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종교와 함께 한 단계 더 올라간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조직 또는 정신성의 조직이다. 세계는 인간 정신을 통해 해석되고 초월된다. 흔히 몇몇 예언자나 신이 계시해 주던 것을 이제는 인간이, 더 정확히는 인간 정신이 파악해 보겠다는 것이다.

반세기 전부터 인류를 정의하는 기준들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가령 역사적 관점에서만 흥미로운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너무 낙관적인 개념인 호모 사피엔스 대신에, 나는 호모 스피리투알리스(Homo spiritualis)를 제안하고 싶다. 세계는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들은 비물질적 힘에 호소해 이런 새로운 복잡성을 이해하고 최대한 잘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주니의 전통 신앙과 가톨릭 신앙을 조합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공존하는 데는 어떤 문제도 없어요. 형과 저 둘 다 기독교인입니다. 핵심은, 초자연적인 세계를 믿으며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이죠.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별로 모순되지 않는 지엽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뜨거운 태양과 사막의 고독 속에서, 그들은 집중과 명상을 하며 전통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마침내 하나의 영상을, 또는 여러 개의 영상을 보게 되었을 것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혼을 영접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이 돌아와 몸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방금 보았던 그 환영의 이미지를 바위에 그렸다. 태평양 연안의 북동부 지역 부족들이 하듯 그 환영을 잊지 않고, 그들의 힘을 보존하고, 또 이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토록 장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들이 바로 내 옆에, 기암절벽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물을 그곳 정령들과 동일시하는 그들은,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진 우리와는 분명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통 문화에서는 모든 사건이 하나의 기호이며, 자연의 영역과 이른바 우리가 초자연이라 부르는 힘 또는 피조물 영역 사이에 경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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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탄생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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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대중의 지상적 메시아로서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력한 존재로 비쳤던 것이다. 제자들조차 대부분 그를 저버린 것(요한 6,66)은 그가 자신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의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무력했던 예수가 어째서 죽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간주되었는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저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왜 그 후에 목숨을 걸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력한 예수가 영광의 그리스도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어떻게 강한 신념과 신앙을 지니게 되었을까?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8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1923~1996)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작 <예수의 생애>에 뒤이어 예수의 죽음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을 다룬다. 대중의 기대를 저버린 메시아. 엔도 슈사쿠가 바라본 예수의 이미지는 무기력한 한 명의 인간이다. 너무도 무력한 모습을 보였기에 주변으로 배신을 당하고 결국은 죽음을 당한 한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류사의 거대한 종교로 부활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를 쫓아가는 작가의 여정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제자들은 굴욕적인 타협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 후에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평생 스승이 자신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부끄러움과 회한이 남았던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p16)... 베드로가 의회와 그러한 타협을 한 이튿날, 예수는 군중의 욕설과 멸시를 받으며 좁고 무더운 예루살렘의 길을 걸어 처형한 골고타로 향했다. 그동안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들의 배신을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예수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정은 그들에게 관념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7


 슈사쿠는 스승의 마지막 순간에 도망친 제자들의 회개(Metanoia)에 주목한다. 자신들의 배신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평소 자신이 강조한 '사랑'에 충실한 스승의 모습. 이러한 예수의 죽음은 생전이 아닌 사후에 온전하게 제자들의 마음에 뿌리내리게 되고, 비로소 믿음이 결실이 되어,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듯 내적 부활(復活)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모(metamorphosis)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 동기를 설명한다.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 자신을 저버린 제자들에 대해 원망과 증오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을 징벌하도록 하느님께 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들을 전해들은 제자들을 충격을 받았다(p20)... 그들은 그때 비로소 자신들이 예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자들은 비로소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생전에 예수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통해서 예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지 조금씩 알 듯했다(p21)... 예수는 죽었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 가운데 생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예수는 다름아닌 그들의 마음속에 부활한 것이다. 부활의 본질적인 의미 중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를 재발견했다는 점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22


 원시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저버리고 배신한 비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배신한 제자들을 미워하기는커녕 끝까지 사랑하려고 했던, 어머니와 같은 예수의 이미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배신한 자식과 사랑을 베푼 어머니와의 관계,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는 예수의 이미지가 생겨났으며 인간의 그러한 나약함, 가련함을 이해해주는 동반자 예수의 이미지가 생겨났고, 그 동반자 예수가 다시 자신들 옆에 와줄 것이라는 신념이 생겨났다. 그리스도가 되기 전까지 예수가 지닌 이미지는 모두 생생한 제자들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63


 그렇지만, 스승의 위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제자들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 없었다. 슈사쿠는 제자(사도)들이 예수의 죽음 후 골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던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바라본다. <사도행전>의 기록과는 달리 그들은 세상끝까지 복음(Gaspel)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을 죽게 만든 이들과의 공존을 선택했다. 성전의 중요성과 관련해서는 사두가이들과, 율법의 중요성과 관련해서는 바리사이들과 부딪히지 않고 유대인들 사이에 조용하게 스스의 가르침을 되새기던 이들. 이것이 슈사쿠가 바라본 소수의 유대교 분파에 지나지 않던 것이 초대 그리스도교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평온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불을 던진 사건이 바로 스테파노의 순교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등장이다. 성전이 아닌 사랑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스테파노는 사두가이파의 교리와 대립하고, 율법 대신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바오로는 바리사이와 대립하며 비로소 유대교의 분파가 아닌 세계 종교로서 변화되었다.


 루가는 명백히 스테파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근거해서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재판을 받고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타에서 처형되었듯이 스테파노 또한 부당한 재판을 받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이 점은 저자 루가의 배후에 있었던 후대 원시 그리스도교 안에 스테파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p93)... 성전보다도 사랑을 위대하게 여긴 예수를 본받아 스테파노는 성전 절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베드로나 사도들보다 스테파노가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95


 바오로는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인간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자신의 독선이며, 그것이 상대를 상처 입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152)... 바오로의 그리스도론論이 전개된다. 율법은 인간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율과 율법을 지키지만, 돌을 던진 수면에 물결이 일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죄에 휘말린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행위의 비애, 그리고 원죄의 고통이 있다.. 그런 인간을 원죄에서 해방시키는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은 자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속죄물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53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무기력한 한 사내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세계 종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려낸다. 십자가에서의 슬픈 절규가 후대에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의 합창이 되는 원동력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적이 증표로 관여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의 침묵에 대한 인간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신앙(信仰)을 고양시켰음을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여준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를 들 수 있다. 이 말은 시편 22편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비애에 찬 하소연이지만, 시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비애의 하소연이 이윽고 "당신의 이름을 겨레에게 알리고 예배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리니"라는 찬가讚歌로 바뀐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말은 결코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의 첫 부분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8


  흔히 독수리로 표현되는 <요한복음>에는 대표적인 7가지 기적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이 복음서에서 카나의 혼인 잔치,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 중풍 환자, 빵과 물고기를 가진 소년, 물 위를 걸음, 태생 소경, 라자로의 부활 등이 서로 연관맺으며 점층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와는 조금은 다른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인상깊었던 설명이 있어 옮겨본다.


 그것은 7가지 기적 중 마지막이 라자로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실천이며, 기적이라는. 이는 예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 후 나타났던 악마가 결코 할 수 없는 경지이며 비로소 7에서 완성되는 설명으로 기억된다. 10년도 더 전에 들었던 강의라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강렬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엔도 슈사쿠의 예수도 같은 지평 위에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리뷰를 마무리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는 이외에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절망에 빠진 유대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외쳤을 그들의 모습에서 <침묵>의 로드리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예수의 생애>에서 <사해 부근에서> 던져진 질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이들을 연관시켜 보려한다. 어쩌다 보니 리뷰의 마무리가 페이퍼의 인트로가 된 것은, 예수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되는 구도와 비슷해졌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소중한 곳이 불타 버리고, 그 지성소도 잿더미가 되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묵을 지켰으며, 그리스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원시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지옥과 같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즉, 하느님의 침묵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공동체에서 이탈하거나, 아니면 그 침묵의 이유를 되물음으로써 신앙을 더욱더 굳게 간직하는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231

당시 제자들은 이사야서에서 가혹한 운명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의 부흥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부활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온다!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이러한 기대가 이때부터 제자들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침묵의 의미를 부활이란 말에서 찾으려 했다(p38)... 부활이나 재림은 당시 유다인에게 일반적인 관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관념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관념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던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죽음과 재생이라는 관념이 유다교 주변의 여러 동방 종교 가운데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 P39

동방 종교와 신약성서와의 관계를 분석한 학자들의 책을 대할 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동방 종교가 지니고 있는 죽음과 재생의 감각과 유다교에 있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대가 제자들과 그 배후에 있는 갈릴래아 집단의 의식 속에 뒤섞여 하나를 이루고 있었고, 그것이 비로소 처참한 예수의 죽음에 의해 촉발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유다교의 예언서 속에서 부활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가운데, 갈릴래아의 서민들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감각에 의거하여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철저한 일신교 一神敎인 유다교적인 요소에 범신론적이고 비유다교적인 요소가 섞였음을 의미한다. - P41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이루어졌던 공동체의 활동은 스테파노 사건으로 뜻하지 않게 이 지방까지 퍼져가게 되었다. 그것은 사도들의 선교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상황 전개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결과적으로 좁은 예루살렘에 한정되었던 예수의 복음은 바깥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가게 되었다.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될 그리스도교 선교의 최초의 씨앗이 스테파노 사건에 의해서 뿌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 P100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두 가지 내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가지 내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당시 상황은 이방인 문제를 둘러싸고 바오로와 보수파 제자들과의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고, 그로 인한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타협안을 제시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타협안이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계속해서 의연금 혹은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이 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종속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안티오키아의 선교는 용인되었지만, 구체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이방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 P144

종교가 조직화, 체계화되고 신학神學이라는 이론으로 신神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명하고자 하여 결국 외형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의문과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순간 쇠약해지고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세中世라는 시대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확립기이자 쇠퇴기이기도 했다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시 그리스도교는 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의문과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신앙은 쇠퇴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왜 재림하지 않는가?‘, 이 두 가지 과제를 풀 수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고뇌하며 발버둥치고 괴로워했으며, 이 고통들이 신앙의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다 - P232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를 신격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과정을 요약해 본다면,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에게 제기된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수수께끼와 마주하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이라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예수를 구름을 타고 나타날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그 칭호가 서서히 메시아로 바뀌고,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다‘라는 유다교 전승에 의해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결국 예수는 최초에는 하느님에게 선택된 뛰어난 예언자이자 랍비였지만, 평생에 걸친 노력과 수난, 참혹한 죽음의 대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받았다는 것이 초기 제자들의 생각이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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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5-21 0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궁금했던 책인데, 먼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21 04:4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라파엘님 좋은 주말 되세요 ! ^^:)

캐모마일 2022-05-22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예수의 생애를 샀습니다. 살까말까 망설이다 호랑이님께서 쓰신 그리스도의 탄생 서평을 읽고 결심했네요. 아마 다음 달 초쯤이면 시리즈를 다 읽지 않을까 싶네요 리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예수 그리스도 번역 합본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2 22:33   좋아요 1 | URL
제 부족한 글이 캐모마일님께 작은 도움이 되어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예수의 생애>에서는 ‘신성(神性)‘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인간 예수의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습니다만, 슈사쿠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읽다 보니 역사적 지평 위의 한 인간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예수의 생애>가 매우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캐모마일님께서도 의미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캐모마일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예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오해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짧은 생애 동안 민중도, 적대자도, 그리고 제자들 마저도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예수에게 걸려고 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중의 기대 속에서 고독했다. 서민들은 그에게서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대중은 로마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유다를 ‘하느님 나라‘로 회복시킬 지상적인 메시아로 그를 내세우려 했다. 이러한 기대와 흥분은 한때 갈릴래아의봄이라는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지만, 예수에게 지상적인 메시아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예수로부터 떠나갔다. 예수의 비극적인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내가 쓴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이다.  - P7

인간이 만일 현대인처럼 고독을 장난스럽게 여기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임한다면, 그래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면 그의 영혼은 반드시 어떤 존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에 실망한 사람은 사랑을  배신하지 않을 존재를 찾을 것이고, 자신의 슬픔을 이해해줄 이가 없어 절망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이해해줄 그 누군가를 찾을 것이다. 그것은 감상도 어리광도 아니며,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반드시 그러한 존재를 영원한 동반자를 계속 찾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의 간절한 기대에 그 자신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답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역사 속에서 많은 죄를 범했고 그리스도교 역시 때로는 과오를 범했지만, 인간이 계속해서 예수를 찾는 것은 그때문이다.
- P250

사울이 볼 때, 신자들은 예수라고 불리는 하찮은 남자를 주님으로 섬기며 그의 재림을 믿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라고 불리는 남자는 십자가형을 당한 자로, 사울이 알고있는 율법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린 자는 모두 하느님에게 저주받은 자이다. 하느님에게 저주받은 그를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율법을 부정한 이들이 이렇듯 생생한 구원의 희망을 지닐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휩싸인 사울은 ‘율법인가, 예수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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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은 우리 마음속에서 이전 것을 대체하는 일시적인 다른 성격처럼 작용하면서, 지금까지 그 성격이 표현해 오던 변하지 않는 특징마저도 파기해 버린다

음악이 그에게 준 기쁨,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욕구를 만들어 낼 기쁨은, 사실 그 순간에는 여러 향수를 실험할 때 느끼는 기쁨이거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세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형태가 없으며 우리 지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로지 우리 감각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와 접촉할 때 얻는 기쁨과도 흡사했다.

시가 진실이라면, 시인들이 그들 말대로만 생각한다면, 그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대개 시인들만큼 타산적인 사람들도 없답니다.

작은 장식품 수집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며 천박한 계산을 경멸하고 명예와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그녀는 다른 어떤 인간보다 뛰어난 엘리트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런 취향을 실제로 가질 필요는 없고 다만 말로 떠들기만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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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역사 1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87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지음, 한정숙.허승철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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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금속문화 시대에는 온갖 종류의 문화적 영향, 온갖 소식과 지식,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형태들이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우리 땅에 침투해 들어왔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경로들은 다음과 같다. 남쪽으로는 아시아 및 지중해 연안지대로부터 온갖 문물이 전파되었던 흑해 연안으로부터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서아시아, 투르케스탄과 오늘날의 페르시아로부터 흑해 북부 초원을 거쳐서 이어지는 전파로가 있었다. 또한 오늘날의 헝가리에 해당하는 도나우 강 유역 지역에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지중해 연안의 영향으로 금속 기술이 발달해 있던 알프스 기슭 나라들로부터 문물이 전해지는 전파로가 있었다. 끝으로 우리 선조들은 서쪽의 독일인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우크라이나 옛말 가운데 독일어로부터 차용한 명칭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 이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흑해 연안 지역으로부터, 그리스 식민도시들로부터 이 땅에 전해진 문물이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105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1>는 시간적으로 선사시대부터 16세기 리투아니아-폴란드 왕국 지배하의 시대를 대상으로 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문화의 근원을 그리스, 로마에서 찾으면서, 친서방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로서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중심을 키예프로 잡지만, 저자는 흑해 연안에 자리잡은 그리스-로마의 후계자로 민족문화의 성격을 규정지으며, '슬라브의 우크라이나'와는 선을 긋는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의 쇠퇴원인을 제공한 외적(外適)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노마흐의 막내아들 유리의 자손들(후일의 모스크바 왕조의 조상들)은 볼가 강 유역지방에서 뿌리를 내린 후, 그들 스스로 공들 중에서 최고 지위를 확보하려는 야심을 품게 되었고 이를 위해 키예프를 더욱 약화시키고 키예프 공을 전혀 중요치 않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유리의 아들 안드레이는 우크라이나에서 공들이 서로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이 분쟁에 개입했고 1169년 키예프를 짓밟으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키예프에 자기 군대를 보냈다. 그리고 이 군대는 실제로 키예프를 점령한 후 이 도시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이 일이 있은 후에는 이미 키예프의 전면적인 쇠퇴가 시작되었다. 훗날 타타르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살육은 앞서 일어난 이 대혼란에 무엇인가를 조금 더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드니프로 강 유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삶은 일반적으로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96


 비잔티움 제국과 새로운 로마라고도 불리던 그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이 무렵 당대 세계의 눈으로 보았을 때 광채와 문화, 영광과 힘의 정점이었다. 그 당시에 생겨난 이러저러한 새로운 국가의 창시자들, 건설자들은 세계의 등불인 이 비잔티움의 광채와 영광으로 자신과 자기 권력을 치장하려고 애썼으며,  또 이를 위해 비잔티움 황제 궁정과 인척 관계를 맺고 이로부터 여러 가지 귀중품을 얻으려고 애썼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0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기틀이 키예프 루스 대공 볼로디미르 1세(958~1015)에 의해 마련된 것으로 파악한다. 키예프 공국 내의 여러 가문들과의 관계 설정, 정교회와의 연계 등을 통해 '루스'의 일원이라는 공동체 이념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이러한 기틀은 이어지는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결속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민족의 근간은 키예프 루스 시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비잔틴 문화가 우크라이나 지방 곳곳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볼로디미르는 혈연관계가 없는 총독이나 공, 혹은 키예프 공의 가문과의 연관 관계가 약화되거나 망각되거나 한 먼 친척들 대신 키예프의 각 영지들마다 자기 친아들들을 앉혔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만 해도 이미 추후의 관계를 위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순간부터 키예프 국가의 뭇 지방에서는 왕조적 이념이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26


 이제는 공통이 신앙과 교회, 키예프 수도대주교 산하에 위치하는 공통의 고위 성직자층과 성직자 집단, 서책 문화와 강력한 교회적 색채를 띤 학식, 그리고 예술도 역시 이들을 한데 연결시켜 주고 있다. 이때까지는 동방의 예술 곧 페르시아-아랍 예술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면서 그리스 예술의 영향과 경쟁하고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국가종교와 결부된 비잔티움 문화와 예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루스-비잔티움' 문화가 우크라이나 땅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 키예프 국가에 속한 동유럽 지역 전역에서 오랫동안 지배적 위치를 가지게 된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6


 키예프 국가에 의해 그것도 주로 볼로디미르 시기에 추가된 이 모든 새로운 유대는 우크라이나 땅과 우크라이나의 종족들을 서로 통합시켜 준 것만으로만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벨라루스 땅과 대러시아 땅도 역시 감싸 안았으며, 종족적, 민속지적 차이들을 지우고 약화시켰다. 이같은 차이들은 신앙과 교회 곡위 성직자층, 서책 문화, 법률의 공통성과 루스라는 공통의 이름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미 느낄 수 없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7


 볼로디미르와 아들 야로슬라프를 이은 후계자들의 계승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서유럽의 봉건제와는 다르게 주민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민중만의 역량은 후대 위기상황에서 '코자크 집단'이 우크라이나의 주류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주민들은 이미 기들이 자기네 현지의 세습지배가문이라고 여기고 있던 그런 가문 출신의 공들을 옹호하고 지켜주었으며, 새로운 골육상쟁, 새로운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다른 공들이 이 공들을 해당 지배영지로부터 몰아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루스 국가는 다만 명목상으로만 키예프 공을 수석으로 인정할 뿐 실제로는 키예프 공에게서 완전히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살고 지배하는 독자적인 공의 가계, 곧 세습지배가문의 다스림을 받는 개별적 공령들로 결정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세분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65


 공의 수가 많아지고 이들이 일정한 공령에서 공고하게 지위를 굳히게 됨과 동시에 공과 공령, 즉 공령, 즉 공령 주민들 사이에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발전해 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공에 대해 큰 힘을 가지게 되었고 공의 통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관계의 변화를 요구하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공을 거부하고자 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81


  키예프 루스 시대 후반부의 느슨한 영주들의 연대는 13세기 몽골인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고, 결국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몽골제국에게 복속당하게 된다. 뒤이어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에 차례로 지배당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은 위기를 겪게 된다. 상대적으로 자치를 인정해 주었던 몽골제국과는 달리 같은 슬라브 민족이었던 폴란드 치하에서 폴란드 문화가 확산되면서 민족으로서 우크라이나는 소멸될 위기에 처한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희망으로 떠오른 세력이 바로 '코자크'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는 한 유목민 집단이 우크라이나 주민들과의 싸움으로 약화되고 그들과 교류함으로써 자신들의 사나운 성격도 상실해 버리고 나면 그런 유목민들 대신 또 다시 새로운 약탈적 유목민 집단을 쉴새 없이 흑해 연안 초원지대에 던져 넣음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삶과 문화에 이미 그토록 여러 차례 심각한 타격을 입힌 바 있다. 이러한 약탈 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할 또 하나의 침입이 1230년대에 우크라이나에 쳐들어온 몽골-타타르인들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310


 리투아니아 공들과 폴란드 사이에서 1380년까지 할리치나-볼린 공령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피비린내 나고도 끈질긴 싸움의 종말은 갑작스러웠다. 그것은 곧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리투아니아 대공의 통치권 아래 연합을 하되, 리투아니아 대공이 폴란드 왕관을 얻는 대신 리투아니아의 모든 영토를 폴란드에 합쳐 영원히 '통합시킨다'는 것, 다시 말해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의 단순한 일개 지방으로 전환시키면서 두 나라를 통일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p366)... 그들 사이에 이러한 약정이 1385년 8월 15일 리투아니아의 크레보에서 맺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크레보 연합조약'으로, 이는 우크라이나 땅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향후 역사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할 수 있는 지극히 중요한 조약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368


 1569년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이 폴란드에 병합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사회 체제는 완전히 폴란드 방식으로 재편되었는데, 이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p468)... 우크라이나의 생활은 폴란드식으로 변하였고 폴란드화하였다. 이것은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일어난 총체적 변화였으므로 우크라이나 생활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자체의 민족성과 단절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우크라이나적 요소들은 우크라이나 생활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내던져버렸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69


 원래 타타르 한국에 의해 폐허가 된 키예프 지역으로 몰려든 이들을 일컫는 코자크 집단은 경계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이들이었지만, 무역에 종사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그들을 지배하던 집단과의 충돌을 통해 서서히 우크라이나 민족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몽골,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지배 아래에서 사라져가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기는 이들 경계인에 의해서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이들의 활약상은 <우크라이나의 역사 2>에서 본격화된다.


 해마다 봄만 되면 키예프 지방의 폴리시아 뿐 아니라 볼린, 벨라루스 같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키예프로 몰려와서 이곳 '출경(出境) 장소'에서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어렵, 맹수 사냥, 꿀벌치기 등을 했다. 그들은 '바타가'라 불리는 두레(아르텔)를 만들어 모인 후 우두머리인 오타만을 뽑았고, 무기와 필요한 물자를 준비해서 이른 봄이 되면 초원 '출경 장소'로 떠났다... 노획물을 얻기 위해 한두 번 초원에 머무른 적이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이는 자기네 살림살이를 좀 더 낫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출경활동 자체에 이끌렸고 이것이 그들의 통상적인 생존수단이 되었으며, 그들은 출경활동을 할 수 있는 곳 가까이 머물렀다. 이런 활동은 코자체스트보, 즉 코자크 일이라 불렸고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은 코자크라 불렸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22


 민중 생활의 이 같은 변화에 따라 코자크 집단은 새로운 힘과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코자크 집단은 이제 단순히 동부 우크라이나인들의 생활에서 등장한 생활방식의 한 현상에 그치지 않고 폴란드 국가의 귀족지배체제 전체에 대항하여 솟아오른 큰 사회적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민대중에게 폴란드 귀족지배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했고 폴란드 귀족체제 자체를 향해서도 파괴와 몰락이 닥치리라고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 생활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코자크들이 인민대중과의 관계에서 비범한 흡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코자크 집단이 성장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86


 폴란드 지배는 우크라이나 인민대중을 농노로 전락시키고 경제를 황폐화시켰으며, 도시를 몰락시키고 우크라이나 소시민들이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우크라이나인들 중에서는 토지소유자 계급만이 유일하게 국가 법률에 의해 정치생활에 참여하고 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511


 16세기 코자크의 대두까지 다룬 <우크라이나의 역사 1> 속에서 저자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 문화의 근원을 비잔틴에서 찾는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폴란드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통합과의 저항 속에서 우크라이나가 동방정교회의 적통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인만의 독창성은 저자에 의하면 키에프 루스 시기에 성립된 민중의 민족의식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코자크 집단으로 표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구 소련 지역의 일부가 아닌, 슬라브 민족이면서 그리스-로마 문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우크라이나인의 모습을 <우크라이나의 역사 1>을 통해 발견한다. 이와 함께 러시아인들이 바라보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생기는데, 이는 후에 러시아사를 통해 정리하는 것으로 일단 넘기자...

확산 이주 이후에 우크라이나 땅에서 가장 큰 상업 중심지가 되어간 곳은 키예프이다. 도시의 위치가 그 같은 성장을 유리하게 도와주었다. 왜냐하면 드니프로 강을 따라, 그리고 이 강의 가장 중요한 지류로서 키예프 위쪽에서 드니프로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프리퍄트 강과 데스나 강을 따라 운반되어 온 모든 상품들이 키예프에 집결했기 때문이다. 강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상업로였다. - P157

일반적으로 말해, 공령들의 개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각 공령은 각기 개별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각각의 공령에서는 현지의 관계가 각기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체제와 생활방식의 공통적 특징들도 강화되면서 현지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키예프의 법은 공들과 드루쥐나들에 의해 모든 공령에 보급되었고, 현지의 재핀과 행정에 도입되었다. - P283

14세기 중반에 우크라이나 땅의 정치적 자립성은 종식되었다. 할리치나는 폴란드가 점령했고 볼린은 점차 리투아니아의 일개 지방으로 전환되었다. 키예프 지방과 체르니히브 지방에 있던 다른 공령들도 역시 리투아니아 출신 공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국가생활은 종식되었다. 우크라이나는 규모와 연륜이 다양한 공령들로 이루어졌고 공의 가문 구성원들이 증가함에 따라 공령들은 점차 세분화되고 영세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p336)... 12세기 후반부터 수즈달 공들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면서 고의적으로 키예프 공들의 권위를 깎아내렸고 12세기 말부터는 할리치나의 공이 서부 우크라이나 전체의 수석군주가 되었다. 키예프는 얼마 동안 여전히 드니프로 강 유역 지방의 중심이라는 자리를 유지했지만 그 후에는 차츰 이곳에서도 중요성을 잃어 버렸다. - P337

리투아니아에 대항하고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의 공들과 영주들에게 강요한 굴욕적인 상황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에서 도움을 얻고자 하는 생각은 이 일파(一派) 사람들 사이에서 꺼지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힘을 믿고 정교도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정교도들이 정교 국가인 몰다비아와 특히 모스크바에 의지하겠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스크바는 오래전부터 옛 키예프 국가의 고토를 수합한다는 과업에서 리투아니아와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 P394

시간이 지날수록 코자크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변경지대 적들과의 전투 외에는 어떤 의무에도 얽매지 않는 자유인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이 점점 더 강하게 발전하고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코자크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선출된 코자크 권력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말에는 코자크 신분, 코자크 지위가 형성되었으며 인민대중은 코자크 권리와 특혜를 누리기 위해 코자크 집단에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코자크 집단은 커다란 사회 세력이자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 되어갔다. - P457

16세기 마지막 4분기부터 17세기 전반 사이 동부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완전히 변했다. 얼마 전까지 타타르인들이 다녔던 도로에는 몇몇 도시가 새로 생겼고, 얼마 전까지 코자크들의 출경지점이었던 곳에는 마을들이 넓은 지역에 흩어져 형성되었다. 귀족들의 크고 작은 성이 출현했고 자주 대리인과 관리인들이 이곳으로 파견되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직 야생마들만이 풀을 뜯고, 초원의 나리새 풀만 바람결에 윙윙거리던 곳에 폴란드의 법제도와 질서가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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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5-18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터키가 기독교의 ‘정교’ 혹은 정통 기독교라는 것을 좀 더 마케팅 잘 하면 이태리 로마보다 터키 이스탄불을 사람들이 좀 더 많이 관심 갖고 더 많이 방문할텐데요, 현재 이슬람 국가라 홍보에 한계가 있는 거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19 08:26   좋아요 1 | URL
터키의 많은 지역이 과거 비잔티움 제국이었기에 많은 유적이 있지만 이슬람 시대를 거치며 모스크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 성당처럼요. 이에 더해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곳에서 일어난 기독교 처형 등으로 갖는 순교지로서 의미도 로마가 갖는 부분이라, 동방교회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과 서방교회 중심지 로마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성지라 생각됩니다. ^^:)

종이달 2022-05-2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0 23:04   좋아요 0 | URL
종이달님 감사합니다