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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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1가구당 대개 5에이커 정도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여유가 있는 가구는 10에이커 정도를 경작하기도 한다. 적정한 경작지 면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일할 수 있는 가족의 수이다. 대략 한 사람당 1에이커 정도가 그 적정 면적인데 이곳 농부들에게 그 이상의 땅은 소용이 없다. 기본적으로 이곳 사람들은 경작하지 못하는 농지를 소유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 53쪽

이 지역에 있는 모든 마을의 입구에 있는 `초르텐(Chorten)`이라 불리는 이 석탑은 체스판의 `폰`처럼 생겼는데 마치 거대한 산이 땅에서 우뚝 솟아 올라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통 석회석과 진흙을 섞어 만든다는 이 석탑은 20피트 정도의 높이인데 윗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져 끝이 뾰족한 첨탑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 석탁의 모양은 불교 교리의 기본을 상장한다고 하는데 탑 윗부분의 태양을 안고 있는 초승달은 생명의 단일성, 이원성의 종식,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결국 하나라는 의미라고 한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여겨지는 해와 달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듯 세상 모든 것이 바로 그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 61, 62쪽

인간들이 도울 수 없는 곳에서
신들이 우리를 돕게 하소서. - 70쪽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까다로운 환경 속에서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검약`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에서 이 `검약`이라는 말은 대개 자물쇠가 채워진 음식 창고를 지키는 나이 든 아주머니를 연상시키지만, 이곳 라다크에서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다. 그것은 풍요의 기본이 된다. 한정된 자원을 조심스럽게 아껴쓴다는 것은 인색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주 적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검약`의 본래 의미라 할 수 있다. - 74, 75쪽

시간을 재는 경우에도 느슨하고 여유롭게 잰다. 1분 단위로 시간을 측정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내일 낮에 찾아올게" 혹은 "저녁쯤 찾아올게"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라다크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에 대해 넉넉한 여유를 남겨 놓는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의 언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많이 있다. `공그로트(gongrot)`는 `어두워진 다음부터 잠잘 시간까지`라는 뜻이고 `나이체(nyitse)`는 `해가 산꼭대기에 걸려 있는 한낮`을 말한다. 또 `새의 노래`라는 뜻의 `치페치릿(chipe-chirrit)`은 해가 뜨기 전 새들이 지저귀는 이른 아침을 뜻한다. 이 모두가 넉넉하고 친숙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다. - 93쪽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는 사람들이 갈등을 피해갈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른바 `자발적 중재자`라는 것이 있다. 양자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의견 차이가 생기면 제3자가 거기서 조정 역할을 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그리고 어떤 사람이 관련되어 있든 그에 맞는 중재자는 항상 그곳에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 일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중재자라는 것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찾는 대상은 아니다. 상황이 일어나는 곳에 있는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중재자이다. 누나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심지어 다섯 살 정도 된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런 중재자가 나타나 언쟁을 하던 다른 아이들 사이를 조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다투던 두 아이는 기꺼이 중재하는 아이의 말을 들었다. 갈등보다는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제3자의 중재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 113쪽

라다크의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한정의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그런 것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를 `버리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 라다크의 아이들은 다섯 살 정도만 되어도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의식을 배운다. 이들은 어느 정도 힘만 있어도 자기보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보살핀다. 이들은 결코 자기의 또래집단끼리 떨어져서 생활하는 일이 없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갓난아이에서부터 증조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다시 말해 라다크의 아이들은 사람들 사이의 주고받는 관계의 사슬 속에서 자신이 그 한 부분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 145쪽

라다크에 처음 왔을 때 나에게 제일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의 얼굴에 피어 있는 환한 미소였다. 라다크의 여성들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린 소녀들은 때로 수줍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성숙한 여인들에게는 자신감과 개성, 위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보다 먼저 라다크에 와 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이곳 여성들의 강력한 파워와 확고한 지위에 대한 이야기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 근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불교 교리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승려의 말을 인용하자면 한 마리의 새가 날기 위해선 두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지혜와 자비심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지혜의 상징이고 남성은 자비심의 상징이다. 그 둘이 함께함으로써 불교의 근본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 149 내지 151쪽

"(...) 중요한 건 그 사람 내면이 어떤가 하는 거예요. 외모보다 성격이 더 중요하지요. 라다크에는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라는 말이 있어요." - 153쪽

불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것 중 하나는 이른바 `공(空)`의 철학이다. 처음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해를 거듭하며 타스 라브기아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
"(...) 어떤 대상 하나를 예로 들어보지요. 이를테면 마루를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나무를 다른 사물과 구분하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나무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 나무는 독립된 실체가 아닌 것이 됩니다. 대신 그것은 관계의 사슬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이지요.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그것을 흩날리게 만드는 바람 그리고 그것을 지지해 주고 있는 토양 등 그 모든 것이 나무를 구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 우주 만물이 바로 나무라는 존재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인 것입니다. 각각의 존재는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 본질은 결코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고 매순간 변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공`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각각의 사물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 155 내지 157쪽

만일 라다크 사람에게 `레에 가고 싶으세요? 아니면 그냥 마을에 머물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면 그는 분명 `레에 가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런데 안 가더라도 좋을 거예요.`라는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상의 음식보다 잔치를 더 좋아하고,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보여주는 기쁨의 모습과 마음의 평화는 적어도 외부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특성들은 그들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만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삶의 흐름에 있어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그것과 함께 여유롭게 흘러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긴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해도 굳이 참담한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그런 경우 `굳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라는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 178,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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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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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흡입력, 훌륭한 번역. 그런데 너무 무섭다... 여자라면, 특히 두번째 작품은 각오하고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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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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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에 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내 기억의 정확성이라는 것을, 얼마나 믿고 있을까?

 

 이 소설의 화자는 '앤서니' 또는 '토니'라고 불리는, 어느 모로보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로, 그 자신도 어느 정도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자기보존' 본능이라는 명분 하에 많은 나쁜 기억들은 지워버리며, 그럭저럭 평온한 삶을 꾸려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적 삶'을 동경한다. 그런 그에게는 고등학생 시절을 함께한 친구 세 명이 있는데, 앨릭스, 콜린, 그리고 에이드리언이다. 그중 에이드리언은 특출한 지적 능력과 번뜩이는 통찰력을 가진 비범한 친구다. 졸업 후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는데, 에이드리언은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다. 토니는 대학에서 베로니카를 만나 연애를 하다가 좋지 않게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후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베로니카와 만나도 되겠느냐'는 편지를 받는다. 토니는 답장을 보낸 후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를 잊는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 반년 정도 머물다가 돌아온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에이드리언의 자살은 매우 그다운 방식으로 - 유서에 자살을 하게 된 철학적 사유를 밝힌 채 - 이루어지고, 토니는 그의 자살에 놀라면서도 역시나 비범한 그의 행보에 경외심을 품는다. 그 후 토니는 마거릿과 결혼하고, 딸 수전을 낳았으며, 수전은 다시 아들과 딸을 낳아, 어느새 토니는 노년에 이르렀다. 토니는 그의 삶을 평범하고 평온하며 그럭저럭 만족스럽다고 평한다.

이것이 1부의 이야기다. 토니의 관점에서 그의 삶을 요약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2부에서는 현재의 토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의 삶이, 토니가 베로니카와 사귈 때 보았던 '세번 강의 해소'처럼, 거꾸로 밀려드는 기억으로 인해 흔들리게 되는 사건을 보여준다. 토니는 어느날 사라 부인이 유언으로 자신에게 남긴 오백 파운드와 두 개의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토니는 몇십년 동안 보지 못했던 베로니카에게 연락을 취하게 된다.

 

이쯤이 대략 책을 읽기 전에 알아도 될 줄거리이다. 나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 책을 다룰 때, 스포일러가 없는 선에서 책을 소개하는 1부를 들은 후, 얼른 책을 사 읽은 다음 2부를 들었다. 처음 책의 마지막까지 읽었을 때의 기분은, "뭐.. 뭐야, 이게?? 잉? 설마.. 그런거야?"였다. 그런 다음 놓친 단서에 대해 잠을 이루지 못하며 생각하다가, 빨간책방 2부를 들은 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책을 정독하였으니, 줄리언 반스가 원서로 150쪽 가량인 이 책에 관해 "나는 이 책이 300쪽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책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줄리언 반스가 얼마나 책을 치밀하게 썼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반드시 두번 읽어야 하는 이유. 토니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토니의 기억의 흐름에 따라 - 대체로는 시간 순서이긴 하지만 - 불쑥불쑥 관계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때문인데, 잊고 있던 기억이 특정한 사건을 겪으면서 갑자기 떠오르게 되는 현상을 그대로 반영한 걸로 보인다. 따라서 처음 읽을 때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읽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드리언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이 있다는 것 - 줄리언 반스와 동급생의, 케임브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갈만큼 똑똑하고, 20대 후반에 여자 문제로 자살한 알렉스 브릴리언트. 이 책에는 '죽음'과 '기억'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많이 담겨 있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사라 부인이 토니에게 남긴 두 개의 문서 중 하나는 사라 부인이 토니에게 쓴 편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토니는 사라 부인의 편지는 받아 읽게 되지만,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은 베로니카가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여 받지 못한다. 일기장을 받기 위해 토니는 끈질기게 베로니카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중 단 한 장만을 복사본으로 건네준다. 그 일기장에는 '책임의 연쇄'와 관련된 에이드리언의 사유가 담긴 수식들이 있고, 마지막 줄은 놀랍게도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로 끝난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토니는 계속하여 베로니카에게 묻고, 결국 베로니카와 만난다.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봉투를 건넨다. 그 안에는 과거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만나도 되냐는 편지를 보낸 데 대해 토니가 보낸 답장이 들어 있다. 놀랍게도 그것은 비꼼, 저주, 저열한 분노로 가득하다. 자신이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있고 있던 - 그 자체를 잊었다기보다는, 그 내용과 편지를 쓴 자기 자신을 미화시켜 기억하고 있던- 토니는 회한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베로니카에게 용서받고 싶은 마음에 사과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지만, 베로니카로부터 '좀처럼 이해를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토니는 베로니카에게 용서받고, 다시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에 빠져,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에 대한 의문은 미뤄둔 채, 베로니카에게 다시 만나자고 제안한다. 베로니카와 만난 자리에서 토니는 베로니카의 미소를 보고 약간 자신감을 찾은 나머지, 베로니카의 "지난 사십 년 동안 어떻게 살았냐"는 물음에 주절주절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떠들며, '내 삶에 만족하고 있되, 현실에 안주한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다.' 베로니카는 손주 얘기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다.

또다시 토니는 베로니카에게 만나자고 메일을 보내고, 베로니카는 낯선 도시에서 만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막상 만나게 되자 베로니카는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며, 차의 보조석에 탄 토니에게 길을 지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라"고 한다. 토니는 열심히 보지만, 도무지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다.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넌 늘 그랬어."라며 끝내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돌아가버린다.

그 후 토니는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베로니카와 갔던 그 낯선 도시에 계속 찾아가고, 그때 보았던 무리가 '금요일에 펍에 간다'고 했던 단서를 떠올리고 금요일마다 펍에서 그들을 기다린다. 어느날 그 무리를 펍에서 만나게 되고, 그제서야 토니는 '이해한다'. 그 무리 중 한명-  마흔쯤 된, 백팔십 센티미터를 조금 넘는 키에 피부는 백짓장처럼 하얗고, 렌즈가 두툼한 안경을 쓴, 그리고 어떤 장애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남자- 가 에이드리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충격을 받은 토니는 다시 한번 베로니카에게 정중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의 말을 담은 이메일을 보낸다. 베로니카는 답장을 했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

그 후에도 토니는 계속하여 에이드리언의 아들이 사는 동네에 가서 그 펍에서 저녁을 먹는다. 어느날 간병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드디어, 마침내, 토니는 완전히 이해한다.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의 누나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즉, 에이드리언의 아들은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사라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1. 개인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작가는 1부에서 고등학교 역사 수업 시간에 나왔던 역사에 대한 물음들을 개인의 역사에 대입한다.

고등학교 시절, 에이드리언은 역사 선생님의 헨리8세의 치세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잘은 모릅니다, 선생님. 하지만 하나의 사유 방식은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15쪽)

 

또 한가지, 역사시간의 대화에서 나타난 중요한 단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역사선생님의 질문에 관한 대화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콜린은 나보다 더 잘 준비된 답변을 했다.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선생님."

"어떤 이유로?"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선생님." (33쪽)

'자기기만'과 '반복'. 이것은 이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다. 예컨대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인 롭슨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문에 의하면, 롭슨의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사라 부인이 임신하자 자살하였다는 것은 롭슨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토니가 폄하했던 롭슨이나 경외했던 에이드리언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작가는 '기억의 부정확성'을 끈질기게 지적한다. 이 소설은 결국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토니가 가졌던 확신이 흔들리고, 결국 '거대한 혼란'만이 남게 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101쪽)

우리의 삶을 지켜봐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부단히 기록- 말로, 소리로, 사진으로- 을 남겨두었다 해도, 어쩌면 그 기록의 방식은 엉뚱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106쪽)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106~107쪽)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111쪽)

 

기억의 부정확성은 토니가 자신이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답장의 내용을 기억한 것과 실제 내용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졸업반의 중반을 넘겼을 때쯤(토니가 베로니카와 만난 것은 대학교 2학년 내내였던 것으로 보이니, 헤어진지 1년 반쯤 지난 무렵인 것 같다)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보낸 편지를 받는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베로니카와 만나기 시작했음을 밝히면서, 토니에게 정중하게 이해를 구하고 있으며, 이 편지는 베로니카와 합의 하에 보내는 것임을 알린다. 토니는 이 편지를 받고 매우 분노하는데, 거기에는 자신이 과거에 베로니카에게 모멸 또는 농락을 당했다는 생각과, 베로니카가 자신과 사귀면서도 에이드리언을 소개받았을 때 호감을 보였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다시 한번 느끼는 상처입은 자존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 같다.

토니는 아무 엽서나 집어들어- '클리프턴 현수교(하필이면 매년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진'이 있는 - 엽서에 답장을 쓰는데, 내용은 괜찮다는 것이지만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 비꼬는 듯한 태도다.

그 후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토니는 다시 제대로 된 답장을 보내는데, 그 내용에 대해 토니는 이렇게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와 베로니카가 공동으로 느낄 윤리적 가책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꽤 많은 얘기를 했다. 또 나는 베로니카가 오래전에 받은 괴로운 상처가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에게 신중할 것을 권했다. 그런 다음 그에게 행운을 빌었고, 그의 편지를 텅 빈 벽난로 속 쇠살대에 넣고 태운 후, 이제부터 그 두사람을 내 인생에서 영원히 내치기로 결심했다. (78쪽)

정말로 토니는 두 사람을 인생에서 내치고, 거의 잊어버린다.

그러나 실제로 토니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어떤가?

 

각자의 인간관계에 독처럼 작용하는 고통이 평생 이어지길. 사실 마음 한켠으론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이어지며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 그 여자 어머니까지도 나에게 자기 딸을 경계하라 주의를 줬었지. 내가 너라면, '모친'에게 이런 사실들을 확인해볼걸? (166~167쪽)

 

2. 인과의 연쇄 속에서,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가?

 

 에이드리언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선생님의 질문-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관한- 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결국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인 해석 대 객관적 해석의 문제, 우리 앞에 제시된 판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가 개인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26, 27쪽)

에이드리언의 대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는 줄리언반스의 '그 시절'의 특징을 꼬집어내는 통찰과 유머로 인해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이 소설의 전체 이야기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책임의 고리'의 문제는 에이드리언이 남긴 일기에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에이드리언의 일기의 내용은 이렇다.

 

b= s - v + a1

혹은 a2 + v + a1 * s = b?

(...)

5.9 (...) 연결고리가 끊길 거라고 할 때, 그와 같은 단절의 책임 소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연결고리의 양쪽 끝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체가 문제인가, 그런데 여기서 '전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임의 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정할 수 있을까? (150쪽)

 

처음 위 내용을 보았을 때, 토니는 그 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에이드리언의 그 천재성, 비범함에 또한번 경외심을 느낀다. 저 수식만 보고 의미를 파악하라는 것은 사실, 자신이 믿고 있는 기억들에 빠져 사라 부인과 에이드리언의 관계를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토니에게는 무리다.

 

에이드리언의 글은 또한 책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 나는 그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잇다. (...)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챙겨라. 에이드리언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석했다. 내가 상식을 적용하는 시점에서 그는 논리를 적용했다. 그러나 결국엔 우리 둘 다 엇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생각이다. (181쪽)

 

토니는 마지막에서야 그 수식의 의미를 깨닫는다.

첫 번째 a는 에이드리언이었다. 다른 a는 나, 앤서니. 그 옛날, 내가 진지해지길 바랄 때마다 그가 불렀던 이름이었다. b는 '아기(baby)'를 뜻하는 기호였다. 위험천만한 노산 끝에 어머니- '모친'-에게서 태어난 아기. 그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된 아이. (...) 나는 책임의 사슬을 보았다. 거기에 나의 이니셜이 있는 것을 보았다. (...)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 (254쪽)

 

그러니까 에이드리언은 아이가 생긴 결과에 대하여 그 책임의 고리를 연결해 나갔던 것이다. 두번째 수식이 더 이해하기 편한데, 앤서니=토니(a2) -> 베로니카(v) -> 에이드리언(a1)과 사라 부인(s)으로 이어지는 인과에 따라 결국 아이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토니가 책임의 사슬에 끼게 된 이유는 단순히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알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에 악담과 함께 '베로니카에 관해 그 어머니인 사라 부인에게 물어봐라'는 말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 편지를 받은 에이드리언은 사라 부인에게 찾아갔을 것이고, 사라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랑의 결과 아이가 생긴 것이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책임의 고리'의 문제는 아주 미묘하게 설정되어 있다. 언뜻 생각하면, 토니가 기여한 부분은 아주 작다. 그 편지를 받은 에이드리언이 사라 부인을 만났다고 해서, 두 사람이 성관계를 하게 될 것이라고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토니는 편지에 '아이가 생겨 대대손손 저주받아라'는 저주가 실제로 실현된 것에 대하여 회한을 느끼고, 도덕적인 책임을 느낀다. 그리고 사라 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토니의 둔감함이 결과에 일부 기여한 측면도 있다.

 

3. 베로니카는 왜 그랬을까?

 

1부에서 토니의 눈으로 베로니카와의 연애의 시작과 끝을 본 독자로서는, 토니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베로니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자구만.'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어떤가. 베로니카의 눈으로 살펴보면 베로니카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토니가 베로니카에 관해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깨닫게 된다. 또한 베로니카가 끊임없이 토니에게 "감을 못 잡는구나. 예전부터 그랬어"라고 말하는 이유도. 아래는 하나의 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든, 그때도 나는 대부분을 착각했다. 예를 들어, 무슨 근거로 베로니카가 처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녀에게 물어본 적도, 그녀가 내게 얘기해준 적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그녀가 나랑 자기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무슨 논리가 존재한단 말인가. (49쪽)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받아 주말을 보낸 후, 토니는 베로니카의 속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어 애무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데 대한 분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두어 주 동안은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호령하는 기분이었지만, 내 방으로 돌아와 수음을 하다보면 때로 분한 마음으로 기분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나는 대체 어떤 종류의 거래를 하고 있는 거지? 전보다 더 유리해진 건가, 아니면 더 불리해진 건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63쪽)

그런 와중에 베로니카는 "우리의 관계가 어딜 향하고 있는 건지 생각을 하긴 해?"라는 질문을 던지고, 토니는 성의 있는 대답을 피한 채 마음 속으로 '그래서 네 속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게 해준 거야?'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어긋난 대화를 나눈 끝에 둘은 헤어진다.

 

헤어진 후, 토니는 펍에서 우연히 마주친 베로니카와, 베로니카의 적극적인 리드로, 드디어(!) 아이러니하게도 헤어진 후에야(!!)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날 밤 이후, 토니는 여전히 우리는 끝난 관계라는 생각에 연락을 하지 않고, 다음에 만났을 때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나쁜 놈이라고 일갈하고, 둘은 말다툼 끝에 진정으로 결별한다.

 

위의 내용은 토니의 입장에서 전개되지만, 베로니카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베로니카는 토니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같이 주말을 보낸 후, 토니에게 '속바지에 손을 넣는 것'을 허락한다. 베로니카로서는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한 것일 수도 있고, 관계의 진전을 바라는 표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토니는 베로니카와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이, 다음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데 대하여 분한 마음을 느끼고, '베로니카가 나와 섹스를 가지고 거래를 하려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거래를, 계산을 한 것은 베로니카일까? 토니일까? 베로니카가 '우리의 관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물었을 때, 토니는 이미 베로니카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엔 귀엽다고 느꼈던 베로니카의 행동을 더이상 귀엽게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답답해진 베로니카는 관계에 대한 어떤 확답 또는 미래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요구하지만, 토니는 무성의하다.

헤어진 후 베로니카는 '내가 자주지 않았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 아닐까? 섹스를 하면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토니와 만난 밤에 섹스를 했건만, 관계를 회복할 의사가 없는 토니의 태도에 화가 났을 것이다. 이미 토니의 마음은 식었던 것이다. 토니는 '섹스를 허락하지 않은 채 밀당하다가 나를 차버렸다'는 식으로 자기 좋을대로 베로니카와의 연애의 결말을 맺었고, 그 때문에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만난다는 편지에 과도한 분노를 표출했다.

 

마거릿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살짝 이상한 짓을 했다. 내 인생사에서 베로니카를 빼버린 것이다. 나는 애니가 내 최초의 정식 여자친구인 것처럼 꾸몄다. (...)

가장 괴상한 부분은 이렇게 조작한 나의 역사를 마음 편히 입에 올렸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나 스스로에게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베로니카와 사귄 것을 패배- 그녀의 멸시, 나의 굴욕- 라 보았고, 기록에서 삭제해버렸다. (122~123쪽)

 

2부로 들어가보자. 베로니카가 40년 후 토니에게, 진실을 곧바로 알려주지 않은 채 스무고개를 넘듯 찔끔찔끔 단서를 주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베로니카가 토니를 배려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눈치를 챌 때까지 기다려, 자신의 젊은 날의 저열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느끼지 않도록 멈추기를 바라며.

 

"그 문장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야? 너도 알 것 아냐.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다음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건 옳지 않아. 원한다면 이거나 읽던가."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한 장을 뺴고는 결국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만약 토니가' 뒤에는 어떤 말이 담겨 있었을까? 토니에 대한 가차없는 비난의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럴싸한 수식을 동원한 이성적인 글 뒤에, 토니가 보냈던 것만큼 저열한 수준의 저주나, 아니면 엄마뻘의 유부녀와 사이에 아이를 만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감상적인 자기연민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됐건, 베로니카의 의도가 토니를 궁금증에 미쳐버리게 만들거나, 야금야금 단서를 흘리며 오랫동안 괴롭히거나, '감히 너 따위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가지게 할 수는 없지'라는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결국에는 끝끝내 감을 잡지 못하는 토니에게, 그리고 망가진 에이드리언, 사라 부인, 그리고 베로니카 자신의 인생과 달리 그가 살아온 평범하고 만족스런 인생에 대해 주절주절 떠드는 토니에게, 엄청나게 분노한 것 같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베로니카와 토니가 서로 만나면서 완전히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 동상이몽의 현실이다. 토니가 베로니카와 다시 연애를 하는 기대를 갖는 것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프다.

 

나 자신이 아둔하고 굴욕적으로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 불과 이삼 일 전에 나 혼자 명명했던 대로 - '인간의 마음에 영구히 존재하는 기대심리' 때문이었다. 또한 그 이전에, '타인의 경멸을 극복한다는 것의 묘미' 때문이기도 했다. 평소 자만심 때문에 큰코 다칠 일은 없다고 생각해온 편인데, 사실은 스스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혼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유증을 통해 내 소유물이 된 걸 찾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 변이를 거쳐서 뭔가 더 거대한 것, 뭔가 평생에 달하는 내 삶과 시간과 기억, 그리고 욕망과 연관된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나는 - 나라는 사람의 어떤 층위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를 역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만하게도 -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 베로니카가 날 다시 좋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중대사라고 여겼다. 베로니카가 이메일에서 '이쯤에서 접는'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행간에 밴 차디찬 조롱의 기미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고, 그것이 다만 초대이며 유혹에 가까운 몸짓이라고까지 생각했다. (223쪽)

 

4. 에이드리언은 어떤 사람인가?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에이드리언에 대해 토니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실제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토니는 베로니카와 마찬가지로 에이드리언에 대해서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토니는 에이드리언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누군가 공무원(아니면 최소한 고급 공무원)은 언제나 도덕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말한 걸 들은 기억이 난다. 에이드리언에겐 그런 일이 맞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는 세속적이라던가, 위험을 즐기는 - 물론 지성의 분야에선 예외였지만 - 타입으로 보이진 않았다. (74쪽)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에이드리언의 정신이 평형상태를 상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데 선서라도 했을 것이다. (89쪽)

 

 그러나 과연 에이드리언은 그런 사람인가? 엄마뻘의 유부녀인 사라 부인과 깊은 관계를 맺은 에이드리언이 언제나 도덕적인 결정을 내릴 만한 사람인가?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 자살을 한 에이드리언의 정신이, 끝까지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대체 에이드리언은 어떤 사람인가?

 

그러나 이제 나는 에이드리언의 면모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재고해야 했고, 자살이 진실로 철학적인 유일한 질문이라고 말한 카뮈를 인용하던 반항아라고 여겼던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 뭔가 다른 존재로...... 그런데 과연 어떤 존재로 본단 말인가? 그래봤자 롭슨의 다른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앨릭스가 말한 대로 '딱히 에로스와 타나토스 감은 아니었던', 지금까지도 딱히 언급할 만한 게 없는, '엄마 미안해'라는 이별의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과학부 6학년생. (240쪽)

 

어쩌면 에이드리언은 그 자신이(토니도 함께) '반철학적이고, 자아도취적이며 반예술적인, 한 마디로 틀려먹은 짓'- 여자친구가 임신하자 자살한 행위- 을 했다고 폄하했던 롭슨과 별다를 것이 없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지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한편으로 토니와 에이드리언의 관계는 생각보다 얕고 가벼웠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훗날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마음 한구석으로 관계가 그렇게 쉬울 수 있다는 데, 굳이 더 복잡할 필요가 없다는 데 나의 일부는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던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었다. 관계란 무엇인가의 증거로서 복잡함을 요하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대체 무엇에 대한 증거인가? 깊이? 진지함? 그럼에도, 깊이나 진지함을 바치지 않고도 관계가 정말로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 있다는 건 맹세코 사실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게 마련'이라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면서, 나 자신이 일종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85쪽)

 

그가 우리 각자의 집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우리가 그의 집에 간 적은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몰랐다. 물어본 적은 있었나? 우리는 호텔 바에서 와인 잔을 부딪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식사 말미엔 맥주잔을 부딪치며 또 경의를 표했다.(96쪽)

 

 

5. 사라 부인은 왜 그랬을까?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 사라 부인인데, 딸의 남자친구를 유혹할 정도로 성적으로 왕성하고 매력이 있는 인물인 것 같다. 40대와 20대의 불륜이 상당히 많다는데, 드라마 '밀회'가 떠오르기도 한다.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받아 머물던 그 주말, 사라 부인은 토니에게 은근한 유혹을 던졌고, 둔해 빠진 토니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것이라는 해석은 아주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다.

어느날 토니는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받아 주말동안 베로니카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베로니카의 가족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인 면에서 모두 토니의 가족보다 상류층이다. 그러나 낮부터 술냄새를 풍기는 아버지, 가벼워보이고 왠지 비웃는듯한 태도의 오빠 잭을 만나며 토니는 소변을 잘 보지 못할 정도로 바짝 긴장하고 불편함을 느낀다. 그중 제일 호감을 준 것은 어머니인 사라 포드 부인인데, 방문 다음 날 아침 토니는 사라 부인과 둘이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사라 부인의 말에 의하면 베로니카가 '토니는 늦잠을 잘 것이라고 장담했다'는 것인데, 토니는 자신이 절대 늦잠을 잔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베로니카가 어머니의 성향을 알고 토니를 시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능하다. 이 일이 있은 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토니에게 베로니카가 애정표시와 스킨쉽 면에서 더 적극적이 된 것을 보면 저런 의심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사라 부인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한다.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 (54쪽)

 어떤 어머니가 딸의 남자친구에게 저런 말을 할까?

 토니는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사라 부인의 편지를 받게 되고, 베로니카와 그렇게 헤어진 데 대한 비난이 담겨있을까 걱정하지만, 놀랍게도 그 내용은 '베로니카와 헤어진 데 유감을 표하면서 틀림없이 너에게 더 잘 어울리는 여자가 나타날 것이다'는 내용이다. 이것도 유혹의 연장선상일까? 한번 주말을 보냈을 뿐인 여자친구의 어머니가 굳이 딸과 헤어진 남자에게 편지를 보낼 이유가 있을까? 이것이 유혹이라면, 역시나 둔감한 토니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유혹은 부질 없이 흩어진다.

 

 사라 부인의 유혹이 토니에게 한정되었을까? 만일 베로니카가 어머니의 유혹에 대해 알고 남자친구를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데려간 거였다면, 에이드리언과 만나면서도 같은 시험을 했을 것이다. 사라 부인은 에이드리언을 유혹했고, 둔감하지 않은 에이드리언은 유혹에 넘어간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가 어려운 것은, 사라 부인은 유증으로 또한번 토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과 함께 500파운드를 남겼다는 것. 편지의 내용은 '그때 그 시절, 나와 우리 가족들이 토니에게 잘못 대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 추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에이드리언은 행복했다고 생각해'.

무슨 뜻인가.. 흠.. 500파운드에 대해서는, 베로니카가 "피묻은 돈"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에이드리언의 죽음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단서가 부족하다.. 왜 하필 500파운드인가.

 

 

6. 비극은 끊임없는 착각 속에 숨어있었다.

 

 토니가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애초에 그의 인식이 자기 좋을 대로 사건과 인물들을 기억했고, 그 때문에 끊임없이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니가 특별히 멍청해서라기보다는 평범한 우리 모두가 자신도 모른 채 겪고 있는 일일지 모른다.

토니의 착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에이드리언의 장례가 끝난 후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앨릭스는 에이드리언이 죽기 세 달 전쯤 그를 만났던 이야기를 한다. 그는 치즐허스트로 가는 길이었고, 팔팔하고 발랄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토니는 '그년이군', 즉 에이드리언이 사랑한 사람이 베로니카라고 생각한다. 치즐허스트는 베로니카의 집이 있는 곳이고, 두 사람이 만난다는 편지를 받기도 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다. 그리고 애초에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 대해 박혀 있는 생각 - 에이드리언은 도덕적이고 위험에 뛰어들지 않으므로 유부녀와 관계를 가질리 없다, 베로니카는 보다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 거래하고 싶어한다 - 으로 인해 베로니카가 내미는 단서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141쪽)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65쪽)

 

비극은 또한 돌이킬 수도, 용서를 빌 수도 없이, 사라 부인과 에이드리언 모두 죽어버렸다는 것.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간이, 시간이 윤색한 기억이, 착각이, 뒤통수를 치고 무릎을 꺾는 것이다.

 

'예술이 과장하는 삶의 보잘것없음'에 대해 이야기한 게 누구였나. 이십대 막바지의 어느 순간, 나는 나의 모험심이 졸아들어버린 지 오래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소년기에 꿈꾼 것 중 단 하나라도 실행에 옮길 날은 오지 않을 거였다. 대신, 나는 잔디를 깎았고, 휴가를 냈고, 나름대로 인생을 즐겼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162쪽)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186쪽)

 

만사는 감소의 문제요, 뺄셈과 나눗셈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뇌가, 기억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속 편하게 점진적인 쇠락에 기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꿈 깨시지. 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니까. 그래서 뇌는 이따금씩 파편적인 기억을 던질 테고, 심지어는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를 터주기까지 할 것이다. (194쪽)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237쪽)

 

 

문득, 나는 어떤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나는 내 기억을,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인간됨을, 나의 과거가 저지른 도덕적 잘못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고 그 확신은 얼마나 잘못되었을까. 과거에 내가 저지르고도 잊고 있는 도덕적 잘못이 어딘가에 싹을 틔워 비극을 낳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면 두려워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182~183쪽)

내가 아는 체하며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했을 때, 조 헌트 영감이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는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라고 했다. 우리의 개인적 삶을 대입해야 할 때 그 말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210쪽)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더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우리는 (...) 상상력의 첫 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다짐하듯 확언했다. 우리의 부모들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는데, 자식들이 갑자기 유해한 세력이 노출돼버린 순진무구한 존재라고 상상했다. (...) 그들은 사춘기의 우정이 갖는 막역한 속성과, 기차에서 마주치는 이방인들의 야수적인 행태와, 싹수가 노란 여자의 유혹에 대해 우리 대신 겁을 먹었다. 그들의 그 노심초사는 우리의 경험을 얼마나 까마득하게 앞서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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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요미요미 2017-08-25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가 뭘 그리 잘못했나 하고 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는데, 쓰신 내용을 보니 한편으로 이해가 잘 되요!!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도 드네요!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독서괭 2017-08-29 16: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짧은 분량에 많은 걸 담아낸, 곱씹어볼수록 맛있는 소설이죠^^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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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갖춰져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뜨끔했다. 글쓰기 근육을 기르는 데 필요한 건 종이와 펜, 그리고 의지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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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가 일자리를 잃고 내 처자식의 밥 세 끼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것이 도대체 '개혁'이란 말인가. 개인의 삶은 구조의 붕괴와 더불어 부수적으로 소멸돼야 하는 비눗방울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 금융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개인은 무엇이고 개인의 가정은 무엇이며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개인의 삶을 제물로 삼고 다시 일어선다는 경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세차가 문제가 아니라, 세차를 해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넉두리가 그의 울분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의 울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밥의 생물학적 본질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며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밥 세끼의 문제를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 본질의 비논리성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고통 앞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진부한 잠언은 그야말로 위선이거나 허위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제도 안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자신의 노동과 피로를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그나마 정직할 것이었다.  (31쪽, '밥이란 무엇인가' 중)

 

2. 이영자는 재능 있는 연예인이지만 뚱뚱한 이영자는 뚱보에 대한 이 사회의 혐오와 모멸을 은연중에 대리만족시켜 줌으로써 인기를 누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지는 인기가 그 여자의 내면에서 참혹한 상처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뚱뚱한 여자를 집단적으로 혐오하는 이런 미학적인 사회에서 그 뚱뚱한 여자에게 날씬해지고 싶은 비원이 있었다면, 수술을 했건 운동을 했건 간에 나는 그 여자가 날씬해진 것을 축하한다. 살을 빼서 날씬해진 여자를 상대로, 그 여자가 운동을 해서 살을 뺐느냐 수술로 살을 뺐느냐를 검색하고 입증하는 일도 언론의 사명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하다. (44쪽, '도덕적인 분노에 대해' 중)

 

3. '국민정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비논리적인 것이라야 마땅하다. 내가 보기에는 내 주변의 나처럼 못난 좀팽이들은 안보도 원하고 통일도 원하고 주권수호도 원하고 군대가 군대답기를 원하고 평화도 원한다. 좋다는 것을 다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일이 좀더 수월해지기를 원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헛소리해대듯이 어느 한쪽 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정치적 욕망을 위장해 놓고서 벌이는 이런 난장 싸움판에 '국민정서'를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없는 '국민정서'의 허깨비를 만들어서 소란을 떨고 싸움질을 해대면 세상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해진다. (60쪽, "'국민정서'의 허깨비" 중)

 

4. 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쓸쓸했지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세계는 무수한 측면을 갖는다. 그 측면마다 하나의 독립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 (67-68쪽, '말하기의 어려움' 중)

 

5.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인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무너진 공가 속을 기웃거리며 떠난 사람들이 버린 가재도구를 뒤적거릴 때 분노와 슬픔으로 치가 떨렸다. 공가에 살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분담되었나. 도대체 누가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졌다는 말인가. 경제발전의 학설과 위기극복의 정책들은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82쪽, '개 발자국으로 남은 마을' 중)

 

6.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하여 부정당할 수 있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 언론과 공론의 기본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를 강제로 편입시켜서 일사불란한 논리를 전개하는 언론행위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 (...) 설득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언론의 윤리이다. (97-98쪽, '언론의 부자유가 언론의 자유다' 중)

 

7. 회사에서 월급을 몽땅 온라인으로 마누라한테 보내니까 돈 구경하기도 힘들다. 원고료로 받은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마누라 몰래 쓰려고 책갈피 속에 감추어놓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맹자』속에 넣었다가, 아무래도 옛 성인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른 책으로 바꾸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맹자속에도 없고,『공자』속에도 없고,『장자』속에도 없고, 제자백가서와 동서고금을 모조리 뒤져도 없다. 수표를 찾으려고『장자』를 펼쳐보니 '슬프다, 사람의 삶이란 이다지도 아둔한 것인가! 외물에 얽혀 마음과 다투는구나'라고 적혀 있어 수표 찾기를 단념할까 했으나 또 그 다음 페이지에 '무릇 감추어진 것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내 언젠가는 기어이 이 수표 두 장을 찾아내고야 말 터이다. (105쪽, '돈 ·오카네 ·머니' 중)

 

8.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보편적 종말이 나의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죽음을 위로할 수는 없다. (...)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을 상종할 수가 없고 죽음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그 설명되지 않는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을 끝없이 긴장시키고, 운명 앞에서의 경건성이 삶 속에서 작동되기를 바랄 뿐이다.

    (...)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인 각자의 죽음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 죽음은 통계화된 사회현상일 뿐이다. 죽음이 그렇게 사물화될 때, 삶 또한 우연성 속에 방치된 사물로 전락한다. 사물화된 죽음은 더 이상 삶의 시간들을 긴장시키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자리매김은 불가능해진다. 죽는 일은 무섭지만, 죽음과 구분되지 않는 일상의 삶은 더욱 무섭다. (137, 139쪽, '대문 밖의 황천' 중)

 

9. 태풍이 먼 바다로부터 밀고 올라오듯이, 해마다 봄의 꽃들이 전선(前線)을 이루어가며 북상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꽃들은 피었던 자리에서 겨우내 숨어 있다가, 숨었던 자리에서 다시 피어난다. 우리 마을에 어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꽃의 무리들이 남쪽 마을에서부터 피어서 북쪽 마을로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 꽃은 인간과 대면하기 위하여 피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이 그 사이를 못 참아서 시름거리며 시(詩)를 적는다.

   (...)

   아이놈들이 옆집 마당의 꽃핀 매화나무를 매우 부러워해서 우리도 마당에 매화나무를 사다가 심자고 조른다. 꽃은 주인이 따로 없고 눈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 주인인 것이어서, "옆집에 매화가 있으므로 구태여 돈 주고 나무를 사다가 심을 필요가 전혀 없으며, 옆집 마당의 매화는 돈도 안 들고 키우는 수고도 안 들면서 오히려 눈부시니 얼마나 더 기특한 나무냐"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어도 다 큰 녀석들이 이 쉬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놈들은 나무를 뽑아서 제 집 울타리 안, 제 방 창문 앞에 옮겨심어 놓기 전에는 꽃핀 매화나무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평안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 아이일 수밖에 없다. 봄날의 이 비린 시간들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다 제쳐놓고서 천지간의 꽃잎을 모조리 휘몰아 사라지는 것이며 모든 꽃은 마침내 인간의 몫이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반찬투정을 하듯이 꽃 투정을 하는 이 어린 것들은 수많은 봄을 더 겪어야 하리라. (239-241쪽, '꽃 몸살 나는 봄' 중)

 

10. 수박을 먹는 기쁨은 우선 식칼을 들고 이 검푸른 구형의 과일을 두 쪽으로 가르는 데 있다. 잘 익은 수박은 터질 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영롱한 씨앗들이 새까맣게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한바탕의 완연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칼 지나간 자리에서 홀연 나타나고, 나타나서 먹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

   무등산 수박이 다 익으면 여름이 끝난다. 메마른 산비탈의 돌밭에서 이 웅장한 수박은 온 여름 내내 폭양을 쪼여가며 익는다. (...) 어디로 피서를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온 여름이 다 지나갔다. 축복은 저 숨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 입의 과일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다. 이 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놓고, 힘센 여름은 이제 물러가고 있다. (246, 249쪽, '수박과 자두' 중)

 

11. 해바라기는 그 꽃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세상을 낯설어하지 않고, 갑자기 터지듯이 활짝 피어난다. 해바라기가 열릴 때, 꽃이 세상을 수줍어하기보다는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이 꽃을 내외하게 한다. 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꽃은 강렬한 내면의 우월성으로 가득하다. 

     (...)

    맨드라미는 꽃이라기보다는 논리적 형태에 도달하지 못한 원한의 덩어리처럼 피어난다. 

     (...)

    수국의 화려함은 현란하지 않고 빛나지 않는다. 수국은 강렬한 원색의 꽃을 피우지 않는다. 수국의 꽃색은 조심스럽다. 그 꽃색은 자주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지만, 수국의 색은 극한으로 치닫지 않고, 색의 초기단계에서 더 이상 색이기를 멈춘다. 그래서 그 색은 색이 아니라 색의 추억 같아 보인다. (256-258쪽, '여름 꽃밭에서 가을 꽃밭으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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