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소년이 죽었습니다
-글쓰기의 간절함에 대하여
1. 들어가며
-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바람의아이들, 2004)를 쓰게 된 동기
옛날 환공이란 사람이 배를 타고 촉나라를 지나가는데, 부하 한 사람이 강변 숲에서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 어미원숭이가 내내 강 언덕을 따라 슬프디 슬프게 울면서 배를 쫓아오다 마침내 배 위로 뛰어내렸는데 그만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 어미원숭이의 배를 갈라서 그 속을 들여다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라는 것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일 테지요.
4년 전 가을 초입이었습니다. 글을 쓰러 지방에 가 있던 내게 고등학생 딸애가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중학교 때 동창이었던 아이가 오토바이 사고로 갑자기 죽었다고 했습니다. 친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 나이에 아는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은 놀라운 충격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다 묘하게도 그 애가 죽기 며칠 전, 딸아이는 그 애를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만났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건너편 길에서 딸애를 발견한 그 애가 일부러 길을 건너와 말을 걸었답니다. 그러는 일이 좀체 없는 워낙 얌전한 애라 딸애는 퍽 놀랐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일부러 길을 건너와 해 준 이야기는 더욱 뜻밖이었지요. 딸애는 같은 중학교 동창인 다른 남자 아이와 사귀고 있었는데, 그 때 좀 다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알았는지, 그 애는 “걔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싸우지 말고 잘 해 줘.”라고 말하고는 도로 길을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런 뒤 며칠 만에 그 애가 이 세상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 그 아이는 내 살을 헤집고 닻이 박히듯 콱 박히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애를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 온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꼬박 사흘을 울고 또 울었습니다. 모르는 어떤 존재의 죽음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내 고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 왔습니다. 갑작스레 자식을 잃은 그 부모를 생각하니, 특히나 그 어머니를 생각하니 누군가 창자를 잡고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타인인 내가 이럴진대 그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하던 터라 나는 남들 앞에서는 티도 내지 못하고 혼자 방으로 돌아와서야 억누른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결국 스스로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던 나는, 마음 속으로 약속을 하고 말았지요. ‘언젠가 네 이야기를 꼭 써 주마. 그건 물론 실제의 네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너처럼 어이없이 일찍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이야기가 될 거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비록 글 속에서라도, 죽은 그 아이를, 그 아이와 비슷하게 죽어 간 다른 아이들을 다시 한 번 살게 해 주는 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뒤로 한참 동안 나는 다른 일들에 밀려 그 약속을 지켜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닻처럼 박힌 아이는, 그 아이에게 한 약속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 약속을 꼭 지켜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겨우 기회가 되었을 때, 나는 그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야기였던 만큼 온 정성을 다해 쓰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다루지만 열여섯의 삶을 빛나고, 행복하게 새로이 살게 해 주는 글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2. 나의 창작 노트
- 작가는 수많은 영혼의 통로일 뿐이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글이란 것을 ‘어떤 영혼이 작가의 몸을 통로로 삼아 자기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탓에 새로운 글을 시작할 때면 나는 내가 통로로 쓰일 준비를 합니다. 누가 들어오기 전에 내 힘만으로는 그런 얘기를 도무지 써 낼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지요. 하지만 표현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다른 작가들이 글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별다를 게 없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좀더 의존하는 작가군에 속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일단 청소년을 다룬 책들, 청소년들이 직접 쓴 글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또 노트를 한 권 만들어 생각나는 모든 아이디어를 적었습니다. 이런 과정은 다른 작가들이 구상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인물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아이디어라도 그렇게 메모할 수 있지만 줄거리라든가 내용에 대해서는 실제로 작품을 써 나가기 전에는 거의 생각을 펼쳐 나가지 못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특히나 첫머리도 잡히지 않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들끓었습니다. 제대로 못 써 줄 바에야 의미가 없는 작업이라고 여겼고, 그 무게가 나를 짓눌렀습니다. 이미 죽은 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까도 싶었지만 그러기가 싫었습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미안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한 번만 더 누리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그 애를 마음에 품고 지내는 사이에, 어느새 그 애는 내 속에서 분명한 성격을 지닌 한 존재로 잉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 나는 어떤 영혼이 조금씩 ‘나’라는 통로에 발을 디디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합니다. 나는 그 애에게 ‘황재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여자 친구인 유미의 존재도 그렇게 떠올랐습니다. 상대적이겠지요. 재준이라는 아이의 캐릭터가 선명해질수록 유미의 존재도 또렷해졌습니다. 그래도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도무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하얀 종이 위에 쓰인 문장이었습니다. 그래, 이 아이는 이 말을 일기장에 적어 놓고 사는 아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첫 장면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준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엉뚱한 생각인 만큼 계기가 분명해야 했습니다.
그 무렵, 우연히 다른 작가에게서 요즘 아이들이 시체놀이를 하고 노는 신기한 사진을 신문에서 봤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거다,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이럴 때도 나는 재준이가 나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합니다. 영혼은 내게 직접 말을 걸 수 없으니 온갖 경로를 통해 내게 무언가를 전달한다고, 역시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 작가에게 그 얘기를 내가 쓰는 얘기에 써도 되겠냐고 허락을 얻었습니다. 시체놀이를 통해 죽은 듯이 사는 놀이를 생각해 낸 재준의 모습이 잡혔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집필을 시작하니, 중학생인 유미의 1인칭으로 쓰는 문장이 내게는 몹시 힘들었습니다. 자꾸만 이야기가 새서,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적인 문장, 어른의 사고를 담은 문장이 새어 나왔고, 그렇게 쓰고 싶은 충동에 괴로울 만큼 시달렸습니다. 내가 유미와 일체가 되지 못한 증거였지요.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중학생 아이를 둔 친구들에게 부탁해 중학생들의 사진을 몇 장 얻어서는 책상 앞에 붙여 놓았습니다. 철저하게 이 아이들에게 내가 이야기를 들려 준다는 심정으로 쓰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유미가 되었고, 재준이가 되어서 그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지간히 머뭇머뭇, 안 나가던 글이, 재준이 살았을 때 사 준 속옷을 유미가 찾아 내서 입어 보는 제1장의 장면을 쓰는데 갑자기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대로 유미가 되어 글 속의 유미보다 더 펑펑 울어 가며 그 글을 써 나갔습니다. 비로소 이 글이 완성되겠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처럼 구성을 미리 못 하고 쓰는 사람에게는 이런 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순간이 오지 않으면 그 글은 거의 완성되지 못합니다. 주인공과 일체가 된다고나 할까, 그 감정이 그대로 내 속으로 쏟아질 때, 아니면 전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이나 사건이 저절로 흘러 나올 때, 그러니까 ‘손이 쓴다’는 느낌이 올 때, 그런 순간이 와야만 나는 그 글의 완성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 장면은 그래서 내게 중요했습니다. 재준이 속옷을 사 준다는 얘기 같은 건 미리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저절로 흘러 나온 얘기였으니, 이제 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단계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느리게라도 끊이지 않고 글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통찰이 빛나는 멋진 문장을 쓰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릴 때, 마음껏 나를 표현하는 근사한 묘사를 하고 싶을 때, 나는 책상 앞에 붙여 놓은 중학생 친구들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 나의 그런 겉멋과 헛된 욕망과 싸웠습니다. 문장을 쓸 때, 감상적으로 여겨지기 쉬워 피해야 할 말줄임표의 남발도, 과잉되게 느껴지는 여러 가지 감정의 토로도, 나는 열여섯 살의 유미였기 때문에, 내가 아닌 그 애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두었습니다.
일반적인 문학의 잣대로 볼 때,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인정합니다. 끝까지 추리물의 방식으로 써 냈다면 훨씬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었으리라는 지적도 충분히 인정합니다. 왜냐면 그 점들은 그 글을 쓰는 동안 내 자신이 내내 싸웠던 유혹의 지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작품으로서의 문학적 완성도보다 실제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써 내는 글이 마치 어떤 존재의 실제 삶으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라도 할 듯이 말입니다. 이런 태도가 문학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유혹을 이겨 낸 나를 스스로는 대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지적들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글을 쓰게 해 준 한 소년의 넋을, 그리고 그 소년처럼 어이없이, 꽃잎 날리듯 사라져 간 다른 소년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어 그 글을 썼던 것입니다. 내게 그 글을 쓰는 목적이 있었다면 오직 그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년 만에 약속을 지켜 냈을 때, 내 마음은 너무도 평안했습니다. 예상 외로 이 글은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이 가끔씩 주는 ‘뜻밖의 선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3. 나오며
- 자신에게 ‘간절한’ 글을 ‘간절하게’ 쓰자
이렇게 쓰고 보니, 이런 글이 앞으로 글을 쓰실 작가 지망생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회의가 불쑥 듭니다. 어떻게 보면 잘난 척 떠든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체계도 없이 아마추어적으로 지껄인 듯도 싶습니다. 나로서는 조금이라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고 싶어 과정 하나하나를 가능한 되살려 솔직하게 써 보았지만, 실제적인 도움은 전혀 되지 못할 글이 된 듯싶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한 가지는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간절한 글을 간절하게 쓰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글을 쓰는 기쁨과 아픔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굉장히 의미 있는 듯, 영혼과 교신이라도 하는 듯, 운명이라도 되는 듯, ‘제멋대로’ 생각하는 나의 글쓰기 방식은 어쩌면 이 ‘간절함’을 지켜 내려는 부족한 사람의 몸부림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 어머님들이 태몽을 꾸면 아이의 탄생을 필연적으로 느끼고 그 생명을 더욱 소중히 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듯 ‘제멋대로’ 쓴 창작 노트도 ‘간절한 것을 쓰자.’는 얘기를 어떻게든 간절히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다들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시지 않을까, 하고 이번에도 나는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바람의아이들, 2004)
동화작가 이경혜의 첫 번째 청소년소설. 주인공 유미는 어느 날 갑자기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남자 친구 재준이의 일기장을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게 된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라는 섬뜩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재준이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며, 그와 함께 한 추억을 더듬는 유미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성장한다. 짝사랑, 성적, 학원, 선생님 등 평범한 중학생의 일상이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위 글은 <동화읽는가족> 가을호 '미래의 작가를 위한 창작 노트' 코너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