은 전날의 무게를 느끼지 않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지난 하루 동안 겪은 모든 일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나는 탕감받지 못한 빚을 기록하는 장부처럼 어제의 일을 일기장에 보관하고 있다. - P406

하지만 그보다는 포기야말로 그애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더 자주 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늘뿐 아니라 영원히 마리나를 굴복시키고, 그애에게 나의 삶처럼 탈출구가 없는 삶을 동경하며 살아야 하는 벌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 P407

평생 내 모든 것을 가족에게 다 주었는데도 아직도 뭔가를 주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간절히 기다린다. 글을 쓰기 위해서. 젖이 너무 많아서 아픈 가슴처럼 넘칠 것 같은 내면의 강물을 마음껏 흐르게 하려고, 그러기 위해 이 공책을 산 것이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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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2-06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일기써........검열하지 말고 🤣🤣🤣

독서괭 2025-02-06 15:15   좋아요 0 | URL
우하하항 내 안의 검열기관.. 어떻게 없애나요? ㅋㅋ

건수하 2025-02-06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25년부터 일기를 쓰고 있어서 재밌게 읽었어요 ^^
아직까지는 매일 잘 쓰고 있고 지금은 아무도 제 일기를 훔쳐볼 수 없지만
집에 돌아가면 매일 쓸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시간도 부족할 것 같고 검열 때문에도...
제가 어릴 때 엄마 일기를 훔쳐봤던지라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제 일기를 아이가 궁금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요.

잠자냥 2025-02-06 15:27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귀국했는지 물어보려했는데... 아직 아니군요;

잠자냥 2025-02-06 15:31   좋아요 1 | URL
제가 일기 안 쓰게 된 계기가 훔쳐보는 사람 때문이었는데!!!! (짜증 나는 울 언니.... -_-)

독서괭 2025-02-06 16:34   좋아요 0 | URL
오 매일 잘 쓰고 계시군요! 대단합니다. 저는 3년 일기를 쓰고 있고(매일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올해는 알라딘 다이어리 받아서 강제로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어릴 때 엄마 일기를 본 기억이 있네요 ㅋㅋ 딱히 엄마가 숨겨놓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육아일기 비슷한 느낌으로.. 집으로 돌아가셔도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자냥님 언니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2-06 20:47   좋아요 0 | URL
건수하님 / 매일 잘 쓰시는 일기.....가 저도 많이 궁금합니다. 한국에도 눈이 많이 왔어요~~

잠자냥님 / 언니 나빠!!

독서괭님 / 거의 매일... 제가 많이 부럽습니다.

관찰자 2025-02-06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주 자세히 일기를 써놓고, 그 일에 대해 잊어버리는 용도로 일기장을 사용했는데. 아주 어릴적에 썼던 그림일기장부터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싸들고 다녀요. 누가 볼까봐.ㅠㅠ 근데,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다르게 기억된 어떤 일을 최근에 일기장을 통해 사실을 알아버린 후에는 ‘오호, 이거 역사 고증의 역할이 있구만‘ 하면서 또 버리지 못하는.. 그래서 그냥 버리지 못한다는 이야기에요.ㅠㅠ

단발머리 2025-02-06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독서괭님, 이 글 너무 좋아요! 뭐랄까요. 일기 토크를 불러일으키는? 저도 마음에 많이 두고 있는 ‘주제‘라고 할까요? ㅋㅋㅋ

전 초등때부터 회사 다닐때까지 일기 썼어요. 아이 키우면서 안 썼다는... 재작년인가 그 전인가부터 종이일기쓰기 아자아자! 해서 쓰기는 쓰는데 잘 쓰다가 안 쓰다가 반복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중간에 아예 온라인 일기로 갈아탔구요. 올해는 다시 종이일기 쓰는데, 이틀 썼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밀린 거 써도 되나요? 2월 가기 전에 쓰려구요.
전, 종이일기에서 훨씬 솔직하기는 한데, 그 와중에도 저는 그 속에서조차 솔직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암호처럼 써놓아서 나중에 보면 무슨 말인지를 제가 모르겠는 ㅋㅋㅋㅋ 이 세상 아무도 모른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르노의 <탐닉>이 일기였잖아요. 나중에 출판 ㅋㅋㅋㅋㅋㅋㅋㅋ1인 독자용이었으나 이제 온 세상이 알게 되는...
눈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조심하세요, 독서괭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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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독서괭이 이 책을 좋아할 것인가에 관해 대단히 무해하고 쓸모없는 내기를 하신 두 분에게 그 답을 말씀드린다. 

독서괭은 이 책을 좋아합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21세기 최고의 책 10권에 이 책을 뽑지는 않을 것 같지만..(혹시 모른다, 아직 안 꼽아 봤으니까) 

이 책을 매우 사랑하는 분이 계속 홍보하셔서 읽어볼까? 읽어봐? 하면서도 계속 미뤘던 이유는, 제목부터 너무 촉촉해 보여서.... 애 낳고 연애세포가 전멸상태에 가까워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틈틈이 로맨스소설과 웹툰을 보던 독서괭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걸 책으로 보고 싶지는 않은 뭐 그런 기분이랄까... 

그러나 읽고 나니,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분이 왜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는지 알겠어서 후련하기도 하다. 


이 책은 결코 영상화 될 수 없는데(설마 이미 된 건 아니쥬?) 메일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게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 오디오북으로도 만들 수 없는데(설마...) 두 사람이 서로의 목소리를 상상하다가 후에 실제 목소리를 듣고 놀라는 장면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에미가 되었다가 레오가 되었다가 하면서, 그들과 함께 상대방을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소설의 설정이 주는 최고의 재미다. 


에미가 주소를 잘못 적어 보낸 이메일- 지긋지긋한 잡지 구독을 끝내기 위한 -을 거듭 받게 된 레오가 정중하게 잘못 보냈음을 알리는 답장을 보낸 것이 이들 인연의 시작이다. 그 뒤 몇 달 동안 잊고 있다가, 에미의 '복된 새해' 어쩌고 하는 단체 메일이 레오에게까지 가게 되고, 다소 빈정대는 답장을 한 레오는, 에미와 메일을 계속 주고받게 된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에미는 남편이 있다. 그녀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언니처럼, 친엄마처럼 여기는 아이들과 살고 있다. 서른넷의 그녀에게, 한참 나이 많은 남편과 평온하기만 한 가정은 뭔가 부족했을까? 통통 튀고 때로는 무례할 만큼 직설적이며 경쾌한 그녀의 메일을 보면, 에미가 가정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에미 스스로도 알고 있다. "메일에서의 에미는 굳이 착하게 굴려 애쓰지 않고 평소에 억눌러왔던 약점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거예요."(170쪽)


레오는 마침 5년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만났다 헤어졌다 반복하면서도 놓지 못하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파리로 가버린 것. 에미와 메일을 주고받는 것이 그에게는 편안한 위로가 된다. 어쩌면 "그 여자는 냉장고예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손을 대면 제가 뜨거워져요."(179)라고 표현되는 전 여친(마를레네)과의 육체적 관계에 지쳐서, 메일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 속 에미에게 빠지게 된 게 아닐까? 


두 사람은 점점 서로의 메일을 기다리고 서로를 더 많이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된다(모습도 모르면서!). 놀이처럼 진행한 '찾기 놀이'(사람 많은 카페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게임)를 한 뒤, 서로의 모습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두 사람 모두 이성에게 꽤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음을 알게 된 후, 환상이 더 강해진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때로는 에미가, 때로는 레오가 선을 그으면서 둘은 아슬아슬한 이메일 친구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에미가 자기 친구 미아를 레오에게 소개시켜 줄 때는, 안 돼! 그러지 마!! 싶었다. 자기가 소개시켜 줘 놓고는 막상 둘이 서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레오에게 친구 험담을 하는 에미를 보는 건 너무 별로였다. 

하지만 에미가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다. 그녀는 가정을 깰 생각이 없고, 가정과 레오를 모두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오를 친구라고 믿어야 했고, 친구라면 자신의 친구의 남자친구가 되더라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한편으로 에미는 레오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었고, 에미가 보기에 '레오와는 전혀 맞지 않는' 친구를 소개시켜 준 후 '나랑 안 맞는다'는 대답을 들음으로써 자신이 아는 레오가 현실의 레오와 일치함을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두 사람이 사귀는 것 같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자, 에미는 퍼뜩 깨닫는다. 레오가 친구와 사귀게 되면 이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걸. 


그럼에도, 에미는. "저는 당신과 사랑에 빠지지 않아요!!!!" (287쪽)라고 강변한다. 

후반부는 두 사람이 겪는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서로가 궁금하다. 만나고 싶다. 아니, 만나고 싶지 않다. '바깥 세상'인 이메일 속에 존재하는 환상의 그/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진짜 키스가 필요하진 않아요. 메일을 쓰는 거 말고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장 저에게 키스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필요할 뿐이에요."(327쪽) 


결국 레오는 끝을 보기로 결심한다. 거기에는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가 보낸 메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환상 속 관계는 끝내야 한다. 실재하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 둘은 레오가 보스턴으로 떠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남을 갖기로 약속하는데... 

그 만남은 성사되지 않지만, 에미는 현실과 환상 사이 벽의 붕괴를 느끼며 레오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지각한다. 그러나 빠이빠이. 단호박 레오는 이미 멀리멀리... 

이 마지막 괜찮았다. 음.끝까지 못 만나고 끝나는 게 제맛(?)이지. 그런데, 후속편이 있던데 거기서는 만나는 걸까?(궁금) 



*****************스포일러 끝 **************************************************************************


이 책을 읽고 나면, 과연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게 된다. 이런 메일친구나 무슨 카톡친구나..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을 잠식할 정도로 비중이 커진다고? 하긴, 온라인으로만 연애하다가 돈까지 사기당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외로운 마음에 스며든다면 뭐든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런 말을 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텐가... 


저는 이를테면 당신이 스무 명의 여자 가운데 섞여 있다 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에미 로트너를 즉시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57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145

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가슴에 관심 없어요. 저는 여자를 이루는 다른 모든 것은 뚝 떼어놓은 채 오로지 가슴 크기에만 관심을 쏟는 재주는 없습니다.  273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274



레오, 당신은 여자가 뭘 원하는지 아는구나! 

하지만 나에겐 메일을 보내지 마시오. 나는 새벽 세 시에는 자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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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2-01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메일 주소 좀 알려주세요~ 보내지 말라 하시니 완전 보내고 싶습니다^^

독서괭 2025-02-01 10:06   좋아요 0 | URL
🤣🤣🤣 단발님 메일이면 받아야죠, 암요!

다락방 2025-02-01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마지막은 정말 최고죠!! 어찌나 서늘해지는지. 정말로 바람이 불더라니까요. 그런 결말입니다.

독서괭 2025-02-01 12:31   좋아요 0 | URL
결말에서 저도 헛 했습니다. 진짜 마음이 덜컥하더라구요. 다른 결말은 다 별로일 것 같아요!

다락방 2025-02-0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아랑 레오랑 섹스해서 너무 괴로웠어요 ㅜㅜ

다락방 2025-02-0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아를 소개해주능 마음도 그리고 괴로워하는 마음도 너무 다 알겠어요 흑흑 ㅠㅠ

독서괭 2025-02-01 12:32   좋아요 0 | URL
친구한테 못할 짓이지만;; 저도 이해는 됩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할 만한 일인 것 같아요. 필요한 전개였다…

다락방 2025-02-01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습니다. 글로 사랑에 빠져버린.. 하아- 이젠 오래전 일이지만..

독서괭 2025-02-01 12:30   좋아요 0 | URL
엄마나.. 그래서 이 책이 더 좋으셨겠어요.

다락방 2025-02-01 1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댓글 도배하는 다락방 입니다!!

독서괭 2025-02-01 12:3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도배 너무 반갑네요 ㅋㅋㅋ

잠자냥 2025-02-02 11:03   좋아요 1 | URL
취했었네 저 인간…

다락방 2025-02-02 12:54   좋아요 1 | URL
저 금욜밤에 역대급 취해가지고 ㅋㅋ 넘어지기도 하고 하아..

독서괭 2025-02-02 15:47   좋아요 0 | URL
🤣🤣🤣🤣🤣
 
넥서스 -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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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까? 유발 하라리는 ‘정보 네트워크‘의 역사를 훑으며 우리에게 이 문제를 사유해 보라고 촉구한다.AI라는 최초의 비유기적 네트워크가 끼어드는 미래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충분하므로, 자정장치를 통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 것. 잘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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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1-31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 이제 리뷰 써…🤣

독서괭 2025-01-31 15:03   좋아요 0 | URL
🤣🤣🤣

다락방 2025-01-31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 이제 리뷰를 내놓으시오!!

잠자냥 2025-01-31 16:32   좋아요 1 | URL
쓰고 있는가 봄….🧐

다락방 2025-01-31 16:56   좋아요 1 | URL
그런가봄…

독서괭 2025-01-31 16:57   좋아요 0 | URL
일하고 있는데요… ㅠㅠ 절반쯤 써놓긴 했습니다… ㅜㅜ

다락방 2025-01-31 17:06   좋아요 1 | URL
나도 일하고 있어요 괭님 ㅜㅜ

독서괭 2025-01-31 17:07   좋아요 0 | URL
락방님.. 우린 왜 오늘같은 날 일하고 있을까요? 크흥 ㅠㅠ

잠자냥 2025-01-31 17: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ㅌ🤣🤣👏👏👏😝

독서괭 2025-01-31 19:07   좋아요 0 | URL
올렸습니다아.. 털썩
 
GUTFLEX 것플렉스 두부 스낵 - 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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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요? 뜯었다가 아침부터 235kcal 순삭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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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1-25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뻔…. 은 완료가 아닌데요. 그럼 남기셨단 말씀? 😳

독서괭 2025-01-25 10:17   좋아요 2 | URL
남겼습니다. 간신히… 한 50kcal 정도? ㅋㅋ

햇살과함께 2025-01-25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달리고 오세요

독서괭 2025-01-25 10:44   좋아요 1 | URL
저는 경칩부터 달릴 예정입니다… 개굴

다락방 2025-01-25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걸 남기다니, 이 적은 양을!! 님 인간이 아니신듯.. 초인간..

잠자냥 2025-01-25 13:51   좋아요 2 | URL
둘째가 깨서 뺏어 먹을까봐 후다닥 숨긴 거라능 ㅋㅋㅋ

독서괭 2025-01-25 13:56   좋아요 1 | URL
둘째한테 먹어보라고 했는데 이미 이 닦았다고 거절당했어요.. 첫째는 아몬드 싫다고 거절.
앞으로 인내의 괭이라 불러 주십셔 ㅋㅋ

다락방 2025-01-31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1월 마지막 글인겁니까, 정녕?

독서괭 2025-01-31 13:49   좋아요 0 | URL
어.. 오.. 어… 원래 계획은 오늘 넥서스 백자평이랑 새벽세시 리뷰를 올리는 거였습니다만.. 과연…

다락방 2025-01-31 14:48   좋아요 1 | URL
제발.. 부디.. 🙏
 
해피버쓰데이
백희나 지음 / Storybowl(스토리보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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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백희나 작가님! 우울증에 빠진 얼룩말 소녀 제브리나에게 배달된 옷장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매일 나타나는 마법의 새옷들이 제브리나를 우울에서 꺼내줄 수 있을까? 알록달록 그림들과 따뜻한 메시지로 가득한 그림책. 아이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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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1-0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옷을 입고 뛰어보자 펄쩍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개인적으로 노란색 드레스 너무 마음에 듭니다. 독서괭님의 최애 아이템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