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개정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 따라읽기를 하며 읽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가 무슨 뜻이지. 뭔가 심오해 보여...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이름이자 아들의 이름으로 그냥 붙여진 것이라고 하니 허무하다. 그냥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다. 강의노트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라서 그런지 책 전반을 통일적으로 쭉 밀고 나가는 힘이 부족한 듯 하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단락들이 비교적 쉽게 씌어 있음에도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올바로 알면 올바로 행할 수 있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올바로 아는 것과 올바로 행하는 것 사이에는 폴리스에서 형성되는 좋은 습관이라는 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폴리스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으로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제국을 건설하면서 일반인들은 정치와 멀어지게 되고, 이 시기에 나온 윤리학설인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키니코스 학파 모두 정치와 무관한 이론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비해 상대적이고 유연한 논리를 펴고 있는 듯 하다. 개별성과 가변성을 무시하지 않고 미덕에 있어서나 실천적 지혜에 있어서나 개별적 가치판단의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

<인문 고전 강의>에서 인용한 부분들과 이 책을 비교해 보니 종전 번역을 상당히 많이 수정한 것 같다. 훨씬 읽기가 편하다.


제1권. 인간의 좋음

 - 모든 인간 활동은 '좋음'을 추구한다.

   하나의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될 수 있다.

 - '좋음'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

    인간의 최고선을 연구하는 학문은 정치학이다(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괄한다).

 - '좋음'에는 가변성이 내포된다.

 -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고, 결코 다른 것 때문에선택하지 않기 때문.

 - 삶의 세 가지 유형 : 향락적인 삶/ 정치가의 삶/ 관조적인 삶

 - 하나의 보편적인 좋음은 존재할 수 없다.

 - 좋음 : 외적인 좋음/ 혼의 좋음/ 몸의 좋음

 -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완전한 미덕과 필생의 노력이 필요하다.

 - 진정한 정치가는 무엇보다도 미덕을 연구하는 사람.

 - 행복은 궁극적인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

    (혼) - (비이성적 부분) - (식물적인 부분)/(욕구적인 부분)

           - (이성적 부분) - (이성에 귀를 기울이려는 부분)/(엄밀한 의미에서 이성적인 부분)

    (미덕) - (지적인 미덕) : 철학적 지혜, 이해력, 실천적 지혜

              - (도덕적 미덕) : 후함, 절제


제2권. 도덕적인 미덕

 - 도덕적인 미덕들은 본성에서 생겨나지 않음. 습관화함으로써 완성됨.

 - 중용 : 지나침과 모자람은 피해야 한다.

 -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쾌락 때문이고, 우리가 고상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고통 때문. =>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

 - 미덕은 감정이나 능력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마음가짐 : 우리가 감정들에 잘 대처하거나, 잘못 대처하게 해주는 심적 상태.

 - 도덕적인 미덕의 특징은 중용을 선택하는 것. 산술적인 중간이 아님.


 - 때로는 지나침 쪽으로, 때로는 모자람 쪽으로 치우쳐 봐야 좋은 것(중용)을 알아낼 수 있다.


제3권. 도덕적인 책임

 - (자발적 행위)

    (비자발적 행위) - (강요당한 행위) : 제1원리(행위의 도구인 사지를 움직이는 원리)가 외부

                              에 있어, 강요당한 사람의 의지와는 완전히 무관한 행위

                          - (무지로 인한 행위) : 선택에서의 무지X, 일반적인 무지X, 행위의 상황과 대

                             상에 대한 무지O + 고통과 뉘우침이 뒤따를 것

 - 미덕와 악덕은 수단에 관련된 것으로, 숙고와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며, 자발적이다.

 

제5권. 정의

 - 정의는 대인관계에서 행해지므로, 타인을 위한 좋음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미덕이다.

 - 분배적인 정의 : 명예나 금전 등 구성원들 사이에서 분배될 수 있는 것들의 배분에서 발견됨.

   조정적인 정의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래에서 조정하는 역할.

 - 정의는 일종의 비례이다.

 - 조정적인 정의(재판관의 정의)와 달리 사람들이 교환을 목적으로 서로 교류할 때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균등함이 아니라 비례에 따른 응보이다. -> 돈이 도입되어 일종의 중용 역할을 함.

 - 어떤 행위가 불의한가 아니면 옳은가는 자발적인가, 비자발적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분배하는 사람이다.

 - 법의 보편성으로 인한 결함은 공정성에 의하여 시정된다.

 - 자살은 법에서 허용하지 않는데(손이 잘리고 따로 묻힘), 자기 자신이 아니라 국가에 대해 불의를 행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


제6권. 지적인 미덕

 - 혼의 이성적인 부분 - (제1원리가 불변하는 것들을 관조)= 인식

                              - (제1원리가 가변하는 것들을 관조)= 헤아림(숙고)

 -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마음가짐

   (1) 학문적인 인식 :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마음가짐. 대상은 필연적인 것.

   (2) 기술 : 참된 이성이 수반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

   (3) 실천적인 지혜 : 사람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 대상은 가변적인 것.

   (4) 직관 : 실천적인 지혜, 학문적인 인식, 철학적인 지혜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를 파악하게 해주는 것.

   (5) 철학적인 지혜 : 가장 소중한 진리들에 대한 최정상의 학문적인 인식. 본성상 가장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학문적이며 직관적인 인식. 개별적이고 경험적인 실천적인 지혜와는 구별됨.

 - 실천적인 지혜와 정치학은 같은 마음가짐이지만 본질은 다르다.

   국가와 관련된 실천적인 지혜 - (기획) -> 입법적인 지혜

                                           - (개별 상황) -> 정치학

 - 인간의 기능은 실천적인 지혜(수단)와 도덕적인 미덕(목표)이 결합될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 강유원 : 플라톤 철학에서는 지혜와 학문적인 인식이 구별되지 않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인 것은 '인식', 실천적인 것은 '지혜'로 구분하였다.  


제10권. 쾌락

 - 쾌락은 하나의 전체이며, 시간이 경과해야 비로소 그 형상이 완성되는 쾌락은 어느 순간에도 발견하지 못한다. -> 쾌락은 과정이 아니다.

 - 사고와 관조에도 그에 걸맞은 쾌락이 있듯 모든 감각에는 그것에 걸맞은 쾌락이 있는데, 가장 완전한 것이 가장 즐거우며 건강한 상태에 있는 기관이 가장 훌륭한 대상과 관련하여 벌이는 활동이 가장 완전하다.

 - 쾌락은 활동을 완전한 것으로 해주며, 따라서 모두가 바라는 삶도 완전한 것으로 해준다. 그렇다면 모두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 진지한 활동에 고유한 쾌락은 훌륭하고, 하찮은 활동에 고유한 쾌락은 나쁘다. 분명히 누구나 다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인정하는 쾌락들은 쾌락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 관조적인 삶은 가장 지속적, 자족적인 것으로 신적인 경지. 가장 행복한 삶.

 -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입법이 필요. 정치학으로 이행.

  

정치학은 다른 모든 학문을 이용할뿐더러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만큼, 정치학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괄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인간을 위한 좋음을 추구한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좋음과 개인의 좋음이 같은 것이라고 해도, 국가의 좋음을 실현하고 보전하는 일이 분명 더 중요하고 더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24쪽

고상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쾌락들은 본성상 즐겁다. 유덕한 행위들도 이와 같아서 유덕한 사람들에게도 즐겁고 그 자체로도 즐겁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자체 안에 쾌락을 내포하고 있어, 쾌락이라는 장신구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 -43쪽

입법자들은 시민들을 습관화를 통해 좋은 시민들로 만들며, 바로 이것이 모든 입법자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입법자들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좋은 정체(政體)와 나쁜 정체의 차이점이다. -63쪽

소망의 대상은 목적이고 숙고와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수단이므로, 수단에 관련된 행위는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그런데 미덕의 활동은 수단에 관련된다. 따라서 미덕의 실행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그 점은 악덕도 마찬가지이다. -106쪽

방종은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인 것 같다. 방종은 쾌락에 의해 유발되고 비겁함은 고통에 의해 유발되는데, 방종은 선택의 대상이고 비겁함은 회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본성을 흐트러뜨리고 파괴하는 데 반해, 쾌락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종이 더 자발적이다. 그래서 방종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132쪽

자부심이 강한 사람의 또다른 특징은, 아무것도 또는 거의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고 기꺼이 남들을 도와주며, 영향력 있고 잘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거만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겸손하다는 것이다. (...) 전자에게 거만한 것은 비열하지 않지만, 미천한 사람들에게 거만한 것은 약자에게 힘을 과시하는 것처럼 야비하다. -156쪽

법은 위법 행위의 변별적 성격에만 주목하고 당사자들을 동등한 자로 취급하며 한쪽은 불의를 행하고 다른 쪽은 불의를 당했는지, 다시 말해 한쪽은 해를 끼치고 다른 쪽은 해를 입었는지 물을 뿐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불의는 불균등한 것이기에 재판관은 이를 균등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 재판관이 하는 일은 균등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마치 한 선분이 동등하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을 때, 더 긴 선분에서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부분을 떼어내 더 작은 선분에 덧붙이는 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전체가 동등한 반쪽들로 나뉘어 양쪽이 동등한 몫을 갖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이 제 몫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균등한 것은 올바른 것(dikaion)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균등한 것이란 마치 동등하게 두 쪽으로 나뉜 것(dichaion)이라고 불려야 하는 것처럼 동등한 두 쪽(dichaia)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관(dikastes)은 둘로 나누는 사람(dichastes)이다. -189쪽

정의와 공정성은 일치하며, 둘 다 훌륭하지만 공정성이 더 우월하다. 다만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공정성은 정의이지만 법적인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법적인 정의의 교정(矯正)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모든 법은 보편적인데, 어떤 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이 옳은지 보편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말할 필요는 있지만 제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영역들에서는 법은 그렇게 하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 자주 일어나는 경우를 취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법이 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오류는 법이나 입법자 탓이 아니라 사태의 본성 탓이기 때문이다. (...) 법의 보편성 때문에 법에 결함이 있는 곳에서 법을 교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공정성의 본성이다. -212~213쪽

자제력 없는 사람은 올바른 법안들을 모두 통과시켜 좋은 법률을 갖고 있지만 그 법률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국가와도 같다. (...) 하지만 사악한 사람은 법률을 이용하되 나쁜 법률을 이용하는 국가와도 같다. -286쪽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의 일들을 생각해야 하며, 필멸의 존재이니까 필멸의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권고를 따라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되도록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 우리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4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연수의 추천사는 탁월하다. 오래 전 책 대여점에서 소설을 뒤적이다가 표지 뒷면에 인쇄된 글이 너무 좋아서 그게 본문을 발췌한 것인 줄 알고 빌려 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본문이 아닌 김연수 작가가 쓴 추천사였다. 그 책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다.

<완벽한 날들>의 표지 뒷면에 인쇄된 김연수의 추천사 역시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내게 "어떤 시인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짐짓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쉼보르스카나 네루다, 혹은 파울 첼란"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거기까지 듣고도 "그리고요?"라고 또 묻는 사람이 있으면 마지못해 "메리 올리버도 좋아해요..."라고 털어놓았다.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어서. (...) 이제 당신 앞에도 이 이 기쁨이 놓여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마음이 든다. 그냥 안 읽고 지나가기를. 나만 읽기를. 너무나 인간적인 그 마음으로.  -김연수 추천사 중

 

이런 추천사를 읽고 기대를 안 품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한 권만으로 김연수가 품은 애정의 깊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평생의 동반자인 몰리 멀린 쿡(책에서는 M으로 지칭된다)과 함께 숲과 바다가 있는 '프로빈스타운'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였다는 메리 올리버는 자연을 향한 사랑과 경이를 시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읽고 있노라면 이 뿌옇고 복작대는 도시에서의 삶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고,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책의 크기나 색감도 좋다. 아름다운 책.

잘 정비된 개미 언덕을 바지런히 오르내리는 검은 개미들도 하나의 기회다. 뜨거운 모래밭의 말랑말랑한 두꺼비도 하나의 기회다.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한 시간을 보내는 건 기회들의 향연이다. 아침마다 소란과 고요가 결혼하여 빛을 만든다. 태양이 장밋빛 자두처럼 떠오른다. 물에서 떠도는 새들이 돌아본다. 이따금 바람도 돌아보는 듯하다.  -33쪽

인간은 무릇 가정적이고, 견실하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바람의 손아귀에 든 먼지처럼 소용돌아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의 유연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신념이었다.  -81쪽

상실은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있던 게 없어지는 거니까. 먹이고, 산책시키고, 목욕시키고, 안아줄 대상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소중히 여기고, 걱정하고, 동정하고, 위안을 얻을 지각력 있는 생물체가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난 베어는 어디 있을까? 우리는 흰 구름을 유심히 본다. 조만간 저 하늘에서 무심하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베어를 보게 될 것이다. 전능의 신들은 떠도는 먼지로 얼마나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창조했는가! 비단 같은 흑기러기, 시폰 스카프, 편지, 빈 봉투, 미국오리, 낡은 신발, 떠나간, 떠나가버린 조그만 흰 개. 우리 삶의 모든 음악은 그것들 안에 있다. 신들은 행위하고, 우리는 그 행위의 목적은 알지 못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세상은 우리의 깊은 관심과 소중히 여김의 소용돌이와 회오리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124쪽

날이 선, 반짝반짝 빛나는 십 대, 자물쇠 채워진 시간. 단단한 이십 대. 느슨해지는 삼십 대. 초조한 사십 대. 가끔은 희망과 약속의 시간이 있는, 버팀의 오십 대. 지금은, 육십 대.
그리고 난 단순하고 헌신적이고 싶다, 떡갈나무처럼.  -129쪽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숲, 창백한 해변. 늘 똑같은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137~13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도서관으로 산책 가는 게 쏠쏠한 재미다. 얼마전 아주 깨끗한 상태의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발견하고 빌려보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으로 알차고 재미있는 책이라, 나중엔 결국 사게 되지 않을까 싶다. 20권짜리 전집이라 비싸긴 한데...
고려 개혁을 꿈꾸던 공민왕, 정몽주,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던 정도전이 차례로 스러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파벌싸움은 무섭고, 개혁의 길은 고되다... 속마음을 숨기고 연기를 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신하들의 청원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루어내는 왕들의 전략이 재밌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는 쇼가 동반되는구나. 뭐 쇼 좀 하면 어떻겠는가. 방향만 제대로라면.
정도전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작성된 조선왕조실록을 보완하기 위해 참고하였다는 <정도전을 위한 변명>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없다. 다음 기회에...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에 새로 생긴 작은 빵집이 있길래 들어가봤다. 식빵, 치아바타 등 담백한 빵 서너종류만 파는 곳. 소금, 설탕, 버터를 적게 넣는다고 한다. 먹어봤는데 오...!!! 맛있다!!! 겉은 약간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것이 일반적인 식빵보다는 바게트에 가까운 맛.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맛.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와 함께 나이 드는 법 - 0세부터 마지막 날까지 냥이를 지켜주는 지식과 비결
핫토리 유키 지음, 이용택 옮김 / 살림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언니에게 선물하려고 주문. 받자마자 쭉 훑었는데 일단 그림이 귀엽고, 임종기 고양이를 돌보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 도움이 될 것 같다. 두께는 생각보다 얇다. 언니네 냥이들은 아직 어려서 이 책은 이른 것 같긴 하지만.. 알아두면 도움은 되겠지.
동물을 무서워하는 어머니와 무관심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우리 자매가 이렇게 동물을 좋아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언니는 두 냥이에게 지극정성. 생후 2개월 정도에 다리 밑에 버려져 있었다는 첫째와 도심의 차량 밑에서 엄마 잃고 울고 있었다는 둘째는 이제 반지르르한 때깔을 자랑하는 청년기 묘가 되었다.
좋은 집사를 만난 집고양이의 묘생은 좀 부러워.
좁은데 굳이 저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요일의 여행 - 낯선 공간을 탐닉하는 카피라이터의 기록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에세이를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행서는 더욱 읽지 않는다. 내가 직접 가야 좋지 남 여행한 얘기 듣는 게 뭐가 좋아? 그러니 이 책이 전자책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띄지 않았다면 좀처럼 읽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여행에세이이긴 하지만 여행정보를 주기 위한 목적은 전혀 없다. 그저 여행을 사랑하는 저자의 절절한 마음으로 가득해서, 그 행복을 타인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흥분으로 발그레 달아오른 뺨이 떠오른다. 여행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편은 아닌 내 마음조차 설레게 하는 열정이다. 귀찮아서 도저히 못 할 것 같긴 하지만, 언젠가는 저자처럼 작은 마을, 정보없는 마을을 찾아 나만의 보물을 만들고 싶게 만드는.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갑자기 문장은 풍성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햇살이 스며든다. 공기의 질감까지 부드러워진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진다. 오후 다섯 시의 그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한낮 차가운 와인을 마신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골목이 노래로 가득 차기도 하고, 낯선 얼굴이 두등실 떠오르기도 한다. 유난히 작았던 숙소가 문득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바람에 고립되었던 그 아찔했던 순간은 인생의 모험으로 포장된다. -11쪽

여행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저 비가 오는 것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지는 느낌이 든다. 그저 몇 개의 가게가 문 닫았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향해 문을 닫는 느낌이다. 한 가게 주인이 나에게 불친절했을 뿐인데, 온 도시가 나에게 불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길을 못 찾았을 뿐인데, 이 여행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마음의 과장법은 순식간에 여행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린다. -82쪽

지금부터 여행에서 가장 실용적인 말 한마디를 공개하겠다. 그건 바로,
"What‘s your favorite?"
겨우 이거냐고? 겨우 이거다. 설마 진짜 저 말이냐고? 그렇다. 이게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뜸을 들였냐고? 중요하다.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써먹은 결과 한 번도 통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마법의 주문처럼 이 질문을 하는 순간 모두가 진심이 되었다. 모두가 내 여행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고심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앞으로 볼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말 그대로 모두. 오로지 저 한마디 때문에.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건요?"라는 이 평범한 한마디 때문에. -108쪽

"난 왜 몰랐지? 알았으면 올라갔을 텐데."
미구엘은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 이건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가 아니야."
미구엘의 그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여행에서의 내 조바심을 정확하게 진단한 말이었다. 못 봤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건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가 아니야. 거길 못 갔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 도시엔 거기만 있는 게 아니야. 그거 못 먹었다고 여행이 끝장나는 게 아니야. 정작 현지인들은 그거 먹지도 않잖아. 그걸 사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거야. 남들 다 본다고 너까지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넌 너만의 여행을 직조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133,134쪽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나는 한 시간짜리 도시 마니아다. 30분짜리 도시면 더 좋다. 그걸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을이라 불러도 좋고, 읍내라 불러도 좋고, 시골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여행을 계획할 때 제일 먼저 골몰하는 것은 가고 싶은 작은 마을을 정하는 것이다. 블로그에 정보 따위는 없는 마을. 있더라도 사진 한 장이 전부인 마을. 그런 마을의 정보 한 줄을 얻는 것은 힘겹고, 그런 마을에 가는 길은 험난하다. 대중교통은 없거나, 있더라도 하루 한두 대의 버스가 전부. 운전면허증도 없는 나와 운전을 싫어하는 남편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야 한다. 언제나 겨우겨우 그곳에 도착하고는, 며칠씩 머물러버린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도착했는데, 라는 심정으로. 그리고 그곳에서의 시간은 여행 상자 안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곤 한다. 가장 희귀하고도 가장 따스한 기억으로만 채워진 보석. 우리들만의 보석. -158쪽

작은 마을들은 어김없이 우리를 환대한다. 큰 도시에서는 우리를 버린 것임에 들림이 없는 행운의 여신이, 유독 작은 마을에서는 우리를 잽싸게 발견한다. 그리고 행복의 진수성찬을 차려버린다. 이 진수성찬은 오롯이 우리들의 것.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한 맛.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다정한 맛. 그 소박한 진수성찬을 맛보고 싶다면 시간을 줘야 한다. 행운의 여신도 우리를 찾아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하루가 아니라, 3일. 유명한 것이 없으므로 오래, 별게 없으므로 천천히.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이므로 음미하며, 낯선 얼굴들과 마주칠 때마다 웃는 낯으로. 그렇게 여행의 보석을 품는 것이다. 나만의 보석을 세공해가는 것이다. 작지만 확실한 보석을. -164쪽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껏 무용해지자 마음을 먹는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며 짐짓 호탕하게 말해본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마음에는 다시 유용함이란 기준이 자리 잡는다. ‘언제 또 올 수 있겠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도 못 보면 아깝잖아.‘ 등등 유용함은 각종 핑계를 달고 여행 한가운데에 번번하게 자리잡아버린다. 그리하여 ‘무용하자‘라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여행자의 스케줄은 봐야 할 것. 가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 등등 유용한 것들로만 빼곡히 들어차게 된다. 무용하고 싶지만 무용한 시간을 견딜 힘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169쪽

남의 여행은 남의 떡이다. 언제나 더 커 보이고, 언제나 윤기가 흐른다. 흠집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고, 부러운 행운만 넘쳐흐른다. 어쩜 그 여행의 풀밭은 그토록 푸르른지. 남의 여행을 직접 이야기로 듣는 시대를 지나, 이제 블로그에서, 각종 SNS에서 남의 여행을 보게 되면서 이 증상은 좀 더 심각해진다. 앞뒤 맥락 따위 존재할 수 없는 그 찰나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우리는 여행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름살을 제거해버린다. 저 여행은 모든 것이 풍족해. 저 여행은 커피 잔에 떨어지는 빛 하나까지 어쩜 저렇게 완벽할까, 저 사람은 내내 행복하기만 할 거야. 같이 간 사람이랑 싸우는 일도 없겠지. 돈이 왜 부족하겠어. 돈이 부족하다면 저런 걸 사지도 못하지. 여행은 왜 또 저렇게 자주 가. 시간도 넘쳐나나 봐. 명백히 세상은 엄친아들의 여행으로 넘쳐난다. -248, 249쪽

그렇게 동네에서 가장 게으른 목련을 알게 되었다.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은행나무를 알게 되었다. 4월에 모든 꽃들이 다 지고 나면 그제야 피어나는 이팝나무들도 알게 되었다. 한 할머니의 베란다 아래 길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다섯을 낳은 소식도 듣게 되었다. 망원시장에서 그때그때 장을 봐서 제철 음식을 내놓는 식당도 알게 되었다. 시시콜콜한 집안 이야
기까지 다 풀어놓는 사장님 부부도 알게 되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 같은 얼굴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매일 더 부지런한 동네 여행자가 되자고 마음을 먹는다.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니까. 멀리 여행을 떠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것은 결국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니까. 그 마음가짐으로 내 고향을 여행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내 고향은 망원동이니까. 내가 내 고향의 가장 충실한 여행자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28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