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툼한 교양서에 따르면 ‘차브’란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한다. 그들이 서점에서 그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차브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차브’란 특별히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언사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자신들의 성공에는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안정적인 중간계급 가정에서, 흔히 말하듯 나무가 우거진 교외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를 나왔고 대부분은 옥스퍼드나 런던정치경제대학(LSE), 또는 브리스톨대학 출신이었다. 노동계급 출신이 그들처럼 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조롱하는 그 수백년 묵은 현상을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최근 거론되는 ‘차브’라는 단어는 폭력, 게으름, 청소년 임신, 인종주의, 주정 같은 노동계급의 부정적인 특징과 연결된다. 『가디언』의 조 윌리엄스(Zoe Williams) 기자가 쓴 대로 "차브라는 말이 원래 뭔가 정통적인 것?그냥 쓰레기나 친구가 아니라 버버리 차림의 쓰레기!?을 전달하면서 대중적인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면 현재 그 말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인간’ 같은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노동계급이 악마화된 뿌리에는 영국 계급전쟁의 유산이 있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정권을 인수한 1979년은 영국 노동계급을 향한 전면공격이 개시된 해로 기록된다. 노동계급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이나 공영주택은 붕괴되었고 노동계급의 일터는 제조업에서 광산업까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그들의 공동체는 산산조각났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연대와 집단적 열망 같은 노동계급의 가치는 단호한 개인주의에 밀려 휩쓸려갔다. 힘을 빼앗겨 더이상 당당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점점 더 조롱거리가 되었고 하찮은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또한 노동계급이 미디어나 정치의 세계에서 축출당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생각은 퍼져나가지 못했다.?

노동계급이 처한 곤경은 보통 ‘열망의 부족’으로 치부돼버린다. 그들의 곤경은 책임이 있는 특권층들에 의해 조작된 불평등한 사회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특성 때문이라고 왜곡된다.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공영주택에 몰림으로써 이 단지들은 이른바 ‘차브’라는 집단과 연결되었다. 영국의 빈곤층 중 반 이상이 집을 소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너무나 한곳에 밀집돼버린 것이다. 공영주택 단지가 싸구려 단지로 변모함에 따라 영국이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차브?스스로 짊어진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는?로 이분화되었다는 논리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정부의 주택정책은 노동계급 영역에 사회적 손실을 끼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처리즘은 듀스베리 모어 같은 사회를 질식시킴으로써 탈산업화의 쓰나미를 불러일으켰다. 제조업 일자리는 지난 30년간 완전히 붕괴되었다.

"보수당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은 그 당이 특권층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겁니다. 당의 주목적이 특권층 보호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이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은 딱 필요한 만큼을 딱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죠."

가히 『사회주의 노동자』(Socialist Worker, 영국의 좌파 사회주의 신문?옮긴이) 지면에나 나올 법한 분석이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보수당의 일인자가 자기 당이 영향력 있고 부자인 사람들의 정치적 오른팔임을 고백한 것이다. 최상층 사람들의 편에서 싸우는 정당이 바로 보수당이었다. 이것은 계급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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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세계사 2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4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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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가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친 지점은 인간이 서로를, 그리고 주변 환경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석기란 경제적 변혁을 일컫는 말이기는 해도 사육과 재배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식량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이용하는지, 그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적 및 사회적 혁신도 함께 요구되었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신석기 패키지"라고 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8


 초기 농업과 관련된 인간의 반응 양상들을 살펴보면. 선호하는 식물의 야생 서식지를 유지하는 활동을 했고,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을 중심으로 머무르며 생활의 이동성이 감소했으며, 이용 가능한 식량 자원의 변화에 따라 식생활 패턴을 바꾸었고, 작물재배 혹은 야생 작물 관리를 통해 원하는 동식물의 밀도를 높여 나갔다... 식량 생산이 지속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 농업에 의존하는 사회가 더욱 많아졌고, 그들이 농업에 적합하도록 주변 환경을 바꾸게 되었다... 농업은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능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90


 그레이엄 바커(Graeme Barker, 1946 ~ )와 캔디스 가우처(Candice Goucher, 1953~ )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4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Ch.8-23 : 농업과 세계사 2 : 지역별 농업의 기원 >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모습을 지역별로 세부적으로 살펴본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던 시기, 홀로세를 살아가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주(定住.)생활의 형태가 등장하고, 창고 등 건물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신분제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재배 및 사육, 그리고 마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사회적 관계도 새롭게 바뀌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몇몇 사회적 관념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변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즉 의례, 가족 및 공동체 구조, 횡적/종적 사회관계, 축제 등의 행위가 이때 모두 고도화되었다. 이러한 행위의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 물질문화의 풍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76


 남아시아의 신석기 발전은 크게 보아서 기본적으로는 "신석기 혁명"의 가장 고전적인 패턴을 그대로 따랐다. 먼저 영구 정착지가 등장했고, 이후 농업이 개발 혹은 유입되었으며, 그다음으로 토기가 제작되었다. 남아시아에서 신석기의 대표적인 특징, 즉 토기와 정주 생활과 가축과 작물 등은 모두 신석기 시대 말기에 등장했다. 남아시아의 신석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변종들이 연속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67


 특정 유형의 건축 재료, 즉 나뭇가지를 엮어 벽체를 만들고 초가지붕을 씌운 오두막 건물의 흔적이었다. 토크와 유적의 발굴 사례에서 보듯이 이러한 구조물을 대개 원형이었고, 안에는 화덕 자리가 있었으며, 대개는 가운데 기둥 자리 구멍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건물화 함께 발견되는 이모작의 흔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건물의 흔적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모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한 장소에서 머물러 살아야만,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갠지스강의 주기적 범람과 갠지스 평원에서 자라는 벼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49


 자원 증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농업으로 변화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첫째, 사람들은 식량 자원을 생산할 수 있는 특정 식물에 집중하여 갈수록 관리를 강화하면서 그 식물을 의도적으로 심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둘째, 사람들은 숲속에서 원하는 식물을 심기 위하여 새로운 환경, 즉 농지를 조성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53


 이와 함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축의 활용, 관개시설의 운용 등이다. 이들의 사용은 해당지역의 기후와 재배하기 적합한 작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졌지만, 결과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토양의 비옥도와 재배작물의 특성, 관개시설의 유무는 투입 노동력의 비율과 가축사육의 필요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단기적으로는 계급제, 장기적으로는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동양에서 곡물의 중요성은 서양에 비교하자면 가축의 중요성에 맞먹는다. 유럽에서 농업은 복합 영농으로, 곡물 생산은 언제나 동물 사육과 함께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농업은 언제나 곡물 생산에 집중했으며, 선사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 음식은 대체로 채식 위주였다. 다만 최근에 그 경향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45


 동물 사육은 일본의 초기 농업 사회에서 그 역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야요이 시대부터 말과 소는 주로 농사일에 사용되었고, 인간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운송 수단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사육의 목적이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고기나 우유를 비롯한 축산물을 활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집돼지도 야요이 시대부터 사육되지 시작했으나, 야요이 시대의 식생활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한 비중은 미미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28


  "농업"에서 식량 생산 활동을 총칭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곡물 재배 위주(원경 園耕, farming), 가축 사육 위주(유목 herding 혹은 목축 pastoralism), 혹은 농경과 유목을 함께 병행하는 경우(농목업 agropastoralism)를 모두 농업의 개념에 포함된다... 다양한 식량 생산 시스템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식량 수급의 안전성을 높이고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복잡한 사회관계와 교환 체계가 마련되어야 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78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시기에 지역별로 생산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농업의 전파 방향이 일방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신석기 혁명의 초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수렵채집, 목축, 농경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안정적인 식량 확보'라는 농업만의 장점은 전반적인 생활 수준의 악화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된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앞선 시대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공존하다가 이들을 대체한 것처럼.


 인도아대륙 전체적으로 볼 때 농업의 확산 방향은 완전히 다르고 서로 상충되기도 했다. 갠지스 평원에서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대체로 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고, 서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패턴은 농업과 인구 확산 모델 연구를 촉진했고, 이로써 상호 작용과 다양한 흐름들이 밝혀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33


 초기 목축민과 달리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초기 농경 공동체들(EFC)은 동부 및 남동부 습윤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우기가 남반구 여름철로 국한되는 지역이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으므로 그중 일부 지역의 생태 환경은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 가운데 대부분에는 이미 후기 석기 시대(LSA) 문화를 보유한 수렵채집인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예전처럼 천연자원을 계속 이용했고, 농업 공동체와는 이웃에서 공존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13


 <농업과 세계사 2>에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지역의 농경문화가 소개된다. 이들 중 일부는 청동기 문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느 문명은 소멸되기도 하지만, 세계 전역에 자리 잡은 문명을 보노라면 문화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든 문명은 저마다의 환경에서 각자 최선의 길을 선택해 발전했던 것이 아닐까. 이들 문명에 대해 현대의 관점에서 우월과 열등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잔혹하다고 알려진 아즈텍(Aztec)문명을 생각해보자. 포로들을 인신공양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잔혹한 제국의 문화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평가를 내리지만, 이들 문화권에서는 포로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제한적이었고, 지력(地力)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의 인신공양의 풍속을 단순히 잔혹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고대 왕이나 귀족 등이 죽었을 때 가까운 이들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의 경우에도 죽은 이(死者)를 위한 강제적인 풍습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지도자에 의한 정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개인의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증이 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이유로 생겨났을 수 있는 문화의 성격을 규정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통(傳統 tradition)이라 알려진 많은 것들이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다른 나라의 문화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전통, 문화의 많은 부분이 신석기 시대 농경 생활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서로 다른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신석기 혁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당시 농업인은 기존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확장을 시도하기보다는 새로운 지역으로 찾아 들어가 원하는 생태 환경의 니치(niche)였다. 그러나 규모가 제한적이고 수용 한계가 뚜렷했기에, 각각의 충적선상지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 규모는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00


 벼농사는 대규모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또한 논농사는 고도의 사회적 협력과 공동체의 단결 및 상호 의존을 필요로 했다. 이는 사회 내부적으로 발달하던 위계질서와 상충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갈등은 야요이 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p318)... 벼농사는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차별의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분화가 최초로 나타났는데, 이를 촉진한 것이 벼농사였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19


요약하자면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는 먼저 야생종 벼를 관리하기 시작했고(BCE 7000 이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2000년 경에 이르러 농업-목축 기반의 정착 마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농업 마을 주변으로는 수렵-채집-어로 문화 공동체가 곳곳에 산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제2천년기에 집약적 벼농사의 관행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로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사회가 복잡성을 더해서 마침내 철기 시대의 도시가 등장했다. 그때가 기원전 제1천년기 중엽이었다. - P150

일본 고고학은 대개 야요이 시대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제1천년기로 수정되었다. 이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신토(神道)라고 불리게 될 문화 및 신앙이 구체화되었으며, 고문헌에서 일본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등장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새로운 도래인(渡來人)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존의 조몬인과 뒤섞였으며, 오늘날 대부분 일본인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벼농사에 기반을 둔 야요이 문화는 기존의 수렵채집문화, 원주민 문화, 조몬 시대의 문화를 대체했다. 전통적으로 야요이 이전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 P291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태국에서 신석기 유적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제3천년기 중엽이었다. 당시 정주 생활이 강화되었고, 문양을 새긴 토기, 간석기 자귀, 사육종 돼지와 닭, 재배종 벼가 등장했다. 홀로세 중기가 끝나갈 무렵, 즉 기원전 제3천년기 말 대륙동남아 몇몇 지역에서 매장지와 주거지가 혼재된 장소가 등장했다. 그곳에서는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 말기에 이르러 태국 남부 해안 혹은 그에 가까운 곳에서 해양 생활에 적응한 뚜렷한 정주 생활 장소가 등장했다. 여기서도 농업의 흔적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 P393

화전을 했던 장소에서는 식량, 약품, 공예품을 만들 재료, 천이나 밧줄을 만들 섬유, 지붕이나 벽의 재료 혹은 바구니를 만드는 데 사용할 나무껍질, 고무, 불 피울 때 사용할 송진, 유향목,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코킹, 향료, 나무 기름, 염료, 사냥을 위한 독성 물질, 지붕에 덮을 나뭇잎, 지붕 조각, 건축 자재, 도구나 배나 무기를 만들 원재료 등을 구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농부는 숲속의 특정 구역을 개간하고 관리하는데, 이는 한 구역을 완전히 갈아엎어서 농지를 만드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오히려 숲의 구조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개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리스(Harris)에 따르면 "화전과 원경(園耕)은... 다른 농업 시스템과 달리 자연환경의 구조, 기능적 역학, 균형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 - P423

바닥면을 인공적으로 높이면 배수가 원활하고 습지에서도 농사가 가능했다. 이런 식의 밭을 치남파스(chinampas)라 했는데, 멕시코 분지의 호숫가 지역에서 농업의 중요한 요소였다. 치남파스는 호수의 진흙과 수생 식물, 그리고 가정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등으로 만들었다. 치남파스는 대개 좁게 만들었지만 상당히 길게 늘일 수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 나무를 심기도 했다. 약 1만 2000헥타르의 치남파스가 아즈텍 제국 수도의 인구를 먹여 살렸다. - P587

초기 농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용한 통로는 바로 그들의 시간 관념이다. 숲을 제거하고, 소규모 농지를 조성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의 일은 분명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토지와 공간을 소유하는 것 또한 연속성이라는 농업 이데올로기의 일부였다(p669)...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굴러간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 역시 복잡한 관계 가운데 할 일이 많았고, 그날그날 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도 있었다(p670)...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신석기 시대 유럽 농업인의 특징이기도 했다. 과거에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것은 곧 현재의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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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위해 괴로워하거나 기뻐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마치 다른 우주에 속한다는 듯 시(詩)로 둘러싸이고 우리 삶은 감동적인 영역으로 변해, 우리는 그 영역에서 조금쯤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

음악이 그에게 준 기쁨,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욕구를 만들어 낼 기쁨은, 사실 그 순간에는 여러 향수를 실험할 때 느끼는 기쁨이거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세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형태가 없으며 우리 지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로지 우리 감각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와 접촉할 때 얻는 기쁨과도 흡사했다. 미술 애호가의 섬세한 눈으로도, 또 풍속 관찰자의 예리한 정신으로도 메마른 삶의 지울 수 없을 흔적을 영원히 간직한 스완으로서는, 인류에게 낯선 피조물, 논리적인 사고력을 빼앗긴 눈먼 거의 환상적인 유니콘처럼 오로지 청각으로만 세상을 지각하는 전설 속 피조물로 변신했다고 느끼는 것은, 일종의 ‘커다란’ 휴식이자 신비로운 쇄신이었다.

그는 밤에만 오데트의 집에 갔으므로, 그녀의 과거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낮에 어떻게 보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상상하게 해 주고, 알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초 지식마저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녀의 과거 생활이 어떠했는지도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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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 교환의 세계 -하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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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이 여기에서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시장 그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붙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끔 그런 식의 언급을 했다. 그래서 독점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이며 후기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제를 대체했을 때 그것은 진보를 낳는 "생산력과 사회관계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사회적인 진보를 독점하는 제약이 마침내 존재하지 않게 될 발전단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화"를 가져오는 체제"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28


 레닌은 여기에 첨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독점은 자신이 거기에서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독점은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이 점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29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2-2>에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가 태어나게 되는 여러 조건에 대해 언급한다. 경쟁이 이루어지는 교환시장경제에서 독점적인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불평등'이다.


 유럽에서는 11세기에 경제가 깨어나면서부터 불평등이 더욱 현저해졌다. 레반트 무역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는 대상인 계급이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고, 이들은 곧 도시 지배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서화는 다음 세기들 동안 경제가 번영할수록 더욱 굳어졌다. 금융업은 이러한 발전 중에서도 최상층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29


  상품의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교환만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商人)계층이 등장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거래를 담당하는 대상인이 출현했다. 문제는 일반 상인들과 대상인들 사이에 적용되는 '게임의 규칙'이 다르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더 좋은 조건으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고, 여러 혜택을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혜택은 그들에게 더 많은 부(富)를 가져다 주었으며, 더 많은 부를 통해 자신들의 사업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인 성공이 돈에 달려 있다는 말은 이때의 돈을 모든 사업에 필수적인 자본의 뜻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그러나 이때의 돈이란 투자 자본 이외에도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보증과 특권, 공모와 보호 등의 여러 가지 것들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고려를 의미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41


 그런데 이상한 일은 대상인들은 이 법칙을 따르지 않아서, 한 업종에 전문화하는 일이 대단히 드물다는 점이다. 심지어 상점주도 큰 돈을 벌어 대상인이 되면 곧 전문화를 포기하고 비전문화의 길을 간다(p534)... 대상인이 된다는 것, 혹은 대상인이라는 것은 모든 상품이라고는 못 해도 적어도 많은 상품을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럴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진다는 것을 말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35


  자본에 적용되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와 비전문화를 통한 위험 회피는 사업 포트폴리오(portfolio)구성을 가능케 했으며, 이러한 사업의 다각화는 시대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품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며 점차 시장에서의 독점(獨占)적 지위를 차지하는 자본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교환시장에서의  활용할 수 있는 신용거래의 차이가 극복할 수 없는 틈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모든 상인들의 장부에는 상품 계정 외에 채권계정과 채무계정이 함께 있다. 채권과 채무 양자 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이 형태의 크레딧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현명한 일이다. 그 결과 이 크레딧은 교환 총량의 4~5배가 된다. 모든 상업체제가 여기에 의존한다. 이 크레딧이 멈추면 상업에 힘을 주는 모터가 마모되다가 결국에는 서버리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상업체제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크레딧이라는 점이다 - 이것은 내부 크레딧이며 이자가 붙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유별나게 활발한 곳이 영국이었으며 그것이 영국이 번영을 누리는 비밀이었다. 대상인은 이 내적인 편익을 통해서 이익을 보고 또 고객들에게도 이익을 준다. 그렇지만 대상인은 그 외에도 대부업자나 자금주라는 외부의 크레딧도 정규적으로 이용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현찰을 빌리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적인 차이다. 이 돈을 사용하는 상업거래는 결국 이자율보다 훨씬 높은 이윤율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42


 이러한 시장경제의 불평등은 금융거래를 통해 대자본형성을 가능케하며, 퇴장(退藏)된 자본은 보다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는 곳을 물색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의 욕구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바로 근대국가(國家)다. 근대국가는 중세의 봉건제와 교회조직과 같은 계서제(階序制)의 연장선상에 있는 조직으로 중앙집권화된 군주제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중세 귀족정에 대항하는 군주와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bourgeois)의 결합은 바로 자본을 통해 이루어졌고 실현되었다.


 국가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가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그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제는 지난날처럼 국왕 직할 재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따라서 유동적인 부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정한 종류의 자본주의와 일정한 정도의 국가의 근대성이 동시에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구성되었다. 이 두 가지 운동 사이에는 단순한 일치 이상의 것이 있다. 핵심적인 유사성은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계서제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사성으로는 국가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부유해지기 위해서 독점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741


 회사(會社)의 형태로 응집된 자본은 초기 원거리 무역을 주도하였으며, 원거리 무역을 통해 자신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파트너인 군주에게는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력과 재력을, 자본가들에게는 막대한 이윤을 독점적으로 제공하게 된다. 이는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어느 한 회사의 독점은 세 가지의 것이 맞아 떨어져야 가능했다. 국가가 그 첫번째이다. 국가는 비교적 효율적이고 결코 뒤에서 그냥 물러서 있지 않는 존재이다. 다음으로 상업세계 - 즉 자본, 은행, 크레딧, 고객 등 - 가 있는데 이것은 독점에 적대적이거나 거기에 공모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만 혹은 동시에 그 두 가지를 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원거리 무역의 대상이 되는 지리적인 권역인데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631


 원거리 무역이 의심할 바 없는 우위를 가지게 되는 까닭은 이것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거리 무역은 집중을 가져오고, 반대로 집중은 원거리 무역으로 하여금 자본을 재생산하고 나아가서 빠르게 증대하도록 하는 더할 나위 없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독일 역사가들과 모리스 도브가 이야기했듯이, 원거리 무역이야말로 상업자본주의를 창출하고 나아가서 상업 부르주아지를 창출한 핵심적인 도구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74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에서는 성숙한 시장경제에서 출현한 독점자본이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위험이 높은 뭔거리 사업을 독점하고,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의 내용과 비추어보면, 재벌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모습은 결코 후진적인 자본주의 기업의 모습은 아니다. 다각화된 사업구조와 정치권과의 결탁 등의 모습은 오히려 궁극적인 대자본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결코 후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앞선 궁극의 자본주의 대기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장경제 부분에서 발견된다. 과연 충분히 시장경제가 활성화된 이후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교환이 중심이 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가 태어났다면,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형태의 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형태의 유통경로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교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시장경제를 말할 수 있겠지만 국가전매 시스템과 대기업에 의해 지배된 유통 구조 등은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 국가주도로 1층 물질문명의 소비요구에 직점 대응하는 형태임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근대기업의 성장이 일제 시대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충분한 시장경제의 성숙이 이루어지기 전 국가에 의해 주도되면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대신 국가 독점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먼저 확립되었다는 점이 오늘날 한국 경제의 문제점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이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 마지막 단계인 자본주의 층으로 올라가보도록 하자...


 자본주의의 과정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오직 일정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과정을 준비해준 것이거나 적어도 용이하게 만들어준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1) 첫번째로 들 수 있는 명백한 조건은 활력이 넘치고 진보하는 시장경제이다. 여기에 지리적, 인구적, 농업적, 산업적, 상업적인 여러 요소들이 더해진다. 이러한 기반에 깔려 있는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대해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2) 또한 사회가 여기에 공모해야 한다. 사회는 자신이 어떤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지, 또 어떤 과정에 대해서 자유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수세기 전부터 그런 것을 옹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되는 가문의 영속성과 연속적인 축적이 확보될 수 있을 만큼 계서화된 사회는 자본주의의 전(前)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점은 세계시장이라는 특별한 해방 세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거리 무역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의 이익을 누리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62



상업사회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 속의 사회이다. 그런 만큼 상업사회를 그 전체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을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된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직후 스페인은 절호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세계시민적인 자본주의가 스페인에 달려들어 그 기회를 빼앗아갔다. 이때의 경제활동들은 피라미드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하층에는 농민, 목동, 양잠업자, 장인 겸 행상인, 소액 고리대금업자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위에는 카스티야의 자본가들이 이들을 장악하고 있고, 다시 그 위에는 푸거 가의 대리인들 그리고 다음에는 새로 권력을 휘두르게 될 제노바 상인들이 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 P534

자본주의는 자기가 선호하는 방향을 따라서 개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콩종크튀르를 주시한다 - 이것은 자본주의가 활동 영역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규정해주는 것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하는 것보다는 - 그 선택은 콩종크튀르에 따라, 세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 전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과 그 전략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P565

우리는 산업 이윤, 농업 이윤 그리고 상업 이윤 사이에 어느 것이 우세하다는 결정적인 분류를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보았다. 크게 보면 상업, 산업, 농업의 순으로 이윤이 높다는 통상적인 견해가 대체로 사실과 일치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많은 예외들이 있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사업활동이 옮겨가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자본주의의 전체사에서 핵심적인 성질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시련이 있을 때마다 드러내는 유연성, 변환과 적응의 능력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심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나 혹은 이윤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때에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거의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능력인 것이다. - P612

국가는 많은 요소들이 합류된 중요한 실체이다. 유럽 이외의 지역은 수세기 동안 국가가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국가가 확고하게 다시 성장해나갔다. 근대성의 창시자들이 만든 근대 국가는 근대적 군대, 르네상스, 자본주의, 과학적인 합리성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이었다(p734)... 근대 국가는 지방의 주, 자유도시, 장원, 초소형(超小形) 국가와 같은 예전의 구성체들과 조직들을 변형시키고 깨뜨려 나갔다. 새로운 군가는 그들의 사람들의 골수를 빼먹으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 경제발전에 힘입어서 발전해갔다. - P735

장기공채는 저절로 영구채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국가가 공채를 상환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국가는 유동공채를 확정공채로 전환함으로써 크레딧이나 현찰로 된 재원을 소진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대출인들로서는 자신의 채권을 제삼자에게 매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매번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국가에 빌려준 돈을 상환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지불하지 않는데 채권자들은 원하는 대로 빌려준 돈을 되찾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p753)... 공채 정책을 성공시킨 것은 대상인, 금 세공업자, 은행업 가문들과 같이 채권 발행 업무에 전문화한 사람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나라의 결정적이고 독점적인 핵심인 런던의 "비즈니스 계"였다. - P754

시장의 합리성이란 통제하는 교환이 아니라 자발적인 교환의 합리성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성", 개인의 계산을 초월하는 집단적인 수요와 공급의 만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선험적으로 그것은 기업가 개인의 합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 자신은 단지 상황에 따라서 그의 활동의 최상의 길, 즉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할 뿐이다. 끊임없이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가능성을 지적(知的)으로 계산하는 의미의 합리성 없이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인정할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문화마다 다양할 뿐 아니라 콩종크튀르마다, 사회집단마다, 또 그들의 수단과 목적마다 다양한 것이다. 하나의 경제내에서도 여러 개의 합리성이 존재한다. 자유경쟁의 합리성이라는 것은 단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점, 투기, 힘의 합리성 역시 또 다른 합리성인 것이다. - P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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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이 여기에서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시장 그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붙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끔 그런 식의 언급을 했다. 그래서 독점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이며 후기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제를 대체했을 때 그것은 진보를 낳는 "생산력과사회관계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사회적인 진보를 독점하는 제약이 마침내 존재하지 않게 될 발전단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화"를 가져오는  체제였다.  - P828

레닌은 그의 유명한 글(1916)에서 "자본주의의 일부 핵심적인 성격들이 정반대로 전환하는, 아주 발전된 특정 단계에 가서의 일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과정에 핵심적인 것인 자본주의적인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내가 레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레닌은 여기에 첨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독점은 자신이 거기에서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독점은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이 점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한다.  - P829

유럽은 적어도 이중의 상층사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역사의 변절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극복할 수 없는 정도의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 앞에 전체주의적인 독재나 자의적인 지배자의 독재와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은 끈기 있는 부의 축적에 유리해졌으며, 또 다양화된사회 속에서 다중적인 세력과 위계들이 발전하고 이것들 사이에 다양한 방향으로 경쟁이 이루어지는 것이 용이해졌다. 출생의 특권에만 근거한 사회신분에 비해서 이것은 다당함, 분별, 노력의 결실, 정당함 등으로 인식되었다.  - P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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