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클리벤의 금화 2
신서로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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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재밌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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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 별 관심이 없어 명성 높은 코니 윌리스 소설 읽기를 미뤄오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김하나 작가 덕이다. 그가 삼천포책방에서 <화재감시원>을 맛깔나게 소개했고, <둠즈데이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화재감시원을 즐겁게 읽은 내 앞에 운명처럼 <20주년 PACK 3900>에 포함된 둠즈데이북이 나타났다. 김하나작가는 이책을 읽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엉엉 울었던 기억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이 책을 절반 이상 읽어가면서도 누군가 죽더라도 울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울고 말았지... 밤중 수유하면서 틈틈이 읽은 게 아니라 푹 빠져서 한번에 읽었다면 더 많이 울었을지도.

때는 2054년. 역사학을 공부하는 역사학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실습의 과정이 있으니, 바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이 실습과정을 거친 역사학도에게 역사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현재”가 된다. 중세를 공부하는 역사학도 키브린은 너무 위험한 시대라며 만류하는 던워디교수의 진심어린 걱정에도 불구하고 1320년으로 가기로 한다. 그러나 시간여행 설비인 네트를 조작하는 기술자인 바드리는 키브린이 떠난 후 급하게 던워디교수를 찾아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의해 쓰러지고 마는데...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실제로 그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역사학도라니! 얼마나 흥미로운 설정인가.
수다쟁이 작가인 코니윌리스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현재의 질병과 과거의 질병을 각각 극복해나가는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1권을 읽으면서는 메인스토리와 관계 없어 보이는 너무 많은 수다를 보며, 아니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빨리 말하라고! 하며 작가든 바드리든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2권을 읽다보니 어쩐지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서술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이 할머니 작가가 좋아졌다.

종교도 신도 전혀 믿어본 적 없는 나에게, 종교적 감동이랄까, 를 선사한 작품으로 소설 <천국의 열쇠>와 영화 <레미제라블>이 있는데, 이 소설이 세번째가 되었다. 이 책에서 중세시대 신부로 등장하는 로슈신부는 <천국의 열쇠>의 프랜시스 치점 신부처럼 이런 신부들만 있다면 기꺼이 종교를, 신을 믿을 수 있겠다는 마음을 품게 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남아 어쩐지 자꾸만 생각나는 소설에 별 다섯 개를 준다. 이 책을 끝내고 나서 쉽게 다음 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만 20주년PACK 의 줌파라히리나 존버거로 넘어가야지...

#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가 엉망인지도 몰라요, 던워디 교수님. 메이즈리와 블로에 경 같은 인물이 살아남아 우리가 사는 시대를 세웠을 테니까요. 도망가지 않고 로슈 신부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결국 페스트에 걸려 죽었거든요.

# 심술궂은 늙은이와 잔소리 많은 시누이보다 더 나쁜 경우는 허다했다. 가니에르 남작은 20년 동안 아내를 사슬에 묶어 놓았다. 앙주 공작은 아내를 산 채로 불태웠다. 그리고 로즈먼드는 자신을 보호해 주고 아플 때 간호해 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다.

-알라딘 eBook <둠즈데이북 2 (20주년 PACK 3900)> (코니 윌리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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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7-1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독서괭님께 땡투하고 이 책을 샀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지금 저에게 오고 있어요. ㅎㅎ

독서괭 2019-07-15 10:41   좋아요 0 | URL
어므나~~ 기분 좋네요^^ 다락방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되어야 할텐데.. 이 코니윌리스가 마거릿애트우드와 함께 유명한 페미니스트 sf 작가라고 하네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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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책을 둘러싼 가벼운 추리/미스테리, 은근하게 진행되는 로맨스... 혹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 <그 후>, <논리학입문>, <이삭줍기>, <만년> 모두 안 읽었지만 이 책을 읽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물론 읽었다면 더 재미날 것 같긴 함. 시리즈 7권까지 있던데 에피소드 형식이라 뒤가 마구 궁금하지는 않아서 당장 다 읽을 것 같지 않지만, 생각날 때 한권씩 읽으면 즐거운 독서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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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와이프
메그 월리처 지음, 심혜경 옮김 / 뮤진트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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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전쯤인가, 신랑과 영화관 한번 갈 수 있으리라는 야무진 희망을 품고 상영중인 영화를 찾아보다가 발견한 <더 와이프>. 줄거리도 흥미롭고, 관람평도 괜찮아서 보고 싶었으나 상영 영화관이 멀었다... 무엇보다 영화관을 갈 시간이 없었다. 흑. 책이 원작이라기에 찾아보니 도서관에 들어와 있었다!

잠자냥님의 <젤다> 리뷰를 읽고 피츠제럴드 부부의 이야기가 이 소설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들 뿐일까.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어려웠던 때, 가능은 하지만 성공하기는 어려웠던 때, 남편의 이름에 묻혀버린 재능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더 와이프>는 조지프 캐슬먼이라는 유명작가와 그의 아내 조안 캐슬먼의 삶을, 조안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조안이 어떻게 자신의 재능을 묻어놓고 헌신적인 아내로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마음이 다시 변해갔는지 추적한다.

둘 사이는 처음부터 평등하지가 않다. 시작부터 삐걱거림을 예감하게 하는 아래와 같은 서술은 앞으로을 예감하게 한다. 조지프의 관심사는 조안이라는 인간 전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없는 재능이 아니었을까.

#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나의 불안감, 나에게 스며드는 정치적 공감과 연대,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욕심들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한편으로 후련했다. 그래, 이런 것이 남자와 함께 있다는 의미였구나. 그가 신경 쓰는 것들을 나에게 말해주고, 그 다음에는 내가 신경 쓰는 것들을 그에게 말해주고,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 적절한 시점에 분노하고 동정하며 맞장구치는 것. 그건 마치 친구를 갖는 것과 같고, 전혀 다른 신체적 구조와 기억들을 가진, 낯선 자신의 판박이를 갖는 것과 같다. 그리고 둘이 모두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면 서로 상대방의 내부에 있는 기억의 채굴장과 저장소에 특별히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그의 질문은 ˝내 글은 어땠어?˝였다.
- 115쪽

여자는 열심히 남자에게 그의 가족, 삶, 생각, 취향 등을 물어보고는 남자도 이제 그런 것들을 물어보리라 기대하고 마음을 열었는데,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 있어... 이런 느낌 안다. 아 너무 슬퍼 ㅜㅜ

1950-60년대에 여성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부분들도 여럿 등장해서 흥미롭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덩굴과 기숙사 현관의 그네, 그리고 마리화나로 이루어진 캠퍼스에서 나의 관심사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 여기서는 모든 것들이 황금빛과 여성성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조직이나 단체의 주류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56년, 우리는 중요한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커다란 마이크를 들고 반질반질한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상원 소위원회에 한통속이 되어 앉아있는 혐오스러운 남자들, 호텔 방에서 긴급한 욕망을 채우고 있는 남자들의 세계와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세균 배양액에 담긴 표본들처럼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4년 동안 유보한 채, 어떤 다른 용도를 위해 보존되어 있었다.
-63쪽

# “당신이 그들의 관심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누구의 관심요?˝
그녀는 나를 불쌍하다는 눈으로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안전핀을 치마에 꽂고 있는 바보.
˝남자들˝ 그녀가 말했다. ˝서평을 쓰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신문·잡지를 편집하는 남자들, 누가 정말로 선택될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누구를 권좌에 올릴지 결정하는 남자들 말이야. 똥 중의 왕이 될 사람.˝
˝그럼 그런 건 음모陰謀란 말이에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내가 질투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일레인 모젤이 말을 계속했다. ˝아니야. 아직은, 하지만, 맞아, 여자들의 목소리를 작고 조용하게 만들고 남자들의 목소리를 크게 만드는 것을 음모라고 부른다면 말이지.˝ 그녀는 크게라는 단어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 예˝ 나는 애매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마.˝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다른 길을 찾아. 어디든 갈수 있는 여자들은 극히 소수야. 대부분은 단편 작가들이지, 마치 여자들은 작은 것들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어쩌면요.˝ 내가 말을 시도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라요. 아마도 여자들은 글을 쓸 때 다른 것을 시도하려는 것일 수도요.˝
˝맞아.˝ 일레인이 말했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 하지만 큰 캔버스, 그 안에 모든 것을 넣으려고 시도하는 대단한 책들, 멋진 정장, 큰 목소리를 가진 남자들은 항상 더 많은 보상을 받지. 그들은 중요한 사람들인 거야. 왜 그런지 알고 싶어?˝ 그녀가 나에게로 몸을 숙이더니 말했다, ˝왜냐면 그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 89~90쪽

영화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나중에 파일로 볼 수 있겠지..
책에 오탈자가 상당히 눈에 띈다. 영화 내리기 전에 출간하려고 서두르다가 교정을 덜 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번역은 괜찮다.

결혼생활에 안주하는 여자들, 남편과 가정에 대한 헌신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자들, 결혼생활이 자신들이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느끼고, 실제로도 가장 좋아하고 잘 맞는 일이었기에 결혼생활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여자들. 수재너는 익숙한 것과 알고 있는 것들에서 누리는 호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불밑의 늘 같은 자리가 튀어나와 있는 침대, 귀를 덮은 머리카락. 남편. 결코 내가 기어오를 수 없고, 흥분해서도 안 되는 존재.
그래도 엉성하게 바른 회반죽으로 벽돌을 쌓아가듯, 세월에 세월을 얹으며 그저 옆에 사는 사람. 두 사람 사이에 결혼이라는 벽이 세워지고, 기꺼이 그 안에 눕게 되는 부부의 침대.
"내가 비참하다고 누가 그러던?" 이것이 내가 수재너에게 실제로 한 말이었다.
- 139쪽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는 그들 사이에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밥 러브조이가 내 팔을 만졌고 나는 약탈당하고 협박을 받은 기분이었지만 어떻게 적극전으로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남성이 여성을 만졌고, 예상 밖의 일이었다면, 여성은 "그러지 말아요."라고 속삭이거나, 아니면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남자를 밀어낸다. 그러면 남자는 하던 짓을 멈추거나, 어쩌면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이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나는 여기에 조와 함께 왔기에 혼자 일어나서 떠나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비상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적막한 거리를 비참한 기분으로 내려다봤다. 조가 드러난 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날씨가 차가워서 뭔가 덮을 게 필요하던 참이었다.
"조안." 조가 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자."
그것이 나는 고맙고 또 고마웠다. 마치 그가 나를 구해주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구해냈고, 파티장을 떠났다.
-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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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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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문맹'이라니, 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유년시절부터 읽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한 소녀가, 외로움과 가난을 시와 희곡을 쓰며 견뎌냈던 그 소녀가, 언어를 잃고 문맹이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56년, 스물한 살에 남편과 4개월 된 어린 딸을 데리고 헝가리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간다. 당시 소련의 지배를 받던 헝가리에서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헝가리혁명에 연루되어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이 든 가방 1개와 사전들이 들어 있는 가방 1개를 들고 월경안내인을 따라 국경을 넘는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무사히 오스트리아에 도착한다.

그러나 모두가 월경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열 살 먹은 터키 아이가 부모를 따라 스위스 국경을 은밀히 넘다가 피로와 추위로 인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월경 안내인들'은 그들을 국경 근처에 데려다 주었다. 그들은 스위스의 첫 반째 마을까지 곧장 걷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산과 숲을 가로질러 오랜 시간 동안 걸었다. 날은 추웠다. 여정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버지는 아이를 업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피로와 추위 그리고 탈진으로 죽어 있었다.

 - 67~68쪽

 

 국경을 넘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기 롤랑이 떠올랐다. 그는 스위스 국경을 넘으려 했지만 안내인은 그를 버려두고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보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월경 장면이 나온다. 트랍 대령에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라는 소집 명령이 내려지자, 마리아와 트랍 부부는 7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을 시도한다.

 

현실은 소설과 영화보다 잔혹하다. 추위와 탈진으로 죽은 아이. 지금도 국경을 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탈북민, 난민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는 걸까.

 

 

스위스에 정착한 아고타에게, 언어는 무서운 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그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 52~53쪽

 

 잊혀져가는 모국어, 여전히 낯선 새로운 언어... 어릴 때 망명하여 프랑스어를 익힌 아이와의 의사소통의 벽(이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다).

 그 안에서 그 새로운 언어를 익혀 그것으로 소설을 써내는 일은 끝나지 않는 도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도전을 감행한 아고타의 의지와 용기는 감탄스럽다.

 

 시종일관 담담한 언어로 상실과 도전을 기록한 글. 그 여백에 담긴 무수했을 고통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찬사를 보낼 뿐이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대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 34쪽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중략)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이들은 끝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 89,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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