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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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네로 이사할 때마다 주변 도서관을 한번씩 찾아가곤 하지만 책을 빌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 책의 깨끗한 종이를 문질문질하는 느낌이 좋고, 반납기한에 쫓기는 느낌은 싫어서.

그런데 얼마 전 이 동네에서 처음 간 도서관에서 절판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을 발견했고, 두께가 얇고 상태도 좋아서 오랜만에 빌려 보았다. <싱글맨>을 반납하러 갈 때는 다른 책을 또 빌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신착도서 코너를 훑어보다가 나폴리 4부작 중 두번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발견. 신착도서이니만큼 반짝반짝 새 책인데다 자리에 앉아 잠시 읽다보니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즈 첫 번째인 <나의 눈부신 친구>가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극적인 장면으로 끝났기에 뒷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던 차였다.


페란테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다층성'이다. 대중적인 요소가 풍성한 이야기 속에 여성 문제, 계급 문제, 물질만능주의, 이탈리아 사회의 남부 문제 등 수많은 사회적 이슈를 함축하고 있다. 동시에 페란테는 시대와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감성을 다루는 데 탁월하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제1권에 이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엉클어지는 릴라와 레누의 우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극의 중심이 되는 감성은 '두려움'이다. 성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랑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두려움, 선택과 결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  -662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유년기가 중심이었던 <나의 눈부신 친구>와 달리 릴라의 결혼을 신호탄처럼 하여 시작된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릴라와 레누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를 보여주면서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 내면과 심각한 삶의 문제들을 다룬다. 1권에 비하면 2권에서의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매우 소원하다. 릴라의 결혼과 레누의 대학 진학으로 인하여 둘 사이의 접점이 많은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연대감과 묘한 경쟁심, 서로에게 미치는 강한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 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470~471쪽


 릴라의 결혼은 첫날부터 파탄에 이른다. 폭행과 강간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은 남편 스테파노의 비겁한 거래를 용납하지 못한 릴라가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 그 후 이어지는 릴라의 굴곡진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그에 비하면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피사에 있는 대학에 학비 걱정 없이 진학하게 된 레누는 지성인들 사이에서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고향의 온갖 지저분한 관계들에서 멀어진다.


 2권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 세대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폭력적인 가부장제다. 릴라의 남편 스테파노는 결혼 첫날 릴라의 뺨을 때린 데서 시작하여 결혼생활 동안 많은 폭력을 가한다. 어디 스테파노 뿐인가? 릴라의 영민함, 강함, 격정적인 변덕스러움과 그 모든 것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남자들은 결국 같은 이유로 릴라를 욕하고 그녀를 굴복시키려 한다. 릴라와 레누가 깊이 사랑했던 니노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강하고 똑똑한 릴라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다. 리노는 아내인 피누차를, 미켈레는 여자친구인 질리올라를, 스테파노는 아내인 릴라와 정부인 아다를 때린다. 레누는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당하지는 않지만, 안토니오와 헤어질 때 폭력의 위험을 각오하는 모습을 보인다(오늘날 흔히 보이는 이별폭력을 생각하면 60년대의 이탈리아와 별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보아왔다. 낯선 남자는 우리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지만 부모님과 남자친구나 남편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뺨을 때릴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라왔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알아들을 때까지 다시 가르치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68쪽


 레누의 경우 피사에서 겪는 어려움은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지역적 불리함, 지성도 부도 없는 가정이라는 계층적 불리함, 여성이라는 성적 불리함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릴라와는 다른 양상을 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릴라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결코 굴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스테파노와 결혼한 후 그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만 후회와 체념에 빠지기보다는 그때그때 원하는 바에 충실하게 행동하면서 버텨나간다. 레누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치열하게 공부하여 아예 그 지긋지긋한 나폴리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자 한 비범한 여성들이다.  

 릴라의 적당히 타협하려 하지 않는 성정과 제멋대로의 행동 때문에 레누가 휘둘리는 모양을 보면 릴라가 미워지기도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다. 또한 릴라가 가난과 가족들의 강압(릴라를 이용하여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것들 - 학업적 성취, 예술적 감각, 뛰어난 미모까지 - 을 생각하면 그녀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으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그녀의 비범함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일견 바닥까지 떨어진 듯 보이는 릴라와 빛나는 미래를 약속받은 듯 보이는 레누가 3권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봄에 출간된다는 글을 봤는데.. 지금 봄인데? 5월에는 출간되려나. 영문판으로는 4권까지 모두 번역되어 있으나 이 두꺼운 책을 영어로 읽어낼 자신은 없다(슬픔). 어쨌든 마지막까지 함께하련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 리뷰


어느 날 오후 릴라가 니노에게 부자와 빈민 간의 갈등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조용히 말했다.

 "왜?"

 "하류층은 상류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니까.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폭력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어떻게? 모두를 상류층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하류층으로 전락시켜서?"

 "그것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상류층 사람들이 기꺼이 하류층이 되려고 하겠어? 하류층 사람들이 신분 상승할 기회를 포기하겠느냐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럴 수도 있지. 너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응. 계급 간 투쟁이란 다른 계층의 사람들끼리 카드놀이나 하면서 노는 게 아니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거고 이들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거야."  -289~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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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책을 사지 말자. 집에 쌓인 안 읽은 책들 하나하나 읽어 가자. 정 구매욕구를 못 이길 때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인터파크 할인 혜택을 이용하여...(10여년을 알라딘만 이용했던 충성고객이었는데 통신사를 바꾼 후 인터파크 할인이 됨을 알고 요즘은 인터파크를 이용한다) 라고 다짐한 지가 얼마 안 됐다.
천호역 근처에 예림문고라는 서점이 있다. 참고서가 대부분인 요즘 동네 서점들과 달리 다양한 분야의 책이 꽤 많은데다가 카페도 겸하고 있다. 마셔보지는 않았지만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구매하지 않은 책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동네 서점은 좀 팔아줘야 해... 라는 핑계로 결국 두 권을 구입. 언젠가는 살 책들이었어, 라고 합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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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4-1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독서괭 2017-04-19 18:26   좋아요 0 | URL
산 책을 다 읽고 다음 책을 사는 날이 오긴 올런지 모르겠네요ㅎㅎ

레삭매냐 2017-04-1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봉사대는 정말 ‘요사‘스러운 작가의 최고작
이라고 단언합니다.

멋진 선택이셨습니다.

독서괭 2017-04-20 10:25   좋아요 0 | URL
제가 잘 고른 거군요! 감사합니다^^
 


옛 그림을 읽는 세 가지 원칙

1. 그림 크기에 따라, 대각선의 1 내지 1.5배 정도를 유지해서 거리를 두고 감상한다.

2.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 감상한다.

3. 세부를 찬찬히 뜯어본다.


<책은 도끼다>에서 박웅현이 추천하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을 사게 되었고, 1만 있으면 보기 그러하니 2도 샀다. 한동안 묵혀 두었다가 꺼내 읽었는데, 아, 이 분 참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데다 문장력도 좋으시구나. 어라, 친정에 갔더니 <한국의 미 특강>이 있다. 내친 김에 위 1, 2를 읽고 <한국의 미 특강>까지 읽었다. 한 저자의 책을 이렇게 내리 읽은 건 오랜만이다. 이제 우리 옛 그림을 보게 되면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 같다. 이토록 아름답고 심오한 그림들이었다니.. 미처 몰랐소.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해서 송구한 마음까지 든다.

<한국의 미 특강>은 제목 그대로 저자가 강의를 한 내용을 옮긴 것이어서 술술 잘 읽히고,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자부심을 높여주는 내용이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난 후 더 자세하게 그림에 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으로 넘어가면 될 것 같다.

저자가 쓴 다른 책 <단원 김홍도>가 궁금해서 어떤 책인지 훑어 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는 없었다.. 다음 기회에.



지금 우리 국민들, 대개 조선에 대한 인상이 안 좋죠? "엣날 고구려는 씩씩하고 멋있었는데 근세 조선은 사대주의에 빠져 망한, 쩨쩨했던 나라다"하고 마뜩찮게 여깁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지만, 옛 그림을 공부하면서 다시 곰곰이 따져 보니, 아주 잘못된 생각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선은 519년 동안 계속된 나라였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이 지난 다음에도 280년이나 더 지속되었습니다. 중국에선 280년 된 왕조조차 드뭅니다. 일제의 정체성停滯性 이론이라니, 원 세상에 시들시들한 채로 오백 년이나 지속되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한국의 미 특강>157쪽


요즘 역사 서술의 원칙은 근대사, 현대사로 올수록, 즉 우리 시대와 가까울수록 더 많이 상세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대사는 아무리 자랑스러워도 좀 덜 가르쳐야 하고, 근대사는 아무리 본받을 것이 적어도 많이 가르쳐야 된다는 기계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혹시 문교부에 근무하고 계신 분이 있으면 그 점 재검토하시길 바랍니다. 조선시대는 세종대왕이며 영조, 정조 때에 배울 만한 훌륭한 사례가 많았는데 그 부분은 대충대충 가르치고, 나라 망하는 부분인 19세기말 20세기 쪽만 잔뜩 가르쳐서 열등감을 주면 우리 학생들은 도대체 무얼 배우고 느끼며, 무슨 자부심을 키우라는 겁니까?  -<한국의 미 특강> 164~165쪽


아침 일찍 임금이 일어나 깨끗이 씻고 옷차림을 갖추고 조정 일을 살피러 나와 가지고, 공손하니 빈 마음으로 여기 용상에 정좌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천지인, 석 삼三 자를 그은 정중앙에 이렇게 올곧은 마음으로 똑바로 섰을 때, 즉 오늘도 백성들을 위해 바른 마음 하나로 반듯이 앉았을 때, 바로 임금 왕王 자가 그려집니다.  -<한국의 미 특강> 234쪽


섣달 눈이 처음 내리니 사랑스러워 손에 쥐고 싶습니다. 밝은 창가 고요한 책상에 앉아 향을 피우고 책을 보십니까? 딸아이 노는 양을 보십니까? 창가의 소나무에 채 녹지 않은 눈이 가지에 쌓였는데 그대를 생각하다가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

이것은 김홍도가 어느 겨울 누군가에게 적어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116쪽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운치 있는 선비가 술상 위에다 밀감 한 쌍을 올려놓았나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여, 수양버들 물가를 오고 가더니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다가 봄 강에 고운 깁을 짜고 있구나

-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2> 66쪽, <마상청앵도>의 제시 번역


조선의 멸망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朝鮮'을 '이조李朝'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조시대니, 이조백자니, 이조회화니 하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 흔히 이조는 '이씨 조선'의 준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조의 '조朝'는 조선을 가리키는 글자가 아니라, '왕조Dynasty'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라를 일컫는 정식 명칭이 아니다. (...) 일본은 이조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쓰도록 강요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이 빼앗은 것은 부덕했던 전주 이씨들의 왕권일 뿐, 옛 조선 백성들은 오히려 그들 통치 아래서 더 잘 살고 있다는 억지가 숨겨져 있다. (...)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한자말은 '본조本朝'였다. 그러나 이제 대일본제국이 '우리나라'가 되었으니 본조는 사용을 금하고, 그 대신 조선을 가리킬 때는 '이조李朝', 즉 '이씨네 나라'라는 신조어를 쓰게 한 것이다. 물론 일본은 '조선'이라는 말 자체에도 지독한 경멸의 뜻을 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조센징, 조센삐 같은 말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남이 내 이름을 나쁜 뜻으로 쓴다고 해서 멀쩡한 제 이름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Land of the Morning Calm 조선', 이것은 실상 전 세계에 유례가 드물었던 도덕 국가, 문화 국가의 국호였기 때문이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2> 200~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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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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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는 일곱살이다. 똑똑하고 특이하며, 그 대가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다. 하지만 엘사는 결코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평범한 척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엘사에게는 슈퍼히어로 할머니가 있으니까!!

거의 중반까지도 이게 뭔 얘기인가 싶다. 좀 정신 없어도 읽는 재미는 있어서 계속 보게 되지만. 할머니가 들려준 동화 속 여섯 왕국은 뭐며,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뭔지. 아마 점점 현실과 연결되어 가면서 후반부에서 감동을 주는 거겠지, 하고 예상은 됐다.

이 작가 이런 비유들이 참 좋다. 귀여워ㅋ

그 한여름 밤에 아빠는 엄마와 춤을 추었다. 둘이 같이 춤추는 모습을 본 건 엘사에겐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몸치인 아빠는 방금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발이 저려서 감각이 마비됐다는 걸 알아차린 덩치 큰 곰처럼 보였다.  -204쪽/531쪽(크레마전자책 기준. 이하 동일)


점점 동화와 현실이 연결되어 가는 건 맞는데 마지막에 빵 터뜨리는 감동은 없다. 그냥 잔잔한 파도처럼 몇 차례 밀려오는 소소한 감동이 있을 뿐. 억지로 너 감동해! 하는 게 없어서 더 좋았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택시기사 알프. 요즘 속어로 츤데레 아저씨. 오베랑 좀 닮아서 더 정이 가나?

할머니와 엘사는 종종 저녁 뉴스를 같이 봤다. 그럴 때 엘사는 가끔 왜 어른들은 저렇게 바보 같은 짓을 서로에게 저지르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른들도 대부분 인간인데 인간들은 대부분 개떡 같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엘사는 어른들이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 와중에 우주를 탐사하고 유엔, 백신, 치즈 가는 강판 같은 좋은 것들도 많이 만들어내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개떡은 아니고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안 개떡은 아닌 게 인생의 묘미라고 했다. ‘안 개떡‘인 쪽으로 최대한 치우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인생의 과업이다. -469쪽/531쪽

"너희 할머니는 내 일생일대의 사랑이었지. 나뿐 아니라 많은 남자들에게. 솔직히 여자들한테도 마찬가지였고."
"아저씨도 우리 할머니한테 그랬어요?"
마르셀은 멈칫한다. 화난 얼굴은 아니다. 씁쓸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살짝 질투할 따름이다.
"아니. 너희 할머니에게 일생일대의 사랑은 너였어. 처음부터 끝까지 너였단다, 엘사." -499쪽/5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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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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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미 봤고, 충분히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책에 대해서는 별 기대가 없었다. 전자책 도서관에 없었다면 굳이 읽지 않았을 텐데.

책과 영화를 둘다 봤는데 둘다 만족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각색이나 연출이 불만인 경우가 많고,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면 이미 화면으로 본 장면들 때문에 상상력이 제한되거나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떨어진다. 하지만 오베라는 남자는, 둘다 좋다. 책을 먼저 읽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영화도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은 유머다. 그래서 내용을 알고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재미난 비유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오베는 마치 해적 차림을 한 미르사드가 보행자 전용 아케이드에서 그를 멈춰 세운 다음 여기 찻잔 세 개 중에서 은화를 감춘 게 뭔지 맞춰보라고 말하기라도 한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383쪽(크레마에서 본 전자책 기준, 이하 동일)

 

확실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감동을 받는 포인트가 달라진다. 실연당해 본 지가 하도 오래 되다 보니 얼마전 읽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은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 감정이입이 안 됐다. 한창 실연의 아픔을 겪는 사람이 읽을 때와는 천지차이겠지. 반면 결혼 후에는 '사별'을 이야기하는 작품만 보면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전자책을 무료로 대여해 주기에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읽었던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아내인 소냐를 앞서 보내고 뒤따라갈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는 오베 역시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438쪽

 

 '까칠하다'고 표현되는 오베의 성격은 무엇 하나 좋게좋게 넘기지 못하는 데서 오는데, 그건 바로 그가 엄격한 원칙주의자라는 뜻이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원칙과 규율을 어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서 오베는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진상 노인이다(사실 59세 밖에 안 됐지만). 오베는 부조리한 '하얀 셔츠(를 입은 공무원)'들과 싸우고, 거주지를 어지럽히는 규칙 위반자들과 싸우고, 자신에게 원칙을 굽히라는 요구를 하는 모든 것들과 싸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는 외국인이민자(파르바네), 고도비만자(지미), 뇌졸중환자(루네), 동성애자(미르사드), 상처 입은 길고양이 등 주류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 모여 든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주류 사회에 대한 비주류(소수자)의 대항과 연대, 그리고 승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베는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천으로 답하는 남자, 자신 안의 이타성과 선량함을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너무 수줍은 남자, 그래서 선한 일을 할 때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아내가 실망할 것이다"라는 핑계를 대는 남자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점점 더 차별을 두었다. 실천하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들을 구별했다. 오베는 점점 더 말을 줄이고 점점 더 실천을 했다.  -107쪽

파르바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여자들을 얼어 죽게 할 수는 없겠죠, 오베, 그렇죠? 애들이 당신이 광대를 공격하는 광경을 봐야 했던 걸로 충분하잖아요. 안 그래요?"

 오베가 그녀에게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말없이, 스스로에게 타협하듯, 그애들의 변변찮은 애비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창문 하나 열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만약 그가 어린이 살해범 자격을 새로 취득한 채 저세상에 도착할 경우 오베의 아내는 엄청난 양의 잔소리를 끓여 부을 것이다.  -179쪽

4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소냐는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혔다. 같은 기간 동안 그녀는 오베가 셰익스피어 희곡을 한 편이라도 읽도록 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택단지로 이사하자마자 그는 몇 주 동안 내내 저녁마다 헛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작업을 마쳤을 때,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장들이 거실에 놓였다.

"책들을 어디에 보관은 해야 하잖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드라이버 끝으로 엄지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를 콕콕 찔렀다.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210쪽

 

 

 그리고 소냐는 그런 오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오베와 소냐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얼마나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둘은 거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극과 극이다. 남중 남고를 나와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와 문학소녀로 자라나 국문학을 전공한 시인의 만남이랄까. 오베의 지극한 사랑은 소설 전반에 걸쳐 담담하게 드러난다. 큰 사고를 당해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는 여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린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276쪽

 

그래서 오베는 쫓겨나는 대신 야간 청소원이 되었다. 만약 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날 아침 자기 조를 떠날 일이 결코 없었을테고, 그녀를 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 빨간 구두와 금 브로치와 윤기 나는 갈색 머리도. 또한 남은 평생 동안 누군가 맨발로 그의 가슴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될 그녀의 웃는 모습도 볼 일이 없었으리라.

 그녀는 종종 "모든 길은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일로 통하게 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것'은 아마도 '무엇'이었으리라.

 하지만 오베에게 그건 '누군가'였다.  -115쪽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155쪽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커다랗고 둥근 바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마치 그녀의 볼을 만지듯 좌우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61쪽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75쪽

 

 이 대책없이 까칠하고 못말리게 사랑스러운, 고집불통 이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제는 저 세상에서 소냐를 만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부끄러운 듯 딴청을 부리고 있겠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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