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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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잘 쓴 오락소설. ‘살아남기‘와 ‘그럼에도 인간성을 지켜내기‘라는 주제는 전통 있는 주제다. 고전문학에서는 그 배경이 전쟁이었다면 최근에는 가상의 무대인 경우가 많을 뿐... 설정은 <배틀로얄>과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메이즈러너>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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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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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을 읽은 건 오랜만이다. 일본어를 번역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을 썩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하루키와 에쿠니 가오리가 별로라는 이유로... 뭐 이런저런 이유로 굳이 일본소설을 찾아 읽지 않게 됐다.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와 아사다 지로는 좋아했었다. DJDJ가 하도 하루키를 칭찬하니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 책도 빨간책방에서 소개하지 않았다면 읽게 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은행에서 1억 엔을 횡령하고 해외로 도주한 리카,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 유코, 전 남자친구 가즈키, 전업주부 시절에 사귄 친구 아키. 이 네 명의 시점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리카의 횡령 사건의 전모이고, 리카의 지인들은 리카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횡령 사건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주인공은 리카가 아니다. '종이달'이 상징하는 바이기도 한 '돈'이다. 사진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에 사진관에서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 사진을 찍곤 했다고 하니, '종이달'이란 가짜로 만들어 낸 행복을 의미하기도 하고, 실재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그 가치가 평가되는 종이돈(화폐)을 의미하기도 한다. 리카의 횡령도 대부분 돈 자체보다는 돈을 예금하였다는 증서를 위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돈이 돈으로 느껴지지 않고 어떤 허상, 허상이므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 마르지 않는 샘처럼 느끼게 되는 리카의 비현실적 감각은 그나마 현금으로 이루어지던 소비가 신용카드 결제 방식으로 바뀌면서 더욱 강화된다. 리카의 무모한 사치는 가속화된다. 이 부분에서 리카의 행위는 단지 개인의 부정을 넘어서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비극으로 확대된다.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萬能感에 가까웠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리카는 죄책감도 불안감도 전혀 느끼지 않고, 인적 없는 플랫폼에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만능감의 쾌락에 잠겼다.  -181쪽
"불꽃 너머에 달이 있어요." 고타가 불쑥 말했다. 정말로 깎은 손톱처럼 가는 달이 걸려 있었다. 불꽃이 떠오르면 그것은 사라지고, 불꽃의 빛이 빨려들 듯이 사라지면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 350쪽

칼로 살짝 도려낸 듯한 가느다란 달이 걸려 있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달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보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391쪽

 

 실상 이 소설에서 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돈의 힘, 돈의 맛이다.

 고타는 자신이 먼저 뭘 사달라거나 해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자신은 돈 때문에 리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타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리카에게 돈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얼마를 쓰든 돈은 무한히 나온다고 여긴다. 쥐뿔도 없는 백수 신세인 고타가 호텔 스위트룸을 자연스럽게 즐기고 또래의 식당 종업원에게 파라솔 위치를 바꿔달라고 지시하며(의자를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데도) 무의식 중에 우월감을 표시하는 장면은 씁쓸하다. 고타는 돈의 힘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갇혀 있다. 결국에는 그곳에서 나가는 길을 택한다.

 유코는 어떤가? 유코는 과도하게 돈을 아낌으로써 오히려 돈에 속박당한다. 근검절약으로 의기투합했던 남편마저 지치게 할 만큼. 그리고 유코의 딸은 친구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갖고 싶은 나머지 도둑질을 저지르게 된다.

 아키는 반대로 쇼핑으로 과소비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는 인물이다. 사치로 인해 이혼을 당했으나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 이혼 후 전 남편과 살고 있는 딸에게 비싼 물건을 선물해준 대가로 딸로부터 애정이 아닌 지갑 취급을 받게 된다.

 가즈키의 아내인 마키코는 매우 부유했으나 가세가 기운 집안 출신으로, 결혼 후 한동안은 소박한 생활에 만족했지만 아이들이 커 나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사치에 빠져들게 된다.

 유코와 아키, 마키코는 모두 리카의 또다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카도 얼마든지 저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고, 저들도 얼마든지 리카처럼 될 수 있었다.

 어쨌든 모든 인물의 공통점은 돈에 휘둘린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  -349쪽

 일정 선을 넘어서면 돈이 덩어리로 느껴진다는 리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한마디로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억 단위의 돈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돈은 어떤 의미일까. 그건 채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느 선을 넘어서면 지극히 뻔뻔해지는 채무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책을 보는 내내 가장 싫었던 인물은 리카의 남편이다. 언뜻 보면 열심히 일하고 아내가 집안일을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불평하지 않는 온화한 남편 같지만, 실은 아내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쫌생이에,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친밀함이 전혀 없는 목석이다. 엄청나게 가부장적이다. 아이를 갖자고 해놓고 배란일이라며 다가오는 리카를 무안주기나 하고.. 아니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러니 아무리 불륜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하여도 리카의 이 독백을 보며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카는 인정했다. 그렇다, 줄곧 기다렸다. 줄곧 이렇게 애무받고 싶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아름다운 것을 어루만지듯이 이렇게 만져주길 바랐다. 줄곧 기다렸다. 줄곧.  -179쪽

 

 리카는 해외로 도망쳐 이대로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갖고, 평생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과 만능감을 느끼지만, 곧 다시 절망에 빠진다. 여전히 자신은 스스로 친 덫에 걸려 있다.

리카는 여권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매달리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예전에 사랑한 남자가 했던 것과 같은 말을.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406쪽

 

 리카가 아닌 아키의 이야기로 소설이 끝맺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건 어쩌면 희망의 제시가 아닐까. 리카는 화려하게 죄를 짓고 도피한 끝에야 자신이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임을,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지만, 아키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봄으로써 죄를 짓기 전에 사치라는 덫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낸다. 아키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돈에 휘둘리기 전, 한때는 순수했던 과거의 자신일까?

 

집을 나설 때는 완벽한 화장에 완벽한 코디네이트를 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 유리창 속에서 몹시 초라해 보였다. 엄마도 아내도 되지 못하고,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한심한 여자로 보였다. 아키는 은행 돈을 착복한 리카를 생각했다. 사건을 알고 난 뒤, 마치 그녀가 내 속에 살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키는 리카를 자주 떠올렸다. 리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리카도 역시 이런 식으로 무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돌아가자, 돌아가자, 생각하는 사이 눈물까지 났다. 어째서 눈물이, 생각하면서 아키는 뺨을 타고 턱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고 되뇌면서 필사적으로 걸었다.  -414쪽

 

리카는 겨우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진학이며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몇 시 전철을 탔는지, 그런 세세한 사건 하나하나까지가 자신을 만들어온 거란 걸 이해했다. 나는 내 속의 일부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때부터 믿을 수 없는 부정을 태연히 되풀이할 때까지, 선도 악도 모순도 부조리도 모두 포함하여 나라는 전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모두 내팽개치고 도망친 지금 역시 더 멀리로 도망치려 하는, 도망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나도 역시 나 자신이라고.
가자, 이다음으로.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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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이 훨씬 좋았다.

아무래도 책을 먼저 읽은데다가, 영화에서 책의 구성(여러 명의 시점이 존재하는 구성)을 그대로 살리기에는 시간적 한계가 있으므로 리카의 이야기로만 압축한 탓인 듯한데, 전체적으로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돈에 휘둘리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고 할까. 리카의 지인들을 아예 빼버린 대신 은행 동료들을 등장시킨 각색이나 리카가 횡령을 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 있는 연출은 좋았지만. 대충 보면 흔한 불륜 이야기 같이 보이기도 하고... 책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리카의 고등학교 시절 일화 - 재난을 당한 국가의 아이들에게 후원금을 보내는 데 리카가 열성적이었다는 이야기 - 에 살을 붙여서 시작과 끝에 배치한 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리카와 고타 사이의 관계가 책과 다르게 느껴지도록 그려져서 더 그런 것 같다. 책에서는 리카가 고타를 단지 연인이 아니라 자신이 갖지 못한 아이를 보듯이 보는 듯한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고타는 엄마에게서 떨어진 아이처럼 언제까지고 리카를 보고 있었다.  -165,166쪽

  리카는 고타가 고학생이고 할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지만 빌리지 못하고 있으며, 친구들과 아마추어 영화제작을 한다는 등의 여러 사정을 알고 충분히 가까워진 후 육체적 관계를 가진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과정이 너무 짧게 그려져서, 마치 리카가 고객인 고타의 할아버지 집에서 고타를 우연히 한번 본 후 서로 첫눈에 반해 바로 잠자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고타의 이런저런 사정들은 그 후에 우연히 알게 되어 횡령을 시작하게 되니(빚이 있다는 것 자체는 책에서도 잠자리 후에 알게 되긴 하지만)- 흔하디흔한 '사랑에 눈 멀어 공금에 손 댄 여자'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느끼길 바라고 리카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전혀 친밀한 애정을 주지 않는 남편과의 관계, 아이를 갖고 싶었던 마음, 자신이 늘 자신의 일부에 불과한 것 같다는 불안감 등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리카가 사주는 음식을 먹는 고타에 대한 애정으로, 고타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만능감으로 진화하는 과정.. 그리고 띠동갑 연하남을 만나며 느끼는 초조함과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에게 돈을 쓰는 희열, 돈이 단순히 종이로, 허상으로, 가짜로 보이게 되는 이상한 감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걷잡을 수 없는 사치와 횡령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 - 그런 것들이 책에서는 섬세하게 표현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영화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는 것 같다.

 고타와의 헤어짐도 그렇다. 영화에서의 고타는 책에서의 고타보다 훨씬 뻔뻔하고, 사기꾼 같다 (책을 읽지 않은 채 영화를 본 남편은 처음 빚 얘기를 할 때부터 고타가 사기꾼이 아니냐며 의심했다). 고타의 양다리를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리카에게 고타가 쥐어짜듯 말하는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라는 절박한 말도 영화에서는 없다. 리카가 구해준 맨션에서 다른 여자랑 나체로 누워 있는 모습을 들킨 욕먹어 마땅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너무 흔한 전개잖아 이거.. 왜 이렇게 각색을 했지. 시간상 섬세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초반에 몇 장면 나오는 베드신을 줄이고 좀더 대화를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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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여행 - 낯선 공간을 탐닉하는 카피라이터의 기록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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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행서는 더욱 읽지 않는다. 내가 직접 가야 좋지 남 여행한 얘기 듣는 게 뭐가 좋아? 그러니 이 책이 전자책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띄지 않았다면 좀처럼 읽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여행에세이이긴 하지만 여행정보를 주기 위한 목적은 전혀 없다. 그저 여행을 사랑하는 저자의 절절한 마음으로 가득해서, 그 행복을 타인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흥분으로 발그레 달아오른 뺨이 떠오른다. 여행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편은 아닌 내 마음조차 설레게 하는 열정이다. 귀찮아서 도저히 못 할 것 같긴 하지만, 언젠가는 저자처럼 작은 마을, 정보없는 마을을 찾아 나만의 보물을 만들고 싶게 만드는.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갑자기 문장은 풍성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햇살이 스며든다. 공기의 질감까지 부드러워진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진다. 오후 다섯 시의 그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한낮 차가운 와인을 마신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골목이 노래로 가득 차기도 하고, 낯선 얼굴이 두등실 떠오르기도 한다. 유난히 작았던 숙소가 문득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바람에 고립되었던 그 아찔했던 순간은 인생의 모험으로 포장된다. -11쪽

여행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저 비가 오는 것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지는 느낌이 든다. 그저 몇 개의 가게가 문 닫았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향해 문을 닫는 느낌이다. 한 가게 주인이 나에게 불친절했을 뿐인데, 온 도시가 나에게 불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길을 못 찾았을 뿐인데, 이 여행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마음의 과장법은 순식간에 여행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린다. -82쪽

지금부터 여행에서 가장 실용적인 말 한마디를 공개하겠다. 그건 바로,
"What‘s your favorite?"
겨우 이거냐고? 겨우 이거다. 설마 진짜 저 말이냐고? 그렇다. 이게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뜸을 들였냐고? 중요하다.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써먹은 결과 한 번도 통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마법의 주문처럼 이 질문을 하는 순간 모두가 진심이 되었다. 모두가 내 여행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고심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앞으로 볼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말 그대로 모두. 오로지 저 한마디 때문에.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건요?"라는 이 평범한 한마디 때문에. -108쪽

"난 왜 몰랐지? 알았으면 올라갔을 텐데."
미구엘은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 이건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가 아니야."
미구엘의 그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여행에서의 내 조바심을 정확하게 진단한 말이었다. 못 봤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건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가 아니야. 거길 못 갔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 도시엔 거기만 있는 게 아니야. 그거 못 먹었다고 여행이 끝장나는 게 아니야. 정작 현지인들은 그거 먹지도 않잖아. 그걸 사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거야. 남들 다 본다고 너까지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넌 너만의 여행을 직조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133,134쪽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나는 한 시간짜리 도시 마니아다. 30분짜리 도시면 더 좋다. 그걸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을이라 불러도 좋고, 읍내라 불러도 좋고, 시골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여행을 계획할 때 제일 먼저 골몰하는 것은 가고 싶은 작은 마을을 정하는 것이다. 블로그에 정보 따위는 없는 마을. 있더라도 사진 한 장이 전부인 마을. 그런 마을의 정보 한 줄을 얻는 것은 힘겹고, 그런 마을에 가는 길은 험난하다. 대중교통은 없거나, 있더라도 하루 한두 대의 버스가 전부. 운전면허증도 없는 나와 운전을 싫어하는 남편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야 한다. 언제나 겨우겨우 그곳에 도착하고는, 며칠씩 머물러버린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도착했는데, 라는 심정으로. 그리고 그곳에서의 시간은 여행 상자 안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곤 한다. 가장 희귀하고도 가장 따스한 기억으로만 채워진 보석. 우리들만의 보석. -158쪽

작은 마을들은 어김없이 우리를 환대한다. 큰 도시에서는 우리를 버린 것임에 들림이 없는 행운의 여신이, 유독 작은 마을에서는 우리를 잽싸게 발견한다. 그리고 행복의 진수성찬을 차려버린다. 이 진수성찬은 오롯이 우리들의 것.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한 맛.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다정한 맛. 그 소박한 진수성찬을 맛보고 싶다면 시간을 줘야 한다. 행운의 여신도 우리를 찾아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하루가 아니라, 3일. 유명한 것이 없으므로 오래, 별게 없으므로 천천히.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이므로 음미하며, 낯선 얼굴들과 마주칠 때마다 웃는 낯으로. 그렇게 여행의 보석을 품는 것이다. 나만의 보석을 세공해가는 것이다. 작지만 확실한 보석을. -164쪽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껏 무용해지자 마음을 먹는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며 짐짓 호탕하게 말해본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마음에는 다시 유용함이란 기준이 자리 잡는다. ‘언제 또 올 수 있겠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도 못 보면 아깝잖아.‘ 등등 유용함은 각종 핑계를 달고 여행 한가운데에 번번하게 자리잡아버린다. 그리하여 ‘무용하자‘라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여행자의 스케줄은 봐야 할 것. 가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 등등 유용한 것들로만 빼곡히 들어차게 된다. 무용하고 싶지만 무용한 시간을 견딜 힘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169쪽

남의 여행은 남의 떡이다. 언제나 더 커 보이고, 언제나 윤기가 흐른다. 흠집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고, 부러운 행운만 넘쳐흐른다. 어쩜 그 여행의 풀밭은 그토록 푸르른지. 남의 여행을 직접 이야기로 듣는 시대를 지나, 이제 블로그에서, 각종 SNS에서 남의 여행을 보게 되면서 이 증상은 좀 더 심각해진다. 앞뒤 맥락 따위 존재할 수 없는 그 찰나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우리는 여행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름살을 제거해버린다. 저 여행은 모든 것이 풍족해. 저 여행은 커피 잔에 떨어지는 빛 하나까지 어쩜 저렇게 완벽할까, 저 사람은 내내 행복하기만 할 거야. 같이 간 사람이랑 싸우는 일도 없겠지. 돈이 왜 부족하겠어. 돈이 부족하다면 저런 걸 사지도 못하지. 여행은 왜 또 저렇게 자주 가. 시간도 넘쳐나나 봐. 명백히 세상은 엄친아들의 여행으로 넘쳐난다. -248, 249쪽

그렇게 동네에서 가장 게으른 목련을 알게 되었다.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은행나무를 알게 되었다. 4월에 모든 꽃들이 다 지고 나면 그제야 피어나는 이팝나무들도 알게 되었다. 한 할머니의 베란다 아래 길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다섯을 낳은 소식도 듣게 되었다. 망원시장에서 그때그때 장을 봐서 제철 음식을 내놓는 식당도 알게 되었다. 시시콜콜한 집안 이야
기까지 다 풀어놓는 사장님 부부도 알게 되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 같은 얼굴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매일 더 부지런한 동네 여행자가 되자고 마음을 먹는다.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니까. 멀리 여행을 떠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것은 결국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니까. 그 마음가짐으로 내 고향을 여행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내 고향은 망원동이니까. 내가 내 고향의 가장 충실한 여행자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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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이처럼 - 아이, 엄마, 가족이 모두 행복한 프랑스식 육아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 이주혜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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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오니 점점 육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데, 마침 이 책을 선물받았다.

 시시콜콜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어떻고 하는 실용서적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마음가짐에 관한 책.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미국인, 남편은 영국인인데 프랑스에서 아이를 낳고 살게 되면서

 "어떻게 미국과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 교육방식이 이렇게 다른가?"하는 의문을

품고 프랑스의 육아방식을 연구했다. 저자가 묘사하는 미국의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한국인 줄;;

 

 내가 파악한 요지는 이거다.

 

 아이에게 좌절을 경험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것은 신생아 때부터 수면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이는 부모가 이룬 가정 안에 편입되는 것이지, 아이를 중심으로 새롭게 가정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와 부부의 행복이 아이에 대한 헌신에 우선한다. 그래야 아이도 행복해진다.

 

 

 글이 속도감이 있고 위트가 풍부하여 술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육아에 대한 마음가짐에 공감가는 부분도 많았지만, 읽는 내내 프랑스의 끝내주는 복지수준이 부러워 좀 슬펐다.

 

오늘날 미국 중산층의 육아법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한 사람은 많았다. 과잉보호, 과도한 교육열, 헬리콥터 부모, 아이지배현상 같은 용어가 등장하는 책들이 수백 권을 넘는다. 혹독하고 불행하기까지 한 미국식 속도전 양육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누구보다 부모들 스스로부터 그렇다.
(...)부모들은 가능한 모든 자원과 노력을 동원해 자녀에게 더 많은 자극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내 아이를 엘리트로 키워야 한다, 일찍부터 또래보다 앞서게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가 점점 더 시급한 일로 부상했다.
경쟁적 양육패턴과 더불어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믿음도 동반해서 커져왔다. 어느 세대보다 정신분석을 맹신하는 우리는 자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요인들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한다. 급증해온 부모의 이혼을 체험하면서, 우리 부모보다는 더 헌신적인 부모가 되겠다는 강박도 강해졌다. -12, 13쪽

프랑스 부모들이 수면에 관해 몇 가지 조언을 해주긴 했다. 그러나 그 방법이란 것은 낮 동안 환한 곳에 두고 밤에는 어두운 곳에 두는 것 정도다. 낮잠을 자는 동안에도 환하게 해둔다고 한다. 또 해준 조언 하나는 출생과 동시에 아기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아기 본연의 ‘리듬‘을 따라가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부모들이 이 ‘리듬‘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언급하던지, 육아가 아니라 록밴드 얘길 나누는 게 아닐까 혼동이 올 정도였다. - 67쪽

프랑스 부모는 흔히 아이들에게 ‘사쥬sage(현명해라)‘라고 말한다. 미국 부모들이 ‘착하게 굴어라be good‘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선 ‘현명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좀 더 큰 뜻이 담겨 있다.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 내가 빈에게 착하게 행동하라고 말하면, 아이는 그 시간동안 길들여진 행동을 해야 하는 야생동물 취급을 받는 것과 같다. 착해지라는 건 그것이 아이의 본성과 정반대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현명해라‘라는 말은, 이미 빈에게 있는 올바른 판단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존중하라는 뜻이다. 아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를 믿는다는 뜻을 함축하기도 한다. -92쪽

루소는 단호한 제한과 부모의 강력한 권위로 아이의 자유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든 것을 다 가지는 데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의 욕망은 쉽게 만족되는 만큼 끊임없이 커질 것이고, 조만간 부모는 무기력에 빠져 어쩔 수 없이 거절을 하게 될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거절을 받은 아이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보다 더한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루소는 양육의 가장 큰 함정은 아이가 빈번하게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것에 어른의 주장과 동일한 무게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악의 교육은 아이가 자신의 의지와 부모의 의지 사이에서 부유하면서 둘 중 누가 지배권을 가질까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119쪽

출산 직후 프랑스 엄마들과 미국 엄마들 사이에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모유수유 여부다. 영어권 엄마들에게 모유수유의 기간은 마치 월스트리트의 보너스 액수처럼 실적의 척도와도 같다.
(...)분유를 섞여 먹이거나 유축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과도하게 오래 모유를 먹이면(이 정도면 이 엄마는 미친 히피로 보이기 시작한다) 감점이다.
미국 중산층 엄마들에게 분유는 곧 아동학대나 다름없다. 모유수유는 인내심, 불편함,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모유수유를 장려하지 않고 심지어 많은 이들이 수유 장면을 불편하게 여기는 프랑스에서 모유를 먹이는 미국 엄마는 더더욱 보너스 점수를 받는다. -159쪽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부모라는 사실이 다른 역할까지 잠식해서는 안 된다는 게 프랑스 사회의 지배적인 메시지다. 파리에서 만난 여성들은 엄마가 아이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170쪽

그런데 사이먼을 돌아보니 그에게는 최고의 순간이 아닌 모양이다.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지 않다. 나는 쌍둥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한껏 들떠 있었던데 반해, 그는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이제 카페 나들이는 꿈도 못 꾸겠군."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여가의 종말을 걱정하다니.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세요." 의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216쪽

프랑스에선 부부만의 질 높은 시간은 나중 일로 치부되지 않는다. 필요하지만 우선순위는 아니라는 식의 양가적 감정도 없다. 이들은 매우 단호하다. 아이에게 올인 하다 자칫 결혼생활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인 듯하다. ‘상당수의 부부들이 아기가 태어난 후 몇 년 이내에 이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모든 게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한 기사는 꼬집는다. -234쪽

고치를 짜는 것과도 같은 초기 육아에서 벗어나면, 프랑스 부모들은 부부로 재빨리 복귀하고자 노력한다. 프랑스의 일과에는 ‘어른(부부)의 시간‘이 따로 존재한다. 아이들이 자러 간 후다. 이 ‘어른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고 노래도 불러주는 등 친절하게 행동한 후에는 엄격히 취침시간을 강제한다. ‘어른의 시간‘은 어쩌다 한 번 받은 보너스 같은 게 아니라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욕구다.(...)
이 분리는 아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자신을 돌보는 일방적인 시혜자로 보이는 부모조차도 자기만의 즐거움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아이 때부터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아이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이는 발달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프랑스 양육서 <당신의 아이>는 설명한다. -236쪽

<순종은 허용된다>에서 마르셀리는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쥔 어린아이의 예를 든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보고 표정은 냉정하게 목소리는 단호하되 중립적으로 눈썹은 살짝 찌푸린 채 ‘그거 내려놔라!‘라고 말한다. 아이는 엄마를 보지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15초 후 엄마는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당장 내려놓도록 해‘라고 말한다. 다시 10초 후에 ‘무슨 말인지 알겠지?‘라고 말한다. 어린 소년은 식탁 위에 칼을 내려놓는다. 엄마는 표정을 펴고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잘했어.‘라고 말해준다. 그러고 나서 칼은 위험하며 손을 벨 수도 있다고 설명해준다."
마르셀리는 아이가 순종했지만 거기에 적극적인 자기 역할이 있었다고 말한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상호존중이 이러났다. ‘아이는 순종했고 엄마는 감사했지만 넘칠 정도는 아니었으며 아이는 엄마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말과 시간과 인내와 상호인정이 있어야 한다. 엄마가 달려들어 아이 손에서 칼을 낚아챘다면 아이는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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