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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한동안 나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소설가가 원래 그런 직업이라고 믿었다.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본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가 김영하의 새 산문집 '보다'는 크고 작은 일, 흘려보내는 순간, 무심한 풍경에 관한 생각.

 

 

 멀리서 바라본 어떤 지점의 먼지 한 톨 같은 이야기들.

 

 

 그 접점의 단어로 마무리된 조심스러우면서도 책임감 있는 생각.

 

 

 시간과 공간의 물리성을 어느 곳보다도 직접 체험하게 되는 순간에서 흘러나온 시선.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한국에서는 굵직한 사건이 터졌노라고 말하는 데서 오는 공감각은 어떤 접점에서 나타난 것일까.

어쩌면 자리를 비울 때마다 하필 굵직한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니라 늘 굵직한 사건이 터지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렇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마침 네 생각 했는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생각의 지속과 연락의 일시성이 만난 것일 뿐, 그 사이에는 어떤 연관도 없다. 이러한 지속성과 일시성이 만나는 지점을 파고들어 본다.

 

쉬운 문제. 아는데 모르는 그 지점에서 사람은 무언가를 본다고 착각하는 것일 게다.

김영하가 스치거나 파고들고 싶었던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너무나도 무심히 보아넘기는 풍경.

쉴 새 없어서 외려 눈 돌리게 되는 정보.

망명정부에서 추락 우주선으로의 변화.

 

모르는 게 약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북소리는 멀리서 들으면 즐겁지만 가까이서 들으면 시끄럽다. 이러한 잠언과 격언 사이를 오가는 시선.  물리적인 필터를 거쳐 보고 듣는 것에서부터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또다시 그에 대한 반응을 추스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시간. 흐르는 것과 쌓이는 것. 모으는 것과 빼앗기는 것.

목숨의 값. 모두의 목숨이 같지 않은 상황.

상황의 변수. 타인을 연기하기는 그토록 쉬운데 자신을 연기하기는 왜 그리도 어려운지.

자신이 사라진 후의 혼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정적을 두려워하는 인간.

다시, 시간과 공간. 그 속을 김영하의 눈이, 본다.

 

 

 

 소설가의 눈과 에세이스트의 눈이 다름에서 오는 묘한 격차. 왼쪽 눈과 오른쪽 눈 안압이 달라 펼쳐지는 풍경의 생경함.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노라면 이런 안압 차이가 느껴진다. 무용함과 유용함을 오가는 시선. 김영하가 바라보는 대상은 당시 사람들이 많이 보던 영화이기도 하고, 해외 신문에 오르내린 가십이기도 하고, 택시법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시아나 항공의 사고를 이야기하다 그는 부자들이 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지, 택시법이 어떤 연유에서 논란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택시 이야기를 잠시 들어본다.

 

 

 

 

 합승이 사라진 것은 단속 때문이 아니라 택시가 흔해졌고 대중교통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의 상대적인 성공으로 위축된 택시업계는 스스로 대중교통이 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논리로 정치권을 압박했고 거의 먹혀들 뻔했다.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한 것이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보면 택시를 이용하는 대중 다수가 그 법을 반대했(그 여론을 믿고 이명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국회로 돌아간 법안은 재의결되지 못했다). 그 법의 내용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택시=대중교통'이라는 산법을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책속에서

 

 

 

 이 높음과 낮음, 오른쪽과 왼쪽의 차이에 관해 그는 소설 '퀴즈쇼'에서 쓴 적이 있다. 돈으로 환산한 이야기. 돈은 가장 명확한 존재임을, 어제 볼 땐 오백 원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천 원 같기도 하네'가 아니라 오백 원은 오백 원이고 천 원은 천 원이라고 말함으로 관점과 실재하는 실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상황의 변수와 역설을 풀어나간다.

 소설 장르를 빌어 미학적인 판단 말고는 모든 것을 유보하는 입장을 택했다면 이번 에세이에서는 유용한 것을 무용하게 바라보는 소설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형식의 틀에서 내용의 속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글을 들여다본다. 소설가로서의 김영하가 구름 저 너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상을 묘사했다면 에세이스트로서 김영하는 그 길을 육로로 건넌다.

 뱃길과 사막길을 건너는 그 시선에서 모래바람이 서걱거린다. 

 

 

 

 

잠시, 그가 인용한 오르한 파묵.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는 그렇지 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멀리서 떨어져서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양식의 글을 씀으로 김영하가 노린 것은 처음 자전거를 탈 때의 그런 느낌일 것이다. 약간은 무섭고 떨리지만 일말의 설렘이 담긴 일. 구태의연한 것, 익숙한 것을 거리를 두고 익숙하지 않게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 직면과 통찰. 책임감 있는 시선. 깊은 생각 끝의 결론. 이것을 그는 영화 '그래비티'를 통해 이야기한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와 얼굴 없는 시체 사이의 우주만큼의 간극. 그것을 들여다본 이후에서야 왜 할로윈 축제에 해골바가지 모양의 호박이 나오는지, 중세 수도사들이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을 짝으로 여겼는지, 무엇보다도 유한한 인간이 무한함 앞에서 버틸 수 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다. 

 

 

 

 일시성과 지속성, 없음과 있음, 다른 것과 같은 것마저도 없는 지금 눈앞의 상황을 제대로 보기를 권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고 나면, 밑줄이 아닌 각주의 책.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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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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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술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책 속에서





'내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라곤 오로지 울고 싶을 때 그 울음을 참은 것이 전부였다.'로 시작하는 산문집을 읽었다. 이 더위에, 혹은 이 추위에, 라고 슬쩍 펄펄 끓거나 얼어붙은 시간 한 톨을 붙이고 싶은 책. 

 말끝마다 싱그럽게 교화된 욕설이 따귀처럼 따라붙고 좀 억울한 표정의 글자가 헤엄치는  책.  '소설가이자 탁월한 신화학자로 잘 알려진 이윤기 선생님은 생전에 나와 마주치면 절대로 류근과는 노래방에 가지 않겠다, 라고 힘주어 결심의 일단을 외치곤 하셨다.'로 글머리를 열더니 마침내는 북방에서 온 아주머니가 어서 나가라 문 두드리고 천장엔 쥐오줌 있는 위독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래깃국도 못 먹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는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시래깃국을 못 먹어 죽을 뻔했다는 말로 들었는지 날마다 시래깃국을 주는 나날. 

 





 가난한 마음. 

 꼭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는데 그걸로 더듬더듬 밤길을 거슬러 어디론가 가는 느낌. 





 이 어둠 속 좌절과 자학의 암중모색 가운데 떠오르는 대책 없는 젊음의 이미지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했었다. 헤어짐과 실연, 게다가 헤드라이트는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 불에 차라리 타서 없어져 버리면 좋을 것 같은 집 이야기를 담은 노래 가사 같은 글귀. 라인과 공백이 어둡지 않은 리듬을 만들어주는 이 책 책장을 넘기면 내도록 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쳇말로 류 근이 그리도 매 페이지 마다 즐겨 부르는 옛 애인조차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술집 여자조차 못기다리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한탄. 세 편의 시를 썼고, 스무 통의 연애편지를 썼고, 열한 명의 애인을 만났고, 아흔 명의 애인을 떠났다는 작가가 차라리 부러워지면 지는 거란 말인가, 하는 자조. 책의 전반에 드리워진 자학의 암중모색이 가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할 때조차 우습게 일컫는 류 근의 글에는 절제, 공백, 여백, 은유, 축약이 없다. 유용하거나 즐거워야 하거나, 쾌락을 가르치거나 주거나, 혹은 이 둘을 겸하여야 하거나,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어야 한다거나, '상상력의 표현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거나,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어야 한다거나, 시는 곳 체험이거나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이거나....... 호레이스, 부알로, 시드니, 셸리, 워즈워스, 릴케, 포의 시에 관한 정의를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류 근의 시나 산문을 읽노라면 이렇게도 직설적일 수가 있다니, 하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자기풍자를 술마시듯 하는 시인의 산문은 통속적이어서 담장이 낮다. 





 소나기 전의 구름도,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가워지는 바람도, 조금씩 기우는 달도, 그의 글 속에서는 라면과 키우는 강아지와 옛날 애인이 입고 지나가던 빨간 옷으로 바뀌어 모습을 보인다.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질 지경이다. 지금 애인은 어디서 뭘 하냐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끄는 정서는, 월플라워즈의 노래에서처럼 단 하나의 헤드라이트, 혹은 파이스트의 노래에 나오는 어느 저녁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가 주는 결핍이 둘을 부른다면, 그는 차라리 셋을 외칠 사람이다. 글이 흐르는 곳과 닿는 곳은 자신이되 언어는 그 자체이길 바라는 글. 책속에는 물론 옛애인과 술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만(그냥 '애인'도 많이 등장한다), 종종 그는 언어의 그릇이 머무는 세상을 맨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언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가 곧 그 사람의 '내용'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단 두어 문장의 글을 보고도 그 사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내뱉는 말의 높이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당 인수위원회의 첫 인선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자의 '언어'를 나는 몇 번 목도한 적이 있다. 이제 그의 언어가 그 당의 입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언어가 곧 그 당의 내용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놀랍다. 국민의 수준을 딱 그 정도 언격으로 판단한 것이다.

-책 속에서





 그러니, 이러한 그릇으로 대접받는 시대에는 사금파리같이 반짝이는 것이라고 모조리 수집하려 들지 말 것. 오늘 창피하다고 내일도 계속 창피해하지 말 것. 말만 남았다 하더라도 빈말은 하지 말 것. 혼자 살든 함께 살든, 가장 혼자가 될 것. 갈 곳이 없어진 류 근이 혼자 기울이는 술잔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들먹이기 위한 술잔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추측이 판단보다 더 많은 것은, 그만큼 이 산문집의 결에 공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류 근의 산문을 읽고 나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들' 같은 메모를 남기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은 결국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핍이며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니,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늘 바뀌고 지금도 바뀌고 앞으로도 바뀔 것인데, 그 사이 빙점을 마침표로 잘못 읽는 것은 읽는 자의 착각이다. 그 끝도 없는 자유에서 울 수도 없을 때 하필 류 근의 이런 글이 나타난다.





 불안을 극복하고, 공포를 극복하고 오늘날 바야흐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람들 보면 킥, 웃음이 난다. 우울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날마다 바야흐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 보면 캑, 목이 막힌다.

 그들이 극복한 것은 불안도 공포도 우울도 절망도 뭣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가벼운 핑계들을 잠시 알고 있었을 뿐이다. 가벼운 느낌들을 잠시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불안과 공포, 우울과 절망 같은 것들은 극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불안을 느끼는 것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다르다. 공포를 느끼는 것과 공포를 깨닫는 것은 다르다. 

 우울과 절망이 느낌이라면 그것은 곧 지나간다. 하지만 불안을, 공포를, 우울을, 절망을 깨달아버린 거라면 그것들은 절대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불안과 공포, 진정한 우울과 절망은 깨달음의 세계다. 가벼운 느낌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한 번 깨달은 것이 무슨 수로 극복될 수 있겠는가.

 극복된 깨달음은 가짜다.

-책 속에서.




 그렇단 말이지, 하고 읽고 있는데 저 말끝에 앙큼한 한 마디가 따라붙는다. '사랑도 그와 같다, 시바.' 그러니까 책 앞머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온 문구, '이 책에 표기된 비속어, 문법 파괴 등의 표현은 원문을 쓸 당시의 격렬한 파토스와 문맥을 살리기 위해 저자와의 협의 아래 최소한의 범위에서 의도적으로 허용한 것임을 밝힙니다.'라는 글귀는 그러니까 '지나친 흡연은 폐암의 위험을 가져오며......'와도 같은 경고 문구였다. 마침 따라붙은 된소리가 제거된 욕설에서 시인이 표현하고 싶었던, 원문을 쓸 당시의 격한 파토스와 글의 결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일이 멀리 떨어지면서 비극이 되어가는 과정. 수족관에 들어간 물고기가 자신은 원래 더 깊고 넓은 물속에 있어야 했다는 것을 잊는 나날. 열차 안에서 태어나서 땅을 밟아본 적 없는 트레인 베이비가 흙을 만지는 역설. 





 그리운 것이 무어 그리 많은지,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 무엇 그리 많은지 '추억의 힘과 그리움의 힘은 같은 높이의 음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내 노래는 언제나 길 없는 허공에 발이 묶인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음계의 색상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이 직접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높낮이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그 열망의 정도일 뿐 그 정확도의 깊이는 아닐 것이다. 상처와 허무, 절망과 헤어짐, 그 사이를 연애와 담배와 술과 부조리로 가득 채우는 류 근의 시는 아마 앞으로도 작가의 바람처럼, 지붕이 낮을 것 같다. 높고 차갑고 엄정한 음계 가운데, 이렇게 하나 정도 속된 낮은 양철 지붕 하나 정도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저녁, 까닭없이 무엇이 불쑥 떠오를 때.







*제목은 책 끝에 실린 시 제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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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8-19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왔는데 바로 이 리뷰를 보게 되다니.
김광석의 저 노래 가사만으로도 마음이 무장해제되는데, 그 가사를 쓴 사람의 책을 통째로 읽으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부제의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라는 문장을 보니, 맞다,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면 다 그런거지, 라는 생각에 오히려 위안을 받아요. 그러면서 다 살아가는거지 라고 생각하먄서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는데 그럼 아마 저를 에뷔테른님 따라쟁이라고 놀리시지 않을까...^^

Jeanne_Hebuterne 2013-08-23 08:33   좋아요 0 | URL
hnine님, 저는 김광석을 잘 알지 못했지만, 류 근에 관해서는 통속시인이라고 부르는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저자의 다양한 경험도 신기한듯 하였고, 글도 접근하기 쉬웠던 것 같아요. 이 책은 일정 기간, 지면 발표하지 않은 그의 개인적인 글모음이라 깔끔하게 정리된 맛은 없지만 어떤 이의 수첩을 몰래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주 깊숙하지도, 내밀하지도 않지만 이런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페이지마다 (옛)애인이 끈질기게 등장하여 이 사람의 머리는 엄청난 구심력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요.

한마디로, 달 보며 함께 술마시기 좋은 책이었어요.

덧-저야말로 hnine님 따라쟁이인데요! 그보다는 풴 정도인지도! 히힛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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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미각에서 얻는 쾌락과 지적인 것의 충만감이 만드는 정신의 기쁨은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지 않다. 주린 위장의 배고픔과 정신의 공허가 초래하는 고통이 그렇듯이. 그 둘은 하나로 포개진다. 그런 맥락에서 철학은 차고 뜨거우며 쓰고 달콤한 음식이다. 오래 전부터 참을 수 없는 정신적 탐식에의 욕망으로 온갖 철학을 삼키고, 위와 장에서 삼킨 것들을 소화시켜쓰며, 마침내 이 화사한 철학들은 내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 <철학자의 사물들>은 사물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사유와 철학을 즐긴 흔적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사물들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고 그 철학적 의미들을 반추하는 동안 나는 사물의 행복한 감식가 노릇에 만족한다. 당신을 이 자유분방한 사유의 축제에 초대하니, 여기 와서 사물의, 사물에 의한, 사물들을 위한 축제를 즐겨라!

-저자의 말 중에서.

 

 

 영화 '클로저'에서 영국인 주드 로는 처음 만난 미국인 관광객 나탈리 포트만에게 런던의 일상을 소개한다. 튜브라고 부르는 지하철, 보비라는 애칭의 경찰. 붉은색 벽돌 같은 이층버스. 입술 양 끝을 벌려 발음하는 티. 오후 네 시의 크림 티, 타인과의 거리를 끔찍이도 지키고 싶어하는 이들이 탄 이층버스, 시민 사이를 천천히 걷는 경찰, 운행을 자주 중단하지만, 도시의 이곳저곳을 연결하는 지하철. 무심히 보아넘긴 사물은 이국의 관광객에게는 신비한 물체로 다가선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어떤 존재는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상외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고개를 들어보면 늦게 와서 빨리 지나치는 봄 공기를 타고 커피 향이 실려온다. 테이크아웃 잔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손에 들고 이야기를 하거나 뭔가를 들으며 스쳐 지나간다. 그 많은 얼굴 속에서 내가 아는 얼굴을 찾기 전까지 가만 앉아있노라면 내가 든 가방, 그 속의 잡다한 물건들이 때때로 말을 건다. 그것은 영화 파니 핑크에서 오르페오가 보지 말라고 했던 시계이기도 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쓰는 밝은 갈색의 가죽 수첩이기도 하다. 원하는 만큼만 인간적인 커피 전문점의 종업원이 내게 건네준 커피가 식기 전까지 짐짓 처음 보는 물건이라도 되는 양 그것들을 들여다보면, 더 깊은 이야기가 들린다. 아마 장석주는 '철학자의 사물들'을 펴내기 전 이런 시간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장석주는 해마다 천여 권의 책을 읽는 다독가로 유명하다. 이 책은 그의 다독의 경험과 일상의 관찰력,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의미로 엮어내려는 노력의 결과다. 이를테면 여행 가방에서 그는 암스테르담과 서귀포를 떠올린다. 배와 기차, 비행기, 기상이변, 무수한 변곡점과 계획의 수정이나 이행을 떠올린다. 여행은 그에게 생각을 낳는 커다란 여행 가방으로 환원된다. 의미를 비틀고 환원하여 그 본질을 자기 생각으로 대치시킨다.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떠나기에 일회성을 지니는 여행을 생각하며 장석주는 떠남과 나아감으로 존재하는 인생 역시 하나의 여행임을 상기시킨다. 하나의 부분이 전체가 되는 순간이다.

 

 

 

 관계, 취향, 일상, 기쁨, 이동이라는 분류에 따라 서른 개의 사물을 서너 페이지에 걸쳐 다소 느슨하게 계열화하고 그 사물에 관해 묻고 대답했다. 철학자의 시선은 종종 인용과 요약으로 장석주의 시선과 어우러진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일상의 사물이며 따라서 우리가 자주, 때로는 무심하게 지나치는 존재다. 하지만 같은 사물도 철학자의 필터를 거치면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김훈은 타인과의 연결 통로, 알랭 드 보통은 무심한 연인의 손에 들어가면 악마의 고문 도구로 본 휴대전화기를 그의 저서에서 이야기했는데 장석주는 이를 고독과 온전함의 자유를 잃게 하는 도구로 본다. 그는 휴대전화를 손의 구조와 그 기능의 한계 속에서 진화하는 사물로 보기도 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광신론적 믿음의 종교적 실존 도구로 보기도 하며 기술의 핵심과 시간 압축을 가능케 한 진화의 매개체로 보기도 한다. 그 사이사이 블랙베리, 모토로라, 삼성, 아이폰 등이 등장한다. 케빈 켈리(기술의 충격), 파스칼 피크, 장 디디에 뱅상, 미셸 세르(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저술이 인용된다. 

 

 

 

담배

나는 담배를 통해서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다.

-보들레르


거울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대이다.

-라캉


카메라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손택


시계

권태란 안쪽에 극히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비단으로 안감을 댄 잿빛 천과 같은 것이다.

-벤야민 



 

 


 엄청난 시간을 자신에게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 무생물의 형성, 생물의 진화로부터 획득한 권위를 지닌 존재, 기호 순환으로부터 획득한 권위를 지닌 존재, 호미니언과 존재, 계통 발생의 시간에서 얻은 권위를 지닌 존재라고 인간을 정의한 파스칼 피크, 장 디디에 뱅상, 미셸 세로의 인용 끝에 저자는 그러나 스마트폰과 자기 자신을 동일화하지 않음으로 스스로 진화를 멈추었고 평한다. 필요성, 가치, 첨단 기술로 꾸민 스마트한 기기에 마음 설레는 사람이 많건만 저자는 그것을 쓴다 하여 자신의 생이 화사해지지도 화창해지지도 않을 것임을, 자기 존재의 현상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결심한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겠노라고. 

 


 

 사과에서 애플을 떠올린 저자는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란 삶을 위한 발명품이고 선택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가 바라본 스티브 잡스는 경영자 이전에 인문학자였다. 11월 들어 세 번째 맞는 목요일의 차가운 빗방울에서 따뜻한 수프의 위로와 욕조의 휴식을 생각한다. 늦게 배달된 신문에서 일상의 커피와 신문으로 드러나는 휴식과 연결고리를 이야기한다. 책에서 종이 재질과 독서의 역사, 재료와 구조까지 그의 생각은 꽤 넓은 범위를 어렵지 않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그러나 깊은 고찰을 통해 드러낸다. 사과와 스티브 잡스, 욕조와 사사키 아타루, 조간신문과 마샬 맥루한, 책과 움베르토 에코가 짝지어 등장한다. 이 속을 함께 산책하는 것은 독자인 나의 즐거움이었다.

 

 

 

 이러한 즐거움은 아마 일상에 희석될 것이다. 아마 앞으로 많은 나날,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장석주의 말에 따르면 항생제 가득한 돼지고기로 저녁을 위안하고 신용카드를 긁으며 소비사회의 톱니바퀴가 될 것이며 자동판매기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침대에서 몸을 수평으로 만들어 다시 아침을 맞고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계속하는 담배 같은 습관을 지닐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 선글라스로 훌륭한 가면을 만들고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삶은 이렇게 지속된다. 파릇한 바람에서 겨울의 공기를 잊고 차가운 서리에서 남풍을 기약하듯 계속 나아가는 것. 일말의 위로와 사유를 통한 직관, 평범을 통한 비범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잠시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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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5-0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가 쓴 책을 읽다보면, 고독에 너무나 잘 적응한 사람 같기도 하고, 고독을 제2의 자신으로 여기고 붙어 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해요.
제목만 보고는 어떤 내용일지 감이 안왔는데 에뷔테른님 리뷰 읽어보니 감이 오네요. 마지막 저자의 말에서 사유, 탐닉, 분석, 이 세 단어가 다 하나인 듯한 느낌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3-05-10 14:26   좋아요 0 | URL
hnine님의 댓글을 가만히 다시 읽다가 이 책을 생각하니 이 책의 저자는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는 일에 무척 익숙한 사람, 또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고 사물이나 개념에서 자기 생각과 의미를 찾아내어 어렵지 않게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글쓰기를 어느 정도는 타고난 느낌도 함께 들어요.
어떤 자세로 사물을 바라보았는지가 책의 서두에 저렇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읽고 나니 정말 초대장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각 사물에 따라 서너 장에 걸쳐 생각이 전개되어서 틈틈이 읽기에도 편했어요. 주말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hnine님! :)
 
극장전
홍상수 감독, 김상경 외 출연 / 미디어마인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나무가 없는 곳에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줄곧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이상 울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겠어요"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중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일기를 쓰는 일과도 같습니다. 돌아보고, 돌이키고, 후회하고, 허탈해하고, 연결을 찾고, 매듭은 끊고, 벗어날 듯 하면서도 회귀하는 그런 일이 있어요. 그것을 일상이라고 부르고, 낭비하다 보면 마침내는 버나드 쇼 처럼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런 묘비명을 가지게 되는 일. 홍상수의 영화가 늘 그러했듯 여자들은 남자들이 기다리면 앞서 걸어가 버리고 좋아하게 되면 발작처럼 울게 되고 잡힐라 치면 떠납니다. 포스터의 동수와 영실의 모습을 보세요. 저보다도 중요한 구도는, 영화를 보고 나온 상원이 영실의 뒤를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꼭 사람이 화면 밖으로 걸어나올 듯한 장면. 저는 이것을 차라리 입체 영상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장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일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질문들은 답이 되어 돌아오고, 그 시기는 제각각 엇갈려요. 이것은 같은 말을 영어로 옮겼다가 그 영어를 다시 한글로 옮기면 영 생경스런 말이 되어 돌아오는 그런 그림자 놀이 같은 현상입니다. 확실히 홍상수는 구조를 허물고, 장면을 재생하고, 영화를 씬 단위로 찍고, 관계를 이었다가 다시 끊어버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시소처럼 오르락 내리락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에 능력이 있는 감독이 분명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들이 반복되고, 확대되고, 전혀 다른 뜻이 되었다가, 죽어버리고, 살아납니다. 이것은 눈과 마음, 마음과 눈, 생각하는 손과 저절로 일하는 머리를 보는 일. 

어떤 영화는 끊이지 않고 몰입을 요구하고, 어떤 영화는 반면 빠져들라 치면 계속 호흡을 뚝뚝 끊어 의식을 몰아냅니다. 헐리우드의 영화들이 대부분 첫번째 전략을 택했다면, 헐리우드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을 전후로 하여 끊임없이 두번째 전략을 택해왔지요. 홍상수의 영화를 굳이 분류하자면 두번째의 부류입니다. 뿐만 아니라 홍상수는 그 어떤 답도 주질 않습니다. 가령 영화를 보는 관객은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남자가 주인공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이 남자는 영화 속의 영화에 등장하는 상원의 형입니다. 그는 '인제 또 일 년 고생해야 겠구나' 라는 말을 상원에게 합니다. 저 나이의 청년이 일 년 간 할 고생. 아마도 재수를 하려나.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다음 나오는 말이, '일요일날 엄마 집에서 보자'입니다. 엄마 집이라니, 그럼 아빠 집도 있나. 여기까지는, '아마도 형이 따로 나와 사나 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상원을 구해주는 남자에게 상원은 '이제 내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되는지를 묻습니다. 아, 엄마와 좋아하는 사이구나. 싶은데 그러나, 엄마는 그 아저씨더러 '니가 뭘 안다고 그러니, 뭘 알어?'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라고 쓰고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삼촌인데 아버지 같은 존재인가. 게다가 '어머니'라고 부르며 야단을 맞다가 상원이 옥상에 올라가 외치는 단어는 '엄마'입니다. 이건 마치, 계모에게 야단맞고 우는 신데렐라 아닙니까. 요정이 나타나려면 멀고도 멀었습니다. 이 이상한 가족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동굴인 극장에서 나왔던 영화였고 관객은 영화 속 '이형수'의 영화를 본 것 뿐이니까요.

한마디 설명도 없습니다.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도처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한없이 단정한 여자가 소주 한 잔에 잠시 흐트러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포스터에는 '여배우를 만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속 영화에서 나와, 밖으로 나와 봅시다) 여배우 영실이 동수에게 '여배우라고 해서 특별한 거 아니에요, 아셨죠? 여배우도 똑같은 여자에요' 라는 말은, 저 광고 문구에 대한 회답일까요. 그것은 차라리, 끊임없이 치근덕대던 동수가 여배우 영실에게서 여배우의 크레마를 뽑아내어, 이상형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화답일 것입니다. 답이 있기는 한데, 조금씩 느리고 느슨하게 이 영화 속에서는 반복됩니다. '말보로 레드 주세요'라는 이형수의 영화에서 '양담배 안팔아요'라는 말이 들립니다. 이것은 '엄마 집에서 보자' 만큼이나 기묘합니다. 요즘 누가 저 말을 하나요? 또한 이형수의 영화에서는 영실이 상원에게 '너 내가 첩 해줄까?'라고 말합니다. 요즘 누가 저 단어를 씁니까? 죽어가는 이형수를 만나고 나온 동수는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생각을 해야 해'라고 이 영화 속에서 최초의 나레이션을 합니다. 그는 그리고 그 때 혼자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자신의 앞에 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말들은 이상하게 메아리칩니다. 

영화 속 영화, 즉,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은 말보레 레드를 사려다 88을 삽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소설 속에 총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발사되어야 할진대 상원은 담배를 피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상원이 사려 했던 말보로 레드를 손에 넣는 것은 영화를 보고 나온 동수입니다.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은 '깨끗이 죽자'라고 말합니다. 죽고 싶어, 죽어버리고 싶어. 죽는다는 이야기가 어찌나 강렬하게 나오는지요. 그 말들을 듣고 뭔가 기기묘묘하다,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영화 밖의 영실의 대사로 다시 이유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녀는 상원에게 '좋고 싶어'라고 말하지요. 사실 이 말은 워낙에 희미하고 얼버무려져 있어 심지어 '여배우의 발성이 엉망이다'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은 이 말은 저도, 당신도, 심지어는 영화 속 동수 조차도 못알아들으니 의도적인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좋고 싶어, 좋게 해줘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의 의도적인 흐트러트림일 것입니다.그런데, 이 의도적인 흐트러트림 앞에서, 상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마침내는 가장 슬픈 말이 되고 말지요. 이것이 슬픈 이유는, 이형수의 영화에서 나온 한 마디, '내가 너, 첩 해줄까?' 이 말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이야기 하여도, 영화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부른 노래들 속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무한대로 증폭됩니다. 그 거리는 아무리 하여도 좁혀지지를 않을 것입니다. 

생활과 이벤트는 다른 것입니다. 전자가 계속 흘러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끊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배가 아프다고 주저앉는 여자는 곧 영화 속에서 섹스에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보아도 됩니다. 문제는 지속성에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실패하던 상원, 영화 밖에서 실패하지 않는 동수)자판기에 넣은 동전이 어떤 일을 하는지, 영실은 모르고 관객들은 압니다. 상원이 죽기 전에 쓰겠다는 공책에 무엇을 썼는지, 상원은 알고 관객은 모릅니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블루, 레드, 화이트에는 힘겹게 휴지통에 유리병을 넣는 할머니가 나오지요. 블루에서는 안간힘을 쓰다 넣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제 딸꾹질을 해 봐' 라는 이야기와, 그것과는 아무 연관 없이 일어나는 사고가 이야기의 첫 출발이 됩니다. 우연히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오고, 그 우연을 시작으로 여배우를 쫓고, 어쩌다 보니그녀와 잠을 자게 되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저는, 들었다고 하지 않고 보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가 찾던 것은 여자에게는 없는 여배우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앞서 인용한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저 독백에는 의도적으로 마침표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모두 말로 되어 있는 스러짐의 연대기이니까요. 지금 던진 질문의 답이 언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동수가 끊임없이 여배우 영실의 뒤를 쫓는 것. 그런데 마침내는 그녀가 먼저 떠나게 되는 것. 그것은, 덧셈과 뺄셈의 이상한 만남과 헤어짐입니다. 그 사이를 끊임없이 맴돌고 있는 홍상수의 죽음에의 열망은(기이할 정도로 두려워한다는 것을 열망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살기 위해 헤어지고, 살기 위해 생각하고, 살기 위해 맴돌고,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나는 모든 데자뷰의 이야기로 보입니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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